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7월 25일 월요일

환경 문제와 철학의 전환

※ 다음 자료에서 일부를 발췌: 
클라이브 해밀턴(Clive Hamilton), 《성장숭배》, 7장 환경

신자유주의를 따르는 아둔한 신봉자일수록 부정하려 들겠지만, 신자유주의는 특정한 가치철학에 기반을 두고 있다. 도구적 가치이론은 인간은 그 자체로 독자적인 가치가 있는 존재인 반면, 인간 이외의 세계는 인간의 행복에 보탬이 되는 한에서만 가치가 있다고 주장하는 입장이다. 즉 자연의 세계는 도구로서의 가치밖에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신자유주의는 정확히 말해 일종의 ‘인간 중심적’인 철학이다. 인간에게는 고유한 내재적 가치가 존재한다는 확신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그 같은 인간의 가치를 뒷받침하려고 등장한 논거들은 수없이 많다. (...) 그러나 지금은 인간의 내재적 가치를 논하자는 게 아니다. 환경주의자들이 계속 제기하는 철학적 문제는 자연계의 가치에 대한 것이고, 자연계의 가치에 대한 이들의 대답은 여러 층의 일반 대중에게 강렬한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현대 환경운동이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하는 뿌리 깊은 이유는 여기서 비롯된다. 

신자유주의 사조의 글들을 보면 자연에 대한 도구주의적 사고방식이 세 가지 유형으로 등장한다. 첫 번째 태도는, 환경이 인간에게 가치가 있는 이유는 물리적 자원이 경제적 가치를 주기 때문이며, 따라서 자연의 가치는 시장의 가치로 매겨진다고 생각한다. 이 사고방식에서는 시장에 나오는 상품의 물량을 늘리는 것이 인간의 삶을 향상시키는 일이 되고, 인간의 삶은 그 자체로 가치가 있는 것이다. 이로 말미암아 무제한적인 경제 확대와 환경 개발이 정당화된다. 명백히 이러한 확신은 인간을 자연으로부터 근본적으로 분리하고, 철학과 행동 양면에서 자연을 인간에게 종속시키는 사고방식이다. 이렇게 양자를 분리함으로써 다양한 성격의 대립쌍이 인간과 자연에 투영된다. 생태여성주의자들eco-feminists은 인간세계와 자연세계를 근본적으로 분리하는 태도가 여러 가지로 파생되는 이원론을 품게 된다고 지적한다. 문화와 자연을, 또 이성과 감성을, 또 남성과 여성을 암묵적으로 구분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원론적 세계에서 자연은 여성적이고 종속적이며 또 무질서하고 원시적인 것으로 간주되는 반면, ‘문화’는 남성적이고 우월하며 또 합리적이고 질서정연하다고 간주된다. 따라서 ‘인간과 자연’에 대한 이러한 시각은 인간 중심적일 뿐만 아니라 남성 중심적인 것이 된다.

두 번째의 도구주의적 자연관은 자원을 물리적 변형의 대상으로만 보는 시각과 마찬가지이지만, 물질적인 경제성장의 물리적 한계를 인정하는 태도이다. 이 사고방식은 피상적인 수준에 머무는 것일지라도 생태학의 교훈들을 반영하고 있다. 즉 무제한적인 개발을 우선시하는 정도가 조금 덜한 대신, 세대 간의 공평한 배분과 지속 가능한 산출의 극대화에 중요성을 부여하는 좀 더 장기적인 시야를 취한다. 이 시각 역시 조악한 도구주의적 관점과 마찬가지로, 철저하게 인간 중심적이고 또 인간의 이기적 입장에 머물지만, 교화된 이기주의이다. 이러한 관점이 자원의 한계를 받아들이도록 신자유주의를 연장한 형태인 ‘환경경제학environmental economics’의 철학적 토대를 형성한다. 《녹색경제의 청사진》 같은 데이비드 피어스David Pearce의 저작들이 이러한 세계관의 전형을 이루[며] (...) 자기 파괴적인 충동으로 치닫는 경제성장을 구해내자는 것에 머문다는 점을 말해준다.

세 번째의 도구주의적 자연관은 더욱 완화된 형태인데, 몇 가지 측면에서는 자연환경의 개발이 아니라 보존을 통해 도구적 가치를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예를 들면, 열대우림은 보존하고 벌목을 허용하지 않는 것이 벌목된 목재의 시장가치보다 인간에게 더 많은 가치를 줄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환경철학자 워익 폭스Warwick  Fox는 보존주의자들preservationist이 유전자원을 보존하려는 목적은 네 가지라고 말한다. 즉 미래의 사용, 과학적 연구, 위락(레크리에이션), 심미적 가치이다. 환경경제학자들은 이러한 환경의 ‘가치’를 받아들여 ‘존재가치existence value’, ‘선택가치option value’, ‘유산가치bequest value’와 같은 새로운 유형의 경제적 가치로 표현했다. 자연의 이러한 속성들에 가격을 매기기 위해 새로운 기법들이 개발되었는데, 잠재소비자들이 어느 자원을 이용하지 않고 보존하기 위해 기꺼이 지불할 의사가 있는 최대금액인 ‘최대지불의사willingness to pay’를 수치화하기 위한 조사방법(소위 조건부 가치측정법contingent valuation method)이 그중의 하나다. 전통적인 경제학 교과서와 마찬가지로 이러한 사고방식은 자연환경을 서로 다른 선택적 용도를 가지고 있는 일정한 상품들의 조합으로 가정하는 것에서 출발하는데, 이 상품들을 보호하느냐 이용하느냐에 따라 발생하는 도구적 가치는 계산되는 숫자에 의해 그 크기가 결정된다.

환경주의의 출발점은 일체의 도구주의적 태도에 대한 직관적인 거부다. 환경주의는 자연세계는 도구적 가치가 아니라 고유한 내재적 가치가 있다는 입장을 취한다. 달리 말하면, 환경의 가치는 인간이 환경에 가치를 부여하느냐 마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 아니며, 나아가 환경이 인간의 경제적 복지에 이익이 된다는 인간의 판단과는 아무 상관도 없다는 것이다. 자연의 고유한 내재적 가치를 주장하는 수많은 근거들 가운데는 자연은 생존과 번식이라는 그 자신의 목적을 위해 노력하는 유기체라는 생각, 또 감각이 있는 존재는 모두 도덕적 고려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는 동물해방의 윤리도 등장했다. 가장 큰 파장을 미친 주장 중 하나는 알도 레오폴드Aldo Leopold의 “대지의 윤리land ethic”로서, 그 논지는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올바르다는 것은 생물 공동체의 온전성과 안정성, 그리고 아름다움을 보존하는 속성이 있다는 것을 말한다. 그렇지 않은 모든 것은 잘못된 것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자아초월적 생태학transpersonal ecology’의 입장은 자아 관여와 편협에 빠진 존재들만이 자신과 자연을 별개라고 상상한다는 인식, 또 개인의 경계를 넘어서 자아를 확장하면 반드시 사람의 의식과 관심의 토대가 자연계로 확장될 수밖에 없다는 생각에 중심을 둔다. 단순한 교화적인 접근은 충분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현실에서 대중과 유리되기 쉽다. 진정한 과제는 환경윤리 차원의 문제를 넘어서는 생태적 의식을 구축하는 일이다. 자아초월적 생태학은 ‘생태계에 참여한다는 의식’의 철학적 주장이며, 따라서 자연계와 맺고 있는 우리의 관계를 단지 합리적으로만 평가하는 자세를 넘어서는 것이다. 이 철학은 “무엇이 나의 정체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것이기에 자연에 대한 이해와 동시에 개인의 정체성을 변혁한다는 대의명분을 주장하고 있다. (...) 

우리가 성장의 망상체계와 개인 영역의 그 단짝인 소비지상주의가 행하는 정신적 기능을 간파하게 되는 대목이 바로 이 점이다. 경제성장과 물질적 취득에 대한 집착은 필연적으로 의식의 침몰을 초래한다. ‘쇼핑몰의 명상’에 빠져드는 의식은 결코 자연의 고유한 가치를 품어 안을 만큼 확장될 수가 없다. 그러한 의식이 바라보는 자연은 소비할 상품을 만드는 데 쓸 자원 채굴장이나 권태에 물린 상품을 내다버릴 폐기장일 뿐이다. 시장의 합리성은 세계를 이런 식으로 보도록 끊임없이 우리를 몰아붙인다. 시장의 합리성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그 보편타당성을 주장하지만, 시장은 시대를 초월해 보편적으로 합리적인 것이 결코 아니다. 

(...) 

물론 이것은 정확히 근대경제학의 오류이고, 이러한 근대경제학의 특징은 때때로 ‘자폐적’이라고 불린다. 관찰자와 관찰대상의 날카로운 구분은 경제학에서 ‘합리적인 경제인’이라고 불리는 경제 행위자가 상품들로 구성되는 물질적 세계와 대면하는 전형적 상황으로 표현된다. 그 행위자가 대면하는 자연은 그 상품 세계처럼 ‘자원들’로 구성되어 있는 물리적 세계다. 이 세계에 그가 작용을 가한다. 목적은 인간의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해서다. 여기서 합리적인 경제인이라는 이 인간이 세계에 참여한다는 의미는 그 어디에도 없다. 의미로 가득한 세계를 설정하는 다른 방식의 자의식과는 대조적으로 이 인간이 사는 세계의 본질은 죽어 있는 대상이다. 

(...) 진정한 환경문제는 그릇된 자연의 이용이 경제에 야기하는 문제가 아니라 인간의 심리에 야기하는 문제이다. 이 숙제는 자연세계를 ‘생명의 세계로 되돌리는 일’이고, 그렇게 하려면 무엇보다 시장 안에 갇힌 철학에서 벗어나는 것이 필요하다.

※ 다음 자료에서 일부를 발췌: 
클라이브 해밀턴(Clive Hamilton), 《성장숭배》, 7장 환경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