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5월 25일 월요일

[발췌: 조영헌] 대운하와 중국 상인(2014)

출처: 조영헌(2014). 대운하와 중국 상인: 회·양 지역 휘주 상인 성장사, 1415~~1784. 민음사.
자료: 구글도서


※ 발췌:


1. 도시 발전과 유동 인구

1.1 수·당 시대의 양주

양주라는 도시가 인상적으로 중국 역사에서 주목된 시기는 수·당대였다. 수·당대에 대운하를 이용한 물자 유통이 활기를 띠면서 양주의 위상도 동반 상승했던 것이다.[주]567 정작 대운하를 개통했던 수나라는 감당하기 어려운 대규모 공사와 고구려 침공 등의 외정으로 말미암아 쇠락했지만, 그 뒤를 이은 당나라는 대운하의 경제적 혜택을 톡톡이 보았다. ( ... ... ) 즉위한 지 14년, 대운하가 완성된 지 8년 만에 수양제는 양주에서 생을 마감하고 수나라의 운명도 끝이 났으니, 수의 생명력이 대운하로 소진되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대운하 건설로 인해 남과 북 사이의 경제 교류가 활성화되었다는 반론도 만만치 않다. 특히 당대가 되면 대운하를 통해 남북의 경제 교류가 활성화될 뿐 아니라 중국의 정치적 통합을 유지하는 데 공헌을 했다는 평가도 있다. 앞서 언급한 피일휴는 대운하에 대해서 "수나라의 백성들에게는 그 해로움이 말할 수 없었지만 당나라의 백성들에게는 그 이로움이 말할 수 없다."고 노래했으며, 송대가 되면 대운하는 수도인 개봉으로 곡물을 운송하는 조운 루트로 크게 번영했다. 그사이 강남 물자의 집산지였던 양주는 경제 중심지로서의 명성을 유지할 수 있었다.

( ... ... )


1.2 명·청 시대의 도시 인구

하지만 명조가 개창된 이후 회·양 지역의 경제는 곧 활기를 되찾았다. 지역 사회가 안정을 되찾고 양회 염장에서 생산된 소금이 양주와 회안을 중심으로 광범위하게 유통되기 시작했으며, 북경 천도 이후 대운하를 통한 조운이 본격화되자 회·양 지역의 주요 도시는 곧 각지에서 몰려드는 상인, 관리 등 각종 체류자[流寓, sojourner]들로 붐비기 시작했다.[주]573 명초부터 회·양 지역에는 강소성 남부 지역과 강서, 휘주, 산서 등 외지에서 온 이민자들이 토착인을 수적으로 초과하기 시작했다.[주]574 ( ... ... )


1.3 양주의 도시 구조


1.4 회안의 도시 구조


1.5 도시 발전과 대운하


1.6 유동 인구

  둘째, 회안과 양주의 도시 발전에 유동 인구의 비중과 역할이 높았다. 앞서 인용했던 "사방으로부터 주거와 상고가 모여드는 곳으로, 인구가 이전의 몇 배가 될 정도로 번성했"다는 구절은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지만, 이는 양주뿐 아니라 회·양 지역에 보편적인 현상이었다.

  1605년에 간행된 『양주부지』를 보면 양주의 토착민이 유동 인구의 20분의 1에 지나지 않는다고 했다. 또한 사치 풍조를 주도한 사람들이 "모두 사방에서 온 상인"으로 "토착인은 열에 하나일 뿐"이라고 했다.[주]595 과장된 표현이기는 해도, 외지에서 이주해 온 유동 인구 가운데 세력가들이 많았음은 틀림없다. 회안 하하진의 경제를 주도한 사람들 역시 바깥에서 들어온 외래 상인이었음은 앞서 언급한 바와 같다.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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