지은이: 도정일 (경희대 영문학)
※ 자료 출처의 명칭을 찾기 어렵다. 다음의 두 출처 링크를 보면, 대입 논술 학습용 텍스트로 자주 활용되는 글로 추정된다. 아래 게시물은 공부 삼아 해당 텍스트를 메모나 강조 표시와 함께 개인 블로그에 보관할 용도이므로, 원 텍스트를 보려는 분은 위 출처를 보시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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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인간을 읽는다”
인간은 거울을 들여다보며 자기를 인지하는 유일한 동물이다. 인지할 뿐만 아니라 그는 거울 속의 자기 이미지에 매혹된다.
- 인간이 자기를 대상화하는 내성적 동물로 발전하게 된 것은 이 인지와 매혹의 능력 때문이다. 인간의 이 자기 대상화를 학문적으로 추구하는 것이 인문학(Humanities)이다. “인간은 무엇인가?”라거나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해답의 학문적 추구가 인문학(Humanities)의 기원을 이루기 때문이다.
- 학문의 역사는 질문 발견의 역사이다. 인문학은 말하자면 인간이 자기 자신을 거울 속에 넣고 “인간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기 시작한 그 순간부터 시작된 것이다. 그리고 그 시점 이후 ‘인간’은 인간의 집중적인 지적 탐구 대상이 된다.
- 사자(獅子)는 자기를 알기 위해 ‘사자학’을 시작하지 않고 침팬지는 거울 속의 자기 이미지에 매혹되지 않는다. 인간만이 자기 자신을 연구대상으로 삼는 유일한 동물이다.
그러나 “인간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자체의 역사 -그 인문학적 질문의 역사는 그리 오래지 않다. 서양의 경우 학문은 인간 그 자체보다는 인간을 둘러싼 외부세계에 대한 호기심으로부터 먼저 발원하고 이것이 서양 과학의 시초를 이룬다. 이 과학적 호기심의 대상은 인간 그 자체가 아니라 외부세계이며, 이때 의미 있는 질문은 “세계는 어떻게 만들어져 있는가?”라거나 “물질은 무엇이며,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가?”같은 것이다. 이런 질문들을 던지기 시작한 것은 기원전 6세기 탈레스(Thales)가 일으킨 그리스의 이오니아 학파이다. 이 학파가 서양 과학의 조상으로 대접받는 이유는 외부세계에 대한 진지한 탐색이 그 학파에서부터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200년쯤 지나서 인간의 눈을 외부세계로부터 인간 그 자체에게로 돌려 놓는 시점이동 또는 사고의 전환이 발생하는데 이것이 ‘소크라테스의 철학의 혁명’이다. 이 전환적 사고의 요점은 “인간이 자기자신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면서 외부에 알려는 것은 무의미하다. ”라는 것이었다. 질문자가 질문자 자신을 질문의 ‘대상’으로 돌려놓게 했다는 점에서 소크라테스 철학은 서양 인문학의 조직적 출발점이 된다. 인간의 자기 발견이 가장 화려한 방식으로 ‘서사화’된 것은 물론 그리스 신화와 호메로스로 대표되는 서사문학에서이다. 그러나 인간을 반성적 질문의 대상 다시 말해 “나는 무엇인가?”라는 질문 형식 속에 대상화함으로써 인문학적 탐구의 길을 연 것은 소크라테스로 대표되는 고전 철학이다.
그 이후 2, 500년 동안 ‘인간’은 인간의 진지한 연구 대상이 되었고 “인간은 이런 것이다. ”를 내용으로 하는 여러 장의 그림과 이미지들이 제시된다. 이 그림과 이미지들을 우리는 ‘인간에 대한 패러다임’이라 부를 수 있다. 철학을 위시한 인문학만이 이런 패러다임을 제시한 것은 아니다. 사회과학도 인간의 사회적 관계나 권력 현상의 연구를 통해 인간에 대한 일정한 정의와 그림, 다시 말해 인간 패러다임을 제시한다. ‘인간은 정치적 동물(zoon politicon)’이라는 오래된 아리스토텔레스적 정의는 정치학적 정의이면서 동시에 고전 철학의 인문학적 인간관과 불가분의 관계로 연결되어 있다. 준 과학의 영역이라 할 인류학, 언어학, 심리학, 정신분석학, 고고 인류학 등도 인간 연구와 직결되어 있다. 예컨대 언어학적 인간 패러다임은 말할 것도 없이 “인간은 상징 기호를 사용하는 동물”이라는 것이다. 인간의 기호 체계에 대한 현대 언어학의 연구는 이미 그 자체로 인간 연구에서 핵심적 지위를 차지한다. 천문학, 물리학, 화학 등의 근대 과학도 인간 발견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 여기서 흥미로운 질문 하나가 제기된다. 인간을 탐색하는 노력이 이처럼 오래 지속되고 그로부터 여러 개의 흥미로운 발견들이 이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여전히 ‘발견’의 대상인가? 우리는 아직도 인간이 무엇인지 잘 모르고 있단 말인가? 인간이 도대체 뭐길래?
현대 생물학이 인문학도와 사회 과학도들의 비상한 관심을 끌게 된 것은 바로 그 인간 발견에 관계된 새롭고 중대한 정보들이 20세기 생물학의 분야에서 속속 터져나왔기 때문이다. 그 정보들은 단순히 새롭기 때문에 ‘중대한’ 것이 아니라 인간에 대한 기존의 그림, 지식, 패러다임들을 흔들기 때문에 중대한 것이고, 인문학이 큰 관심을 갖는 것도 그 발견들이 인문학적 지평의 확대 내지 수정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인간이 하등 생명체로부터의 진화의 결과이고 침팬지가 인간과는 ‘밀림의 사촌’ 관계에 있다는 식의 정보는 이미 현대 인문학의 관심거리는 아니다. 그러나 인간의 직계 조상으로 알려졌던 직립 원인(Homo erectus)과 현생 인류(Homo sapiens)가 서로 별개의 존재이고 양자 사이의 생물학적 차이는 0. 6퍼센트에 불과하지만, 바로 그 차이 때문에 직립 원인은 절멸한 반면 인류는 지구의 지배자가 될 수 있었다는 주장, 그 미세하면서도 결정적인 차이가 ‘언어 능력’에 있다는 생물학/유전학 쪽의 발견은 인문학의 관심을 끌기 충분하다. 또 인간의 유전을 지배하는 법칙과 콩의 유전 법칙이 동일하다는 멘델의 발견은 그 자체로는 중대한 유전학적 업적이었지만 진화론 이후의 위축된 인간 초상을 더 찌그러뜨릴 정도의 충격을 주지는 않았다. 그러나 1953년 디옥시리보 핵산(DNA)의 구조 발견과 함께 인간이 ‘유전자 언어로 씌어진 책’이라는 분자 생물학적 관점이 대두한 것은 인간에 대한 지금까지의 모든 패러다임들을 한바탕 뒤흔들어 놓을 정도의 중대한 함의를 갖는다.
생물학이 인문·사회 과학의 인간관에 중대한 영향을 줄 수 있는 일련의 발견들을 내놓게 된 것은 무엇보다도 분자 생물학(molecular biology)에서 진행된 인간 읽기의 방법 개발 때문이다. 이 경우 ‘인간’은 물론 생물학적 육체, 더 정확히는 개체 인간을 결정하는 유전 정부[정보??] 체계이다. 현대 분자 생물학의 대두 이전까지는 개인의 특성, 자질, 능력, 질환이 유전적으로 결정된다는 것 이외에는 어떤 유전자가 어떻게 특정의 유전 정보를 보존하고 전달하는가를 알 수 없었다. 유전 정보체계는 인간이 끝내 알 수 없는 자연의, 또는 신의 비밀 장부로 남아 있었다. 그러나 제임스 왓슨과 프랜시스 크릭에 의한 DNA 구조 발견 이후 이 비밀의 텍스트를 읽어내기 위한 방법들이 차례로 발견되고, 마침내 인체의 전체 유전자 지도를 그리기 위한 대대적인 사업이 지금 진행되고 있다. 이른바 「인간 게놈 프로젝트(Human Genome Project)」로 알려진 이 연구는 향후 10년 이내에 완성될 것으로 예측되고 있는데 이 유전자 지도가 만들어질 경우, 21세기 사회는 한 인간이 태어나는 순간부터, 아니 이미 태아 단계에서부터 그의 ‘생물학적 미래’를 들여다보는 놀라운 지식을 보유하게 된다. 말하자면 21세기 인간은 자신이 어떤 유전적 특성과 자질을 갖고 있는가에서부터 언제 어떤 질병을 일으킬 것인가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미래 일기’를 사전에 공개 당하게 된다. 인간의 운명에 관한 사전 지식의 사회적 보유가 어떤 놀라운 신세계를 가져올 것인가는 지금으로선 상상하기 어렵다. 확실한 것은 생물학의 인간 읽기가 개인의 운명에 결정적 영향을 주면서 동시에 상당한 사회 변화를 유도할 것이라는 점이다.
2. 유전자-미래로 열린 창
자연을 ‘책’이라는 은유로 표현했던 최초의 과학자는 갈릴레오이다. 자기 작업의 정치적 동기를 의심하는 박해자들에게 그가 “나는 단지 자연의 책(the book of nature)을 읽고자 했을 따름이다. ”라고 대답한 것은 과학사의 일화로 남아 있다. 책은 특정 언어의 문법 질서로 씌어진다. 그러므로 그 책을 읽기 위해서는 해당 언어의 문법 체계를 알아야 한다. 갈릴레오의 은유는 자연과 우주도 문법에 비유할 만한 ‘질서’를 갖고 있고, 따라서 우리가 그 질서를 안다면 자연이라는 책을 읽어낼 수 있다는 관점을 표현한다.
인문학의 궁극적 과제는 인간의 이해, 다시 말해 ‘인간 읽기’이다. 그러나 인간을 읽기 위해서는 인간이라는 이름의 책이 어떤 문법, 어떤 언어로 씌어 있는가를 알아야 한다. 프로이트의 정신 분석학이 현대 인문학에 큰 영향을 준 것은 그가 ‘무의식 읽기’라는 방법으로 인간을 ‘읽어내려’ 했다는 점 때문이다. 그의 발상은 아주 간단하다. “인간을 결정적으로 지배하는 것은 이성과 의식이 아니라 무의식이며 따라서 무의식을 읽을 수 있다면 우리는 인간을 알 수 있다. ” 2, 500년 넘게 유지되어온 서양의 이성 중심적 또는 의식 중심적 인간관을 뒤흔든 ‘프로이트의 혁명’은 이처럼 간단한 명제에 입각해 있다. 그러나 명제는 대체로 어떤 발견에 이르기 위한 가설이지 그 자체가 반드시 발견인 것은 아니다. 자기 명제를 입증하기 위해 프로이트는 우선 무의식의 존재를 증명해야 했고 이 증명 방식으로 그가 채택한 것이 ‘무의식을 지배하는 문법’의 제시였다. 그 문법에 따라 읽으면 인간의 행위나 정신 질환 중에 그 때까지 설명되지 않았던 것이 설명된다. 따라서 이 설명력은 역으로 무의식의 존재를 입증한다는 식이었다. 말하자면 프로이트가 발견한 인간은 ‘무의식이라는 이름의 책’이었고 그의 업적은 이 무의식의 텍스트를 읽어낼 수 있는 문법의 발견에 있었다.
분자 생물학의 인간 발견은, 물론 정신 분석학의 인간 발견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정신 분석의 읽기 대상이 무의식이라면, 분자 생물학의 판독 대상은 인간의 유전 정보망이고, 이 읽기가 제시하는 인류를 인간이 유전자 언어로 씌어진 책이라는 것이다. 양자가 모두 인간을 모종의 텍스트 개념으로 파악하고 있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지만 생물학과 정신 분석의 관심 및 방법은 상호 비교하기 어려운 차원에 있다. 그러나 서양의 오래된 인문주의적 인간관에 차례로 충격을 주고 있다는 점에서는 양자를 서로 비교할 만하다.
플라톤에서부터 데카르트, 르네상스의 근대 계몽 이성 시대, 정치적 자유주의 시대를 거치는 사이에 형성된 서양의 인문주의적 인간관은 시대에 따른 조금씩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인간을 기억, 이성, 의식의 주체로 파악하고 있었다. 플라톤의 유명한 이분법에 따르면 인간은 영혼과 육체라는 완전히 상호 이질적인 두 부분으로 구성된 복합체이다. 영혼은 진리를 기억하고 진리를 알 수 있는 이성적 존재이고, 육체는 비이성적이고 감성적인 차원, 다시 말해 인간이 지닌 동물적 차원이다. 그러므로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것은 이성적 차원의 영혼이며 육체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않는 동물적 ‘망각의 자루’이다. 영혼은 이 망각의 자루를 벗어날 때에만 진리의 본향으로 되돌아 갈 수 있다. 이 이분법은 영혼과 육체, 이성과 감성, 진리와 비진리, 기억과 망각, 의식과 무의식 등의 서열 질서로 양분되는 서양적 이분법의 토대를 이루고 이 분할 구도는 데카르트에 와서 확인, 강화된 다음 근대의 이성적 ‘자율 주체’ 사상을 거쳐 확고한 인식의 틀로 굳어진다. 이 인식 구도에서 특징적인 것은 ‘육체’의 비하이다. 육체는 유한성, 타락, 부패, 오염, 망각, 무의식, 비진리의 범주로 인식되어온 것이다.
프로이트의 무의식 이론이 이 인문주의적 인간관에 준 타격은 [:]
- 인간이 명징한 이성의 주체도, 명료한 의식 주체도 아니라는 관점의 제시에 있었다.
- 인간은 오히려 그가 의식하지 못하는 무의식의 조종을 받고 있고 따라서 그는 의식 주체가 아니라 무의식 주체이다. 그의 유명한 언술을 빌면 “인간은 자기 집의 주인이 아니다. ” 무의식은 이성이 지배하지 못하는 ‘비논리의 왕국’이다.
- 그러나 이 비논리의 영역을 캐고 들어 갔을 때에만 인간은 자기 주인을 만난다.
프로이트의 이 관점이 의식 주체론을 뒤엎고 있다면, 현대 생물학의 인간관은 또 다른 각도에서 영혼/육체의 이분법과 의식 주체론을 전복한다. 분자 생물학의 발견에 따르면 인체 유전자는 다량의 정보를 수집, 보존, 기억하고 그 자체의 언어 문법에 따라 그 기억 정보들을 복사, 전달한다. 그러므로 육체는 플라톤이 생각한 것처럼 망각의 자루가 아니라 엄청난 기억 용량을 가진 정보 체계이다. 뇌세포의 기억만이 기억이 아니다. 인간은 오히려 그가 의식하지 못하고 의식적으로 통제할 수 없는 이 유전정보 체계에 종속되고 그 체계에 의해 결정된다. 그의 운명을 지배하는 것은 의식이 아니라 지금까지 판독되지 않았던 그 ‘유전자 언어’다.
‘인간은 유전자 언어 문장으로 씌어진 책’이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이 나오고 인간이 그 책의 판독 방법을 알게 되었다는 사실의 중요성은 단순히 ‘인간’에 대한 과학적 지식의 확장이라는 선에만 머물지 않는다. 우선 그 지식은 개인과 종의 미래를 유전 공학적 통제와 조절의 영역으로 몰아 넣는다. 특정의 유전병이나 유전적 정신 질환이 특정의 염색체와 유전자 문장의 교란에서 오는 결함이라면, 인간은 그 결함 유전자 또는 교란된 유전 정보를 제거, 치료, 무력화시킴으로써 지금까지 치유 불능의 것으로 알려진 질환들을 통제할 수 있다. 분자 생물학과 유전 공학이 열어 놓은 이 가능성은 유전자 의학, 유전자 치료법, 유전 약물학의 광대한 새 영역들을 열어제친다. 유전자 문장을 고쳐씀으로써 인간을 바꾸는 일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 가능성은 치유가 불가능한 선천성 결함 인자를 가진 태아에게는 탄생의 기회를 아예 박탈하는 우생학적 사회 공학의 대두를 암시한다. 또 개인의 생물학적 미래가 적혀 있는 유전 정보가 사회적으로 보유된다는 것은 그의 사회적 미래에 결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다. 보험 회사는 보험 가입자들의 유전 정보에 입각하여 요율(料率)을 책정할 수 있고, 이 유사한 선택, 배제, 불평등 조건 부과 등등의 가능성이 결혼과 취업의 영역으로 확대될 수 있다. 21세기 청춘 남녀들에게는 궁합, 사랑, 연애 아닌 각자의 유전 정보 교환이 가장 중요한 일이 될 수 있다. 먼저 유전자 문장으로 된 그 결정적 텍스트를 서로 검증해본 다음 ‘이상 없음’의 판정이 있고 나서야 결혼이 가능해질지 모른다. 또 개인 유전 정보에의 접근이 허용되고 그것의 사회적 사용이 보편화할 경우 미래의 고용주에게는 취업 희망자의 유전 정보를 검토하는 일이 이력서 심사 이상으로 중요해 질 수 있다. 알 수 없는 비밀의 영역, 신과 운명의 영역으로 여겨져 온 개인의 미래는 21세기 인간에게 더 이상 비밀이 아닐 것이다. 그는 자신의 운명이 적힌 생물학적 자서전을 미리 검토받은 다음에야 세상에 태어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3. 과거의 재구성
유전자 언어의 판독은 인간의 미래에만 영향을 주는 것이 아니다. 유전자는 미래를 보여주는 창이면서 동시에 인간의 ‘과거’에 관한 결정적 정보를 담고 있는 시낭(타임 캡슐)이자 ‘살아있는 화석’이다. 특수한 유전 정보나 유전적 특성이 왜 특정의 종족에게서만 발견되는가를 안다는 것은 그 종족의 과거를 아는 데 결정적인 단서가 될 수 있다. 이를테면 세계의 타 지역 인구들에서는 극히 적은 ‘리수스 네거티브’(통칭 RH 마이너스) 혈액형이 스페인의 바스크족에서는 20퍼센트 이상의 높은 분포를 보이고 있는데 이 사실은 바스크족의 과거를 해명하는 데 결정적인 정보이며 농업 문화의 확산 경로를 아는 데에도 중요한 정보이다. 말하자면 생물학은 지금까지 역사학, 인류학, 고고학, 고고 인류학, 언어학 등에서 얻어진 인류의 과거나 특정 종족의 과거에 대한 지식을 확대 내지 수정케 하는 유용하고 결정적인 정보들을 제공함으로써 인류의 ‘과거 재구성’에 기여하고 있는 것이다. 언어학상 한국어와 일본어는 알타이 어족의 특성을 가지면서 동시에 이 정보만으로는 해명되지 않는 다른 요소들도 갖고 있다. 이 때문에 이들 언어를 어느 어족에도 포함시키기 어려운 ‘고아 언어’로 분류하는 학자들도 있다. 종족적 유전 특성 연구 분야의 권위인 루카 카발리-스포사의 연구에 따르면 한국인의 유전적 특성은 인근 인종 집단인 중국인이나 티베트인들보다도 오히려 유럽계에 더 가까운 것으로 되어 있다. 이는 앞으로 한국측 연구자들의 손에서 더 정밀하게 확인되어야 할 사항이지만 우리에게는 매우 흥미로운 정보가 아닐 수 없다.
현대 유전학이 유전자 연구를 통해 내놓은 현생인류의 기원에 관한 새로운 발견은 매우 극적인 것의 하나이다. 1987년 캘리포니아 대학 유전학자 앨런 윌슨이 인류의 일원 발생설을 내놓기 전까지는 인류의 다지역 진화설이 대체로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다지역 진화설에 따르면 각 대륙에 분포해 있었던 직립 원인으로부터 현생 인류가 진화한 것으로 되어 있다. 예컨대 유럽인은 유럽 대륙에 살았던 직립 원인 네안데르탈인으로부터 진화해서 오늘의 백인종을 이루게 되고, 아시아 쪽의 황인종은 북경 원인으로 알려진 직립 원인을 조상으로 하며, 동남아-호주계 인종은 자바 원인을 조상으로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윌슨은 인체 세포에 들어 있는 두 유전자 가운에 하나임 미토콘드리아 유전자(이 유전자는 여자[어머니]를 통해서만 자식에게 전달된다. )의 돌연변이 과정을 추적한 결과 현생 인류의 모계 뿌리가 20만 년 전 아프리카에 살았던 어떤 여성(집단)에 있다는 사실을 찾아낼 수 있었다.
이 발견은 인류의 발생과 진화, 6대륙 분포 과정에 대해 지금까지 알려진 것과는 전혀 다른 지도를 그리게 한다. 일원 발생설이 그리는 진화도에 따르면 20만년 전 ‘아프리카의 이브(African Eve)’에서 발원한 현생 인류의 한 줄기는 아프리카에 남고 한 줄기는 약 10만 년 전쯤 중동 아시아로 진출했는데, 인류의 5대륙 분산이 시작된 것은 거기서부터이다. 아시아 내륙을 향한 이 신인류의 이동은 6~7만 년 전에 시작되고, 동남아를 거쳐 호주로의 이동은 약 4만 년 전, 베링 해협을 거쳐 북미 대륙으로 진출한 것은 3만 5천년에서 1만 5천년 전이다. 유럽 대륙을 향한 신인류의 서진은 약 4만 년 전의 사건이다. 신인류가 유럽으로 진출했을 당시 그 대륙에는 직립 원인 네안데르탈인들이 살고 있었으나 이들과 신인류는 뒤섞인 것이 아니라 신인류가 네안데르탈인들을 완전히 대체했다는 것이 유전학 쪽의 설명이다. 인류 일원설은 아직 더 확실한 증거를 필요로 하지만 유전학이 내놓은 증거들 자체의 상당한 과학성 때문에 이미 이 학설은 구학설(다지역 진화설)을 대체하고 있다.
이 발견이 왜 인문·사회 과학에 특별히 흥미로운가? 그것은 생물학과 유전학이 인류의 과거에 대한 지식을 정밀화하는 데 기여하면서 동시에 제국주의와 인종주의, 과학과 권력의 결탁 등에 관한 비판적 안목을 유지하는데 극히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유럽 백인종이 흑인을 위시한 여타 인종들과는 다른 ‘별개 조상’을 가진 별개 인종임을 ‘과학적’으로 입증하는 일은 19세기 생물학의 중요한 관심사 가운데 하나였다. 이는 19세기 생물학이 유럽의 당대 제국주의 담론에 밀착해 있었기 때문이다. 유럽 제국주의가 아프리카를 접수할 때 필요했던 것은 제국주의적 침탈 행위를 ‘도덕적으로’ 정당화하는 작업이었다. 이 작업은 백인이 흑인보다 ‘우수한’ 인종이며 따라서 우수한 인종이 열등한 야만 인종을 깨우쳐 그들을 ‘문명’으로 이끄는 것은 도덕적으로 정당하다는 쪽으로 진행되었고, 따라서 백인 별개 인종설을 확립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이 정당화 작업의 필수적 부분이었다. 게다가 백인과 흑인이 동일한 조상을 갖고 있다는 것은 백인 사회의 정서 구조상 수용하기 어려운 부분이었다. 쉽게 말하면, 네안데르탈인 백인 조상설은 제국주의적 담론 구조나 백인 정서가 기다리고 기다리던 ‘과학적 발견’이 되어 준 것이다. 따라서 현대 유전학의 인류 일원 발생설이 확고한 증거를 확보할 경우, 네안데르탈인 백인 조상설은 과학이 과학의 이름으로 어떻게 당대적 권력 담론과 결탁하는가(이는 미셸 푸고의 주요 주장인 ‘권력/진리 불가분설’의 골자이기도 한다. )를 보여주는 흥미로운 사례로 남게 될 것이다. 이미 현대 생물학자들 사이에는 네안데르탈인 백인 조상설이 과학사상 최대의 ‘사기극’이었다는 반성이 일고 있다. 한때 인종 차별주의에 과학적 토대를 제공하는 듯이 보였던 생물학이 지금은 인종주의적 편견의 근거를 삭제하는 데 기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현대 생물학과 그 연관 분야로부터의 발견이 인간의 지식 체계와 미래 사회에 던지는 함의는 이 정도에서 그치지 않는다. 생물학의 근래 동향들 중에는 인문학, 특히 문화론과의 심각한 충돌을 야기하는 것들이 많고 이 대목은 21세기 초반의 지적 이슈를 중심으로 전개될 것인지를 짐작하게 한다. 이 충돌 부분에 관한 이야기는 이 칼럼의 다음 번 화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