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9월 30일 금요일

생활과 글 속의 지시(대명)사 ‘그’

매체 중에는 140자 한도 내에 적을 글이 있어 이렇게 적어 봤다.

원문에 대한 호불호를 떠나 잘못 옮긴 글을 보고 삼천포에서 헤매는 흔적을 볼 때마다 책임을 통감한다. 어떤 책에서든 마경을 만나니 에 굴복하면 업을 짓게 되고 를 물리치면 삶이 궁핍해진다. 마경과 대적함이 생계와 모순된 것 또한 마경일 것이다.
마경(魔境)을 가리키는 지시대명사로 ‘그’를 썼다. 마경이 사람을 뜻하는 것은 아니니 여기서 ‘그’가 사람일 리는 없다. 사람이 아니니 ‘사물’ 비스무리한 것이겠지만, 그렇다고 출판가 서적에 널리ㅡ때로 지나치게 자주ㅡ등장하는 사물 지시용 지시대명사 ‘그것’이라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우리말의 지시대명사, ‘그’가 사람이나 동물, 흔히 유정물이라 분류되는 대상에만 쓰는 말은 아니라고 본다.  지시하는 대상의 속성을 전달하려 할 때 그 사물성을 돋보이게 하고 싶으면 ‘그것’이라고 써 좋을 것이다. 하지만 지시하려는 바(그 의미와 심상)가 사물도 아니요 사람도 아닌 그 무엇이라면, ‘그것’보다 ‘그’를 쓰고 싶을 때가 많다. 문법적으로 뭐라 표현해야 될지는 아직 잘 모르겠다. 다만 말하는 이가 듣는 이에게 사람인 듯도 하고 사물인 듯도 하지만 그도 저도 아닌 무언가의 속성을 ‘사람인 양 가리키며 활동성(혹은 주체성, 아니면 상호 작용성)’의 이미지를 부여할 때 이 포괄적인 지시대명사 ‘그’가 활약하는 의미 공간이 상당 정도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다행히 우리말에서 ‘그’가 인칭 대명사 외에도 사물 대명사로도 쓰인다고 정리한 글이 두어 개 보인다.

* * * 

예전에 이런 문장을 다음과 같이 옮긴 적이 있다.
The craftsman summons an immediate image.
장인이라고 하면 곧바로 이미지가 떠오른다.
리처드 세넷이 지은 《장인》에서 프롤로그를 지나 제1장을 시작하는 짧은 문장이다.

이 문장 뒤로 목수의 작업장이 묘사되고, 어느 생물학 실험실의 상황이 묘사되며, 또 어느 오케스트라의 리허설을 주관하는 지휘자의 모습이 묘사된다. 지은이는 목수와 실험실 조교와 리허설의 지휘자를 각각의 문단에서 따로따로 묘사하다가 네 번째 문단을 열면서 하나의 ‘이미지 사슬’을 던져 똑같은 장인의 이미지로 묶는다.

이런 긴ㅡ글의 분량이 아니라 던지는 이미지의 폭에서 긴ㅡ호흡의 문맥에서는 비록 원문에서 부정관사 ‘an’이 쓰였다고 하더라도 우리말에서는 긴 호흡의 문맥을 모두 품을 수 있는 포괄적인 지시사 ‘그’가 가장 어울릴 거라고 봐서 영어의 부정관사를 무시하고 ‘그’라고 옮겼다.

영어란 말에서 쓰는 부정관사의 사전적 의미대로 ‘하나의(혹은 어떤) 이미지가 떠오른다’는 말로 첫 문단을 열 경우 첫 네 문단이 함께 묶이는 이미지 사슬을 망칠 것이요, 신출내기 편집교열인이 제안했던 식으로 ‘이런 이미지가 떠오른다’고 하면 그 입체적인 이미지 사슬 중 첫 소재인 목수의 이미지만을 가리키게 되니 첫 문장의 흡인력이 확 죽어 버릴 것이다.

이런 문맥에서 나를 유혹했던 우리말의 말맛을 좌우하는 지시사 ‘그’의 정체가 앞에서 마경을 가리키고자 했던 지시대명사 ‘그’와 그리 먼 위치에 있지 않다고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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