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8월 6일 수요일

금융선물 탄생의 대 서사시: 영원한 트레이더, 리오 멜라메드

지난 생각의 편린을 찾아보다가 다시 읽어 본다. 작년에 번역했던 책(영원한 트레이더, 리오 멜라메드)의 역자후기를 상기할 겸해서 붙여본다. 2007년 6~7월 경에 썼던 것 같다. 고쳐 쓸 부분은 없는지도 살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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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선물시장에 금융선물(financial futures) 상품을 처음으로 도입한 리오 멜라메드(Leo Meamed)는 금융선물의 아버지로 불린다. 이 책은 폴란드의 비알리스토크에서 태어난 그가 어떻게 시카고상업거래소(CME)에 발을 들여놓게 됐고, 어떤 과정을 거쳐서 양파와 달걀의 선물계약밖에 거래되지 않았던 CME를 통화(currency), 재무부증권(T-bill), 양도성예금증서(CD), 유로달러(Eurodollar), 주가지수(stock index)가 거래되는 선물시장으로 일구어냈는지를 자서전으로 기록한 것이다. 여느 자서전과 마찬가지로 리오 멜라메드의 자서전은 그가 살면서 겪고 지켜본 일들을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한 사람의 독자로서 옮긴이게는 그의 자서전이 독특한 의미로 다가온다.


살아 있는 시장의 역사: 금융선물이 탄생하는 대하 드라마

우선, 그가 기록하고 있는 삶의 소절 하나하나가 살아있는 시장의 역사라는 점이다. 그는 금융시장제도론이라든가 외환거래법과 같은 이미 있는 교과서나 법률을 따라서 새로운 시장을 만든 것이 아니다. 그 과정은 오히려 그 반대로 전개됐다. 존재하지 않는 시장을 새로 만들언낸 것이어서, 그 시장의 원리와 참여자들의 논리, 시장이 굴러가는 데 필요한 제도의 첫단추에서부터 성공적인 시장으로 자리 잡기까지 그가 적어가는 고민과 대화, 여러 가지 행동과 싸움, 또 성공과 실패는 다양한 금융선물 시장이 탄생하는 대하 드라마다. 그런 의미에서 꿈틀대며 그 존재를 드러내는 시장의 살아있는 역사라 하기에 부족할 것이 없다. ‘개체 발생은 종족 발생을 반복한다.’ 도무지 머리는 몇 개이고 또 꼬리는 몇 개인지 알 수 없는 거대한 공룡들처럼 되어버린 현대 금융시장이 어떤 개체 발생을 거쳤는지를 독자들은 볼 것이다. 한편, 새로운 사업에는 사업계획서가 필요하듯, 존재하지 않던 시장이 새로 태어나려면 새로운 시장이 작동하는 원리가 있어야 한다. 또 이 시장이 의지할 만하며 먹을 것도 생기는 시장이라고 새로운 시장 참여자들이 인정해야 한다. 리오 멜라메드는 통화선물, 재무부증권 및 유로달러를 기초상품으로하는 금리선물, 주가지수선물을 새로 도입하면서 현실에서 부딪쳤던 그 각각의 시장 원리와 새로운 논리를 생생하게 적고 있다. 독자들은 딱딱한 이론서나 우리 시장의 언저리에서 일부 무책임한 ‘전문가들’이 하는 설명과는 달리 생동감 넘치면서도 상세하고 성실한 설명을 볼 것이다. 왜냐하면 시장을 처음부터, 또 기초부터 만들면서 부딪쳤던 질문과 대화, 고민과 행동을 기록한 내용 그 자체가 그 시장의 공식 교과서라고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언제나 시장을 맴도는 트레이딩 세계의 원형(原型)들
둘째로, 금융이나 산업의 역사 서적을 읽으라고 하면 손사래부터 치는 독자들이 많을 것이다. 그 많은 사건과 인물, 참고문헌들 사이를 오고가는 장구한 설명에서 머리를 쥐어뜯어본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책을 읽어가다 보면, 세계화와 금융자본의 위력이 전면에 부상하기 시작한 1970년대 초 이래 세계 금융시장의 흐름을 흥미진진하게 보게 된다. 1971년 브레튼우즈 체제의 붕괴, 1976년 멕시코 통화위기, 가공할 인플레이션을 배경으로 벌어진 그보다 더 가공할 헌트(Hunt) 형제의 은(銀) 시장 매점(1970년대 말~1980년), 1987년 10월 블랙 먼데이(Black Monday)와 같은 굵직한 사건들은 이 책에서 역사가 아니라 멜라메드가 직접 체험한 아슬아슬하고도 흥미진진한 사건으로 펼쳐진다. 브레튼우즈 체제의 고정환율 시스템이 붕괴하느냐 아니냐는 통화선물 시장이 사느냐 죽느냐 하는 문제였고, 마찬가지로 멕시코 통화위기와 블랙 먼데이의 충격은 CME가 문을 닫느나 마느냐 하는 문제였다. 한편, 저자가 헌트와 직접 대면했던 이야기도 나오지만, 은선물 거래에 직접 참여해서 큰 수익을 낸 이야기도 흥미진진하다.


셋째로, 지은이는 경제학을 전공한 것도 아니고 선물시장과 금융시장을 이론으로 알게된 것도 아니다. 그는 1950년대에 CME 입회장에서 사자와 팔자 주문을 들고 뛰어다니는 잔심부름꾼으로 시작해서, 큰 돈을 벌기도 하고 큰 손실을 내면서 가려한 죽음을 맞기도 했던 입회장의 트레이더들에게서 트레이딩과 시장의 생리를 배우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그는 지금과 같은 챠트도 없던 시절의 기술적 분석을 신봉하는 트레이더들과 이들을 경멸하는 펀더멘털리스트 트레이더들을 만난다. 또 이 두 부류의 방법론을 모두 무시하고 오로지 작전이나 속임수를 중시하는 트레이더들도 만난다. 지은이는 이들을 회상하면서 트레이딩 세계의 다채로운 인간 군상을 보여준다. 현대 선물시장과 금융시장에는 다양한 거래기법들이 개발돼 있다고 하지만, 1950~60년대에 실존했던 트레이더들의 이야기들에서 엿보이는 트레이딩 세계의 원형(原型)들은—그 거래종목이 양파나 돼지고기이든, 아니면 현물주식이나 선물옵션이든—지금도 우리 주변에서 살아 움직이는 것 같다. “외고집으로 시장에 맞서서 이기는 사람 못 봤다”라든가 “큰 손실보다 큰 수익을 관리하기가 더 어렵다”, “훌륭한 트레이더는 자신의 실수를 빨리 인정할 줄 아는 트레이더이다”라는 말과 같은 트레이딩 세계의 격언들은 동서고금이 없는 것 같다. 이런 내용들을 실존 인물들의 이야기로 읽는 재미도 있지만, 옮긴이도 경험한 바 있는 뼈아픈 실수와 잘못을 되새기게도 된다. 그 원형들이 조만간 대량으로 재생산되리라는 불길한 생각에 연일 강세장을 이어가는 요즈음 우리 주식시장을 보는 마음이 사뭇 남다르다.


냉혹한 금융시장에서 보기 힘든 인간적 열정

마지막으로, 리오 멜라메드는 홀로코스트의 전야인 1939년에 그의 부모와 함께 폴란드에서 탈출한다. 근 2년에 걸친 피난 여정에서 그 가족은 나치와 스탈린 체제의 감시망을 뚫고 폴란드, 리투아니아, 모스크바, 시베리아, 일본을 거쳐 유대인 난민으로 미국에 들어온다. 이때가 그의 나이 8~9세 시절이다. 그 여정을 기록한 것이 이 책의 제2부 “시베리아 특급”이다. 지구의 반 바퀴를 도는 길고도 위험한 탈출에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치명적이고 결정적인 순간마다 정확하고도 신속했던 그의 부친의 결단 덕분이었다. 미국 홀로코스트 추모관 사업을 부흥시킨 일원이었고 미국유대인위원회의 인권대상도 수상한 바 있는 리오 멜라메드로서는 이미 작고한 그의 부친에 대한 감사와 추모를 위해서라도 자기 자서전에 이 이야기를 빠뜨릴 수 없었을 것이다. 저자는 동유럽 유대인들의 모국어인 이디시어(Yiddish) 표현들을 하나하나 떠올리며, 마치 사진 앨범이라도 만드는 것처럼 유난히도 애틋한 옛 기억에 대한 애착을 되새기고 있다. 1941년에 미국에 들어온 그는 1969년에 CME의 회장으로 선출된다. 그리고 1977년 특별고문을 시작으로 또다른 경영일선을 맡아 1991년 명예회장으로 은퇴하기까지 20년간(1969~1989년) 보수 한푼 받지 않고 CME를 이끌었다. 그는 오로지 입회장에서의 트레이딩으로 생계비와 소득을 마련했다. 금융산업에서 스톡옵션은 고사하고 월급도 받지 않았던 회장. 독자들은 본문에서 그의 대답을 듣게 될 것이다.


무일푼의 유대인 난민으로 미국에 입국해 금융선물이라는 산업 전체를 일구어낸 입지전적인 과정의 이면에는 이러한 유대인의 역사가 없을 리 없다. 어린 시절 그의 가족과 친척에 대한 애틋한 회상을 담아 이디시어 그대로 표출한 지은이의 정감과 분위기를 전달해 보고자, 인터넷상의 이디시어 사전들과 이디시연구소Institute for Yiddish Research(YIVO, 유대연구소Institute for Jewish Research라고도 한다) 웹사이트의 알파벳 발음표기와 음성파일을 들으며 가능한 한 정확한 발음을 추적하려고 애썼다(물론 모두 정확하지는 않겠지만). 아직 얄팍한 학습에 불과하지만, 언젠가 이디시어를 배워볼 기회를 얻게 돼서 수십 개국의 언어로 번역되리만큼 세계 문학에 큰 족적을 남긴 이디시 문학 중 일부 단편이라도 읽어보리라는 만학도로서의 꿈이 생겼다면, 이 또한 이 책을 번역한 소득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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