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홍식
《새뮤얼슨의 경제학》(제19판 번역서)에서 발췌
이 책이 출간되면 대학교육 과정에서 흔히 경제학원론으로 통하는 초급 경제학 교과서가 한 권 더 늘어난다. 책을 번역하면서 교과서가 지니는 의미에 대해서는 생각할 겨를이 없었고, 그저 두 가지 이유에서 이 책의 번역을 맡았다. 오래전 이 책의 11판 원저를 주교재 중 하나로 공부했지만 제대로 읽지 못했으니 이번 기회에 꼼꼼히 공부해보자는 욕심이 그 하나요, 다른 하나는 그동안 번역자로서 품어온 문제의식과 역량을 총동원하여 건조하게만 비칠 수 있는 경제학 교과서를 우리말‘스럽게’ 쉽게 읽히는 책으로 번역해보자는 도전의식이다.
물론 제2차 세계대전 후 현대 경제학과 경제학자들의 ‘주형’을 만들었다고 일컬어지는 폴 새뮤얼슨의 대표적 저작을 번역해 한국어 사용자들에게 소개한다는 데 나 나름의 의미를 두기도 했다. 서점가를 둘러보면 초급 경제학만 해도 다양한 교과서가 있고, 대학 도서관의 서가에는 그동안 점멸했던 교과서들이 십여 종 이상을 헤아린다. 그 책들을 펼쳐 보면 대개 경제학의 정의나 의미, 수요와 공급, 소비자 행동과 수요이론, 생산자 행동과 공급이론, 완전경쟁과 독점 등의 시장구조, 시장실패, 거시경제의 단기변동과 성장으로 이어지는 여러 주제가 나온다(여기에 행동경제학 같은 최신 주제가 보태지기도 한다). 이처럼 책은 많아도 주제는 다 대동소이하고 주제마다 등장하는 개념과, 개념을 제시하는 도구들도 다 비슷하다. 주제를 배치하는 방식과, 논증의 스타일, 강조하는 것과 생략하는 것의 조합이 ‘조금씩’ 다를 뿐이다. 이러한 대동소이함은 하나의 일반형이 존재해왔다는 뜻이다.
경제학 교과서의 그 일반형이 새뮤얼슨의 이 교과서라는 데 이의를 제기할 경제학자는 아마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2008년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한 폴 크루그먼도 자신의 교과서를 집필하기 위해 이 책의 1948년 초판을 구해 공부했다고 밝히고 있고,[주1] 게임이론으로 유명한 애비너시 딕싯도 새뮤얼슨의 이 교과서가 그 이후 모든 교과서의 틀을 결정했다고 언급한 바 있다.[주2]
지금으로부터 약 60년 전 한국이 전쟁의 포화로 신음할 때, 세계는 동서냉전과 식민지 해방을 비롯해 전후 새 질서를 숨 가쁘게 만들어가고 있었다. 물론 경제학도 예외는 아니었다. 출판 전문가들이 주목하지 않은 현상이라지만, 미국 독서계에서도 그러한 조짐이 나타나고 있었다. 1948년 미국인들이 즐겨 읽던 베스트셀러 목록에는 전쟁 영웅이자 34대 미국 대통령 아이젠하워의 회고록 《유럽 십자군》이 올랐고, 역시 전쟁을 다룬 노만 메일러의 유명한 소설 《나자와 사자》가 올랐다. 자기계발서로 데일 카네기의 《걱정 없이 사는 기술》 외에, 성생활을 다룬 알프레드 킨제이의 《남성의 성적 행동》도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같은 해에 출판된 새뮤얼슨의 《경제학》은 판을 거듭하며 판매 부수에서 이 베스트셀러들을 모두 앞질렀다.[주3] 30년 넘어 반세기에 달하도록 경이적인 판매를 달성한 아주 이례적인 기록이다. 이러한 상업적 성공의 원인으로 여러 가지가 언급되지만, 간결하고 명료한 서술을 꼽는 이들이 많다.
크루그먼은 새뮤얼슨을 추모하는 글에서 그의 이론적 업적을 이렇게 요약했다. “독창적이고 혁신적인 논문, 즉 무슨 문제에 대한 기존 사고를 근본적으로 바꿔놓는 논문을 딱 하나만이라도 썼으면 좋겠다는 것이 웬만한 경제학자들의 꿈이다. 새뮤얼슨은 그런 논문을 십여 개나 썼다. 국제무역에서부터 금융, 성장이론, 투기 등 거의 모든 주제에서 그러한 업적을 남겼다.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지식을 들춰보면, 그 거반의 밑바탕에 여러 세대의 학자들이 연구할 의제 자체를 설정한 새뮤얼슨의 결정적인 논문이 자리 잡고 있다.” 다른 학자들의 평가도 다 이와 비슷하다. 신고전파 종합으로 불리는 전후 주류경제학을 ‘주물’한 사람이 새뮤얼슨이며, 여러 세대의 경제학자들이 공부한 교과서가 바로 이 책이다.
이번의 19판은 어떤 의미에서 새뮤얼슨의 유언과도 같다. 그가 세상을 떠난 해에 영문으로 ‘중도 선언’이라고 칭한 글을 쓰고, 교과서의 맨 앞에 배치했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그가 말하는 중도가 경제 이론과 사상, 그리고 정치적인 면에서 어떤 함축을 지니는지에 대해서는 앞으로 더 많은 연구가 이루어질 것이고, 이 자리에서 잘라 말하기 어려운 점이 많다(그가 남긴 미발표 논문과 각종 서신을 포함한 연구가 이미 시작됐다는 말도 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중간에 서고자 하는 양 극단을 정의하지 않고는 존재할 수 없는 길이 중도라는 점일 것이다. 새뮤얼슨의 이 책은 그 극단 중 하나인 자본주의를 “개인이 자본을 소유하고 그로부터 이득을 누릴 수 있는 능력은 자본주의가 자본주의라고 불리는 이유다”라고 명쾌하고 분명하게 언급한다.
흥미롭게도 경제학에 수학적 방법을 대대적으로 도입한 사람이 새뮤얼슨이라고 평가되지만, 이 교과서의 서술 방식은 그 정반대다. 그래프를 곁들인 묘사적 언어가 주를 이루며, 공부하는 학생들 스스로 직관적이고 상식적으로 설명할 수 있도록 익혀야 한다고 교과서의 곳곳에서 강조한다. 애초에 새뮤얼슨이 이 교과서로 가르쳤던 MIT 대학의 수강코드 “Ec11” 강의도 교양필수 과목이었지, 경제학 전공과목이 아니었다. 그만큼 쉽게 읽히도록 설계된 책인 데다, 한 세대 넘어 두 세대에 이르도록 경제학 교과서의 전형을 창조한 이 책을 한국어 자산으로 보유한다는 것에 큰 의미를 두고 싶다. 앞으로 독자들과 호흡하며 더 읽기 쉬운 책으로 거듭날 수 있도록 더 보완할 것은 보완해가고 싶다.
옮긴이 김홍식
2012년 2월
《새뮤얼슨의 경제학》(제19판 원저의 번역서)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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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2. Avinash Dixit, “Paul Samuelson 1915-2009,” http://www.princeton.edu/~dixitak/home/PaulSamuelson.pdf
[주]3. Kenneth G. Elzinga, “The Eleven Principles of Economics,” Southern Economic Association, November 26, 1991. 1991년에 작성된 이 자료에 따르면 1990년까지 미국 내에서 총 3,235,000부가 판매되었다. 미국 외 지역의 판매는 맥그로우힐 출판사가 공개하지 않아 알 수 없었다고 한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지금까지 세계적으로 대략 400만부 이상이 판매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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