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은이: 임 항 (국민일보 환경전문기자)
(전략) 이 둘이 공통적으로 대표하는 문화현상을 보자. 나는 전기구석기시대의 수렵채취 사회라는 코드에 주목해야 한다고 본다. 나비족도, 조에족도 수렵채취민이다. 우리의 문화적 편견은 수렵채취를 원시적이거나 야만적인 것과 동일시한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적어도 인류학자들은 수렵채취 사회가 초기농경사회보다 훨씬 더 풍요롭고 삶도 여유로웠다는 데 동의한다. 발굴된 유골의 이빨들이 그렇게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북아메리카 대륙의 수렵채취 원주민들의 영양상태는 농경 원주민들의 그것보다 훨씬 더 좋았다. 농사는 단일, 혹은 소수의 작물에 목숨을 거는 일종의 도박이었던 반면, 수렵채취는 에너지의 흐름이 풍부한 생태계를 찾아서 그곳에서 이뤄지기 때문이다. 알프스산의 동굴, 고대 그리스와 터키, 미국의 옥수수 농업 지대에서 발견된 유골에 대한 고병리학적 조사 결과 수렵채취인들의 평균 신장은 현재의 인류보다 더 컸고, 이빨과 영양 상태가 좋았던 반면 농경인들은 충치와 영양실조에 시달렸던 것으로 드러났다.
4만년~1만년전의 남부유럽은 그처럼 양호한 생태계였던 것같다. 간빙기에 빙하가 녹으면서 유럽 대륙과 아프리카 북부는 풍부한 산림과 초원으로 뒤덮여 있었다. 지금의 프랑스와 스페인에 해당하는 이곳에 살았던 수렵채취 인류, 즉 일부 네안데르탈인과 크로마뇽인은 무리지어 달리는 거대 초식동물을 낭떠러지에 떨어뜨리는 방법으로 일주일에 두 시간만 사냥하면 배불리 먹고 살았다고 한다. 다만 생태계에 부하를 급격히 늘리지 않기위해 인구조절과 영아살해가 성행했을 것이기 때문에 평균수명은 짧았다고 한다. 오늘날 인류학자들은 수렵채취 인류가 농경 기법을 일찌감치 알았지만, 될 수 있는 대로 농경을 기피했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시작했다. 수수께끼 3부작을 쓴 마빈 해리스, ‘총, 균, 쇠’의 저자 제레드 다이아몬드 등은 지금도 수렵채취를 고집하는 파푸아뉴기니 원주민 등의 예를 들어 이같이 주장한다.
‘아마존의 눈물’을 제작한 김진만 PD도 이데일리와의 인터뷰에서 아마존의 원시부족에 대해 “어쩌면 (문명사회보다) 더 나은 사회일 수도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잊고 살던 것을 다시 깨닫게 된 것 같다”며 그들에 대한 감사를 전했다. 그들이 사는 아마존이 없어지지 않도록 조그마한 노력이라도 한 것 같다며 PD들은 뿌듯해 했다.
물론 아마존의 눈물을 시청한 우리 국민들이 모두 원시사회, 전기구석기시대를 동경했을 것이라고 볼 수는 없다. 그러나 비접촉 원주민의 삶의 방식에 어느 정도 공감하지 않고서는 그토록 높은 관심과 시청률을 보이기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또한 아바타의 나비족을 자연을 숭상하는 수렵채취인들로 설정한 것도 관객들의 원시나 자연에 대한 동경 또는 문화 상대주의적 관점을 어느 정도 전제로 한 것임에 틀림없다.
이런 관찰은 얼마 전 타계한 프랑스의 구조조의 인류학자 클로드 레비-스트로스의 생각과도 일맥상통한다. 그는 전 일생을 서구우월주의의 편견을 깨는 데 썼다. 그는 다른 지역의 사회들의 친족체계와 신화에 대한 분석을 통해 ‘문명’과 ‘야만’의 경계를 부수고 ‘야만’의 세계도 ‘문명’ 못지않은 논리와 합리성을 갖추고 있음을 명확한 근거를 통해 제시했다. 인류학자인 임봉길 강원대 명예교수는 레비-스트로스의 업적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문명’과 ‘야만’, 과거와 현재의 인간은 본질적으로 똑같다. 1만 년 전의 인류나 현대인이나 본질적인 차이는 없다는 것, 그래서 어떤 문명이나 민족도 다른 집단보다 위대한 것은 없다는 게 그에게서 얻을 수 있는 통찰이다”
MBC ‘아마존의 눈물’ 홈페이지에는 시청자들이 가장 좋아한 조에족에 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자연 상태 그대로 살아가는 조에족은 턱에 나무 막대기를 꽂는 뽀뚜루로 장식을 한다. 생활방식도 원시 그대로. 해를 시계 삼아 하루를 보내고 나무를 마찰시켜 불씨를 얻는다. 칼을 가지고 밀림을 해치며 사냥한 고기들을 다듬고 그 이상의 문명의 필요성은 느끼지 못한다.” 그들이 받아들인 문명의 이기는 칼, 거울, 바늘이 전부라고 한다. 1만여년전 수렵채취인들이 농경을 거부했듯이 조에족은 문명이 그들을 파괴할 수도 있는 양날의 칼임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는 것 같다.
우리가 아마존의 눈물을 통해 수렵채취를 근간으로 하는 원시사회를 일방적으로 미화한다거나, 반대로 일부 오락프로그램에서 그랬던 것처럼 그들을 희화화하는 것 모두가 바람직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비접촉 원주민의 삶의 방식을 있는 그대로 이해함으로써 동서고금의 다양한 사회와 문화에 “다름을 있을지언정 우열은 따질 수 없다”는 인식을 가진다면 그것은 우리 사회의 수준을 한 단계 높일 것으로 본다. 김우창 고려대 명예교수는 레비-스트로스의 저작들을 설명하면서 “풍요가 경제발전의 결과라는 것은 현대인의 착각이다. 원시사회야말로 풍요한 사회였다”고 단언한다.
한반도 남쪽의 우리 민족에게 지난 반세기는 경제성장을 위해 앞만 보고 달려온 세월이었다. 이제는 가끔 옆이나 뒤도 돌아보면서, 지구 반대편이나 선사시대의 다른 사람들이 사는 모습에서 교훈을 얻을 때다. 그것은 현대문명이 잉태한 여러 모순과 위험에 대한 자각이기도 할 것이다. 도구와 기술에 대한 맹목적 의존, 교통사고와 산업재해로 대표되는 위험을 내재한 산업사회, 천연자원의 낭비와 기후변화, 환경파괴와 환경성 질병 등은 현대문명이 얼마나 깨지기 쉬운 연약한 기초위에 서 있는 지를 깨우쳐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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