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8월 6일 수요일

계약서와 "약속", 번역 시장의 상식과 몰상식

번역가로서 어렵게 살고 있지만, 참 우스꽝스러운 일이 벌어졌다. 번역가들이 모인 공동체라고 들어서 바른번역이라는 곳에 회원으로 가입해 번역활동을 한 지 일년이 넘어가는 시점이다. 이 공동체는 나름대로 공감하는 번역가들의 공동체이기도 하면서, 번역가들과 번역출판을 하는 출판사, 양자의 필요를 해소해주는 중개기능을 담당하는 곳 중의 하나다.

시장을 공부한 경제학도로서, 또 시장이라는 경제와 경제외적인 왜곡을 직장 세계에서 경험한 한 인간으로서, 번역가들이 모였다는 이런 공동체의 가치에 호감이 가서, 일년 전에 가입을 했다.

이 공동체는 참 이점이 많다. 내가 번역료로 100을 받기로 계약하면, 10을 이 공동체의 운영비로 낸다. 주1) 그러면 나에게 남는 게 90이다. 100 중의 10이 아까울 수도 있다. 하지만 번역의뢰를 해주는 출판사와 일일이 협상을 하고, 다른 번역 건과 일정을 조율하고, 계좌번호를 알려주고, 지급이 약속대로 진행되지 않을 경우에 통화를 해야 하고, 또 프리랜서인 개인으로서 세금(원천징수와 종합소득세 신고)과 관련된 행정업무를 처리해야 하는 그런 일들을 대행해주기도 하는 공동체를 만났기에 참 반가워서 언뜻 가입했던 게 일년이 지났다. 사실 번역가로서 상대해야 하는 출판사가 대충 세 곳 이상만 되어도, 위와 같은 여러 가지 사안으로 통화해야 할 일도 꽤 많다. 당연히 그 통화료도 비용이요, 통화하면서 그 전후로 내가 내려야할 의사결정과 그와 관련된 마음 씀씀이 자체가 사실은 시간 비용이다. 그래서 나는 10 퍼센트 운영비가 비싸지 않다고 생각했다.

이런 관계 하에서 6월 말이나 7월 초 즈음, 그러니까 대략 한 달은 되었나 보다. 어느 출판사에서 원서로 400쪽 분량의 경영전략과 조직행동 전략 분야의 영어권 서적 번역의뢰를 이 공동체를 통해서 의뢰받았었다. 그 번역계약은 내가 10월 초부터 작업에 들어간다는 전제 하에 2009년 2월말까지 번역을 마치기로 협의가 됐었고, 번역계약일자는 7월 7일이다. 그 계약서 상에 추정 번역원고료로 내가 제시했던 번역 원고료의 10%인 계약금을 지급할 날짜는 계약서 작성일자로부터 10일 이내라고 계약서가 작성됐다. 그러면 계약금 지불일자는 7월 17일이다.

약속대로 이행할 의사가 없는 계약서?


그런데, 7월 17일 그 계약금 지급이 이행되지 않아서 며칠을 좀 더 기다렸다. 아무 소식 없이 하루 이틀이 더 흐른다. 당연히 나는 운영비를 내는 내 공동체의 회계 담당자에게 문의했다. 그 담당자분으로부터 전해 들은 말은, 그 출판사의 지급 관행이 "월말"이라고 하니까 7월 31일이 계약금 지급일자가 될 것이라는 해석이었다. 지구가 망하지 않는 한, 한 10여 일의 배고픔은 참을 수도 있는 일이다. 배고픔도 인간에게 가르쳐주는 바가 많고, 기다림의 미덕도 인간을 아름답게 가꿔주는 요소일 것이다. 나는 사실 한 달 넘게 점심을 굶고도 사는 재주를 어렵게 배운 사람이기도 하다. 그러니 좀 봐줄 수도 있는 거 아닌가?

그런데, 7월의 말일인 31일이 지나도 내 핸드폰에서 입출금을 알리는 신호가 오질 않는다. 또 주말을 포함해 며칠을 기다리는데, 아무 소식이 없다. "이거 내가 계약서를 잘못 본 거 아니야?"하는 생각은, 상식적인 인간이라면 당연한 수순이다. 즉 내가 불만을 품기 이전에 불만스러월 할 만한 일이 있었던가를 점검하는 일이다. 계약서는 내가 봤던 그대로였다. 이 번역작업에 투입할 시간은 2008년 10월부터 2009년 2월말까지이니, 5 개월이다. 그 5 개월을 들일 "번역"이라는 노동 계약서가 7월 7일자로 작성되어, 내가 의지하는 공동체와 출판사가 그 계약서에 도장을 찍은 이미지 파일을 내가 저장해 가지고 있다.

그런데, 이 출판사의 대외 지불 관행이 매월 말일이라고 해서, 계약서 상 지급일자가 7월 17일임에도 불구하고, 7월 31일에 지급할 거라는 공동체 회계 담당자의 말을 전해듣고 좀 황당했다. "그러면 계약서를 7월 31일이라고 쓰는 게 상식이 아닌가?"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아니, 계약 따로 관행 따로 할 거라면 계약이 뭐가 필요하며, "기대하는 현실"을 "약속"한다는 게 "계약"일 텐데 굳이 "기대하는 현실"과 "계약"을 따로 할 거라면 계약할 이유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7월 31일 매월 말일자 지급이 관행이라는 그 지급일자에도 계약금은 지급되지 않았다. 8월 4일, 월요일, 그러니까 어제 이 사실을 확인했다. 당연히 그 날에 그 공동체의 회계 담당자분께 뭔가 잘못돼 있다는 내 의사표시를 메일로 전달했다. 웬걸, 다음 날 그 회계 담당자분께서 파악한 상황이 이렇게 나에게 전달됐다:

" 그 출판사의 회계 담당자가 8월 7일까지 휴가여서 8월 8일부터 <언제 지급될지>를 알아볼 수 있겠다."

이쯤 되면 출판사와 번역가를 연계하는 일이 대표적 기능이라는 이 공동체도 제 기능을 다 한다고 할 수 없다. 이렇게 기능에 장애가 생긴다면 10 퍼센트 운영비도 비싸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일례로, 부동산 매매나 임대차 거래를 중개하는 공인중개사 사무소에서 거래 쌍방이 도장 찍은 계약 사항을 나몰라라 하고 있다면 명백한 배임이다.

이 블로그의 독자분들 중에, <생각동네: 시장과 인간>의 부정기 연재 중인 필자의 글을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말이 왜 존재하는지를 의심하게 하는 사례다.<헌법>도 말이고, <법률>도 말이며, <계약서>도 말이다. 그 말이 그 뜻대로 집행될 게 아니라면, <헌법>도 무의미한 것이다.

문제의 이 출판사는 원래 계약금 지급일자인 7월 17일 지급을 이행하지 않았다. 그 다음으로, 그 출판사 <나름의> 지급 관행이라는 말일자(즉 7월 31일) 지급도 그 <나름대로> 어겼다. 그러면 법률의 법자도 공부하지 않은 신림동 예비 고시원생들의 길을 막고 물어본다고 하더라도, 이 7월 7일자의 계약서가 계약서로서 유효하다고 할 중생들이 도대체 몇이나 될까?

"보이지 않는 손"은 보이지 않는 게 아니라 원래 없다

어쩌면 내가 "행복한(?)" 고민을 한다는 분들도 있을지 모르겠다. 계약금을 제때 받기는커녕, 완역 원고를 납품하고 나서 계약금을 받게되더라며 푸념하는 번역가 분들도 만났었기 때문이다. 안타까운 일이다. 이런 사례를 볼 때도 그렇지만, "시장"과 거래라는 것은 전혀 당연한 것도, 자연스러운 것도 아니다. 인간의 의지가 개입되지 않고는 돌아가지 않는 게 시장이다. 그래서 평소에 나는 "보이지 않는 손"이라는 아담 스미스의 말은 잘못됐거나, 경제학계의 그 후예들이 오해하고 있는 내용이라고 믿고 있다. "보이지 않는 손"은 보이지 않는 게 아니라 원래 없다. "보이는 제도의 기능"이 너무 매끄러워서 "공기와 물"처럼 "느끼지 못할 정도일 가능성이 있다"는 "이상형"으로 해석해야 옳을 것이다. 과연 아담 스미스가 죽고 난 뒤에 펼쳐졌던 식민지와 후진국의 시장경제라는 것이 과연 시장인 것인가를 아담 스미스가 곰곰히 살펴봤다면, 그는 도저히 "보이지 않는 손"이라고 시장을 묘사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가 바보가 아니었다면 말이다.

나는 다음과 같이 판단했다.
어느 비즈니스 파트너가 "충분히 사업 가치를 인정한다는 합작투자 건"에 어느 날짜까지 그 전체 투자 지분의 10%을 계약금으로 지불하기로 <계약서>를 작성해 도장을 찍었는데, 그 지급 일자를 두 번이나 이행하지 않았다. 첫 번째 지급 불이행은 계약서와는 다른 <그 파트너 내부의 관행> 때문이었고, 두 번째 지급 불이행은 < 그 파트너의 회계 담당가가 휴가를 갔기> 때문이었다! 이렇다면 그 <합작투자>가 제대로 된 약속이라고 생각할 이가 누가 있을까?
나는 이런 계약을 파기해야겠다. 아니, 내가 파기한 게 아닌 게 분명하다. 상대방이 이미 파기한 거니까, 내가 파기하고 말 게 없다. 그냥 약속이 말장난이 됐다고 보는 게 맞을 것이다.

도대체, 이런 게 우리나라 출판계의 <상식 아닌 상식>, 이름하여 <몰상식>이란 것일까? 내가 그런 관행을 <한심하다>고 매도할 권리는 없다. 내게 있는 권리는 상대방이 파기한 계약에 응하지 않는다는 상식을 이행하는 것뿐이지 않겠는가?

***
주: 1) 언제부터인가 이 운영비 부담률은 10 퍼센트에서 일정 분량의 원고매수까지 15 퍼센트로 인상됐다. 약 600만원의 원고료 수입에 운영비 90만원,원천징수 3.3 퍼센트 떼면 약 500만원이 번역자에게 돌아온다고 보면 된다.

댓글 1개:

  1. IT Programmer에서도 있는 현상이 번역업계에도...있군요...
    IT만 슬픈현실이 아니군요...
    지금보니, 소위 전문가라고 불리는 업종은 모두 노가다 판일 수 밖에 없다는 확신이 드는 군요....
    빨리, 내가 일하지 않고도 돌아가는 사업체를 만들어야 할텐데...결국은 투자로 돈을 벌야야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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