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2월 25일 토요일

Ⅰ. 들어가기: 삶과 이야기, 그리고 시간



김홍식
「브로델이 들려주는 자본주의라는 이름의 히드라 이야기」
※ 다음 역서의 해제에서 일부를 발췌: 
Fernand Braudel, La dynamique du capialisme


누구나 삶이 있고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린아이의 태를 벗은 자식에게 “나는 이렇게 살았단다”라고 이야기할 때도 있고, 먼 조상이 어떻게 살았다는 이야기를 전해들을 때도 있습니다. 나의 삶이든 남의 삶이든, 삶을 이야기하는 방식에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어떤 일들이 일어났는지 커다란 사건을 중심으로 이야기할 수도 있고, 무엇을 목표로 살았는지 삶의 목적을 중심으로 이야기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 밖에 여러 가지 방식이 있겠지만, 삶을 이야기할 때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무언가의 변화를 이야기하게 됩니다. 동시에 여러 가지 변화 속에서 변하지 않는 것을 이야기할 수도 있습니다. 변하는 것은 현상이요, 변하지 않는 것이 본질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개인의 삶이든 어느 사회의 삶이든 무엇이 변했고 무엇이 변하지 않았는가 하는 것은 그 삶의 내부를 들여다보는 중요한 관점이 될 수 있습니다. 가령 우리는 밥을 먹고, 자동차를 타며, 스마트폰을 쓰면서 살고 있습니다. 밥(즉 쌀)과 자동차, 스마트폰은 그저 생활에 필요한 물건일 뿐이지만, 우리가 사는 삶의 시간대를 말해주기도 합니다. 스마트폰을 쓰고 산 지는 한두 해에서 서너 해 정도 될 것입니다. 자동차를 타고 산 지는 이보다 더 오래되어서 50년 넘어 길게 보면 100여 년에 달할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기껏해야 두세 세대 전부터 자동차와 함께 살아온 셈이지만, 밥을 놓고 생각해보면 시간의 차원이 확 달라집니다.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와 그 할아버지의 할아버지를 넘어 시작을 가늠하기 어려운 태곳적부터 우리는 밥을 먹고 살고 있습니다. 당연한 이야기일지도 모르지만, 이것을 아래 그림처럼 그려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가로축은 과거에서 미래로 이어지는 시간의 흐름을 나타냅니다. 세로축의 위쪽은 쉽게 의식할 수 있고 겉으로 잘 드러나는 의식과 표층의 세계를 상징하고, 아래쪽은 그 반대로 무의식과 심층의 세계를 상징합니다.

[그림]

그림을 보고 금세 알아챌 수 있듯이, 스마트폰이라는 생활 요소가 지속된 시간의 길이는 짧고, 자동차는 그 시간의 길이가 훨씬 깁니다. 스마트폰과 관련된 여러 가지 일들이 화제에 자주 오르는데, 전에 없던 새로운 것이고 다양한 응용 프로그램이 하루가 다르게 쏟아지는 데다 업체 간 주도권 다툼도 치열해서 변화가 활발한지라 사람들의 이목을 끌기 때문일 것입니다. 한편 자동차의 경우는, 새로 출시된 무슨 차종에 어떤 특징이 있을 경우나 화제에 오를까, 자동차 자체가 화제에 오르는 일은 별로 없습니다. 그만큼 자동차는 오래돼서 당연한 것이며 따라서 자동차와 관계된 삶은 우리 생활 깊숙이, 또 의식의 깊은 곳에 들어와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즉 무의식과 심층을 가리키는 세로축 방향에서 자동차가 스마트폰보다 더 아래쪽(더 깊은 곳)에 위치하는 셈입니다. 더 나아가 밥은 헤아릴 수 없이 오랜 시간을 지속한 것이어서 우리의 삶과 의식의 저 아래 아주 깊은 곳까지 파고들어 가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림의 세로축에서 세 가지 물건이 자리하는 심층의 입체 공간에 시간의 흐름과 함께 점점 아래로 내려가는 좀 널찍한 블록 화살표를 그려봤습니다. 밥을 예로 들면, 밥과 관련된 생활이나 사회관계의 폭을 나타냅니다. 밥을 먹고 살려면 쌀농사를 지어야 하고, 경작할 농지가 필요하며, 일 년 중 오랜 시간을 적지 않은 농민들이 일해야 합니다. 그렇게 세대에 세대를 거듭하며 오래도록 밥과 관련된 삶이 이어졌습니다. 지금은 국민의 태반이 농사 말고 다른 일을 하고 살지만, 아주 오래전 농사에서 비롯된 구성진 민요가락을 들으면, 나도 모르게 마음속 한구석에서 무언가 뭉클한 것을 느끼게 됩니다. 풍물놀이 역시 농사에서 비롯됐습니다. 오래전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 미국에 사는 우리 교포 2세들에게 국내 풍물 전문가가 찾아가 장구며 북이며 꽹과리 등 풍물 가락을 가르쳐주던 일이 소개됐습니다. 그 교포 2세들은 중학생 정도의 나이에 우리말을 할 줄 몰랐고 한국적인 삶을 전혀 경험하지 못했지만, 풍물 교습에 순간적으로 집중하며 몰입하는 모습을 봤습니다. 어느 아이는 눈물을 흘리며 “이제야 내가 누구인지 알 것 같다”는 말도 했던 것으로 기억납니다. 진화심리학에서 말하듯, 밥이며 농사며 그와 관계된 오랜 세월의 삶이 멀리 타향에서 태어난 그 아이들의 유전자 속까지 파고들었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세월을 이기는 장사는 없다고들 말하지만, 이처럼 어떤 삶의 요소나 생활양식, 사회관계 혹은 그 무엇이 됐든 간에 시간의 세파에 굴하지 않고 수백 년 심지어 수천 년에 걸쳐 오래 지속되는 현상을 가리켜, 브로델은 ‘장기 지속longue durée’이라는 단순한 말로 불렀습니다. 그는 과거가 됐든 현재가 됐든 인간의 삶을 이해하려면 변하지 않고 오래 지속되는 것들, 그러한 삶의 요소들을 바탕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또한 인간은 과거에서 현재로 또 미래로 이어지는 단선적인 시간을 살고 있는 게 아니라고 보았습니다. 우리는 지금 분명히 오늘을 살고 있지만, 동시에 수천 년을 이어온 시간과 그보다 덜 오래된 시간, 바로 며칠 전부터 시작된 시간이 겹겹이 포개져 있는 다중적(혹은 중층적) 시간대temporalité multiple를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역사는 모름지기 시간에 따른 변화를 연구하는 일일 텐데, 브로델은 왜 오래도록 변하지 않는다는 장기 지속을 중시했던 것일까요?


※ 다음 역서의 해제에서 일부를 발췌: 
페르낭 브로델, La dynamique du capialis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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