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4월 15일 수요일

철학의 기본개념들(7강): 선의지와 공리주의, 미와 예술

자료: 소리아카이브, 강유원의 인문학 강좌 7강


강의: 강유원
필사: 임경준

이 블로그 게시물은 위 제목의 강의를 담은 원문이 아니라, 읽는 이가 공부하면서 적는 메모판이다. 원문을 보실 분은 위 원문 링크를 보시기 바란다.(2009.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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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를 갈아 마셔버리고 싶었던 적이 있는가? 대부분 마음은 먹었지만 뒷감당이 버거워서 구체적으로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래도 분한 마음은 삭혀야 하니까 아마 저주를 퍼붓는 등의 염력법念力法을 사용하는데 그쳤을 듯 싶다. 이렇게 보면 염력법은 힘없는 약자들이 쓴다. 강자들은 자신의 의지를 실천할 수 있는 뒷심이 있기 때문에 염력법을 사용하지 않는다. 회사에서 사장과 회사원을 떠올려 보라. 사장은 회사원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바로 해고할 수 있으나, 회사원은 사장이 마음에 안 들어도 어찌할 도리가 없다. 술자리에서 뒷담화나 하고 만다.

'갈아 마신다'는 표현을 좀 고상하게 바꾸면 '초극超克', 즉 '초월하고 극복한다'가 되겠다. 주위를 둘러보면 근대를 초극하겠다는 담론들이 무성하다. 대표적인 것이 이진경의 《자본을 넘어선 자본》이다. 그 의지만은 대단해 보이나 막상 읽고 나면 굉장히 공허하다. 내용이 모두 염력법으로 채워져 있기 때문이다. 근대는 책 한, 두 권으로 초극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근대가 갖고 있는 '땐땐함'을 결코 무시해서는 안 된다. 근대가 무엇인지부터, 즉 근대의 fundamental을 알아보는 것이 먼저여야 할 것이다.

근대는 서구역사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BC 5세기에 아리스토텔레스는 학문을 이론학, 실천학, 제작학으로 분류했다.
  • 이론학에는 형이상학,
  • 실천학에는 정치학과 윤리학,
  • 제작학에는 시학과 수사학이 해당한다.
이를 보면 서구사상의 기본적인 내용이 고대 그리스에서 정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스를 계승한 로마는 여기에 덧붙여 수사학과 법학을 체계화시킨다. 그리스와 로마의 공통점은 하나같이 인간중심의 학문을 주창했다는 것이다. 로마인들이 버릇처럼 쓰던 말이 있다. "honeste vive" 명예롭게 살라는 말이다. 여기서 명예로운 삶은 공동체의 유익에 기여하는 삶을 뜻한다.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을 보라. 오이디푸스는 떠돌이에 지나지 않는다. 그가 왕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인가? 공동체를 위기에 빠뜨린 스핑크스를 제거했기 때문이다.

고대를 대체한 중세에는 모든 인간들에게 원죄가 부과된다. 이제 세계를 구원하는 것은 인간이 아니라 신이다. 중세인들은 죄인으로서의 인간과 자애로운 신의 대립구도 속에서 언젠가 다가올 종말을 기다리며 그 종말에서 구원받기 위한 기도로써 살았다. 조르주 뒤비의 《서기 1000년과 서기 2000년 그 두려움의 흔적들》(동문선)을 읽어보면 구체적인 실상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이러한 중세가 1000년이 지속되었다고 말하곤 한다. 근대는 이 중세의 1000년을 깨부수고 등장했다.

지성사적인 측면에서 근대의 계기들로 흔히 르네상스, 계몽주의, 낭만주의를 꼽는다.
  1. 먼저 르네상스를 살펴보자. 르네상스인들은 중세의 굴레에서 벗어나고자 고대적 정신을 부활시키려 했다. 말하자면 르네상스가 기치로 내걸었던 인문주의는 고대의 '고귀한 인간'을 복귀시키려는 기획이었던 것이다. 단테의 《신곡》을 보라. 말 그대로 신성한 이야기이다. 단테는 여기에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아베로에스를 등장시킨다. 이교도들을 집어넣은 것이다. 단테가 신심이 깊지 않아서 그랬던 것이 아니다. 이교도라 할지라도 고귀한 덕과 품성을 지닌 인간이라면 신성한 이야기에 끼워주지 않을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리 한 것이다.
  2. 르네상스에서 계몽주의에로 전환되는 시점에서 인식론과 정치철학을 근대적으로 새롭게 정초한 이가 데카르트와 홉스이다. 이들이 이렇게 한 데에는 반 세기 동안 유럽을 살육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던 30년 전쟁이 주효했을 것이다. 계몽주의는 칸트에 의하여 집대성되고 다시 프랑스혁명을 거침으로써 낭만주의를 낳아놓는다.
  3. 낭만주의는 인간이성만을 강조한 계몽주의를 넘어서서 이제 인간 내면의 열정의 분출을 중요시한다. 즉 인간이 가진 내면성innerlichkeit을 '고귀한 인간의 복귀'라는 근대적 인간성의 한 측면으로 제기하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르네상스에서 출발한 근대적 패러다임의 여정은 낭만주의에 이르러 종결된다.
근대가 전개되어온 과정을 살펴만 봐도 근대를 초극한다는 것이 만만치 않은 일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최소한 앞서 설명한 것들을 10년씩 할당하여 공부해 봐야 한다. 그래야 근대가 우리 앞에 던져놓은 과제가 무엇인지 알 수 있으며, 오늘날의 우리는 어떤 것을 선택해야 하는지를 알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은 이상적인 인간으로 공동체의 유익을 주는 인간을 상정했다. 여기서 공동체는 보편적인 상황이 아니라 공동체 별로 각기 다른 특성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은 법칙적인 측면이 약하다. 그때그때의 상황에 융통성있게 대처해야 한다. 반면에 칸트의 윤리학은 추상화되고 보편화된 윤리를 추구한다. 왜 그랬나? 30년 전쟁이라는 극단적인 사태가 공동체의 결속을 모조리 파괴해 버렸기 때문이다. 스티븐 툴민의 《코스모폴리스》(경남대학교출판부)를 읽어보면 좋을 것 같다.

"일반[적]으로 진리의 파악이나 가치의 평가에 있어서 직각이나 직관을 그 근본기능이라고 보는 입장을 널리 직각론intuitionism이라고 한다. 따라서 윤리학에 있어서도 직각론자들은 양심을 정상적인 사람이면 누구에게나 갖추어져 있는 선천적 직가[지각?] 능력이라고 보며, 또한 도덕적 가치판단은 논리적 추론이나 경험을 기다릴 필요없이 이러한 직각에 의해서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점에서 직각론적 윤리설은 어떤 형이상학적 원리로부터 도덕적 가치를 논리적으로 추론해 내려고 하는 형이상학적 윤리설의 입장이나 또는 경험적 사실을 근거로 하여 거기에서 도덕의 원리를 이끌어 내려고 하는 자연주의적 윤리설의 입장과는 원리적으로 구별된다."

칸트의 직각론적/직관론적 윤리설은 형이상학적 윤리설과 자연주의적 윤리설과는 입장이 상이하다. 무엇보다도 경험적 사실과는 동떨어져 있는 것이기 때문에 굉장히 공허한 측면이 존재한다.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좀 상스럽게 표현하자면 칸트의 윤리설은 "어쩌라고"론적 윤리설이라 할 수 있겠다.

"직각론에는 여러 유형이 있으나 모든 개별적 행위에 관한 도덕적 평가의 기준이 되는 최고의 원리만을 직각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입장이 있다. 이것을 흔이 철학적 직각론이라고 부르거니와, 그 대표적인 예는 칸트의 윤리설이다. 인간은 이성적 존재자로서 자연계와는 다른 실천적 도덕적 세계에 살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단순한 자연물과 같이 단지 주어진 환경에만 적응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행위가 올바른가를 생각하고 실천에 앞서서 자신의 행위를 선택하게 된다. 이것은 곧 우리의 의식이 도덕율의 존재를 부정할 수 없는 사실로서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하여 칸트는 도덕율이 존재한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이성의 사실ein Faktum der Vernunft'이라고 한다. 도덕율이란 실천적 법칙Gesetz이므로, 그것은 모든 사람에 대하여, 아니 '모든 이성적 존재자의 의지에 대하여' 보편적으로 타당한 것이 아니면 안 되며, 그 점에서 주관적인 실천적 원리, 즉 격률Maxime과는 엄격하게 구별되어야 한다. 칸트는 도덕율로부터 일체의 경험적 요소, 즉 일체의 질료적 규정을 배제하려고 하거니와, 그 경우에는 '단지 형식적으로만 의지의 규정근거를 포함하고 있는 원리', 즉 보편적 입법의 단순한 형식만이 남게 될 것이다. 그리고 도덕율이 그처럼 이성의 사실로서 존재하며 또한 형식상으로만 의지를 규정하는 것이라면, 그 규정을 받아들이는 우리의 의지는 곧 자유가 아니면 안될 것이다... 이와같이 칸트는 도덕율이 존재한다는 사실에서 출발하여 의지의 자유를 확증하거니와, 그에 의하면 의지의 자유는 도덕율의 존재근거요, 도덕율은 의지의 자유의 인식근거라고 한다. 의지의 자유가 없다면 도덕율은 성립할 수 없으며, 또한 우리는 의지의 자유를 직접 확인할 수가 없고, 다만 도덕율의 존재를 통해서만 이를 의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칸트철학에서 자연의 법칙과 실천의 법칙은 형식이나 내용이 원리적으로 구별된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두 가지 영역이 서로 엄격하게 분리되어 있기 때문에 칸트철학의 범위에서 인간은 정신분열에 빠지기 쉽다. 칸트처럼 이것들을 깔끔하게 분리시켜 놓고 살지 않는 한 매우 어렵다.

칸트는 모든 인간의 내면에는 이성이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을 자신의 윤리학의 출발점으로 삼는다. 칸트는 이를 '이성의 사실ein Faktum der Vernunft'라고 표현한다. '이성의 사실'이야말로 칸트 윤리학의 제1전제이며, 그런 까닭에 이것은 논증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 요청postulat의 대상이 된다. 또한 이것은 모든 이성적 존재자의 의지 안에 들어있는 것이다. '모든'이라는 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조건이 충족되기 위해서는 누구라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보편타당한 특성을 가져야 할 것이다. 이는 개별적 경험에서 얻어지는 진리값을 제거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칸트가 일체의 경험적 요소를 자신의 윤리학에서 제거하는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칸트의 윤리학의 가장 큰 특징은 그것이 의무의 윤리학이라고 하는 데에 있다. 그의 윤리학의 출발점은 선의지였다. 의지란 곧 이성에 따라 행위를 결정하는 능력이요, 이를 다른 말로 표현하면 실천이성이다. 그러므로 선의지란 이성의 가르침에 따라 옳은 행위를, 그 결과야 어떠하든 단지 그것이 옳다는 이유만으로, 선택하는 의지이다. 이와같이 행위의 결과를 전연 고려하지 않는 선의지의 동기는 칸트에 의하면 객관적으로는 도덕율의 표상이라고 할 수 있으며, 주관적으로는 도덕율에 대한 존경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결과에 대한 고려나 자연적 경향과 조금도 타협하는 일 없이 도덕율을 위하여 도덕율을 준수하는 것이 우리에게 과해진 절대적인 의무라고 생각하고, 이러한 의무의 의식에서 의무를 행하는 의지만이 선한 것이다. 그러므로 칸트에 의하며[면] 의무에 반하는 행위, 즉 경향에서 결정된 행위가 반도덕성을 갖는다는 것은 두 말할 필요도 없지만, 비록 <의무에 맞는pflichtmäßig> 행위라 할지라도 그것이 <의무에서aus Pflicht> 한 행위가 아닌 한 적법성Legalität을 가질 뿐이요, 도덕성Moralität을 가지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쉬어 가면서 다음에 공부하자...
... 이렇게 강의를 마련하고 글을 만들어 공개해주신
저자와 필사에 애쓰신 분들께 감사한다.
이렇게 편안히 앉아 공부할 수 있으니 참 큰 복이다....)



칸트는 선의지가 행위의 결과를 고려하지 않을 때만이 성립된다고 주장한다. 이 때문에 칸트의 윤리학을 동기주의 윤리설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러니 동기없이 어쩌다 보니 우연하게 이뤄진 결과는, 비록 그 표면적인 형태가 선한 것이라 할지라도 의무에 이끌린 행위가 아닌 까닭에 적법성을 가질 뿐이지 도덕성을 갖지는 않는다. 앞서 설명했듯이 칸트철학에서의 윤리는 보편타당한 것이 되어야만 한다. 그래서 칸트의 도덕법칙에는 어떠한 조건도 붙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오로지 그것 자체가 목적이어야 하며 그런 까닭에 명령문으로써 표현된다. 칸트의 도덕법칙은 정언명령Categorical Imperative이라는 형식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이는 조건을 다는 가언명령Hyper Imperative와는 구별되는 것이다. 도덕법칙이 드러나는 형식을 중요시하기 때문에 칸트의 윤리학을 형식주의의 윤리학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처럼 칸트는 자신의 윤리학에서 일체의 경험적 요소를 배제해 버리기 때문에 초시간적인 보편타당성을 얻는다. 어쩌면 이런 점이 오늘날에도 칸트의 윤리학이 유효하게 보여지게 하는지도 모른다. 개별적인 특성에 맞추어서 그때그때 적절하게 대응해야 하는 아리스토텔레스와는 정반대의 지점에 칸트가 위치하고 있는 셈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실천적 지혜phronesis--아마도 실천적 지혜를 묶은 의미의 희랍어가 이 외국말인가 보다--이 독자를 오늘날에 의미있게 읽어내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융통성이 필요한 반면에 칸트는 시공간을 초월하여 의미를 가진다. 어쨌든 칸트는 이렇게 하여 자신이 출발했던 지점, 인간의 주체성이 모든 것의 준칙이 되어야 한다는 테제를 끝까지 밀어붙임으로써 자신의 철학체계를 일관성 있게 구축한다. 그리고 바로 이런 점이 칸트가 계몽주의의 완성자인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 낭만주의의 선조로서 평가되는 점이기도 하다. 이사야 벌린은 《낭만주의의 뿌리》에서 칸트를 낭만주의의 숨겨진 선조로 지목한다. 왜 그런가? 인간의 주체성을 외부로부터 독립시킴으로써 내면의 준칙이 곧 우주의 준칙으로 정립시켰기 때문이다. 이를 더욱 밀고 나가서 내면의 열정을 불러일으키면 낭만주의가 된다. 그러니까 윤리의 준칙이 공동체라는 외부로부터 주어지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입장에서 볼 때 칸트는 세상물정 모르고 자신의 내면으로 퇴각한 것이지만서도, 낭만주의의 입장에서 볼 때는 내면을 해방시킴으로써 밖으로의 분출을 위한 토대를 다진 것이 되는 것이다. 칸트는 내용이 텅 비어있는 순수한 형식주의의 윤리설을 주장한다. 이에 반하여 내면에 있는 형식을 따를 것이 아니라 원하는 것을 따르라고 주장하는 것이 자연주의이다. 자연주의가 좀더 극단화되면 이익되는 것이 선한 것이라는 공리주의가 된다. 즉 공리주의는 내용을 철저히 이익으로 채우자는 것이다. 근대는 이 같이 극단적으로 대립되는 윤리학이 낳아놓는다.
  • 하나는 지극히 형식적인 윤리설이고,
  • 다른 하나는 지극히 탐욕적인 내용을 채우는 윤리설이다.
  • 그 사이에 의지의 열정을 분출시키는 낭만주의가 위치한다.
이 모든 것이 서구의 근대에 나온 것이니, 근대야 말로 사상의 용광로였던 셈이다. "자연적 내지 경험적 사실을 근거로 하여 거기에서 도덕의 원리를 이끌어 내려고 하는 입장을 널리 자연주의적 윤리설이라고 한다. 이것은 윤리학사상 일찍부터 여러 모로 전개되어 온 사상으로서, 특히 사실의 어떠한 측면을 도덕적 가치의 근거로 보느냐에 따라 다시 여러 입장으로 구별되기도 한다.
  • 즉 에피쿠로스, 홉스, 벤덤 등의 쾌락주의적 자연주의,
  • 스펜서, 니이체 등의 진화론적 자연주의,
  • 제임스, 듀이 등의 실용주의적 자연주의,
  • 산타야나의 심미적 자연주의 등이 그것이다."
도덕의 원리를 이끌어 내는데 형식을 강조한 칸트와는 달리 자연주의적 윤리설은 경험적 내용을 기초로 한다. 이 경험적 내용이 탐욕으로 채우는 것, 다시 말해 탐욕을 기준으로 삼아 도덕의 원리를 끌어내는 것이 자본주의적 인간관의 토대가 된다.

"공리주의는 소박한 쾌락주의를 넘어서서 사회전체에 쾌락 내지는 행복을 도모하려는 사
회적 쾌락주의이다. 그리하여 공리주의가 표방하는 윤리적 원리는 '최대다수의 최대행복'
이다... 벤덤이 전개한 공리주의의 요점은 이러하다:
  1. 쾌락이나 행복은 낳는 행위는 선이요, 고통 또는 불행을 낳는 행위는 악이다.
  2. 도덕의 원리는 사회의 공익에 있으며, 공익은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각 개인의 이익의 총계이다.
  3. 도덕은 도덕가의 주관적 판단에 의하여 결정되어야 할 것이 아니라 인간성의 객관적 법칙 위에 수립되어야 한다.
  4. 쾌락과 고통의 양은 과학적으로 측정할 수 있다.
  5. 개인의 快苦의 감수능력은 평등하므로, 사회의 공익을 생각할 때에는 누구나 한 사람으로서 계산되어야 한다.
  6. 입법과 통치의 원리도 이러한 도덕의 원리와 같다."

자연주의적 윤리설의 선구자는 고대의 에피쿠로스이다. 그리고 근대에 이 같은 전통을 계승한 이가 홉스와 벤담이다. 그런데 에피쿠로스의 자연주의와 홉스·벤담의 자연주의는 그것들이 다루고 있는 범위의 측면에서 구별된다. 에피쿠로스의 자연주의는 개인적 차원의 쾌락만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소박한 쾌락주의적 자연주의이다. 이에 비해 홉스와 벤담의 자연주의는 사회 전체의 쾌락을 염두에 둔다는 점에서 소박한 쾌락주의를 넘어서는 사회적 쾌락주의에 기초한다. 이러한 사회적 쾌락주의는 홉스에서 시작되어 벤담에 이르면 공리주의로 전개된다.

공리주의의 특징은 6가지로 요약될 수 있는데, 이는 전자가 후자의 근거가 되는 식으로 전개된다. 이중에서 "1)쾌락이나 행복은[을] 낳는 행위는 선이요, 고통 또는 불행을 낳는 행위는 악이다"라는 주장이 특히 중요하다. 17세기의 홉스는 《리바이어던》에서 나에게 이익이 되는 것이 선이요, 그렇지 않은 것을 악으로 규정한다. 21세기인 오늘날에 들어도 썩 유쾌한 발언은 아니다. 그런데 이런 말을 17세기에 했다고 생각해 보자. 모르긴 몰라도 굉장히 충격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어떤 학자는 홉스의 견해를 재해석하여 홉스의 이론이 17세기 당시에 성장하던 신흥 부르주아 계급의 이론적 정당화를 제공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어쨌든 이러한 쾌락주의는 굉장히 낯설고 충격적이었음은 분명하다. 에피쿠로스의 쾌락주의만 해도 최소한의 넘어설 수 없는 선의 한도가 있었다.

푸코의 판옵티콘을 들어봤나? 서대문형무소를 떠올리면 된다. 육각형 모양의 감옥이 있고 그 가운데에 감시탑이 세워져 있는 구조다. 여기에서는 어디라도 감시탑의 가시권 안으로 들어가기 때문에 수감자들은 시도때도 없이 자신이 감시당하고 있다는 불안감에 시달린다. 판옵티콘의 예를 통해 푸코는, 권력이란 단순히 물리적인 폭력을 행사할 수 있는 것뿐만 이 아니라 인간에게 감시당하고 있다는 불안감을 심어놓음으로써 피감시자가 권력이 작동하는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 것이라는 정의를 내놓는다. 바로 이 판옵티콘을 설계한 사람이 벤담이다. 벤담이 판옵티콘을 개발한 이유는 간단하다. 범죄자를 감시하는데 효율적이기 때문이다. 효율적라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나? 객관적 법칙인 '이익의 총계'를 산출함으로써 알 수 있으며 이것은 수학을 통해서 결과를 내놓는다. 자연주의적 윤리설이 공리주의에 들어서면 이제 도덕의 원리는 효율성의 원리로 치환 [중요한 명제니 기억해두자]되며 이것이 궁극적으로 사회적 입법의 기초가 되는 것이다.

"도덕적 생활에 있어서는 보다 많은 행복의 획득을 위해서이든 공공의 복지의 증진을 위해서이든, 또는 민족정신의 문화적 형성을 위해서이든 이성이 의지와 욕망을 통해서 자기의 행위를 규제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성이 행위를 규제하는 생활을 우리는 성실하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적 욕구에는 언제나 일종의 결핍, 즉 불만이 전제되고 있다. 설사 가치윤리가 이성적 세계질서에까지 승화되었다 하더라도 거기에는 항상 인간적인 것, 지상적 인간의 잔재가 부착되어 있다. 인간의 욕망이나 의지 등에 의해서 지배되는 윤리적 가치 이외에 다른 가치가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욕망이나 의지에 기초를 두지 않은 새로운 가치이어야 한다. 그것은 예술적 가치이다."

앞서 언급했던 윤리적 가치는 욕망이나 의지에 기초하고 있다. 반면에 예술적 가치는 이것들에 기초하지 않는다. 윤리적 가치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욕망이나 의지를 순화시켜서 인간이 윤리를 지키며 살아야 한다고 주장할 것이다. 그러나 예술적 가치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예술적 가치란, 윤리적 가치 이외의 다른 가치이므로 윤리적 가치의 잣대로 예술적 가치를 판단할 수는 없다고 주장할 것이다. 그래서 예술적 가치의 입장에 서있는 사람들은 음란물에 대해 판단하지 않는다. 윤리적 가치의 차원에서야 음란물이 도덕이나 법률의 개입 아래 두어야 한다고 주장할 수 있겠지만, 이와는 출발점이 다른 예술적 가치의 차원에서는 이런 문제를 다루는 것 자체가 무의미한 것이다.

"'미학aesthetics', '예술학science of art', '예술론theory of art'을 구별해둘 필요가 있다. 미학은 미의 형이상학적 내지 심리학적 분석으로서 철학의 한 분과이며, 예술학은 미의 대상을 예술작품에만 한정하고 역시 그것을 학문적으로 다루는 과학이다. 이 점에서 예술학은 미학의 한 좁은 영역이라 할 수 있다. 예술론은 작가, 예술가 또는 사상가가 창작의 체험이나 자기의 인생관, 세계관에 입각해서 예술에 대하여 표명하는 견해나 태도를 말한다. 그것은 본래 학문이 아니다."

'미학', '예술학', '예술론'을 구별하고 있다. 1)미학aesthetics은 아름다움의 본질은 무엇이며, 특히 그 아름다움에 대한 우리의 판단은 어떻게 성립되는가를 따져 묻는 철학의 한 분과이다. 2)'예술학science of art'은 예술작품 그 자체의 아름다움을 탐구하며, 3) '예술론theory of art'은 예술작품을 보는 이의 주관적인 영역에서 살펴보는 것을 말한다.

"칸트는 미학에 하나의 커다란 전기를 마련하였다. 《순수이성비판》에서는 오성의 선천적 원리를 규명하여 자연과학적 지식의 기초를 밝히고 《실천이성비판》에서는 의지의 선천적 원리를 규명하여 자유개념을 기초로 하는 도덕을 확립하였다. 인식능력으로서의 오성과 이성의 중간에 판단력이 있다. 자연개념에 의한 입법은 오성에 의하고, 자유개념에 의한 입법은 이성에 의한다. 그러므로 오성과 이성은 상이한 두 법을 경험이라는 동일한 영역 위에 베풀지만, 그러나 이 양자는 상호 불가침이다. 자연개념은 자유개념에 의한 입법에 영향을 미치지 못하며, 그 역도 마찬가지다. 여기에 이론이성과 실천이성의 중간에 있으면서 양자를 결합시키는 능력으로서의 판단력이 오성에서 이성으로의 이행을 가능하게 한다."

칸트는 오성과 이성을 구별한다. 오성은 대상세계의 데이터를 받아들여 인식으로 성립시키는 능력이며, 이는 《순수이성비판》에서 다뤄지는 주제이다. 이성은 오성을 넘어서는 어떤 초월적인 능력을 말하는데, 이는 《실천이성비판》에서 다뤄지는 주제이다. 이 두 가지는 서로 불가침적이어서 둘 사이의 중간단계에 있는 것으로 칸트는 이것으로 '판단력'을 지목하고 《판단력 비판》에서 구체적으로 탐구한다. 《판단력 비판》은 1)미적 판단 2)목적론이라는 상반되는 영역을 탐구한다. 그래서 《판단력 비판》은 칸트의 이전 저작들과는 달리 깔끔한 맛이 적다.

"칸트는 내용을 사상한 형식미학Formästhetik을 주장한다. 내용은 감각인데 거기에는 쾌, 불쾌의 경험적 감정(자극성)은 있으나 미감이 없다는 것이다. 순수성 -- 순수한 미적 판단 -- 은 형식에 있고, 거기에 진정한 미가 있다고 한다. "순수성은 형식에 속한다. 왜냐하면 이 경우에는 우리는 감각의 성질로부터 떨어질 수가 있기 때문이다.""칸트는 쾌, 불쾌의 경험적 감정이 외부에서 들어옴으로써 미적 판단이 성립하는 것이 아니라, 순수하게 내면의 주관에 있는 쾌, 불쾌의 형식이 미적 판단을 성립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니까 칸트철학에서 미는 대상세계에 전혀 의존하지 않는 것이다. 칸트의 미학을 '무관심적 관심'이라 말하는 것이 이 때문이다. 여기서 '무관심'은 그 대상의 질료와 내용에 의존하지 않으나 그것의 미 자체에 대해서는 '관심'을 가져야 함을 말하는 것이다.

"칸트와 대립적인 입장에 서있는 것이 내용미학Gehaltästhetik이다. 이 사상은 미적 가치가 표현의 형식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표현물의 내용에 있다고 주장한다."

내용미학을 충실하게 정리한 책은 헤겔의 《미학강의》이다. 내용미학은 표현물에 내용이 있다고 주장하기 때문에 표현물의 내용이 미를 담지하느냐 안 하느냐에 따라 논쟁의 여지가 크다. 이 점에서는 형식미학이 공부하기에는 깔끔한 편하다. 어쨌든 칸트는 미학에서 마저도 주관성의 내면의 형식이 미를 판별한다는 주관주의를 radical하게 밀어붙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