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6월 15일 월요일

윌리엄 더글러스: 월스트리트로 들어온 대법원 판사?

역사상 논쟁의 무대에 가장 많이 올랐던 대법관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 윌리엄 더글러스가 있다. 그가 증권거래위원회(SEC)의 제3대 위원장이기도 했었다는 사실은 그가 대법원 판사로 보낸 36년의 세월 속에 묻혀 거의 잊혀졌다. 어찌 보면 아이러니다. 그의 SEC 재임 기간은 그가 대법원으로 뛰어오르는 가장 중요한 발판이었기 때문이다. 더글러스는 1937년에서 1939 사이 19 개월 동안 SEC 위원장을 지내면서 “금융 도덕성의 혁명”에 불을 붙였다. 그는 전임 SEC 위원장이었던 제임스 랜디스가 떠난 자리를 이어받아, SEC 역사상 가장 야심 찬 위원장으로 일했다.

대표적인 자유주의자였던 더글러스는 부임하자마자 주식시장을 “카지노판 분자들”이 끼어든 “사설 클럽”이라고 규탄했다. 더글러스는 일반대중의 접근이 보다 용이하고 내부자의 악용에서 자유로운 주식시장을 만들고자 했다. 1930년대 초에 여러 가지 법률이 제정됐지만, 그의 눈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일례로, 증권거래법Securities and Exchange Act을 그는 “19세기 유물 같은 입법”이라고 불렀다. “못돼 먹은 은행가들”에 대한 적개심으로 들끓었던 그는 투자은행들 간의 경쟁을 높여서 은행가들의 독점을 막는 일에 앞장섰다. 그는 또 랜디스가 시행했던 공익기업 지주회사법을 철저하게 이어갔고, 장외시장에도 SEC의 법규 집행을 강화하고자 했다. 그가 시도했던 모든 일이 먹혀들지는 않았지만, 다음 세대의 개혁가들을 위한 체계적이고 효과적인 정책을 확립할 수 있었다. 더글러스는 “자본주의를 수호한다”는 각오로 일을 추진한다고 말했다. 물론이요, 옳은 말이다! 우리를 도와주기 위해 정부가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편으로 자본주의를 수호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동시에 은행가들을 “못돼 먹은 것들”로 취급하기란 아주 어려운 일이다. (중략...)

1929년에서 1932년 사이에 더글러스는 미국 상무부Department of Commerce 일로 여러 가지 금융 연구에 가담했다. 그 중에는 대공황을 겪으면서 커다란 관심 사항으로 부상한 파산과 기업회생과 같은 연구를 수행했다. 곧이어 그는 금융 관련 법률의 전문가로 유명해져서, 1936년 조 케네디가 SEC 초대 위원장으로 있을 때, SEC 위원으로 발탁됐다. 더글러스는 낯선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서먹하고 소심한 모습도 보였으나, 조 케네디와 루스벨트 대통령은 곧바로 그에게서 큰 호감을 느꼈다. 그는 순식간에 대통령의 “자문위원임과 동시에 친구, 포커 상대”가 됐다. 그는 루스벨트에게 마티니를 직접 타주면서 뿌듯해했다. 아마도 월스트리트 사람들은 그가 월스트리트에 이전과 다른 명약을 내놓을 요량으로 일을 준비하고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 다음해에 루스벨트는 더글러스에게 SEC 위원장직을 제의했다. 더글러스는 월스트리트가 아주 곤란한 처지에 몰려 있을 때 그 자리를 맡게 됐다. 왜냐하면 월스트리트를 이끄는 대표적 수장 가운데 한 사람인 뉴욕증권거래소(NYSE) 리처드 휘트니Richard Whitney 회장이 얼마 전에 약 300만 달러를 횡령한 혐의로 유죄판결을 받았기 때문이다. 월스트리트는 대공황 이래 최악의 불황에 시달리는 와중에, 이 추악한 사건으로 심각한 일격을 얻어맞은 격이었다. 더글러스는 자신의 SEC 임기는 “행동의 시기”로 기록될 것이라고 선언했다.

조 케네디가 업계 사람들과 협조적인 자세로 SEC를 이끌고, 또 랜디스가 꾸준하고 참을성 있게 협상을 추진했을 때보다 더글러스는 더 많은 “행동”을 만들어내는 데 성공했다. 그는 휘트니의 위법 행위에 들어있는 정치적 함의를 십분 활용했고, NYSE에게 스스로 개혁을 추진하도록 촉구하면서, 아니면 SEC가 개입하겠다고 으름장을 놨다. 그는 피상적인 변화 이상으로 근본적인 개혁을 요구했다. 휘트니가 NYSE에서 축출된 지 서너 시간 만에 더글러스는 이렇게 말했다. “증권거래소의 개편은 그저 눈 가리고 아웅 식이 아니라, 구체적인 사실에서 철저하고 완벽하게 추진돼야 한다. 증권거래소를 지배했던 예전의 모든 철학은 폐기돼야 한다. 말로만 폐기하는 게 아니라, 행동 자체에서 폐기돼야 한다.”

NYSE가 철저한 자정 노력을 하지 않으면 자신이 직접 개입하겠다고 더글러스가 엄포를 놓았지만, 과연 그럴 능력이 그에게 있었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그에 상관없이 NYSE는 그가 촉구한 개혁 방안을 찾아볼 생각도 없었고, 수행하고 싶지도 않았다. NYSE는 더글러스의 압력에 못 이겨서 13개 항에 달하는 개혁 프로그램을 내놓았다. 그 중에는 다음과 같은 조치들이 들어갔다: 거래소 회원사들에 대한 빈번하고 상세한 감사 실시, 개인투자자들을 상대하는 브로커들의 신용거래 계좌 사용 금지, 브로커의 채무잔고와 운전자금을 15 대 1로 유지, 회원사들간의 무담보 여신을 전부 보고하도록 하는 새로운 강제 규정의 도입.

더글러스는 장외시장 규제에 가장 큰 힘을 기울였다. 하지만 1938년에 활동하고 있던 장외시장의 위탁매매 업자들(브로커)과 자기매매 업자들(딜러)은 6,000 명 정도였는데, 이들을 하나로 묶어줄 만한 구심점이 없었다. 이렇게 사방으로 흩어져서 독립적으로 시장에 참여하는 업자들을 SEC가 직접 감독하는 것은 “현명하지도 않고 비현실적일 뿐 아니라 상상도 할 수 없다”는 그의 판단은 마땅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글러스는 그가 언급했던 유명한 통제선을 이용해 어느 정도 그들의 행동을 통제할 수 있었다. “정부는 뒷짐 진 채 총만 들고 있겠습니다. 다시 말해, 실탄을 장전하고 반들반들한 총신을 겨누면서 항상 사격자세를 취하고 있겠습니다. 다만, 실탄이 날아갈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더글러스에게 “뒷짐을 진 채” 쓸 수 있는 그런 무기가 있었는지는 분명히 알 수 없는 일이다. 기업역사가인 로버트 소벨Robert Sobel 교수는, 전임 SEC 위원장들(케네디와 랜디스)처럼 더글러스에게도 그의 으름장을 실행에 옮길 만한 예산과 인력, 힘이 부족했지만, 그가 노렸던 효과는 충분히 봤다고 평가했다. (중략...)


출처: 다음 자료에서 일부 발췌. "William O. Douglas: The Supreme Court Judge on Wall Street?", Chapter 6. New Deal Reformers, Kenneth L. Fisher, 《시장을 뒤흔든 100명의 거인들One Hundred Minds That Made the Market》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