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4월 16일 토요일

발췌: CMEC 2권의 제3장

도서명: 《물질문명과 자본주의》2권 “교환의 세계”
페르낭 브로델 지음(주경철 옮김), 1996년 까치 펴냄.

※ 발췌식 메모로 읽어가기.

■ 제3장. 생산: 자기 영역을 벗어난 자본주의

(...) 산업화 이전 시기에도 어떤 경제활동 중에는 우리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간에 불가피하게 이 말[자본주의라는 말]을 쓸 수밖에 없으며 그 외에 다른 어떤 말도 맞지 않는 {것들: 경제활동들}이 있다. 그러한 경제활동에 대해서 산업적인 “생산양식”이라는 말을 할 수는 없겠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고전적인 시장교환과 같은 것이라고 말할 수도 없다 (사실 나는 이 산업적인 ‘생산양식’이 자본주의가 가진 핵심적이고도 필수불가별한 특성이라고는 믿지 않는다). (...)

자본 투자와 {자본의 고도 생산성}의 영역으로 이해해왔던 자본주의는 이제 경제생활 속에 다시 위치를 잡아야 한다ㅡ이때 자본주의는 그 경제생활 전체와 완전히 같은 범위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Capitalism, having been identified as the realm of investment and of {a high rate of capital formation}, must next be related to economic life, with which it was not coterminous. ( 출처: 구글도서 영역본 )
자본주의를 위치시키는 영역은 두 개가 있다. 그 하나는 자본주의가 장악하여 편하게 거주하고 있는 곳이며, 또 하나는 자본주의가 옆길에서 새어들어올 뿐이고 지배적이지 못한 곳이다.
There are thus two zones in which it can be located: its native soil so to speak, the sector in which it was completely at home; and another sector which it entered only obliquely, insinuating itself into this zone without ever completely dominating it. (출처: 전과 같음)
19세기 산업혁명이 일어난 후 자본주의산업 생산을 장악하여 거대한 이윤을 확보하기 전까지는, 자본주의는 유통의 영역에서만 제자리를 찾았다. 물론 산업혁명 이전 시기에도 때로는 자본주의가 다른 영역에서{으로?} 소풍가는 정도 이상의 일을 하기도 했고, 반대로 유통 영역이라고 해도 그것 전체에 관심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그중 일부만 통제하려고 했고 실제로 일부만 통제할 수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Until the industrial revolution of the 19th century, when capital moved into industrial production, now newly-promoted to the rank of large profit-maker, it was in the sphere of circulation, trade and marketing that capitalism was most at home; even if it sometimes made more than fleeting incursions on to other territory; and even if it was not concerned with the whole of circulation, since it only controlled, or sought to control, certain channels of trade. (출처: 전과 같음)
(325-326쪽)

3.1. 자본, 자본가, 자본주의

3.1.1. “자본”이라는 말

[12세기~18세기 사이 자본이란 말의 여러 가지 쓰임을 고찰한다]

3.1.2. 자본가, 자본가들


(...) 이 자본가라는 말은 대체로 돈을 가지고 있으면서 그것을 사용하여 더욱 많을 돈을 벌려는 사람을 가리켰다. 
(...) 이미 본 것처럼 그 말[자본가라는 말]은 결코 우호적으로 쓰이지 않았다. (...) 프랑스 혁명이 시작된 후에는 어조가 더욱 강해졌다. 1790년 11월 25일에 국민의회의 연단에서 퀴스틴 백작(Adam Philippe Custine: 1740-1793. 프랑스의 장군으로 1789년 삼부회에 귀족 대표로 참여했다)은 자기 열정에 취해서 이렇게 말했다. “모든 종류의 귀족제를 깨부순 우리 국민의회가 자본가들이라는 귀족 앞에서는 무릎을 꿇어야 할 것인가? 자본가들이란 단지 그들의 부를 늘릴 수 있는 곳이면 어디든 조국이라고 생각하는 코즈모폴리턴이 아닌가?”[주41] (335쪽)

3.1.3. 자본주의: 최근에 나온 말

(...) 푸루동은 가끔 이 말을 썼는데, 그때마다 정확한 뜻을 사용[했다]: “토지는 아직도 자본주의의 성채이다”ㅡ그리고 바로 이 말이 그의 중요한 테제 중의 하나이다. 그릭 그는 이 말을 아주 훌륭하게 정의했다: “자본이 소득의 근원이지만, 일반적으로 자신의 노동을 통해서 자본을 움직이게 만드는 사람들이 그 자본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회적, 경제적인 체제.”[주47] 그러나 10년 뒤인 1867년에도 마르크스는 이 말을 알지 못했다.[주48]
Proudhon occasionally uses it, correctly: ‘Land is still the fortress of capitalism’, he writesㅡand indeed this was one of his major theses. And he defines it very well: ‘Economic and social regime in which capital, the source of income, does not generally belong to those who make it work through their labour.’[주47] Six years later however, in 1867, the word was still unknown to Marx.[주48]
사실 이 말은 20세기 초에 가서야 완전히 힘을 얻고 뛰쳐나왔다. 그것은 사회주의에 대한 반대어로서 정치 논쟁의 와중에서 일어난 일이다. 이 말이 학문의 세계에 등장한 것은 베르너 좀바르트의 《근대 자본주의》(1902년 초판)라는 대저에 기인한다. 당연한 일이지만 마르크스가 사용하지 않았던 이 말은 곧 마르크스주의 모델에 흡수되었다. 그리하여 《자본》의 저자[마르크스]가 구분한 중요한 역사의 세 단계를 흔히 노예제, 봉건제, 자본주의라고 부르게 되었다.

따라서 이 말은 정치적인 단어였다. 이 말의 운명이 모호한 것도 이런 까닭이다. 샤를 지드, 칸바스, 셀리그먼, 카셀과 같은 20세기 초의 경제학자들은 오랫동안 이 말을 사용하지 않았다. 《정치과학사전》에는 제1차 세계대전 이후에 가서야 이 말이 실렸고, 《브리태니커백과사전》에도 자본주의라는 항목은 1926년판에 처음으로 실렸다. 《아카데미프랑세즈사전》에는 1932년에 이 말이 등장했으나 그 뜻은 우스꽝스러울 정도였다: “자본가들의 총체(ensemble des capitalistes)” (...)  (336-337쪽)

(...) 나는 오늘날의 자본주의와는 달리 지난날의 자본주의는 경제생활의 좁은 상층부만을 차지하는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그렇다면 이것을 어떻게 사회 전체에 확대된 “체제(système)”로 이야기할 수 있겠는가? {그것: 지난날의 자본주의}은 그 자체를 둘러싸고 있는 사회적, 경제적인 총체와 비교하면 상이하고 낯설기까지 한 독립된 세계이다. {“자본주의”라고 정의되는 것은 나중에 발전해 나올 새로운 자본주의적인 형태와 비교해서만이 아니라, 위에서 말한 사회적, 경제적인 총체와 비교해서 이루어져야 한다}. 즉 거대한 비율을 차지하고 있는 그 ^비(非)자본주의^와 비교해야 하는 것이다. “진정한” 자본주의는 19세기에 가서야 나타나는 것이라는 이유를 들면서 이와 같은 지난날의 경제의 이중성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는다면, 자본주의의 옛날 위상이라고 부를 수 있는 이 경제를 분석하는 데 핵심적인 중요성을 가지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게 된다. 그 자본주의가 우연히가 아니라 어떤 곳을 선택해서 자리 잡았다는 것은 ^이런 곳만이 자본의 재생산에 유리한 곳이[었]기 때문이다^.
I have already indicated that capitalism in the past (as distinct from capitalism today) only occupied a narrow platform of economic life. How could one possibly take it to mean a 'system' extending over the whole of society? It was nevertheless a world apart, different from and indeed foreign to the social and economic context surrounding it. {And it is in relation to this context that it is defined as 'capitalism', not merely in relation to new capitalist forms which were to emerge later in time}. In fact capitalism was what it was in relation to a ^non-capitalism^ of immense proportions. And to refuse to admit this dichotomy within the economy of the past, on the pretext that 'true' capitalism dates only from the 19th century, means abandoning the effort to understand the significanceㅡcrucial to the analysis of that economyㅡof what might be termed the former topology of capialism. If there were certain areas where it elected residenceㅡby no means inadvertentlyㅡthat is because these were the only areas which favoured the reproduction of capital.
(336-339쪽)
3.1.4. 자본의 실체

3.1.5. 고정자본, 유동자본

3.1.6. 자본에 대한 계산

(...) 엘리스 헨슨 존스는 1774년의 뉴저지, 펜실베이니아, 델라웨어 지방의 재산, 달리 이야기하면 자본 스톡을 어느 정도 타당성 있게 계산했다. 그의 연구는 우선 유언장들을 수집하여 거기에 드러난 재산을 연구하는 것으로 시작하고 그 다음에는 유언장 없이 상속된 재산을 추산하는 것이었다. 그 결과 (...) 자본재(C)의 액수는 국민소득(R)의 서너 배에 달한다. [즉] 이 경제는 즉각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자산으로서 3-4년의 국민소득에 해당하는 부를 보유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케인스 역시 1930년대를 분석하면서 C=4R이라는 비율을 이야기했다. 이것은 과거와 현재가 어느 정도 상응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

[1750년 이전의 유럽에 대한 쿠즈네츠의 추산 (...)
조자본과 순자본의 격차가 이 옛날에는 아주 컸다(즉 새로 생산된 자본의 마모가 매우 빨랐다)는 서술 등.]

결국 쿠즈네츠의 다음과 같은 언급은 전적으로 옳다고 생각한다. “과연 1750년 이전 시대에 (...) {^어떠한^ 지속적인 고정자본이라는 것ㅡ아마도 “지속적인 고정자본이라고 할 만한 것”}이 형성된 것이 있는가? 그리고 물질적으로 오래 지속될 수 있는 자본재라고 하더라도 곟속해서 수리(내지 대체)를 필요로 해서 그것이 원래의 전체 가치 중 많은 부분을 잠식해버리는 일이 허다한 형편인데, 과연 자본재가 대량 축적된 적이 있는가? (...) ^고정^ 자본 이라고 하는 개념은 근대 경제와 근대 기술에 의해서만 생산된 것이다.”[주72] 이 말을 [약간 과장하여 표현한다면] 산업혁명은 무엇보다도 ^고정^자본의 변화라고 하는 말과 같다. (...)  (345-350쪽)

3.1.7 영역별 분석

3.2. 토지와 돈

3.2.1. 자본주의의 전제조건
3.2.2.농민층의 수, 타성, 생산성
3.2.3. 궁핌과 생존
3.2.3. 장기지속이라고 해도 변화가 없는 것은 아니다
(...)

3.3. 자본주의와 전(前)산업

3.3.1. 4중의 모델(위베르 부르쟁의 모델)

(...) 부르쟁이 생각하기에 15-18세기에 모든 산업활동은 그가 구분해놓은 네 가지 카테고리 중 어느 하나에[속한다].

첫 번째 카테고리: 무수히 많은 소규모의 가족적 작업장들이 "성운처럼" 모려 있는 형태. 대개 매스터 한 명에 두세 명의 저니맨 그리고 한두 명의 도제로 구성된 이 작업장은 그 자체가 하나의 가족과 같았다.  (...) 이 카테고리에 들어가는 것으로는 구두 수선인이나 구두 제조인의 노점, 세밀한 도구와 희귀한 재료를 갖추고 있는 금은 세공인의 가게, 내부가 여러 물품들로 미어지게 차 있는 철물공의 작업장, 또는 레이스 직공이 일하는 공방(이들은 자기 집 문앞에 앉아서 짜기도 하고 공방에 들어가서 일하기도 한다) 같은 것들이 있다. (...)

이와 같은 수공업적인 전산업의 핵심적 특징은 이것들이 절대 다수를 차지했다는 것이다. 바로 이 점이 동시에 자본주의적인 혁신을 거부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 1838년에만 해도 제노바 주변의 시골 지역에서는 벨벳 직조업이 존재했다. 프랑스에서 오랫동안 우세를 지키던 수공업적 산업이 근대 산업에 밀려나게 된 것은 1860년경의 일이다.[주226]

두 번째 카테고리: 이것은 분산되어 있지만 내부적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는 작업장들이다. 위베르 부르쟁은 이것을 ^분산적 공장(fabrique disséminée: 이 용어는 G. 볼페에서 차용한 것...)이라고 명명했다. 나는 차라리 ^분산적 매뉴팩처(manufacture disséminée)라고 하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18세기의 르 망 주변에서 생산하던 평직천이나, 그보다 수백 년 앞선 빌라니 시대인 1350년경 피렌체의 아르테 델라 라나(피렌체 시와 반경 50여 킬로미터 내의 주변에서 6만 명 정도가 모직물업에 종사하고 있었다)가 그와 같은 예이다.[주227] (...)

[이처럼 분산된 작업장들의] 생산작업을 조정하고 중재하고 총괄하는 사람은 기업가 상인들이다. 이들은 원재료를 선대해주고, 그것을 가지고 방적으로부터 방직, 축융, 염색, 전모를 하도록 하는 한편, 마무리 공정은 스스로 [맡았다]. 그러면서 임금을 지불하고 종국적으로 완제품을 가까운 시장이나 원격지 시장에서 판매하여 수익을 누린다.

이런 분산적 공장은 중세부터 형성되어 있었다. 그리고 직물 분야에서만이 아니라 “아주 일찍부터 칼, 못, 철사 등의 제조업에서도 이런 방식의 작업장이 형성되었는데, 노르망디나 샹파뉴 같은 곳에서는 오늘날까지도 이런 분야들이 원래의 성격을 유지하고 있다.”[주228] 이런 점은 15세기 이후 쾰른 주변의 금속공업, 16세기 리옹 주변이나 카모니카 계속에서 브레시아까지의 지역에서 볼 수 있는 철물공업부터 무기산업에 이르는 여러 종류의 산업활동도 마찬가지였다.[주229] 이 모든 영역에서는 언제나 그렇듯이 완제품이 생산되어 상업활동의 대상으로 넘어갈 때까지 여러 작업들이 연이어져 있었다.

세 번째 카테고리: 이것은 “집중적 공장(fabrique agglomérée)”으로서 분야와 지역에 따라 다르지만 대개 느즈막이 형성되었다. 그러나 14세기에 등장한 수력을 이용한 철공소는 이미 집중적 공장에 속했다. 여기에서는 여러 공정이 한 곳에 집중되어 있었다. 양조 공장, 피혁 공장, 유리 공장 등도 마찬가지다. ^매뉴팩처^ 역시 (...) 이 카테고리에 넣는 것이 타당하다. 특히 18세기 후반에 전 유럽에 걸쳐 매뉴팩처가 증가했는데 (직물업 매뉴팻처가 대다수이기는 하지만) 온갖 종류의 것들이 다 생겼다. [이 집중적 공장의] 특징은 꽤 큰 건물의 한 곳에 노동력을 집중시킨다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노동에 대한 감시가 가능하고 분업이 발달하게 되어서, 결국 생산성이 제고되고 생산품의 품질이 개선되었다.

네 번째 카테고리: 기계류를 갖추고 있고 수력과 증기력을 사용할 수 있는 공장이다. 마르크스의 용어로는 이것이야말로 문자 그대로의 “공장(fabrique)”이다. 사실 18세기에는 ^공장^과 ^매뉴팩처^라는 단어는 흔히 혼용되고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두 단어를 구분하여 쓸 것이다. 이 점을 명확히 이야기하자만 기계화된 공장은 이 책이 다루는 시기를 벗어난 것으로서 산업혁명을 거치고 난 19세기의 이야기이다. 그렇지만 아그리콜라의 「금속론」(1555)에 나오는 삽화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은 중유럽의 ^근대적인^ 광산은 기계화된 공장의 중요한 예로 볼 수 있을 것이다. (...)

이상과 같은 네 개의 카테고리나 유형은 대개 연차적으로 나타났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의 구조가 다른 구조로 급작스럽게 대체된 것은 아니다.”[주234] 특히 매뉴팩처에서 공장으로 자연스럽게, 논리적 귀결로서 이행한 것은 아니다ㅡ이 점에서는 마르크스보다 좀바르트가 옳았다.[주235] (...) (424-429쪽)

3.3.2. 부르쟁의 도식은 유럽 이에외도 타당한가?

3.3.3. 농업과 전산업은 뗄 수 없는 관계다[관계였다]

(...) 전산업은 그 독창적인 성격에도 불구하고 (...) 18세기 이전에는 [농업과 완전히 분리되어 있지 않았다]. 도처에 널리 퍼져 있는 농업이 전산업과 병행하고 때로 [농업이 전산업을 집어삼켰다.] 심지어 가족이나 마을 위해서만 일하는[시장에 내다 팔지 않고 자체 소비하는/역주], 따라서 오직 사용가치만 가지는 "풀뿌리" 산업이라고 할 만한 것도 존재했다. (...)

(...) 유럽 어디에서든지, 읍, 마을, 농가마다 겨울이 오면 거대한 “산업” 활동이 농업 활동을 대신했다. (...) 1780년경에 오스나브뤼크 주변 지역에서는 농민과 그의 처, 아이들, 심부름꾼들이 아마포를 짰다. 이것은 여분으로 하는 일이므로 소득이 얼마인가는 상관이 없었다! (...) 16세기에 리에주의 탄광에서 일하는 광부들도 매년 8월에는 추수를 하기 위해 광산을 떠났다.[주254] 어느 직종이든지 이 규칙에는 거의 예외가 없었다. 예를 들면 1601년 6월 1일자 피렌체의 한 상업 서한은 이렇게 이야기한다. “양모 판매가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 그렇지만 이것은 조금도 놀랄 일이 아니다. 사람들이 시골로 가버려서 노동자가 모자라기 때문에 일이 줄어든 것이다.”[주255] 로데브, 보베, 혹은 안트워프와 같은 모든 산업 도시에서는 여름이 오면 농사일이 모든 것을 좌우했다. 그러다가 다시 겨울이 돌아오면 수공업이 가장 중요한 일이 된다. (...)

물론 이와 반대되는, 아니면 적어도 상이한 예들도 찾아볼 수 있다. (...) 예를 들면 1723년 루앙에서는 “[이전에는] 추수 때에 자기 일을 멈추곤 했던 시골 노동자들이 ...이제는 더 이상 그렇게 하지 않는다. 이제는 나사나 다른 직물을 계속 짜는 것이 더 이익이 크기 때문이다.” 그 결과 “밀을 거두어들일 사람이 모자라서 곡물이 밭에서” 싹을 틔우려고 할 정도였다. 그래서 고등법원은 “밀과 다른 곡물을 추수하는 동안에는” 매뉴팩처 일을 중단시키려고 하기도 했다.[주256]  (...) 장인들이 1년에 이하는 날이 120일이었다는 보방의 계산을 잊지 말자. 그 나머지 날들은 일하지 않는 축제일ㅡ축제일은 결코 적지 않았다ㅡ과 계절에 따라 꼭 해야 하는 일들을 하는 날들이었다.

따라서 농업 및 공업 활동[은 서로 잘 분리되어 있지 않았고, 분리되었다고 해도 느즈막이 이루어진 일이다]. (...) 그래서 포도주를 생산하는 아르부아 주변 지역에서는 노동력 부족 때문에 직물공업이 들어설 수 없었다.[주260] 17세기에 대단히 활발하게 직조업이 발달했던 레이덴도 주변 농촌지역이 워낙 부유했던 까닭에 그곳으로 직물업을 확대해갈 수 없었다. 그래서 18세기에 [아마도 ‘직물업’이 이 문장의 주어일 것이다] 반드시 노동력을 확보해야만 {하게 되었을  때: 했을 때}, 이 도시에서 ^멀리 떨어진^ 가난한 지역에 의존해야 했다. 역설적이게도 이런 지역이 네덜란드 근대 직물업의 대중심지가 된 것이다.[주261] (433-436쪽)

3.3.4. 공업: 신의 섭리

[16세기 영국의 노퍽 해안지역에서] 남자들은 북해나 심지어 아이슬란드에까지 나가서 청어, 고등어 등속을 잡았다. 그래서 대단히 많은 여성 인력이 염장 작업장에서 생선에 소금 치는 일을 했지만, 문제는 고기잡이 때가 아니면 놀게 되었다는 점이다. 반(半)실업 상태에 있는 이 인력을 기대하고 상인 영업주들이 몰려왔고 그리하여 새로운 산업이 자리 잡게 된 것이다.[주263]

그래서 수공업 방식의 전산업을 이끈 것은 대개 가난과 관련이 있다. (...) 영국의 하이랜드에서도 농민들은 땅만 가지고는 먹고살기가 힘들었기 때문에 광부나 직공이 되어서 역경을 헤쳐나갔다.[주266] (436-437쪽)

3.3.5. 노동자의 불안정성

3.3.6. 시골에서 도시로, 도시에서 시골로

3.3.7. 선구 산업이라는 것이 존재하는가?

3.3.8. 상인과 길드

우리는 다양한 맥락 속에서 산업 활동을 살펴보았다. 이제 남은 문제는 여기에서 자본주의가 어떤 위치를 차지하느냐를 결정짓는 것인데,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자본주의는 무엇보다 도시 상인의 자본주의다. 그러나 상인, 혹은 대상인, 경영인 등도 처음에는 ^길드적인(corporatif)^ 질서 속에 편입되어 있었다(...). 상인과 장인은 같은 조직망 속에 위치하게 되었고 또 거기에서 완전히 자유롭게 벗어나온 적이 없었었다. 그 때문에 모호성과 갈등이 일어나게 되었다.

^길드(corps des métiers)^[를 두고] ‘corporations’이라는 단어가 마구잡이로 쓰이고 있지만, 역설적이게도 [곧 뒤따라 나오는 ‘등장하다’는 술어의 주어는 아마도 ‘corporations’일 듯하다] 처음 정식으로 등장한 것은 1791년에 길드를 해체하는 르 샤플리에 법[역주*]에서였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길드는 12세기부터 15세기 사이에 유럽 전체에서 발달했다. (...) 일부 도시들은 길드에 사로잡혀 있는 반면, 다른 도시들은 ^자유로웠다^. 파리와 런던 같은 큰 도시는 두 개의 길드 구역으로 나뉘기도 했다. 서양에서 길드의 전성기는 15세기에 지나가 버렸다. (...)
[역주*] 르 샤플리에 법: 프랑스 혁명기였던 1791년 7월 4일에 르 샤플리에가 상정하여 통과시킨 법안으로서 길드제를 해체한다는 원칙에 따라서 같은 직종의 사람들 사이의 결사와 연합을 금지[하는] 내용이다. 경제적 자유주의에 입각한 이 법의 주요 내용은 19세기 후반까지 적용되었다. 한편 이 법의 입안자의 르 샤플리에는 변호사 출신으로 혁명의회에 참가하여 ...했으나 후에 처형되었다.
길드의 전성기에는 상거래, 노동, 생산의 태반을 길드가 장악했다. 그러다가 경제생활과 시장이 발달하고 분업이 진척됨으로써 새로운 영역이 창출되거나 기존 영역이 분할되자 당연히 영역 싸움이 일어나게 되었다. [그와 동시에] 이와 같은 발달을 따라가기 위해서 길드의 수가  증가했다. 1260년 파리에는 101개의 길드가 파리 시장(市長: prévots des marchands)의 엄중한 감시를 받고 있었[다]. [길드가 100여 개에 달했다는 사실은] 이미 전문화가 뚜렷하게 진행되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벌들이 분봉하여 새 집을 짓듯 새로운 길드들이 만들어졌다. (...)

13세기의 발전은 이와 같이 분업이 정착되고 크게 진척되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러나 [그로 인한 경제발전]은 그렇지 않아도 상업의 성장으로 위험에 빠진 길드 구조 자체를 위협하게 되었다. 이 격렬한 대립 속에서서 자연히 도시 권력의 쟁취를 놓고 내전이 벌어졌다. 이것이 독일 역사가들이 말하는 춘프트혁명이다. 이것은 길드가 도시 과두귀족에 대항하여 싸운 것을 말한다. 이것은 지나치게 단순한 도식이지만, 하여튼 여기에서 우리가 읽을 수 잇는 점은 상인들과 장인들 사이에 연합과 대립이 반복되면서 투쟁이 지속되었다는 점이다. (...) 상인과 길드 사이에 평등한 협력 관계는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상인들은 (자본주의가 그렇게 했다고 말하지 못하더라도) 노동시장을 정복하고 경제의 우월성을 확보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길드의 소명은 같은 직종의 사람들 사이에 합의를 이루고 일상생활에서 일어나는 다른 집단 사람들과의 자잘한 분쟁에서 길드 구성원들을 보호하는 것이다. 길드는 특히 도시 시장을 엄중히 감시해서 각각의 길드가 자신의 몫을 지키도록 했다. 그것은 고용과 이윤의 안정을 의미하며, 실제로는 특권에 다름아닌 "자유들"을 의미했다. 그러나 여기에 돈, 화폐경제, 원거리 무역ㅡ즉 간단히 이야기해서 상인ㅡ이 개입하기 시작하는데, 그것은 결코 단순한 것이 아니다. (... 길드 사이의 부익부 빈익빈, 길드 내에서의 부익부 빈익빈, 부자의 거리와 빈자의 거리가 나뉘는 현상 등에 대한 언급...) [보통 사람들의 상층에서] 한무리의 사채업자들과 밀라노, 베네치아, 제노바, 피렌체 등지의 상인들이 두각을 드러내고 있었다. 상인과 점포를 갖춘 수공업자들(...)이 섞여 있는 이 체제는 그 상층부에 이미 소(小)자본주의(micro-capitalism)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닐까? 수많은 불확실성을 고려할 때 그렇다고 단언할 수 있을 정도는 아니지만 그럴 가능성은 매우 크다.[주309]

어쨌든 돈이 이미 모습을 드러냈고 벌써 축적의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었으며 또 일단 축적되면 자기 역할을 할 수 있었다. 불평등한 투쟁이 시작되었다. (...) 피렌체에서 아르티 마조리(Arti Maggiori: 대규모 길드)는 점차 대상인 수중에 들어갔고, 아르티{길드를 뜻하는 듯} 체제 자체가 이제는 노동 시장을 지배하는 수단밖에 되지 않았다. 이 뒤에 숨겨져 있는 조직이 있는데[,] 이것을 역사가들은 선대제라고 부른다. 새로운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446-450쪽)

3.3.9. 선대제

선대제는 유럽 전체에 걸쳐 발전한 현상이[다]. (...) 선대제라는 생산 조직에서 상인은 (...) 수공업 장인에게 원재료와 임금의 일부를 미리 선대해주고, 나머지 임금은 완제품을 받을 때 지불한다. 이런 체제가 등장한 것은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이야기하는 것보다 훨씬 앞선 시기인 13세기의 경제 팽창기일 것이다. 1275년 6월에 파리 시장이 “직물상이 일하라고 맡긴 견사를 견직공들이 담보로 잡히거나 파는 행위를 금하여 이를 어길 경우 추방[한다]”[주310]는 결정을 내린 것을 달리 어떻게 해석하겠는가? (...)

이러한 가내 노동 체제에서는 길드 매스터 역시 대개는 임금노동자에 불과했다. 상[인은 먼 곳에서 원재료를 수입해서 공급해주었고 (...) 판매와 수출을 담당했기 때문에, 매스터로서는 이런 상인에게 의존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장인들의 모든 생활 영역이 침범당하며, 길드 체제는 비록 겉모습은 유지된다고 해도 사실은 무너져가고 있었다. 상인은 자신의 서비스를 제공하면서 그가 선택한 활동들을 종속시켜 나갔다. [이러한 상인의 활동이] 철공, 직조, 혹은 조선 등 아주 다양한 분야에 걸쳐 있었다.

(...) 그렇지만 [그와 같은 상인의] 거미줄이 모든 것을 포괄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대단히 광범위한 지역에서는 생산이 상인의 직접적인 지배에서 벗어나 있[었]다. (...) 18세기에도 아직 대상인의 지배를 받지 않고 있던 트루아의 아마포 제조공도 그렇다. 그리고 다른 많은 지역에서는 19세기까지도 그랬다. (...) (450-455쪽)

3.3.10 독일의 선대제

3.3.11. 광산과 산업자본주의

독일의 광산 또는 중유럽(...)의 광산에서는 자본주의를 향한 결정적인 발걸음을 떼었다. 여기에서는 사실 상업 체제가 생산을 장악하고 [생산을] 스스로 재조직했다. 이 영역에서의 혁신은 15세기 말에 이루어졌다. 이 결정적인 시기에 광산이 처음 만들어졌다든가 광부라는 직종이 처음 나타났던 것은 아니지만, 이때 채굴 및 노동의 조건들이 크게 변화되었던 것이다. (...)

3.3.12. 신대륙의 광산들
3.3.13. 소금, 철, 석탄
3.3.14. 매뉴팩처와 공장

대부분 전(前)산업은 수공업과 선대제라는 기초 단위가 무수히 많은 형태로 이루어진다. 이러한 분산된 조직들 위로 보다 자본주의에 가까운 ^매뉴팩처^와 ^공장^이 솟아올라 있다. 이 두 단어는 서로 혼용되고 있지만, 역사가들은 마르크스를 따라서 매뉴팩처는 수작업을 하는ㅡ특히 직물업에서ㅡ수공업 방식의 노동력이 집중해 있는 곳을 지칭하고, 공장은 광산, 야금업, 조선소에서 이미 사용하고 있는 바와 같은 시설과 ^기계^를 사용하는 곳을 지칭하는 것으로 구분했다. (...)

3.3.15. 아브빌의 반로베 가문
3.3.16. 자본과 부기
3.3.17. 산업 이윤에 관하여

(...) 그러면 우리는 왜 자본이 농업 분야에서 단지 지대수취에만 관심을 두었는가, 왜 변화중인 전산업의 세계가 자본가들에게는 덫이나 구렁텅이밖에 되지 못했는가, 왜 자본가들은 이 분산된 활동 영역의 외곽에 머무르려고 했는가를 이해하게 될 것이다.

3.3.18.

3.4. 수송과 자본주의적 기업

3.5. 다소 부정적인 결론

(...) 몇 가지 예외들이 있지만 자본가들ㅡ다시 말해서 다양한 활동을 무차별적으로 하던 “대상인들”ㅡ은 생산에 전적으로 참여[하지 않았다]. 그들은 결코 대지에 두 발을 굳건히 뿌리박은 지주가 아니었다; 그들이 간혹 지대수취인인 경우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들이 진짜 이익을 얻고 신경을 쓰는 곳은 다른 곳이다. 이들은 또 자기 일에 갇혀 있는 수공업 작업장의 주인이나 수송업 경영자 같은 사람이 아니었다. 이러한 사업가들 중에서 누군가가 배를 한 척 소유하든가 혹은 배의 일부 지분을 소유하고 있었다면, 또 선대제를 가까이에서 통제하고 있었다면, 그것은 참된 그의 모습과 관련을 가질 때에 한정되어서의 일이다: 그의 참된 모습이란 시장, 거래소, 상업망, 긴 교환의 연결망 등에서 찾을 수 있다. 다시 말해서 분배야말로 이익을 내는 참된 분야인 것이다.

(...) With a few exceptions, the capitalist, that is, in this period the 'important merchant' with many undifferentiated activities, did not commit himself wholeheartedly to production. He was practically never a farming landowner with feet firmly planted in the soil; while he was often a rentier owning land, his real profits and concerns lay elsewhere. Nor was he the master of a craft workshop wedded to his trade, nor a transport entrepreneur. Whenever one of these businessmen owned a boat or shares in a boat, whenever he controlled a putting-out system, it was always as a corollary of what he really was: a man of the market, the Stock Exchange, of the networks and long chains of commers. Above all a man in distribution, marketingㅡthe sector in which real profits were made.

(...)

간단히 말해서 자본주의가 자기 영역이 아닌 곳에 침투한 것은 그 자체로는 정당화가 안 된다. 단지 상업의 필요성이나 이익에 따라 그렇게 할 필요가 있을 때에만 생산에 손을 댔다. 자본주의가 생산 영역에 침입하는 것은 기계 사용이 생산의 조건들을 변화시키서 산업도 [이윤을 확대할 수 있는 영역이] 된 산업혁명기에 가서야 일어난다. 이때 자본주의는 그런 것에 의해서 크게 변형되고 나아가서 확대된다. 그렇다고 해서 자본주의가 국면에 따라 변화하는 행보를 포기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19-20세기가 되어서는 산업과는 또 다른 조건들이 제기되기 때문이다. 산업시대의 자본주의라고 해서 그것이 단지 산업 생산양식에만 연관된 것은 결코 아니다.

In short, these ventures by capitalism outside its favoured sector were rarely justified in themselves. It only took an interest in production when necessity or trading profits made it advisable. Capitalism did not invade the production sector until the industrial revolution, when machines had so transformed the conditions of production that industry had become a profit-making sector. Capitalism would then be profoundly modified and above all extended. It did not however abandon its habits of oscillating according to the circumstances of the day, for over the years other options besides industry became open to it, in the 19th and 20th centuries. Capitalism, even in the industrial era, was not exclusively attached to the world of industrial production, far from 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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