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명: 《물질문명과 자본주의》2권 “교환의 세계”
페르낭 브로델 지음(주경철 옮김), 1996년 까치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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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장. 교환의 도구
(...) 경제학이 생리학에서 차용한 이 유통[주3]이라는 용어는 너무 많은 내용을 담고 있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 튀르고는 「유통론」이라고 부를 만한 저서를 구상하고 있었는데, 이 책에서 그는 은행, 로 체제, 크레딧, 외환과 교역 그리고 사치에 이르기까지, 한마디로 그 당시 경제라는 의미로 말할 수 있는 거의 모든 것을 이야기하려고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시장경제라는 용어 역시 단지 유통과 교환이라는 원래의 뜻을 훨씬 넘어서는 확대된 의미를 가지고 있지 않은가?
(...) 앞으로 보게 될 여러 장들에서는 유통을 다루게 된다. 그리고 생산이라는 어려운 문제는 제일 마지막에 보려고 한다.[주6] 그것은 생산 문제가 핵심적이라는 마르크스나 프루동의 견해를 부인하려는 것이 아니다. 다만 과거를 되돌아보며 관찰하는 역사가들에게는 [생산 영역으로부터 시작하기가 막연하고 갈피를 잡기 힘들며 기록도 불충분한지라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이와 달리 유통은 관찰이 용이하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
cf. 거래소(Bourse)에 대한 역주: 이 책에서 자세히 다루듯 거래소는 교환의 중요한 기구였다. 오늘날에는 거래소가 상품 교환의 중개 기능은 전혀 하지 않고 오직 증권 거래소 역할만 하고 있으므로 사전에도 증권 거래소라고 나와 있다. 그러나 이 책이 다루는 시기에는 거래소가 상품 교환소와 증권 거래소의 역할을 모두 맡고 있었기 때문에 ‘거래소’ 로 옮기기로 했다. 한편 런던에서는 같은 기능을 하는 기구로서 로얄 익스체인지(Royal Exchange)가 있다. 이 경우에는 그 말뜻을 살려서 왕립 교환소라고 옮겼다.
(...) 튀르고가 그 시대의 모든 경제활동을 취급하면서 특별히 유통에 우선적인 지위를 부여한 것이 전적으로 틀렸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자본주의의 기원은 교환과 긴밀히 연관되어 있다. 이것이 무시해도 좋을 만한 일이겠는가? (...) 생산이란 결국 분업을 의미하며 따라서 필연적으로 사람들에게 교환에 응하도록 강요하는 것이다.
(...) “시장이 일반화된 사회”는 그 과정의 마지막에 가서 뒤늦게 이루어진 일이며, 그것도 지방마다 틀려서 결코 같은 때에 같은 방식으로 된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시장의 발전에 관한 단순하고 단선적인 역사와 같은 것은 없다. (...)
(...) 근년에 우상파괴적인 칼 폴라니가 정열적으로 문제삼았던 것 역시 바로 이 거대한 영역이었다.[주9] 그러나 고대 바빌로니아의 유사 시장, 오늘날 트로브리안드 제도에 사는 원주민들의 교환의 순환체계, 유럽의 중세 및 전근대 시장들 모두를 단일한 하나의 설명으로 묶는다는 것이 가능할까? 나는 거기에 완전히 동의하지 않는다.
어쨌든 나는 처음부터 일반적인 설명을 하지는 않으려고 한다. 그것보다는 차라리 대상들을 묘사하는 일부터 시작할 것이다. 우선 핵심적인 증인이며 다른 지역보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유럽부터 보려고 한다. [그러고 나서] 유럽 이외의 지역을 볼 것이다. 사실 어떠한 묘사이든 간에 그것이 전 세계를 포괄하는 것이 아니라면 타당한 설명을 제공하지는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17-21쪽)
1.1. 유럽: 최저 수준에서의 교환기구
1.1.1. 오늘날과 같은 보통 시장들
(...) 이 초보적인 시장들이 비슷한 모양으로 수세기 동안 계속 살아남아 있는 것은 그 투박한 단순성 속에 당해낼 수 없는 강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우선[,] 상하기 쉬운 상품이랃 주변의 텃밭에서 직접 가져오기 때문에 언제나 싱싱하다는 점과 값이 싸다는 이점이 있다. 이 초보적인 시장은 “중간 상인을 거치지 않고 바로” 판매를 하기 때문에 가장 직접적이고 투명한 교환이 이루어져서 감시가 쉽고 속임수가 없다. 동시에 가장 공평한 곳이기도 할까" 1270년경에 쓰인 부알로(Etienne Boileau)의 《Livres des métiers》[주20] 는 단연코 그렇다고 주장한다. (...) 독일식 표혀을 따르자면 이 직접적인 교환은 “손에서 손으로, 눈에서 눈으로 하는 상업(Hand-in-Hand, Auge-in-Auge Handel) ”[주21]이다. 팔릴 만한 것은 그 자리에서 팔리고, 인도되며, 바로 계산을 마친다. 신용거래[라고 해도] 한 시장에서 크레딧을 주면 다음 시장에서 바로 갚는 식의 것만이 겨우 이루어지는 정도이다. 이 오래된 유형의 교환은 수백 년, 수천 년 전에 이미 폼페이, 오스티아, 팀가드에서 이루어졌다.
- 고대 그리스 역시 [시장이 있었고],
- 고대 중국이나 파라오 시대의 이집트도 마찬가지이며,
- 특히 바빌로니아에서는 이와 같은 교환 활동이 아주 일찍 발달해 있었다.[주23]
- 유럽인들의 기록에 따르면, “테노치티틀란”(Tenochititlan: 아나우악 고원 위에 있던 아스테카 문명의 옛 수도로서 1521년 코르테스에 의해서 정복되고 파괴되었다. 그 자리에 멕시코시티가 건설되었다) 옆에 위치한 트랄테코(Tlalteco) 시장은 꽤 조직적이었고 시장이 열릴 때면 울긋불긋하게 화려한 광경을 볼 수 있었다.
- 블랙아프리카의 시장은 비록 교환의 양이 많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규칙적이고 질서 잡힌” 모습으로 유럽인들의 탄성을 자아냈다.
- 에티오피아의 시장은 하도 오래되어서 그 기원이 [얼마나] 먼 과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지] 모를 정도이다.[주26] (23-24쪽)
도시 시장은 대개 일주일에 한두 번 열린다. 이곳에 상품을 공급하기 위해서는 시골이 물품을 생산하고 집산할 시간이 필요하고 그것을 내다 팔기 위해서 노동력의 일부를 돌려쓸 수 있어야 했다. (...) 그리하여 도시 당국은 이 시장의 조직과 감시를 아주 단단히 챙겼다. 그들에게 이것은 사활이 걸린 문제였다. 당국은 늘 가까이에서 엄벌을 부과하고 규제를 가했으며 특히 가격을 엄격하게 감시했다.
- 시칠리아에서는 규정된 가격보다 1 그라노만 더 받아도 그 상인은 갤리 선 노역수로 끌려갔다! (...)
- 샤토됭에서는 세 번째로 빵값을 올려 받다 적발된 빵 장수들을 “소시지처럼 꽁꽁 묶어서 죄수 호송차 위에서 사정없이 던져버렸다.” 이런 관행은 샤를 도를레앙(1391-1465)이 행정관에게 빵 가게를 검문할 권리를 부여하 1417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곳에서 체형을 없앤 것은 1602년의 일이다.
1.1.3. 시장의 수가 늘어나고 전문화하다
(...) 파리에서는 고등법원, 행정관, (1667년부터는) 경찰총감이 시장을 적정한 경계 내에 묶어두려고 온갖 노력을 다 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생-토노레 거리는 1678년에 시장 때문에 통행이 막혀버렸다. “캥즈-뱅 정육점 앞과 그 근처에 불법적으로 시장이 섰다. 생-토노레 거리에는 시골이나 도시 출신의 많은 여자들과 장사꾼들이 노상에 물건을 널어놓아서 자유로운 통행을 막고 있었다. 파리에서도 사람 왕래가 많은 큰 길에 속하는 이 거리는 언제나 자유롭게 다닐 수 있어야 하는데도 말이다.”[주40] 이것은 명백한 불법 행위이지만 도대체 어떻게 {그것을} 막는단 말인가? 한곳을 치우면 다른 곳이 막혀버리게 된다. 거의 50년이 지난 뒤에도 이 캥즈-뱅 소시장이 여전히 남아 있었다는 것은 1714년 6월 28일자로 브뤼셀 경관이 샤틀레의 상관에게 보고한 문서에서 볼 수 있다. “ ... ”
어느 도시에서나 교환의 증가로 중앙시장(halle)이 들어서게 되었다. 중앙시장은 전용 건물이 있고 그 주위를 노천 시장이 둘러싸고 있는 형태이다. 이 중앙 시장은 대개 상설 시장이고 전문화된 시장이다. 우리는 무수히 많은 직물 중앙시장을 알고 있다. [주49] 심지어 카르팡트라와 같은 그리 크지 않은 도시도
- 바르셀로나는 론하(Lonja)라고 부르는 거래소 위에 직물 중앙시장(ala des draps)을 세웠다.[주51]
- 런던에 있는 블랙웰 홀(Blackwell Hall)[주52]은 1397년에 세워졌다. (...) 이 시장은 오랫동안 일주일 며칠만 시장이 열렸으나 18세기에는 날마다 시장이 열리게 되었고 (...) 1660년경에는 중앙시장에 대리인과 상주 고용인이 생겨서 복잡한 조직을 이루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이 만개하기 전부터, 복합건물이 서 있는 베이징홀 거리는 이미 베네치아의 독일 상관(Fondaco dei Tedeschi) 지역에 비래서도 전혀 손색이 없는 “사업 중심지역”이 되었다.[주53] (28-32쪽)
- 투르넬 지역에서는 1594년부터 아를레 의장이 지휘하는 상인단(컨소시엄)이 수익성 좋은 멋진 집들을 지어서 (...) 대귀족 가문에게 임대했다.[주120]
- 17세기에는 생-제르맹 외곽 지역과 그 외의 지역들이 투기 대상이 되었다.[주121]
- 루이 15세와 루이 16세 시대에 수도 파리는 건축 작업장으로 덮여 있었고 부동산 업자들은 경기가 한창 좋았다. 1781년 8월, 어느 베네치아인은 파리의 아름다운 팔레-루아얄 산책로가 사라지고 나무가 베어지고 있다고 편지에 썼다. “시내의 모든 사람들이 투덜거리는 소리를 내는데도 불구하고” 샤르트르 공작이 “이곳에 건물을 짓고 임대할” 계획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주122] (55-56쪽)
(...) 단기 혹은 장기 화폐시장의 발달이 어디에서나 똑같은 리듬과 효율성을 가지고 이루어지지는 않았다는 것은 의미심장한 일이다. 이에 반해서 어디에서나 보편적으로 볼 수 있었던 것은 자금을 빌려주는 자본주와, 유대인이나 롬바르디아인, 또는 카오르인 등으로 부르는 고리대금업자들이다. 여기에는 농민들에 돈을 빌려주는 일을 전문적으로 하는 바이에른의 수도원도 끼어 있었다. [주129] 우리가 정보를 얻을 수 있는 곳에서는 어디에서나 고리대금업이 탄탄하게 성장해 [있었다]. 이것은 전 세계 어느 문명에서나 똑같이 볼 수 있는 현상이다.
반대로 화폐 선물시장은 이미 경제가 발달해 있는 지역에서만 [존재했다]. 그런 시장은 13세기 이후 이탈리아, 독일, 네덜란드에 있었다. 이런 지역에는 그런 화폐시장이 만들어지는 데 유리한 조건들이 두루 갖추어져 있었다: 자본 축적, 원거리 무역, 환어음이라는 도구, 아주 일찍 등장한 공채증서, 상공업과 조선업에 대한 투자, 또 15세기 이전부터 굉장한 규모로 커져서 한 개인의 수준을 넘어서게 된 선박들의 항해에 대한 투자 등. (...) (57-58쪽)
(...) 어쨌든 확실한 것은 노동시장 ㅡ개념으로서가 아니라 실제의 노동시장ㅡ은 산업화 시대에 가서야 등장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노동시장이란 그 사람이 어떤 출신이든 간에 상관없이 전통적인 “생산수단”을 가지지 못한 사람들이 스스로를 팔기 위해서 내놓는 곳이다. (...) 자기 자신을 이렇게 세놓고 판매하는 사람은 시장이라는 작은 구멍을 통해서 전통 경제를 벗어나게 된다.
- 이 현상을 예외적으로 명확하게 보여주는 예로는 중유럽의 광부가 있다. 오랫동안 독립 장인으로서 소그룹별로 일하던 이 사람들은 15-16섹에 상인의 통제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 광산을 개발하는 데 필요한 상당한 투자를 할 수 있는 사람은 상인들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광부는 임금노동자가 되었다.
- (...) 1549년 보헤미아의 작은 광업 도시인 요아힘스탈의 행정관들은 이렇게 이야기했다. “한편은 돈을 대고 또 한편은 일을 한다.”
- 13세기 파리 사례: 취업시장 역할을 했던 광장들[주135]
- 롬바르디아 피아첸차 주변의 벽돌공장에 관한 고용계약 서류(1288년, 1290년) [주136]
- 1253~1379년 사이 포르투갈 농촌에 임금노동자들이 있었음을 말해주는 문서들[주137]
- 부르고뉴의 오세르 시[주138]에서는 1393년에 포도밭 노동자들이 파업에 돌입했다(포도 재배는 일종의 산업 활동이었음을 감안해야 한다). 오세르 시에서는 늦봄부터 초가을까지 매일 해뜰 녘에 이 도시의 광장에서 일용 노동자들과 고용주들이 만난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흔히 고용주를 대신해서 클로지에(closier)라고 부르는 대리인이 나왔다. 이것은 우리가 확실히 증거를 가지고 있는 최초의 노동시장 중의 하나다.
- 1480년에 함부르크에서는 일용 노동자(Tageloehner)가 일거리를 줄 주인을 찾아 크로스트 다리로 갔다.[주139]
- (...) (59-60쪽)
- 튜더 왕조 때의 영국에서는 “모든 가국의 절반 이상, 어쩌면 2/3 정도는 적어도 그들의 소득의 일부를 임금 형태로 [받았다]는 것이...증명되었다.”[주150]
- 17세기 초에 슈트랄준트를 비롯한 한자동맹의 도시에서는 임금노동자 층이 계속 증가하여 결국 전 인구 중 적어도 50%를 차지하게 되었다.[주151]
- 혁명 전야의 파리에서도 그 수치는 50%를 넘었을 것이다.[주152] (62쪽)
(...) [정기시가 맡은] 역할은 일반적으로 교환이 너무 좁은 한계 내에 갇여 있을 때 그 제약을 깨는 것이었다. 1800년에 뫼즈의 한 마을은 정기시를 세우데 해달라고 요구했는데 그것은 이곳에 부족한 철기류를 들여오려는 의도에서였다. 가까운 시골 지역과 도시의 장인층을 겨우 결합시킨 정도에 불과한 소박한 규모의 읍내 정기시라고 해도 이것 역시 일상적인 교환의 한계를 깨는 역할을 한다. 더 나아가서, 초대형 정기시는 광대한 여러 지역 경제를 동원하기도 한다. 때로는 유럽 전역이 이곳에 약속을 하고 모여들기도 했다. 그렇게 될 수 있었던 것은 많은 세금과 관세의 장벽을 일시적으로 없애는 자유와 특권을 누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정기시가 보기 드문 대규모 집합소가 되었다. 지배자들(프랑스 왕, 영국 왕, 신성로마황제)은 결정적으로 중요한 이 집합 지점에 대해서 아주 일찍부터 관심을 두어서 특별 사면, 자치권, 보증, 특권을 허락해주었다. 그러나 (...) 정기시들이 실제로 면세되었던 것은 아니어서, 예컨대 보케르 정기시와 같은 곳에서도 완전한 자유 교역이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예를 들면, 소뮈르에 "왕립" 정기시 세 고싱 있어서 각각 사흘씩 장이 서지만 문서에 의하면 "면세 혜택을 누리지 못해서 거의 쓸모가 없었다." (103-105쪽)
1.2.2. 도시의 축제
1.2.3. 정기시의 변천
(...) [오스트리아의 거대한 정기시인 린츠, 번성기의 라이프치히, 교황령의 작은 도시인 란치아노] 이 정기시에는 상인들이 오래된 환어음들을 한 움큼씩 가지고 왔다. 페즈나스 혹은 몽타냐크 정기시는 보케르 정기시들을 연계해주는 곳으로서 (...) 파리나 리옹에 대해서 발행한 일련의 환어음들이 모두 이곳을 경유했다. 그러므로 정기시란 결국 채무들이 모여들어서 서로가 서로를 [상쇄하게 만드는 곳이다]. (...) 수십만 개 정도의 "진짜 금화"만 가지고도 리옹에서는 청산 방식을 통해서 몇백만 에퀴에 달하는 교환을 결제할 수 있었다. 더구나 아직 해결되지 않은 부채의 많은 부분을 어느 다른 장소에서 갚는다는 약속(환어음)을 하거나, 다음 번 정기시에 떠넘기는 방식을 통해서 해결하기 때문에 이 기능이 더욱 잘 운영되었다. 이것을 데포지토(deposito)라고 하는데 일 년에 평균 10% (그러므로 석 달에 2.5%)의 이자가 붙었다. 정기시는 이런 식으로 크레딧을 만들었다. (115-116쪽)
1.2.4. 정기시의 순환
1.2.5. 정기시의 쇠퇴
18세기에 들어오자 “몇 년 전부터 국내에서 생산한 상품의 대부분을 외국에 수출하거나 원재료를 면세로 수입하도록 허락해주던 정부 정책이 점차 바뀌어 면세 혜택을 누리던 정기시의 교역을 매년 줄일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리하여 해가 갈수록 정기시를 거치지 않고 이 상품들을 직접 교역하는 데 점점 익숙해졌다.”
1.2.6. 창고
1.2.7. 거래소
1.2.8. 암스테르담의 증권시장
1.2.9. 파리를 방문할 필요가 있을까?
1.2.10. 거래소와 화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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