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우리 모두가 까맣게 잊어버렸다. 그러니까 멀리는 10년 전부터 가까이는 5~6년 전의 이야기다. 허망의 꽃들로 시대를 한껏 풍미했던 대단한 증후군이 우리 사회에 일었었다. 바로 인터넷이라는 통신수단이 확산되고, "정보화"라는 슬로건이 정부와 정치권에서부터 일개 소기업과 가정과 개인에 이르기까지 혁명의 물결처럼 밀려왔던 적이 있었다. 아마도 1998년 IMF 구제금융의 위기에 따른 충격과 사회 불안으로 인해 무언가의 '슬로건'이나 '새로운 미래상'이 필요했던 우리 사회에 멀리 뉴욕에서 불어오는 나스닥 바람이 이런 슬로건과 미래상과 아주 잘 어울렸고, 시점도 딱 맞아떨어졌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그때는 일자리도 삭막하게 줄어들었으며, 기업과 은행이 무너졌고, 평생직장 개념이 사라지는 등 우울한 시절이었다. 바로 김영삼 행정부가 마지막 판에 김대중 행정부에게 정권을 넘길 때 벌어진 일이다.
그 시절에 "정보화"라는 말과 더불어, "정보사회"라든가 "인터넷 혁명"이라든가, 또 "멀티미디어 시대" 라든가, 온갖 말들이 서서이 등장하다가 1999년과 2000년 즈음해서 갑자기 급물살을 탔다. 그 말들을 입에 올리는 사람들의 표정이나 메시지를 보면 정말 대단한 역사가 눈앞에 닥친듯 거창했었다. 문자 그대로 정치, 경제, 사회, 문화에 걸쳐, 그리고 문화 중에서도 TV와 신문을 온통 뒤덮을 정도로 대단했던 물결이 왔다가 지나갔다.
그때 이 물결에 올라탔던 사람들과 정부를 비롯한 여론 선도층은 '지금 우리 앞에 커다한 변화가 일고 있으며, 우리에게 긍정적인 의미로 다가오고 있으니 모두 변해야 한다'고 외쳤다. 그런 긍정적인 의미 중에서 큰 부분이 일자리 창출이요, 일자리를 창출해줄 벤처업체들의 육성이었다. 이게 김대중 행정부의 주요 정책 가운데 하나였다. 그들은 그 변화를 "혁명"으로 자리매김하면서, "정보혁명"이나 "정보화 (시대)"를 새로운 미래상으로 내세웠다.
2.2. 새로운 미래상과 "메타 밸류에이션"의 비약
이 연재물의 전편, "배용준의 스캔들과 코뮤니케이션"을 읽어본 분들이라면, 지금쯤 어리둥절하거나 지루해질 지점이 됐다. 갑자기 이야기가 10년 전 과거로 돌아가더니, 나오는 용어들도 딱딱해졌기 때문이다. 게다가 필자가 왜 이런 이야기를 꺼내는지 아리송해질 것이다. 이런 이야기를 되짚어 보는 이유는 2000년 전후 나스닥 거품에 반갑다며 화답했던 한국판 코스닥 거품이 일었다 붕괴했던 과정에는 크게 두 가지 거대한 조류가 있었다는 것을 밝히기 위해서다.
그 하나는 금융시장에서 발생하는 일반적인 광기 현상이다(《광기, 패닉, 붕괴: 금융위기의 역사》를 참조). 다른 하나는 우리나라 특유의 냄비 증후군이다. 냄비 증후군이 뭐 그리 거대한 조류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아주 거대하다. 조류라고 보기보다 어쩌면 거대한 암초가 어울릴지도 모르겠다. 그 이야기를 풀어보자면, 조금 더 답답한 담론을 들어주셔야 한다(이에 대한 고찰은 이어지는 글들에서 개념적인 고찰과 대비해 훑어보려 한다).
자. 생각해 보자. 보통 어느 사회나 한 시대가 무언가의 변화를 시도했다고 치자. 아니면 어쩔 수 없이 무언가의 변화에 응해야 한다고 치자. 그때 무슨 일이 벌어질까? 어쨌거나 변화를 통해 다가올 미래라지만, 손에 쥔 현실이 아니기 때문에, 인간이 개가 아닌 이상은 생각할 수밖에 없다(사실 개한테는 미안한 이야기다. 알고 보면 개도 생각을 많이 할 뿐 아니라, 도덕과 의리까지 있기 때문이다). "무슨 변화일까?" "어떤 과정을 거쳐야 할까?" 즉 바람직한 미래의 모습에 대한 생각들과 현실 인식을 둘러싼 사회적 토론이 나타나기 마련이다. 특히 급격한 변화의 시기에는 여러 가지 서로 다른 미래상과 서로 다른 현실 인식 사이에 활발한 논의도 일고, 열띤 논쟁도 벌어진다. 이 과정에서 여론 선도층은 서로의 다른 생각을 확인하고, 논쟁의 효율을 높이기 위해, 미래상과 현실 인식의 토대가 되는 개념을 거론할 수밖에 없다. 산업혁명기 자본주의의 성격에 대한 논쟁이 그랬다. 또 후진국과 구식민지에서 산업화가 추진될 때도 그랬다. 냉전 중의 서구 사회민주주의 계열에서 일었던 사회주의에 대한 논쟁도 그랬다. 미래상은 현실 인식과 분리될 수 없고, 현실적인 입장에 따라 미래상이 갈릴 수밖에 없기 때문에 논쟁이 생길 수밖에 없다. 그리고 논쟁이 진행되려면 개념이 먼저 논의되어야 한다.
그런데 우리나라에 인터넷 바람이 불 때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정부와 언론을 위시한 여론 선도층은 "혁명"이라고 자리매김하면서도 그들이 내세우는 변화의 개념에 대해서는 일언반구 탐구하는 논의가 없었다. 즉 "정보화"라는 것이 무엇인지, 그것이 지향하고 있거나 야기하게 될 변화가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지에 대해서, 그 뜻을 따지거나 확인하려는 논의가 전혀 없었다.
일례로, 《사이버 코리아 21: 창조적 지식기반국가 건설을 위한 정보화 비젼"(정보통신부, 1999.3)》이나, 《정보통신백서 2001"(정보통신부 2001.11)》을 살펴본 적이 있었는데, 어느 구석에도 자주 등장하는 핵심 용어--"지식기반", "정보화", "지식정보사회" 등--의 뜻을 밝히는 논의가 없다. 그런 핵심적이어야할 정책 문서에서 찾을 수 있는 메시지는 바로 이것이었다. "정보 인프라를 깔자." 물론, 정보 인프라를 깔아야 하는 목표가 말로는 나와 있다. 바로 "지식기반 국가를 건설"하는 것이라고 나와 있다. 그런데 "지식 기반"은 무엇이고, "지식 기반 국가"는 또 무엇인지, 그 뜻이 없었다. 그 개념은 없다고 하더라도, 없는 개념을 주창했던 이유를 찾아보면 다음과 같은 이유가 행간에 나탄난다.
1. ' <지식 기반 사회knowledge-based society>라든가, <지식 주도 경제knowledge-driven economy>라는 게 무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남들에 따르면 이런 시대가 왔거나 오고 있다. 미국과 영국을 비롯한 대국에서 그렇다고 하니 분명한 미래상이다.
2. 그런데 그 대국들이 정보 인프라라는 게 중요하다고 한다. 그러니 중요한 게 분명하다.
여기에 바로 비약이 발생했다. 즉 코스닥에 상장된 쓰레기 같은 기업들의 가치가 불어나기 전에, 미래상으로 내걸었던 정보화와 그 가치 자체가 공백이었다. 매출도 없고, 이익도 없는 기업에 주가를 매겨주는 근거가 무엇인가? 바로 미래에 대한 개념이다. 바로 그 개념의 원류가 뜻도 없는 말로 시작돼서 분위기가 형성됐다. 뜻 없는 말은 공허하고, 뜻 없이 추진된 일은 설계도 없이 짓는 교량과 다를 게 없다. 무학여고 여학생들을 비롯해 애꿎은 시민들을 죽여버리며 무너졌던 성수대교의 거창했던 외형과 유사하다. 우리나라의 인터넷 가치와 성수대교는 아주 어울리는 형제들이었다. 물론, 이에 어울리는 형제들은 훨씬 더 많다.
2.3. 비약의 배후
앞에서 그 시절 정보통신부 문건을 예로 들었지만, 나는 정부의 문제라고 보지 않는다. 행정부의 인사들은 절대 "바보"가 아니요, "전문가"들이다. 그런데 내 생각에는 바보였다. 왜 그랬냐를 생각해보면, 현실과 미래와 개념을 따져 물어야할 학계가 아무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그들을 따라서 같이 바보가 될 수밖에 없었다는 생각에 50 퍼센트를 주고 싶다. 이 이야기가 이해가 되지 않는가?
간단히 이야기하자면, "정보화", "정보사회", "인터넷 혁명", 또 "멀티미디어 시대" 등등의 슬로건들이 사회 전면에 등장하면서, 그 수많은 벤처업체와 그 주식 가치가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그야 뭐 사업하는 인간들과 수익 내겠다는 탐욕스런 투자자들이 자초한 자업자득이라고 칠 수 있다. 그런데 이런 슬로건들이 공무원들과 언론들을 타고 퍼져나가면서, 외국산이 태반인 네트웍 장비와 컴퓨터 서버, 마이크로소프트의 윈도즈가 팔려 나갔고, 관련 업체들의 매출이 대단히 늘었다. 무선통신과 그 단말기, 인터넷 서비스 공급자들의 매출이 덩달아 늘었다. 특히 마이크로소프트와 인텔, 인터넷 통신망의 하드웨어 격의 제품들을 파는 시스코(Cisco) 류의 네트웍 장비와 컴퓨터 서버 류의 외국산 고가 제품들 매출이 급격히 늘었다.
어느 한 쪽의 매출은 다른 한 쪽의 비용이다. 그런데 그 비용을 지불하면서 사회가 얻을 가치는 무엇인지에 대한 논의가 우리나라를 통틀어 전혀 없었다! 그 시절 "정보 인프라 최강국=딱딱한 장비(하드웨어) 최강국"을 자랑스럽게 울부짖었던 고급 공무원들과 그 장비 장사를 했던 시장의 친구들은 이렇게 이야기할지도 모르겠다. "자유로운 시장에 따라 자유로운 개인들이 자유롭게 쓰게 될 부드러운 가치 창조를 위해 딱딱한 장비를 먼저 깐 것이다. 그 후의 이야기는 내 소관이 아니다." 사실 그들은 이런 말도 할 리가 없다. 우리들이 예전에 그랬듯이 냄비처럼 잊어주기를 기대할 것이다. 요즈음인지 얼마전부터인지 제3세대 무선통신을 볼 때도 또 그런 생각이 난다. 아마도 그 난리판을 지상의 유선으로부터 허공의 무선으로 옮겨가려는 시도는 이미 시작된 것 같다!
개개인이 "자유롭게" 참여하는 시장이라지만, 한국이라는 시장에 참여하는 개개인을 다 모아 보면 하나의 "집합적 사용자"다. 그 "집합적 사용자"가 엄청난 장비와 그 소프트웨어의 비용을 지불하면서도, 그게 무슨 소용(所用)인지--어디에다 쓸 건지--에 대한 생각이 없다면 그 "집합적 사용자"는 바보가 아니고 무엇일까? 그렇게 딱딱한 것인지 견고한 것인지 하는 장비들을 깔아서 '선진 정보 인프라 지식 강국 한국'(발음하기 꽤나 숨차다)이라는 것을 갖추어놓고 나서, '원조 교제'에서부터 '애인 대행'에다가 '자살 도모'와 아울러, 온갖 '도박 게임'과 함께, 또 무엇이냐, '인터넷 쇼핑몰 사기'와 같이 아주 간편한 사기 공간을 만들어준 것을 비롯해, 그 쓰임이 "아주 생산적이지만은 않다"는 것을 알 것이다. "그때 그 사람"들도 말이다. 이렇게 시장이 난장판이라면, 최소한 어느 사회의 집합적 사용자 대표격의 직무에 있는 사람들은 도구와 목적을 구분할 정신을 차려야 한다. 그 대표격에는 헌법에 지정된 공무원들만 있는 게 아니다.
2002년 미국의 클린턴 행정부가 정보고속도로(Information Highway) 를 뭐 대단한 슬로건인양 떠들어댈 즈음에도, 그게 그런 게 아니라는 연구가 미국에서는 나왔었다. 그래서 미국이 존경스럽다는 말이 아니다. "그러한" 미국에서조차 그랬다는 이야기에 강조를 두고 싶다. 즉 인터넷 가지고 난리를 떨고 있는데, 과거의 증기기관이나 전동모터 등의 발명이 야기한 사회경제적 변화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데다, 난리를 떨 이유도 없다는 논문이 미국 국립과학재단의 연구비를 받아 발표된 적이 있었다. 주*) 최소한 학계에 몸담은 사람이라면 이 정도의 견제와 균형의 역할을 해줘야 한다. 학계 전부는 아니라고 하더라도, 그 물결에 올라타 관련 예산이 나오는 길목에 서서 글을 찍어대는 학자들에게 해당되는 이야기다. 더 말하고 더 탓하고 싶지만, 여기서 접고 후편의 내용을 구상하련다.
주*) Robert. J. Gordon, "Does the New Economy Measure up to the Great Invention of the Past?", National Science Foundation, May, 2000. 프랑스와 바, "The Jeffersonian Syndrome: the Predictable Misconception of the Internet", (츨처 잊음. 시기: 2000년 3월).
P.S. 번역일이 바빠서 이제야 연재를 약속한 글의 제2편을 썼다. 다음 편은 언제 쓸지 모르겠지만, 이와 비슷한 주기로 "메타 밸류에이션"의 허구, 그 정중앙에 있는 "정보화"와 그보다 더 핵심에 있는 "지식 기반" 등의 넋 나간 빈 개념들에 대해 훑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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