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4월 14일 목요일

발췌: CMEC 3권의 1장

도서명: 《물질문명과 자본주의》3권 “세계의 시간”
페르낭 브로델 지음(주경철 옮김), 1997년 까치 펴냄.

※ 발췌식 메모와 함께 읽어감.

■ 발췌: 3권의 1장. “공간과 시간의 분할: 유럽”

1.1. 공간과 경제: 세계-경제

[공간은 설명의 원천이며 국가, 사회, 문화, 경제 등 공간적 넓이를 차지하는 모든 역사적 실재는 공간의 영향을 받는다.] 우리가 이러한 ^집합들(ensembles)^[주1] 중 어느 것을 선택하느냐에 따라서 공간의 의미와 역할이 달라지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그런 선택[만으로] 정말로 모든 것이 완전히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우선 경제만을 살펴볼 텐데] 경제로부터 시작하는 것은 (...) 공간을 차지하는 모든 범주들 중에서 경제야말로 가장 쉽게 위치지울 수 있고 동시에 가장 폭넓은 것이다. 사실 경제는 세계의 물질적 시간에만 리듬을 부여하는 것이 아니다. [다른 모든 사회적 실재가 경제의 작동에 대해서] 우호적으로든 적대적으로든 끊임없이 개입할 [뿐 아니라,] 반대로 경제도 다른 사회적 실재에 영향을 끼친다. (...)

1.1.1. 세계-경제

(...) 두 가지 용어에 대해서 설명할 필요가 있다: ^세계경제(économie mondiale)^와 ^세계-경제(économie-monde)^가 그것이다.

^세계경제^는 지구 전역에 걸쳐 있다. 시스몽디가 이야기했듯이 “전 지구적인 시장”[주2] 또는 “함께 교역을 하여 오늘날에는 일종의 단일시장을 형성하고 있는 인류 전체, 또는 인류의 어느 부분 전체”[주3]를 가리킨다.

^세계-경제^(이 말은 사실 어색하고 불어에는 잘 어울리지 않는 표현이다. 내가 예전에 독일어의 벨트비르트샤프트[주4]의 번역어를 찾을 때 그리 논리적이지 않다는 것은 알지만 달리 나은 표현이 없어서 만든 말이다)는 우선 {전} 지구의 일부분에만 관련된 말임에 주목해야 한다. 이 말은 경제적으로 독자적이며, 핵심적인 것들을 자급자족할 수 있고, 내부적인 연결과 교역이 유기적인 통일성을 이루는 단위를 말한다.[주5]

예를 들면 오래 전에 나는 16세기의 지중해를 세계-무대(Welttheater) 또는 세계-경제(Weltwirtschaft)로서 연구한 적이 있ㄷ.[주6] 이때 지중해는 단지 바다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연안으로부터 어느 정도의 거리 내에서 교역에 의하여 활성화되는 모든 곳을 포함하고 있다. 즉 이것은 그 자체로서 하나의 세계이며 하나의 전체이다. 지중해권은 사실 정치적, 문화적, 사회적으로는 분리되어 있지만 경제적으로는 통일성을 띠고 있었다. 이것은 북부 이탈리아의 지배적 도시들(베네치아를 필두로 밀라노, 제노바, 피렌체 등)에 의해서 위로부터 건설된 것이다.[주7] 그러나 이때 전체 경제라고 하는 것은 정말로 지중해와 그 바다에 의존하고 있는 지역들의 경제 ^전체^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상층구조만을 가리킨다. 이런 활동은 제국(...)의 경계를 무시하고 넘나든다. [즉] 지중해 공간을 [뚜렷하게 갈라놓았던] 문명들(그리스, 이슬람, 기독교) 사이의 (...) 경계 역시 {이 활동들: 상층구조의 활동}을 제약하지 못했다. 회교권과 기독교권은 [서쪽과 동쪽으로 갈라지는 포난트(Ponant) 지중해와 레반트(Levant) 지중해로] 나뉘어서 서로 맞서고 있었다. [남북으로 그어지는 이 구분선은] 아드리아 해 연안과 시칠리아 섬 연안을 통과해서 오늘날의 튀니지 해안선에 닿는다. 이처럼 지중해를 둘로 갈라놓았던 이 구분선 주변에서 기독교도와 소위 이교도들 사이의 요란한 전쟁이 일어난 것이다. 그러나 선박들은 이 구분선을 넘어서 쉴 새 없이 왕래했다.


1.1.2. 세계-경제는 늘 존재해왔다.

1.1.3. 경향적 법칙

▷ 첫 번째 법칙: 공간은 서서히 변화한다

▷ 두 번째 법칙: 중심부에는 지배적인 자본주의 도시가 있다

(...) 이 중심점을 둘러싸고 어느 정도 떨어진 거리에 부차적인 연결도시들이 존재하는데, 이들은 중심도시에 대해서 동료 또는 공모자 역할을 하거나 대개는 보조 역할을 맡아서 한다. 이 도시들의 활동은 중심도시의 활동에 종속되어 있다: 즉 그 주변에서 보초를 서든지, 사업의 흐름을 [중심도시]로 유도하든지, 중심도시가 맡겨오는 상품들을 재분배하거나 다른 곳으로 넘기든지, 혹은 중심도시의 크레딧 활동에 동참하여 손익을 함께 감당한다. 베네치아와 안트워프는 모두 홀로 있었던 것이 아니다. (..) [즉] 수행원이나 신하들을 거느리고 있었다.(27쪽)

▷ 두 번째 법칙(계속): 도시의 우월한 지위는 차례로 돌아간다
▷ 두 번째 법칙(마지막): 도시의 지배는 각양각색이다

▷ 세 번째 법칙: 권역은 계서제를 이루고 있다

세계-경제가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 혹은 자본주의와 시장경제가 서로 섞이지 않으면서 공존과 상호 침투를 하는 메커니즘이 어떤 것인지 등에 대해서 내가 이해하게 된 것은 {이런: 혹시 ‘다음과 같은’의 의미?} 경험들을 통해서였다. 지표면[과] 물길을 따라서, 수세기에 걸쳐 지방시장 및 지역시장의 연쇄망들이 조직되었다. 대개 일상적인 관례대로 움직이는 이러한 지방경제는 지배적인 어느 한 지역이나 한 도시에게만 이익을 가져다줄 뿐 그 자신은 정기적으로 통합의 대상 또는 “합리적인” 신질서 수립의 대상이 되어버리는 것이 운명이다. 이와 같은 일은 새로운 “조직 주동자”가 나타날 때까지 한두 세기 정도 지속된다. 이것은 마치 자원과 부의 ^중앙화^ 및 ^집중화^[주14]가 필연적으로 일부 선택된 ^축적^ 지역에만 이익을 가져다주는 것과 같다. (40쪽)


[앞에서 말한 중심도시로 설명한다면] 아드리아 해가 베네치아에게 유리하게 이용된 것이 좋은 예이다. 적어도 1383년에 베네치아가 코르푸를 점령한 이후 통제하게 된 이 바다는 베네치아[에게는] 일종의 ^전국시장(marché national)^ 역할을 했으므로 베네치아는 이 바다를 “우리의 만(灣)”이라고 불렀다. (...) 그러나 베네치아가 이 바다를 {만든} 것은 아니다. 또 이 바다 주변에 빙 둘러서 자리 잡고 있는 도시들 역시 베네치아가 만든 것은 아니다. 베네치아는 이미 만들어져 있던 연안지역의 생산물들, [생산물의 교역] 그리고 선원들을 발견했을 뿐이었다. 베네치아로서는 자신이 등장하기 전에 이미 행해지고 있던 교역들을 마치 실가닥처럼 수중에 모아서 쥐기만 하면 되었다. 풀리아의 올리브 기름, 몬테 가르가노 숲의 조선용 목재, 이스트리아의 석재, 아드리아 해 양안에서 사람과 가축 모두에게 필요했던 소금 그리고 포도주와 밀 등이 그런 것들이다. 베네치아는 또 여행 상인들, 수백 혹은 수천 척의 소형 선박과 범선들을 불러 모아서 자신의 필요에 맞추어 새로운 모델[을] 따르게 하고 자신의 경제에 짜맞추었다. 이렇게 손안에 잡아두는 것, 이것이야말로 확고한 독점을 유지하면서 세계-경제를 건설하는 과정이자 “모델”이다. 베네치아 시 정부는 아드리아 해의 ^모든^ 교역에 대해서 목적지가 어디가 되었든지 간에 반드시 베네치아 항구에 들러서 통제를 받도록 했다. 그리고 이러한 주장을 관철시키기 위해서 해적의 소굴이었던 세냐 및 피우메와 끊임없이 싸웠고, 또 상업 경쟁자들이 트리에스테, 라구사, 안토나와도 싸웠다.[주35]

베네치아식의 지배 도식은 다른 곳에서도 볼 수 있다. 이 도식에서 핵심적인 것은 한편으로 거의 자연발생적으로 발전해가는 시장경제가 있고, 다른 한편으로 이 소수의 활동을 다시 그 위헤서 쥐고 있으면서 방향을 잡고 마음대로 통제하는 상층의 경제가 있어서 이 양자 사이에 진동하는 변증법이 작용한다는 점이다. [베네치아는 풀리아의 올리브 유를 오랫동안 독점하기 위해서] 1580년경 올리브 산지에 자국의 수하에 있던 베르가모 출신의 상인들을 500명 이상 배치하여 수집, 저장, 출하 등의 업무를 맡겼다. 이런 식으로 상층경제는 생산을 포괄하고 판매방향을 통제한다.  (...) 메수엔 조약(1703) 이후 영국이 포르투갈에 대해서 우위권을 확보하게 된 것이나, 미국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남아메리카에서 영국 세력을 축출한 것도 이와 다르지 않다.

▷ 세 번째 법칙(계속): 튀넨의 권역

(...) 그러나 도대체 왜 그와 같은 지배가 이루어지는가? 경제의 초보적인 순환을 형성하는 시골-도시 사이의 교환은, 아담 스미스[주42]가 무엇이라고 하든 간에, 불평등 교환의 훌륭한 예이다. 이 불평등에는 기원과 유래가 있다.[주43] 경제학자들은 이 점과 관련해서 역사적 발전을 너무 무시했다. 그러나 이 역사적 발전이라는 것이야말로 분명히 결정적인 중요성을 가지고 있다.

▷ 세 번째 법칙(계속): 세계-경제의 공간적 도식

[중심부ㅡ두 번째 지역(부심부라 부르면 적절할지도)ㅡ주변부 ..]

중심지역 근처에 바로 잇닿아 있는 광범위한 지역들의 위치를 잡는 일은 매우 힘든 작업이다. 이 지역들은 중심부보다 열등하지만 때로 그 차이는 매우 미세하다. (...) 그러나 크든 작든 그 차이는 언제나 존재한다. (...) 최상의 기준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가장 간단하며 어쨌든 가장 손쉽게 이용할 수 있는 기준은 어떤 지역에 ^외국의^ 상업 식민지가 존재하는냐 아니냐 하는 것이다. 어느 도시나 국가에서 외국 상인이 높은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면 이 도시나 국가는 그 상인을 대표나 밀사로 파견한 곳의 경제에 비해서 열등하다는 표시다. 그러한 예들은 얼마든지 있다:
  • 펠리페 2세 시대에 마드리드에 와 있던 제노바의 상인 겸 은행가들,
  • 17세기에 라이프치히에 있던 네더란드 상인들,
  • 18세기에 리스본에 주재하던 영국 상인들 그리고
  • 특히 브뤼주, 안트워프, 리옹, 파리(적어도 마자랭 시대까지)에 존재하던 이탈리아인들.
  • 1780년경 “리스본과 카디스에서는 모든 상업회사들이 외국인 회사의 지점이었다(...).”[주48] 18세기 베네치아의 사정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주49]
(...) 주변부 지역은 가난하고 [뒤쳐져] 있는 국가들이며, 최대 다수의 사회계층은 언제나 농노이거나 심지어 노예이다. (이곳에서는 서유럽 중심부에서 볼 수 있는 자유로운 농민들, 혹은 스스로 자유롭다고 자부하는 농민들이 없다). 이런 나라들에는 화폐경제가 일부에만 침투해 있다. 분업이 발달해 있지 않아서 농민들은 모든 직종의 일을 동시에 한다. 화폐가격이 존재한다고 해도 말도 안 되게 낮았다. 생활비가 지나치게 싸다는 자체가 저개발의 표시다. 헝가리의 설교사인 마르티노 셉시 콤보르는 1618년에 조국으로 돌아가면서 이런 관찰을 했다: “네덜란드와 영국에서는 식료품 값이 아주 높았다. 이런 상황은 프랑스에서 변하기 시작해서 독일, 폴란드, 보헤미아로 갈수록 빵 값은 계속 내려가다가 헝가리에서 최저가 되었다.”[주50]  헝가리만 해도 최저 수준이었지만 이보다 더한 지역들도 있었다. (...)

유럽의 변두리에 있는 후진 지역들[을 보면] 주변부 경제의 모델[을 수없이 발견할 수 있다].
  • 18세기 “봉건적인” 시칠리아
  • 시대를 따질 것 없이 항상 후진 지역이었던 사르데냐
  • 터키 지배 하의 발칸
  • 서유럽 시장의 이익을 위해서 동원되고 자신의 지방적 수요보다는 외부시장의 수요에 생산을 맞추어야 했던 메클렘부르크, 폴란드, 리투아니아 등지의 광범위한 지역
  • 러시아 세계-경제의 착취 대상인 시베리아
  • 건포도와 리쾨르 술(이것은 영국에서까지 소비되었다)에 대한 외부의 수요 때문에 15세기부터 외부로부터 단일경작(monoculture) 체제가 강요되고, [이로 말미암아 지방의 균형이 파괴되었던] 레반트 지역의 베네치아 령 섬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46쪽)
▷ 세 번째 법칙(계속): 중립지역이 존재하는가?

(...) 예를 들면 17세기 초에 네덜란드식으로 개간사업이 한창 벌어지면서 워시 만 근처의 펜스(Fens) 지역이 그런 곳이다: 수리 사업이 벌어지면서 이때까지 물가의 짐승들을 사냥하고 물고기를 잡으며 자유롭게 살던 이곳에 자본주의적 농촌이 출현했다. 그러자 그곳 주민들은 엔지니어와 토목 인부들을 공격하고 제방을 무너뜨렸으며 저주스러운 노동자들을 살해하면서 자신들의 삶을 지키기 위해서 맹렬히 투쟁했다.[주58] 이러한 근대화와 고풍주의 사이의 갈등은 캄파니아 내부와 같은 곳에서는 오늘날에도 일어나는 일이다.[주59]  (...)  (50쪽)

▷ 세 번째 법칙(마지막): 포락선과 하층구조


1.2. 세계-경제: 다른 여러 질서들 중의 하나

(...) 경제의 영역과 공간은 동시에 다른 실체들ㅡ문화, 사회, 정치ㅡ이 자리 잡고 살아가는 곳이기도 하다. 이것들은 끊임없이 경제에 섞여 들어가서 경제를 돕기도 하고 방해하기도 한다.  {이런 것들: 이러한 사회의 실재들}을 구분해내기 어려운 이유는 우리 [눈에는 관찰 대상이 총체성(globalité)으로만 보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것을 특별한 의미의 사회 또는 ^전체집합(ensemble des ensembles)^[주63]이라고 부른 바 있다. 각각의 개별 집합[주64]은 그 파악 불가능성 때문에 실생활 속에서는 다른 집합들과 섞여서 존재한다. (...)

한 국가는 수도, 지방, 식민지의 세 권역을 나뉜다. 이것은 15세기의 베네치아에 적확히 들어맞는 도식이다: 베네치아는[,]
  • 첫째, 도시와 그 교외인 도가도(Dogado)[주67]
  • 둘째, 테라 피르마(Terra firma)의 지방도시들과 구역들,
  • 셋째, 마르(Mar)라고 부르는 식민지로 되어 있[었]다.
피렌체는 도시, 콘타도(Contado), 로 스타토(lo Stato)로 되어 있[었]다. 로 스타토는 시에나와 피사를 누르고 정복한 땅으로서 준 식민지의 범주에 드는 것이 아닐까? 17~20세기의 프랑스, 영국, 혹은 네덜란드 역시 세 개의 지역으로 되어 있었다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그러나 유럽 전체의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유럽의 균형^ 체제는 세계-경제의 정치적인 복사판이 아닐까?  (...) (54쪽)

1.2.1. 경제질서와 국제분업

(...) 1817년에 리카도가 [묘사했던] {비교우위에 바탕을 둔} 역할분담은 마치 자연적인 규칙으로 보이지만 도대체 언제 어떤 이유에서 그렇게 된 것인가? 그것은 “자연적인”, 저절로 이루어지는 소명의 경과가 아니고, 서서히 역사적으로 형성된, 어느 정도 오래된 상황이 [누적되고] 고착화된 결과이다. 세계(또는 세계-경제) 차원에서의 분업은 매번 동등한 파트너 사이에서 조화롭고 수정 가능한 협약을 통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그것은 서로가 서로에 대해서 결정한 종속관계의 연쇄로서 점진적으로 형성된 것이다. 불평등 교역은 세계의 불평등을 낳고[,] 반대로 세계의 불평등은 끈질기게 교역을 창출한다. 불평등 교역과 세계의 불평등, 이 두 가지는 모두 오래 전부터 존재하던 현실이다. ( 영국과 포르투갈의 교역 이야기.. 메수엔 조약..) (57쪽)

1.2.2. 국가: 정치세력, 경제세력

(...) 15-18세기 중에 국가는 모든 사회공간을 다 채우지 못했다. 이때에는 오늘날의 국가가 가지고 있는 것과 같은 “악마적인” 침투력을 갖추지 못했다. 그럴 수단이 부족했던 것이다. 더군다나 국가는 1350-1450년 동안의 장기적인 위기를 거치면서 큰 타격을 받았기 때문에 더욱 사정이 나빴다. 국가의 재건이 이루어지는 것은 15세기 후반의 일이다. 18세기 초까지 영토국가보다 우선해서 첫 번째 역할을 하던 도시국가는 그 당시에 완전히 상인들의 수중에 놓인 도구가 되었다. 느릿느릿 세력을 형성해가던 영토국가의 경우에는 사정이 훨씬 복잡하다. 전국시장과 국민경제를 처음 이루어낸 영토국가인 영국은 1688년 혁명 이후 아주 일찍이 상인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따라서 산업화 이전 시대의 유럽에서 정치세력과 경제세력이 합치도록 만드는 어떤 {결정주의}?가 있다고 해서 조금도 놀라운 일이 아니다. (...) (61쪽)

(.,..) 그러므로 베네치아뿐 아니라 암스테르담에서도 런던에서도, 모두 강한 정부가 들어서 있었다. 정부는 국내적으로 강력한 힘을 발휘해서, 도시의 “서민들”을 길들이고 필요한 경우 재정적인 부담을 무겁게 지우기도 하며 크레딧과 상업상의 자유를 보장해주기도 한다. 또 국외적으로도 강력한 힘을 발휘해서, 때로 주저치 않고 폭력을 휘둘렀기 때문에 ^아주 일찍부터^ {이런 도시들에 대해서 ^식민주의^ 및 ^제국주의^ 세력이었다고 말하는 것: 이런 도시들이 ^식민주의^ 및 ^제국주의^ 세력이었다고 말하는 것}이 부당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 “중심부”의 정부들이라고 하더라도 이미 야심을 드러내고 있던 조숙한 자본주의{에  대해서는}{에} 종속되지 않을 수 없었던 것도 사실이다.[그래서] 이 양자가 권력을 나누어 가지게 되었다. 이 게임에서 국가는 세계-경제에 완전히 잡아먹히지 않으면서 그 움직임 속에 침투해 [들어갔다]. 남들에게 봉사하고 돈에 봉사하면서 국가는 결국 자기 자신에게 봉사하는 것이다.  (61쪽)

(...) 그러나 우리가 오해하지 말아야 할 점은 17세기의 네덜란드와 같은 근대적인 국가와, 프랑스나 스페인과 같은 위풍당당한 국가 사이에는 큰 거리가 있다는 점이다. 이런 거리는 각 정부가 특정한 경제정책에 대해서 어떤 태도를 취하느냐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당시에는 만병통치약으로 통했던 이 정책에 대해서 우리는 사후적으로 ^중상주의(mercantilisme)^라는 말을 만들어 붙였다. 이 용어에 대해서 역사가들은 다양한 뜻을 부여한다. 그러나 그 여러 의미들 중에서 보다 우세한 것은 타자에 대한 자신의 방어이다. 중상주의는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을 방어하고자 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군주나 국가가 중상주의의 원칙을 따른 것은 한편으로 그 시대의 유행에 따른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자기 나라가 취약하기 때문에 응급조치를 취하거나 그 상태를 바로잡아야 한다는 사실을 인정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네덜란드는 아주 예외적인 때에만 중상주의적 태도를 취했는데 그 예외적인 때란 외부로부터 큰 위험이 닥치고 있다는 것을 인식한 때를 말한다. 그러나 평시에는 아무 문제 없이 자유경쟁을 주장했고 대개는 그것이 자신에게 유리했다. 18세기에 영국은 엄격한 중상주의로부터 멀어져갔는데 이것은 세계의 시간 속에서 영국이 위대함과 힘을 차지하는 시기가 도래했다는 증거가 아닐까? 아닌 게 아니라 한 세기 뒤에 가면(1846) 영국은 큰 위험 없이 자유교역에 문호를 개방했다. (62-64쪽)

cf. 독점 교역(exclusif) 체제: 앙시앵 레짐 시기에 프랑스와 식민지 사이의 교역을 규제한 체제를 가리킨다. 1717-1727년 사이에 법제화된 이 체제의 내용은 허가받은 상인과 의장업자들에게만 대서양 너머의 식민지 교역 및 노예무역을 배타적으로 인정하는 한편, 식민지 지역이 그들끼리 혹은 다른 외국과 교역하는 것을 금지하고 모국과 경쟁할 가능성이 있는 상품의 생산을 금지하는 것이었다. 그 대신 식민지에 대해서는 고부가가치 식민지 산물(인디고, 면화, 설탕, 커피, 향신료 등)의 생산을 유도하고, 그 상품들을 프랑스가 유럽 시장에 판매하여, 그 대가로 식민지에 식량과 공산품을 공급하고 군사원조를 해주었다. 그러나 밀수를 규제하는 것이 힘들어서 1767-1783년 동안 제한을 완화하는 수밖에 없었다. (64쪽)

1.2.3. 제국과 세계-경제

초국가(super-Etat)라고 할 수 있는 제국이 단독으로 세계-경제의 전 공간을 차지하는 경우, 이것은 또 하나의 포괄적인 문제를 제기한다. 대개 세계-제국(world-empire)ㅡ월러스틴의 용어다ㅡ은 구식의 구성체로서 경제에 대해 우월한 형태이다. [이 책이 다루는 시기 동안에도 이러한 세계-제국이] 유럽 이외의 지역에 [존재했다].
  • 대무굴 제국의 인도,
  • 중국,
  • 이란,
  • 오스만 제국,
  • 차르 통치하의 모스크바 대공국
등이 그것이다. 이매뉴얼 월러스틴에 의하면 제국이 존속하는 한 그 기저에 있는 세계-경제는 발전할 수 없고 성장이 저지된다. 이것은 힉스가 말한 지시경제(command economy)라고 할 수 있고 마르크스의 구식 설명에 의하면 ^아시아적^ 생산양식이라고 할 수 있다.

경제는 {견제장치가 없는} 제국 정치의 요구와 제약에 잘 적응하지 못하는 것이 사실이다. 이곳에서는 그 어떤 상인도, 자본가도 자유롭게 활동할 여지가 없다.
  • 오스만 제국에서 유럽의 푸거와 비슷한 지위에 있던 미카엘 칸타쿠제노스는 1578년 3월 13일에 별다른 재판 형식도 거치지 않고 단지 술탄의 명령에 의해서 (...) 교수형에 처해졌다.[주83]
  • 중국에서는[주84] 건륭제의 총신이었던 대부호 화신이 황제가 사망하자 다음 황제에 의해서 처형되고 재산을 몰수당했다.
  • 러시아에서는[주85] 시베리아 총독으로서 독직 행위를 일삼던 가가린 공이 1720년에 처형되었다. 
물론 우리는 자크 쾨르, 상블라세, 푸케(Nicolas Fouquet)를 생각하게 된다. 이 예들에서 볼 수 있는 재판과 (상블라세의 경우) 처형은 그 나름대로 프랑스의 정치 및 경제 상태가 어떠했는지 우리에게 알려준다. 비록 아무리 낡은 형태라고 해도 오직 자본주의 체제만이 이런 소란들을 삼키고 소화시킬 수 있는 위를 가지고 있다.

그렇지만 내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비록 공격적이고 또 자신의 여러 영토들의 개별적 이익에 대한 인식이 거의 없는 제국의 억압 아래에서 세계-경제가 혹사당하고 감시당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라고 해도 그 세계-경제는 그에 굴하지 않고 꾸준히 살아남아서 제국의 경계를 넘어 자신의 조식을 확대하게 마련이다. 예컨대[,]
  • 로마인들은 홍해와 인도양에서 교역을 했다;
  • 에스파한의 외곽 지역인 줄파의 아르메니아 상인들은 거의 전 세계를 상대로 상업 활동을 했다;
  • 바니아 상인들은 모스크바로까지 갔다;
  • 중국 상인들은 말레이 군도의 모든 기착 항국에 들렀다;
  • 모스크바 대공국은 기록적인 속도로 시베리아라고 하는 주변부 지역을 장악했다.
비트포겔은[주86]은 정치적 압력이 강한 남부 아시아와 동부 아시아의 전통적인 여러 제국들에서는 “국가가 사회보다 훨씬 강하다”고 이야기했다. 물론 이 말은 맞는 말이다. 그러나 국가가 경제보다 강하지는 못했다. (66-68쪽)

(...) 진정한 논쟁거리는 [유럽이 특권적 지위를 활발히 행사하고 또 활발한 무역이 생겨나서 다양한 경제들이 자기 자리를 잡고, 그러한 다양한 경제들이 서로 돕기도 하고 경쟁하기도 했던 시점이] 언제부터인가 하는 문제다. [국제적인 협조는 아주 이른 시기인 중세 이래 시작되었으며 그후 수 세기 동안 계속되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따라서 하나의 세계-경제를 이루는 상호 보충적 지역들 그리고 생산 및 교환의 계서화는 아주 일찍부터 만들어졌고 {그것은: 세계-경제를 가리키는 것 같다} 거의 시초부터 효율적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카를 5세가 평생 동안 성공하지 못한 것을 16세기 초에 새로 {경신된} 세계-경제의 [중심을 차지한 안트워프]는 힘들이지 않고 성공했다. 이 도시는 전 유럽을 장악했으며 (...)

(...) [서유럽의] 경제질서가 일찍 형성되었으며, 그 다음에는 전압의 차이와 그로 인한 갈등을 이용해서 유럽 대륙의 경계를 넘어섰다. 아주 일찍부터 유럽의 “중심부”는 근접한 {반주변부}와 멀리 떨어진 주변부들로 둘러싸이게 되었다. 그중에서도 중심부를 압박하고 또 더욱 빠르게 작동하도록 강요하는 이 {반주변부}라는 것이 아마도 유럽의 구조의 핵심적 양상일 것이다. {14-15세기 동안 베네치아를 둘러싼 북부 이탈리아, 또 안트워프를 둘러싼 네덜란드 등이 대표적인 곳이다. ㅡ 이 말은 베네치아와 안트워프가 중심(혹은 중심부)였고 북부 이탈리아와 네덜란드가 그 중심(혹은 중심부)를 둘러싸는 반주변부였다는 뜻인 것 같다.} 이런 {반주변부}는 북경, 델리, 에스파한, 이스탄불, 모스크바 주변에서는 볼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나는 유럽의 세계-경제가 이매뉴얼 월러스틴이 고집하듯이 16세기에 탄생한 것이 아니고, 그보다 훨씬 일찍 탄생했다고 본다. 사실 월러스틴을 괴롭힌 문제는 마르크스가 제기한 문제였던 것 같다. (...) “자본의 전기(傳記)는 16세기에 시작된다.”[각주*] 월러스틴이 보기에는 유럽 세계-경제는 자본주의를 [배태하는] 과정이다. [나 역시 월러스틴의 이러한 논점에 반대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중심부 지역을 이야기하는 것이나 자본주의를 이야기하는 것이나 결국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16세기에 유럽에 세워진 세계-경제가 유럽(...)에 근거를 둔 첫 번째 세계-경제는 아니라는 주장은 자본주의가 16세기[에 이르러서야 처음으로] 등장한 것이 아니라는 주장과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유럽의 자본주의ㅡ심지어 자본주의적 ^생산^ 역시ㅡ가 13세기에 이탈리아에서 시작된 것이라는 마르크스의 주장(그후 마르크스는 그렇게 말한 것을 후회했다지만)[각주**]에 동의한다. (...)

[각주*] 마르크스의 《자본》 [제1권] 제4장 “자본의 일반 공식”에 나오는 다음 문장을 가리키는 것 같다. “상품 유통은 자본의 출발점이다. 상품생산과 상품유통 그리고 그것의 발달된 형태인 상품은 자본이 성립하기 위한 역사적 전제조건을 이룬다. 16세기에 세계무역과 세계시장이 형성된 때로부터 자본의 근대사가 시작된다.”  (* 표시된 모든 각주는 역주다)

[각주**] 마르크스의 《자본》 제1권 제26장의 앞부분을 가리키는 것 같다. “자본주의적 생산의 최초의 단서는 이미 14세기나 15세기에 지중해 연안의 일부 도시들에서 드문드문 볼 수 있었지만, 자본주의 시대는 16세기부터 비로소 시작된다.” 저자는 마르크스를 인용하면서 시기와 관련하여 약간의 착각을 했을 가능성이 있다.  (69-70쪽)

1.2.4. 세계-경제의 각 권역에서의 전쟁

(...) 사실 전쟁은 하나의 모습만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 원시적인 전쟁과 근대적인 전쟁이 공존[했다]. (...) 기술에 의해서 전쟁의 면모가 일신되었고 동시에 전쟁이 근대성의 창출 요인으로서 자본주의 체제의 확립을 가속화시켰다고 한 베르너 좀바르트의 말은 틀린 것이 아니다. 16세기부터 전쟁은 크레딧, 지능, 기술자의 창의성을 전폭적으로 동원하는 첨단전쟁이 되어서 매년 새롭게 변화해갔다. (...) 그러나 진보의 어머니이자 딸인 이런 성격의 전쟁은 오직 세계-경제의 중심부에서만 존재한다. 그러한 발전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풍부한 인력과 재력이 있어야 하고 무모할 정도로 거대한 계획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

(...) [유럽에서] 17세기에 전쟁이란 공성전, 포격전, 병참전, 회전(會戰) 등을 의미했다. 비용이 많이 들고 손실도 큰 전쟁이었다. (...) 그러나 이것이 전면전은 결코 아니었다. 포로들을 서로 교환하고 부자들에게 몸값을 물리며, 전술은 유혈적이라기보다 오히려 병법을 자랑하는 것에 가까웠다. (...) 무자비한 전쟁은 프리드리히 2세, 아니 차라리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 제정 이후에 시작된 것이다.

이와 같은 상층의 전쟁을 하는 데 핵심적 규칙은 반드시 이웃 나라에 가서 전쟁을 하라는 것이었다. 전쟁의 무대가 되는 나라는 가장 약한 나라 또는 적어도 가장 강하지 못한 나라가 될 것이다. 만일 반대로 공격을 당하게 되어서 성스러운 국경을 넘어 우리 땅으로 전쟁이 밀려온다면 우위는 영영 상실되어버린다. 이 규칙에는 거의 예외가 없다. (...) 네덜란드는 1672년의 루이 14세의 공격을 피할 수 있었다. 그러나 1795년에 피슈그뤼(Charles Pichegru: 1761-1804. 프랑스의 장군. 나폴레옹 아래에서 활약)의 공격은 피할 수 없었으니, 그것은 결국 네덜란드가 이제 더 이상 유럽의 중심부가 아니라는 뜻이었다. 19-20세기에는 누구도 영불해협이나 북해를 넘어간 적이 없다. 강력한 영국은 [자기 나라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전쟁을 수행했고 정작 본토는 [섬나라라는 유리한 입지에 더하여] 영국이 동맹국들에게 제공하는 막대한 지원금 덕분에 보호를 받았다. 당신이 강하다면 전쟁은 다른 나라에서 일어난다. (...) (76-77쪽)

1.2.5. 사회와 세계-경제

(...) 사회적 상승[사회적 지위의 상승을 말하는 듯하다]은 경제 발전과 함께 활기를 띠는 것이 보통이지만, 부르주아지 전체가 [밀집 대형으로 한꺼번에] 상승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전체 인구 중에서 특권층이 차지하는 비율은 한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불리한 콩종튀르에서는 상층계급이 바리케이드를 친다.  (...) 일반적으로 국가는 사람들이 흔히 믿고 있는 바와는 달리 부르주아지의 상승을 단지 간헐적으로만 도와주며 그것도 자기 자신에게 필요할 경우에만 그렇게 한다. 그래서 만일 시간이 지나도 지배계급의 구성원 중에 탈락하는 수가 적다면 사회적 상승은 한층 더 느리게 이루어진다. 다른 곳에서도 마찬가지였겠지만 프랑스에서 “제3 신분은 언제나 귀족을 동경하여 ^믿지 못할 정도의 노력을 통해서^ 귀족을 모방하려고 했지만”[주96]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사회적 상승이 힘들고 오랜 동경의 대상인 만큼 언제나 소수일 수밖에 없는 새로 선택된 자들은 당연히 그들이 도달한 지위를 강화하려고 했다. (...)

1.2.6. 문화적 질서

1.2.7. 세계-경제의 분석 틀은 분명히 타당하다.

(...) 월러스틴의 분석 틀은 다양한 적용성과 함축적 의미들을 가지고 있다: 심지어 국민경제 역시 더 넓은 보편적인 분석 틀의 축소판으로 여겨졌다. [즉] 국민경제란 자급자족적인 지역들이 여기저기 널려 있는 것으로 보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 세계: ‘국민경제라는 세계’를 뜻하는 듯하다}를 “주변부들”ㅡ즉 저개발된 지방, 권역, 지역권, 경제 등의 의미로서ㅡ이 널려 있는 것으로 생각하기도 했다. {한정된 “국가” 공간들: “국가” 내로 한정된 공간들}에 대해서 이런 분석 틀을 적용하다 보면 일반 명제와는 분명히 모순된 예들을 찾아볼 수 있다.[주112] 영국의 “주변부”라고 할 수 있는 스코틀랜드가 18세기 말에 경제적 발전을 이룩한 것이 그런 예이다. (...)

{세계의 불평등성을 통해서 자본주의의 팽창과 뿌리 내리기를 설명하는 방식은 중심지역이 자신의 한계를 극복하며 스스로 앞서가고 모든 가능한 진보의 선두에 서게 되는 것을 설명해준다.}ㅡ다음과 같이 고쳐 읽어도 좋을까?ㅡ{자본주의가 팽창하고 뿌리를 내리는 과정을 세계의 불평등을 통해서 설명하는 것은 중심지역이 스스로 자신의 한계를 극복하면서 진보하게 되고 온갖 진보적 추세의 선두를 차지하게 됨을 뜻한다} 또 {이것: 불평등을 통해서 설명하는 것}은 세계의 역사란 여러 생산양식의 {행렬}이자 진행이며 공존이라는 것을 설명해준다ㅡ우리는 이 생산양식들[을] 지나치게 시대적인 순서[에만 맞추어서] 보려는 경향이 강했다. 사실 이 상이한 생산양식들은 서로 연결되어{얽혀? 맞물려?} 있다. [가장 진보적인 생산양식이 가장 후진적인 생산양식에 의존하고 있으며, 반대로 가장 후진적인 생산양식이 가장 진보적인 생산양식이 의존하고 있기도 하다.] 발전은 저발전의 다른 측면인 것이다.

이매뉴얼 월러스틴은 최대의 외연을 가지면서도 응집성을 가지고 있는 측정 단위를 찾던 중에 세계-경제라는 설명에 도달하게 되었다고 이야기했다. (...) 공간에 따른 구분은 필수불가결하다. 그러나 시간적인 참조 단위도 필요하다. 왜냐하면 유럽의 공간에서 여러 개의 세계-경제드링 연이어 나왔기 때문이다. 훅은 달리 이야기하자면 유럽의 세계-경제는 13세기 이래 여러 번에 걸쳐서 형태를 바꾸고 중심지를 이동했으며 주변부 지역들을 재정비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느 주어진 세계-경제에 대해서 가장 장기적인 단위, 그렇게 오래 지속되고 여러 번의 변화를 겪으면서도 시간의 흐름 가운데에서 부정할 수 없는 응집성을 가지고 있는 시간적인 단위는 무엇일까를 물어야 하지 않을까? 사실 공간이든 시간이든 응집성이 없으면 측정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89-90쪽)

1.3. 시간의 분할과 세계-경제

1.3.1. 콩종튀르의 리듬

1.3.2. 파동과 파급 공간

(...) [가격 변동은] 아주 일찍부터 있었을 뿐 아니라, 특히 아주 넓은 공간에 걸쳐서 공시적으로 전개되었다는 것은 유럽에서 일찍이 시장망이 형성되었다는 표시이다. 15~17세기의 유럽은 물론 완전한 조화를 이루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이미 전체적인 리듬, 혹은 하나의 질서를 따르고 있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

여러 가격들이 거의 함께 변한다는 것은 어쨌든 세계-경제에 화폐교환이 뚫고 들어왔고, 또 세계-경제가 이미 자본주의적인 조직화 속에서 발달하고 있다는 최상의 증거이다. 가격 변동이 빠른 속도로 전파되고 “균형에 이르는” 것은 당시의 교통 수간이 허락하는 속도 내에서는 어쨌든 교환이 효율적으로 이루어졌다는 증거이지만 그 속도는 우리의 관점에서 보면 가소로운 수준이다.

  • 어쨌든 특별한 임부를 띤 파발꾼들이 국제적인 정기시들이 끝날 때마다 대 상업 중심지로 급히 말을 몰아서 유용한 소식, 가격에 관한 정보, 환어음 다발(...) 등을 전해주었다.
  • 특히 나쁜 소식들, 즉 지방의 기근, 파산 등의 소식은 아주 먼 곳의 소식일지라도 날개를 단 듯이 빨리 전해졌다.
  • (...)
그러나 가장 이상한 것은 유럽의 콩종튀르의 리듬은 자신의 세계-경제의 엄격한 경계를 [넘어서] 유럽 이외의 지역에 대해서 원격 조정의 힘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 16세기에 모스크바 대공국의 가격들은 우리가 아는 한 서유럽의 가격 움직임을 따라가도 있었다. 이것은 아마도 아메리카 대륙산 은의 중개를 통해서 이루어졌을 것이다.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이곳에서도 은은 "트랜스미션 벨트"의 역할을 하고 있었다.
  • 오스만 제국의 가격들도 똑같은 이유에서 서유럽의 가격들과 같은 보조를 취했다. 
  • 아메리카 그중에서도 적어도 뉴-스페인과 브라질에서는 가격변동이 멀리 떨어진 유럽의 모델을 따르고 있었다. (...) 유럽의 가격들은 사실 마닐라 갤리온 선 항로를 넘어서 마카오에까지 그 리듬을 전파했다. 또 우리는 아지자 하잔의 연구를 통해서 16세기 유럽의 인플레이션이 약 20년 정도의 시차를 두고 인도에까지 영향을 미쳤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주126]
이렇게 {강요된} 혹은 전달된 가격의 리듬이 내각 생각하듯 정말로 지배의 표시 혹은 역으로 충성의 표시였다면 유럽 중심의 세계-경제의 영향력은 일찍이 예상했던 최대치를 훨씬 더 상회했음을 알 수 있다. 지배적인 세계-경제가 자신의 경계 밖으로 “더듬이”를 내뻗는 것에 우리가 주목하게 되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 월러스틴을 포함해서 역사가들은 이런 유형의 교역을 과소평가하고 단지 부수적인 것으로 치부해버렸다. 그 이유는 이 무역이 전적으로 사치품 무역이었기 때문에 이것을 제거해버린다고 해도 보통 사람들의 일상의 삶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럴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가장 정교한 자본주의의 핵심이 자리 잡고 있는 이 무역은 ^영향력^을 행사하며 그 영향력은 일상생활에 대해서 여러 방향의 가지를 친다. 그 영향은 무엇보다 물가에 대한 것이었지만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다. 바로 이 때문에 우리는 화폐와 귀금속에 주목하게 된다. 이것은 지배의 도구이며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중요한 전쟁의 무기이기 때문이다.

1.3.3. 장기추세

1.3.4. 세계-경제를 설명하는 연대

1.3.5. 콘드라티에프 사이클과 장기추세

1.3.6. 장기적 콩종튀르는 설명이 가능한가?

1.3.7. 과거와 현재

(...) 위기란 탈구조화의 초기를 가리킨다. 최고조로 발전한 하나의 응집적인 세계-경제는 쇠퇴를 거듭하다가 그 쇠퇴 과정이 완수되며, [그 와중에] 다른 체제가 머뭇거리는 듯이 완만한 속도로 탄생한다. 

장기적인 상승기 동안에는 경제와 사회질서, 문화, 국가가 활짝 꽃핀다. (...) [16세기에] 일반적으로 생산은 좋은 상태에 있었고, 국가는 자신의 활동을 펼칠 수단을 가지고 있었고, 사회적으로는 한정된 귀족층이 성장할 수 있었으며, 문화도 자기 나름대로의 방향을 좇아 발전했고 인구 상승의 지원을 받는 경제는 복잡한 유통망을 발전시켜갔다. 이것은 또한 분업을 촉진시킴으로써 물가의 상승을 가져왔다{분업의 촉진이 물가를 올린다??}. 화폐 스톡도 증가하고 자본이 누적되어갔다. 게다가 모든 상승은 보수적이다. 이것은 기존의 체제를 보호하고 ^모든 경제들^을 장려한다. 바로 이런 상승 기간 동안 여러 곳에서 중심이 형성되는 것이 가능하다. 16세기에 베네치아, 안트워프, 제노바 사이에 분산이 이루어진 것이 그 예다.

그러나 [하락세가 오랫동안 이어지면 사정이 바뀐다]. 건강한 경제란 이제 거의 세계-경제의 중심에서만 가능한 일이 된다. 경기후퇴가 시작되고 {무엇이?[주어]} 하나의 극에 집중되는 현상이 일어난다. 국가들은 성미가 까다로워지고 공격적이 된다. (...) 프랑스에서는 경제가 상승할 때에는 분산과 분열이 심해지고(종교전쟁 시기가 전형적인 예다), 경기가 좋지 않을 때에는 분명히 강력한 정부를 중심으로 여러 당파들이 모여든다는 것이다. 

경기가 안 좋을 때 상류사회는 투쟁을 시작하고 바리케이드를 쳐서 자신을 보호하고 자신의 수를 제한하려고 한다(결혼을 늦추고, 과도한 수에 달한 젊은 사람들이 이민을 떠나며, 17세기에 제노바에서 그랬던 것처럼 일찍부터 피임을 시작한다). 그런데 문화는 이중에서 가장 이상한 양태의 행동을 한다. (...) 스페인의 황금의 세기는 이 나라가 이미 쇠퇴기에 들어섰을 때 문화가 수도에 집중되면서 이루어졌다: 황금의 세기란 무엇보다도 마드리드의 폭발적인 팽창, 그곳의 궁정과 극장들의 팽창을 뜻한다. (...) 확실히 이야기할 수 있는 사실은 장기적인 후퇴는 문화의 팽창, 더 나아가서 문화의 폭발을 촉진시킨다는 것이다. 베네치아, 볼로냐, 로마 등지에서 볼 수 있듯이 1600년 이후 이탈리아가 마지막으로 활짝 꽃핀 가을을 맞이했던 것과 1815년 이후 이미 사양길에 접어든 유럽에서 낭만주의의 불길이 일어난 것을 보라. (...)

역설적이지만, 경제적인 모든 지표가 나은 방향으로 움직이기 시작할 때 오히려 대중의 상태는 나빠진다. 생산 증가의 영향이 느껴지기 시작하면서 인구가 늘어나지만 이것은 여러 활동층과 노동층에게 부담을 가중시킨다. 그렇게 되면 엠 해밀턴이 지적했듯이[주141] 물가와 임금 사이에 격차가 발생한다. 즉 임금의 물가의 변화에 비해서 뒤처지는 것이다. 장 푸리스티에, 르네 그랑다미, 빌헬름 아벨 드의 저작, 그리고 펠프스 브라운과 실라 홉킨스의 논문을 참조한다면[주142], ^실질임금^이 하락한다는 것이 분명하다. 상층의 영역이 진보하고 경제의 잠재력이 성장한다는 것은 이런 식으로 일반 대중의 고통이라는 대가를 치르게 하는 것이다. 일반 대중의 수는 생산과 비슷하게, 어쩌면 그보다 더 빠른 속도로 증가한다. 그리고 아마도 이런 인구 증가, 사람들의 교역과 노력의 증가가 생산성의 증가로 보상을 받지 못하게 되었을 때 모든 것이 이완되고 위기에 도달하게 되며, 그 다음에는 움직임이 역전되고 하락세가 시작되는 것이다. 이상한 것은 상층구조가 후퇴할 때 일반 대중의 생활수준이 향상되고 실질임금이 다시 상승한다는 것이다. 1350년부터 1450년 사이의 기간은 유럽이 겪은 가장 큰 쇠퇴기의 하나이지만 이때가 소시민들에게는 일상생활에서 일종의 황금기였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역사적 조망에서] 엄청난 결과를 가져온 가장 큰 사건 혹은 결정적인 단절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19세기 중반에 산업혁명과 함께 장기적인 경제 상승이 일어났으며 이것이 일반 민중의 복지를 후퇴시키지 않고 오히려 일인단 소득을 상승시켰다는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해서도 단정적인 이야기를 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기계와 함께 생산성이 급격히 그리고 거대하게 증대함으로써 갑자기 가능성의 천장이 높아졌다는 점이다. 이런 새로운 세계 속에서 한 세기가 넘는 기간 동안 전례 없는 인구 증가가 일어나고 그와 동시에 일인단 소득의 증가가 병행해서 일어난 것이다 분명히 사회적인 상승의 양식도 변했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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