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2월 25일 토요일

I. 경제사와 물질생활 (Fernand Braudel, 1976)


페르낭 브로델
다음 역서에서 일부를 발췌: 


경제사라고 일컫는 역사는 여전히 형성되는 과정에 있고, 여러 가지 선입견과 충돌하고 있습니다. 경제사는 고상한 역사가 아닙니다. 고상한 역사는 뤼시앵 페브르가 건조하고 있던 범선입니다. 고상한 역사는 거상巨商 야코프 푸거Jacob Fugger를 다루는 역사가 아니라,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와 프랑수아 라블레François Rabelais(르네상스기 인문주의 작가이자 의사)를 다루는 역사입니다. 경제사가 고상한 것이든 고상하지 않은 것이든, 아니면 다른 역사에 견주어 고상함이 덜하든 간에, 역사가라는 직업에 고유한 온갖 문제가 줄어드는 것은 아닙니다. 경제사 역시 하나의 관점에서 인간의 역사를 통째로 묶어 바라보는 것입니다. 경제사는 자크 쾨르Jacques Coeur(프랑스의 상인)나 존 로John Law(스코틀랜드 출신의 경제학자로 루이 15세 치하 프랑스의 재무대신이었고 ‘미시시피 거품 사건’의 주역으로 유명함)처럼 우리가 위인들로 여기는 사람들의 역사이기도 하고, 동시에 커다란 ‘사건(événement)’의 역사이자, ‘긴 시간을 두고 순환(conjoncture)’하는 역사요, 위기의 역사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오랜 시간을 따라 천천히 진화하는 거대하고 구조적인 ‘장기 지속(longue durée)’의 역사입니다. 여기에 역사가들이 겪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4세기 동안의 시간과 세계 전체를 놓고 어떻게 그에 걸맞은 사실과 설명을 조직해낼 것인가 하는 문제를 풀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선택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나는 장기적인 시간을 두고 진행되는 심층의 균형과 불균형을 선택했습니다. 내가 보기에 산업화 이전의 경제에서 가장 근본적인 특징은 두 가지 경제 활동이 공존했다는 점입니다. 한편에는 여전히 단순한 형태의 경제가 관성적이고 경직된 채 육중하게 버티고 있고, 다른 한편에는 제한적이고 소수에 그치기는 했지만 근대적인 경제 활동이 활발하고 힘차게 성장하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즉 한쪽에서는 농민들이 촌락에서 자급자족에 가까운 방식으로 자율적으로 생활하는 한편, 다른 한쪽에서는 시장경제와 자본주의가 서서히 팽창하면서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의 모습을 그때 이미 만들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적어도 두 개의 세계, 서로 이질적인 두 종류의 삶이 있었던 것인데, 어쨌거나 이 두 세계가 각각 어떤 모습이고 어느 정도의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는지는 하나를 가지고 다른 하나를 설명하는 식이 됩니다.

나는 거의 변하지 않는 관성적인 것, 언뜻 보아서는 희미한 미지의 역사부터 들여다보자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니까 인간의 명료한 의식 밖의 역사, 인간이 능동적 존재라기보다 피동적 존재로 놓이게 되는 역사를 들여다보고 싶었던 것입니다. 이 내용이 내가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제1권에서 설명하려고 하는 부분입니다. 1967년 이 1권의 초판을 낼 때는 부제를 “가능과 불가능: 인간의 일상생활”이라고 정했었는데, 나중에 “일상생활의 구조”로 바꾸게 됐습니다. 물론 제목이 중요한 것은 아니겠지요. 연구 대상은 매우 분명했지만, 그 탐구 과정은 불확실했습니다. 공백과 함정도 많았고, 잘못 이해할 여지도 많았습니다. 사실 내가 핵심어로 삼은 무의식, 일상성, 구조, 심층 같은 말도 모호한 것들입니다. 하지만 정신분석에서 말하는 무의식을 연구 대상에 포함시킨 것은 아닙니다. 물론 정신분석의 무의식도 관련이 있습니다. 칼 융은 집단 무의식의 실체를 놓고 대단히 고심했는데, 아마도 그에 대해서 발견해야 할 것들이 있을 것입니다. 사실 이 주제는 엄청나게 광활한 문제이지만, 그중 아주 제한적인 측면 말고는 별로 다루어지고 있지 못합니다. 이 문제는 아직 역사가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는 중입니다.

나름의 연구를 풀어갈 구체적인 잣대가 필요했고, 그에 맞추어 범위를 좁혔습니다. 출발점으로 삼았던 것은 일상생활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전혀 의식하지 못하지만 우리 생활을 지탱해주는 습관 같은ㅡ관행이라고 하면 더 어울릴ㅡ것들입니다.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행동은 수천 가지에 달하지만 아무도 결정할 필요 없이 그것들 스스로 완수됩니다. 사실 이러한 일상적 관행은 우리가 충분히 의식하지 못하는 것들입니다. 내 생각에 인류의 삶은 절반 이상이 일상생활에 묻어서 굴러갑니다. 예로부터 내려오는 수없이 많은 행동이 뒤죽박죽 누적되고 무수히 되풀이되면서 우리 시대까지 이어집니다. 이러한 습관적 행동은 우리가 삶을 영위하도록 도와주기도 하고 옥죄기도 하면서, 우리가 사는 내내 우리를 대신해 결정을 합니다. 이 같은 행동을 유도하는 유인과 충동, 그러한 행동의 전형과 방식, 또 그리 행동해야 할 책임을 살펴보면, 까마득한 옛날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들이 왕왕 있는데 우리가 짐작하는 것 이상으로 오래된 것들이 많습니다. 이처럼 수백 년 전의 과거는 아주 오래된 것이지만 여전히 살아 움직이며 현재로 흘러옵니다. 마치 아마존 강이 엄청난 물줄기에 토사를 실어 대서양으로 쏟아내는 모습과 비슷하지요.

이 모든 것들이 내가 ‘물질생활(vie matérielle)’이라는 편리한 용어로 파악하려고 했던 내용들입니다. 편리한 용어이기는 하지만, 의미 폭이 넓은 다른 용어들처럼 정확한 용어는 아닙니다. 물론 이러한 의미의 물질생활은 능동적으로 살아가는 인간의 삶 중에서 일부에 지나지 않습니다. 인간은 주어진 관행대로 살기도 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활동도 인간의 뿌리 깊은 본성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연구를 시작하는 초반에는 이처럼 능동성보다 피동성이 강한 삶의 한계나 성격을 정확하게 규정하는 일에 얽매이지는 않았습니다. 이러한 삶의 역사는 별로 중히 여기지 않고 살아온지라 일반적으로 잘 인식되어 있지 않습니다. 나는 그와 같은 역사가 차지하는 중량을 보고 싶었고 또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그 역사 속으로 뛰어들어 가까이 다가서고 싶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그 세계에서 나올 때가 다가오지요. 비유컨대, 그 심해 깊은 곳으로 잠수하고 나오는 순간, 우리가 태곳적의 물속에 살고 있구나 하는 강렬한 느낌이 가시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언제부터였는지 알 수 없을 만큼 오래된 역사, 200~300년 혹은 1,000년 전에도 있었을 역사인데, 어느 순간 우리 눈앞을 보면 오늘날에도 옛 모습 그대로 살아 움직이는 역사 속에서 우리가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

※ 다음 역서에서 일부를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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