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12월 31일 목요일

맨해튼 지하실에서 시작한 1인 어음 중개상



(전략)... 골드만은 1869년 아내와 다섯 아이들을 데리고 뉴욕으로 옮겨와, 맨해튼 남부 파인스트리트Pine Street에 “마커스 골드만 회사Marcus Goldman & Co.”라는 작은 간판을 내걸었다. 건물 지하의 석탄낙하통 곁에 비좁은 공간을 얻어 사무보조 소년과 오후 때면 장례식장으로 일하러 가는 시간제 경리직원 둘만을 두고서, 채권을 매매하는 중개인(브로커broker) 일을 시작했다. 초라한 시작이었지만, 이 작은 회사가 20세기 굴지의 투자은행으로 커가게 된다.

골드만은 매일 아침 긴 코트를 걸치고 뉴욕 맨해튼의 메이든레인Maiden Lane과 비크먼스트리트Beekman Street로 향했다. 지금은 금융가로 변한 메이든레인에는 다이아몬드 도매상들이 많았고, 그 가까이 북쪽의 비크먼스트리트에서 “늪지the swamp”라는 별칭으로 불리던 곳에는 생가죽과 피혁을 거래하는 상인들이 모여 있었다(식민지 초기 17세기부터 이곳 늪지에서 동물 사냥을 많이 했고 그 주위로 가죽 무두질을 하는 피혁공들이 밀집하게 되어 생긴 별명이다--옮긴이). 골드만은 그곳 상인들을 순회하며 약속어음을 매입했다. 이를테면, 그가 준비해간 현금 4,850 달러를 상인에게 건네주면, 상인은 어느 날짜까지 해당 어음의 소지인에게 5,000 달러를 지급하겠다는 약속어음에 서명해 골드만에게 넘겨줬다. 그러니까 골드만은 그 무렵 표준 금리인 8~9 퍼센트로 상인들의 어음을 할인해준 셈이고, 이 할인금리에 더하여 골드만과 같은 어음 수집상들은 액면금액의 0.5 퍼센트(50 베이시스 포인트)를 수수료로 뗐다.[역주]* 이런 약속어음은 지금의 채권처럼 제삼자와도 매매가 가능했고 주로 은행에서 많이 거래됐다. 골드만이 약속어음을 매입하고 나면 얼마 지나 일과 중에 이런저런 은행을 다니며 다시 매도했는데, 그럴 때마다 높다란 실크모자의 속띠에 어음을 끼워 넣고 다녔다. 체임버스스트리트Chambers Street의 케미컬뱅크Chemical Bank, 워런스트리트Warren Street의 수입무역은행Importers and Traders Bank, 월스트리트의 내셔널시티뱅크National City Bank(지금의 시티은행)가 그가 주로 약속어음을 매도했던 은행들이다. “골드만의 모자 높이”를 보면 그가 드나드는 은행의 일일 실적을 알 수 있다는 말이 나돌았다.

약속어음은 오늘날 기업어음commercial paper(CP)의 전신이다. 약속어음을 매매하는 사람들은 “어음치기note shaver(어음 깎는 사람)”로 통했다. 골드만이 사업 초기부터 혼자서 소화했던 기업어음은 거래규모가 한 해 500만 달러나 됐다. 성공적인 실적이었지만, 그 무렵 다른 독일계 유대인 은행가들에 비하면 보잘것없는 수준이었다. 골드만은 일 년 내내 사고팔았던 기업어음 총계가 500만 달러였지만, 1869년 당시 조지프 셀리그먼Joseph Seligman을 비롯한 다른 사업가들은 상시 대기 중인 운전자금만 해도 600만 달러에 달할 정도였고, 철도채권 발행을 본격적으로 주간하고 매매하는 현대적인 투자은행의 모습을 이미 갖추고 있었다...(중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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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대략 할인금리를 9%, 어음만기를 100일로 치고 계산해보면, 할인이자는 5000×9%×(100/365)=123.3 달러가 되고, 골드만이 뗐던 수수료는 5000×0.5%=25 달러가 되어, 액면금액 5000 달러에서 공제되는 전체 할인폭은 123.3+25=148.3 달러가 된다(옮긴이).

※ 다음 자료에서 일부를 발췌: 리사 엔드리치Lisa Endlich, "1869~1976: The Family Firm,"《Goldman Sachs: The Culture of Succ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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