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가로서 어렵게 살고 있지만, 참 우스꽝스러운 일이 벌어졌다. 번역가들이 모인 공동체라고 들어서 바른번역이라는 곳에 회원으로 가입해 번역활동을 한 지 일년이 넘어가는 시점이다. 이 공동체는 나름대로 공감하는 번역가들의 공동체이기도 하면서, 번역가들과 번역출판을 하는 출판사, 양자의 필요를 해소해주는 중개기능을 담당하는 곳 중의 하나다.
시장을 공부한 경제학도로서, 또 시장이라는 경제와 경제외적인 왜곡을 직장 세계에서 경험한 한 인간으로서, 번역가들이 모였다는 이런 공동체의 가치에 호감이 가서, 일년 전에 가입을 했다.
이 공동체는 참 이점이 많다. 내가 번역료로 100을 받기로 계약하면, 10을 이 공동체의 운영비로 낸다. 주1) 그러면 나에게 남는 게 90이다. 100 중의 10이 아까울 수도 있다. 하지만 번역의뢰를 해주는 출판사와 일일이 협상을 하고, 다른 번역 건과 일정을 조율하고, 계좌번호를 알려주고, 지급이 약속대로 진행되지 않을 경우에 통화를 해야 하고, 또 프리랜서인 개인으로서 세금(원천징수와 종합소득세 신고)과 관련된 행정업무를 처리해야 하는 그런 일들을 대행해주기도 하는 공동체를 만났기에 참 반가워서 언뜻 가입했던 게 일년이 지났다. 사실 번역가로서 상대해야 하는 출판사가 대충 세 곳 이상만 되어도, 위와 같은 여러 가지 사안으로 통화해야 할 일도 꽤 많다. 당연히 그 통화료도 비용이요, 통화하면서 그 전후로 내가 내려야할 의사결정과 그와 관련된 마음 씀씀이 자체가 사실은 시간 비용이다. 그래서 나는 10 퍼센트 운영비가 비싸지 않다고 생각했다.
이런 관계 하에서 6월 말이나 7월 초 즈음, 그러니까 대략 한 달은 되었나 보다. 어느 출판사에서 원서로 400쪽 분량의 경영전략과 조직행동 전략 분야의 영어권 서적 번역의뢰를 이 공동체를 통해서 의뢰받았었다. 그 번역계약은 내가 10월 초부터 작업에 들어간다는 전제 하에 2009년 2월말까지 번역을 마치기로 협의가 됐었고, 번역계약일자는 7월 7일이다. 그 계약서 상에 추정 번역원고료로 내가 제시했던 번역 원고료의 10%인 계약금을 지급할 날짜는 계약서 작성일자로부터 10일 이내라고 계약서가 작성됐다. 그러면 계약금 지불일자는 7월 17일이다.
약속대로 이행할 의사가 없는 계약서?
그런데, 7월의 말일인 31일이 지나도 내 핸드폰에서 입출금을 알리는 신호가 오질 않는다. 또 주말을 포함해 며칠을 기다리는데, 아무 소식이 없다. "이거 내가 계약서를 잘못 본 거 아니야?"하는 생각은, 상식적인 인간이라면 당연한 수순이다. 즉 내가 불만을 품기 이전에 불만스러월 할 만한 일이 있었던가를 점검하는 일이다. 계약서는 내가 봤던 그대로였다. 이 번역작업에 투입할 시간은 2008년 10월부터 2009년 2월말까지이니, 5 개월이다. 그 5 개월을 들일 "번역"이라는 노동 계약서가 7월 7일자로 작성되어, 내가 의지하는 공동체와 출판사가 그 계약서에 도장을 찍은 이미지 파일을 내가 저장해 가지고 있다.
그런데, 이 출판사의 대외 지불 관행이 매월 말일이라고 해서, 계약서 상 지급일자가 7월 17일임에도 불구하고, 7월 31일에 지급할 거라는 공동체 회계 담당자의 말을 전해듣고 좀 황당했다. "그러면 계약서를 7월 31일이라고 쓰는 게 상식이 아닌가?"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아니, 계약 따로 관행 따로 할 거라면 계약이 뭐가 필요하며, "기대하는 현실"을 "약속"한다는 게 "계약"일 텐데 굳이 "기대하는 현실"과 "계약"을 따로 할 거라면 계약할 이유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7월 31일 매월 말일자 지급이 관행이라는 그 지급일자에도 계약금은 지급되지 않았다. 8월 4일, 월요일, 그러니까 어제 이 사실을 확인했다. 당연히 그 날에 그 공동체의 회계 담당자분께 뭔가 잘못돼 있다는 내 의사표시를 메일로 전달했다. 웬걸, 다음 날 그 회계 담당자분께서 파악한 상황이 이렇게 나에게 전달됐다:
" 그 출판사의 회계 담당자가 8월 7일까지 휴가여서 8월 8일부터 <언제 지급될지>를 알아볼 수 있겠다."
문제의 이 출판사는 원래 계약금 지급일자인 7월 17일 지급을 이행하지 않았다. 그 다음으로, 그 출판사 <나름의> 지급 관행이라는 말일자(즉 7월 31일) 지급도 그 <나름대로> 어겼다. 그러면 법률의 법자도 공부하지 않은 신림동 예비 고시원생들의 길을 막고 물어본다고 하더라도, 이 7월 7일자의 계약서가 계약서로서 유효하다고 할 중생들이 도대체 몇이나 될까?
어쩌면 내가 "행복한(?)" 고민을 한다는 분들도 있을지 모르겠다. 계약금을 제때 받기는커녕, 완역 원고를 납품하고 나서 계약금을 받게되더라며 푸념하는 번역가 분들도 만났었기 때문이다. 안타까운 일이다. 이런 사례를 볼 때도 그렇지만, "시장"과 거래라는 것은 전혀 당연한 것도, 자연스러운 것도 아니다. 인간의 의지가 개입되지 않고는 돌아가지 않는 게 시장이다. 그래서 평소에 나는 "보이지 않는 손"이라는 아담 스미스의 말은 잘못됐거나, 경제학계의 그 후예들이 오해하고 있는 내용이라고 믿고 있다. "보이지 않는 손"은 보이지 않는 게 아니라 원래 없다. "보이는 제도의 기능"이 너무 매끄러워서 "공기와 물"처럼 "느끼지 못할 정도일 가능성이 있다"는 "이상형"으로 해석해야 옳을 것이다. 과연 아담 스미스가 죽고 난 뒤에 펼쳐졌던 식민지와 후진국의 시장경제라는 것이 과연 시장인 것인가를 아담 스미스가 곰곰히 살펴봤다면, 그는 도저히 "보이지 않는 손"이라고 시장을 묘사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가 바보가 아니었다면 말이다.
나는 다음과 같이 판단했다.
어느 비즈니스 파트너가 "충분히 사업 가치를 인정한다는 합작투자 건"에 어느 날짜까지 그 전체 투자 지분의 10%을 계약금으로 지불하기로 <계약서>를 작성해 도장을 찍었는데, 그 지급 일자를 두 번이나 이행하지 않았다. 첫 번째 지급 불이행은 계약서와는 다른 <그 파트너 내부의 관행> 때문이었고, 두 번째 지급 불이행은 < 그 파트너의 회계 담당가가 휴가를 갔기> 때문이었다! 이렇다면 그 <합작투자>가 제대로 된 약속이라고 생각할 이가 누가 있을까?나는 이런 계약을 파기해야겠다. 아니, 내가 파기한 게 아닌 게 분명하다. 상대방이 이미 파기한 거니까, 내가 파기하고 말 게 없다. 그냥 약속이 말장난이 됐다고 보는 게 맞을 것이다.
도대체, 이런 게 우리나라 출판계의 <상식 아닌 상식>, 이름하여 <몰상식>이란 것일까? 내가 그런 관행을 <한심하다>고 매도할 권리는 없다. 내게 있는 권리는 상대방이 파기한 계약에 응하지 않는다는 상식을 이행하는 것뿐이지 않겠는가?
IT Programmer에서도 있는 현상이 번역업계에도...있군요...
답글삭제IT만 슬픈현실이 아니군요...
지금보니, 소위 전문가라고 불리는 업종은 모두 노가다 판일 수 밖에 없다는 확신이 드는 군요....
빨리, 내가 일하지 않고도 돌아가는 사업체를 만들어야 할텐데...결국은 투자로 돈을 벌야야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