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4월 12일 토요일

금융위기와 킨들버거의 《광기, 패닉, 붕괴》

미국의 서브프라임 위기가 심상치 않은 국면을 계속 이어가고 있다. 언제 시간이 나는 대로 자세히 들여다봐야겠다는 생각만 할 뿐, 일하느라고 정신이 없다. 부동산이나 주택을 담보로 발행한 채무증서(부동산 담보부 증권 외에 여러 용어가 사용되는데 통일돼있지 않아 보인다) 를 금융기관이 채권자가 되어 인수하는 대신, 채무자인 거주자는 일정한 계획에 따라 채무액을 해당 금융기관에 상환하는 자금조달 관계가 발생한다. 그런데 미국에서는 다시 이 채무증서(이걸 간단히 모기지mortgage라고 줄여 부르기도 한다)를 기초자산으로 삼아 파생되는 각종 금융거래가 아주 복잡한 것으로 알고 있다. 얼른 보면, 서브프라임 위기도 이 파생상품들이 촘촘하게 연결된 보다 광범한 구조에서 진행되고 있을 것으로 보인다.

왠지 불안해지는 점은 이렇게 거미줄처럼 파생상품들이 진화하는 과정을 정책 변수로 조절하기도 힘들고, 아마도 그 내용과 심각성 자체가 위기 진행 중에는 파악되지 않을 것이라는 추측이다. 어쩌면 위기가 터질 대로 터져서 모두 마무리된 뒤에야 그 내용이 제대로 파악되지 않을까 짐작된다. 항상 정책이 시장을 뒤에서 따라갔고, 새로운 정책이 나오기 전에 진상을 파악하는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찰스 킨들버거의 《광기, 패닉, 붕괴: 금융위기의 역사》(2006.11, 굿모닝북스)는 약 400년 동안의 수많은 금융위기를 다루었는데, 새로운 금융위기가 발생할 때마다 새로운 판이 출간되었다. 현재 5판까지 나와 있는 이 책의 6 판에는 서브프라임 위기와 달러화 약세가 추가될 듯하다. 킨들버거는 타계했지만, 5판의 공저자 로버트 알리버가 2010년쯤에는 6판을 낼지도 모르겠다.

이 책을 번역한 사람이지만, 이 책은 도무지 요약해서 설명하기가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 일반화의 위험을 감수하면서 다음과 같이 책의 내용을 곱씹어 본다.


메시지 1 : 눈앞의 자본이득(capital gain) 앞에 인간과 시장은 전혀 합리적이지 않다. 수백 년간 되풀이된 광기와 거품들이 이를 입증한다.

 - 세계 10대 금융거품:
  1. 네덜란드 튤립 알뿌리 거품(1636년),
  2. 영국 남해회사(South Sea Company) 거품(1720년),
  3. 프랑스 미시시피회사(Mississippi Company) 거품(1720년),
  4. 대공황 직전 주식거품(1920년대 말),
  5. 멕시코 및 여타 개발도상국들에 대한 은행여신의 급증(1970년대),
  6. 일본 부동산 및 주식 거품(1985-89년),
  7. 북구 3개국의 부동산 및 주식 거품(1985-89년),
  8. 동남아 부동산 및 주식 거품(1992-97년),
  9. 멕시코 외국인투자의 급증(1990-93년),
  10. 미국 나스닥 주식거품(1995-2000년)

메시지 2 : 광기와 거품으로 시작되는 금융위기에는 전형적인 유형이 있다.

 (1) 변위요인의 출현과 호황 국면의 시작
 (2) 경제적 풍요감의 확산과 신용 확대
 (3) 거품 형성
 (4) 위기와 불안
 (5) 거품의 붕괴 또는 패닉
 (6) 궁극적 대여자의 성공적 개입 또는 붕괴와 패닉의 후속 파장 지속

메시지 3: 금융위기가 몰고올 파탄과 후속 파장의 경제적 부담을 줄이려면 궁극적 대여자의 효과적이고 기민한 개입이 필요할 때가 많다. 그러나 잘못 개입하면 위기가 악화될 수도 있다.


좀 더 논리를 보태서 풀어헤치면 다음과 같이 금융위기를 보는 저자들의 시각을 정리해볼 수 있겠다.


■ 금융위기에 대한 민스키 모델의 설명력은 여전히 타당하다.
  • 경기확장기에 신용 공급도 늘어나며 경기수축기에는 신용 공급도 줄어드는데, 하이먼 민스키(Hyman Minsky)는 경기순환의 파동과 함께 오르내리며 과도하게 증폭됐다가 난폭하게 경색되는 신용 공급의 변동성이 금융질서의 취약성을 초래하고 금융위기의 가능성을 증폭시킨다고 봤다.
  • 세계 10대 금융거품을 보면 모두 과도한 신용 팽창 혹은 지속 불가능한 자금조달 유형이 상당 기간 지속됐고, 이에 동반해 비상식적인 수준으로 자산가격이 폭등하다가 폭락으로 급반전하는 금융위기가 초래됐다.

■ 금융위기가 전개되는 유형을 논리적으로 재구성해봤다.

 (1) 변위요인의 출현과 호황 국면의 시작
  • 새로운 혁신이나 시장의 출현과 같은 ‘변위요인(變位要因,displacement)’이 출현하면서 상당한 비중의 경제 부문에서 수익 기회가 향상되고 호황 국면이 시작된다.
 (2) 경제적 풍요감의 확산과 신용 확대
  • 호황 국면의 지속과 함께 경제적 풍요감이 고개를 들고 가격이 오르는 자산 한두 가지가 매혹적인 투자기회로 등장한다.
  • 이런 자산을 매입해 자본이득을 노리는 자금이 몰려들기 시작하고 신용도 늘어나기 시작한다.
 (3) 거품 형성
  • 경제성장의 증대와 자산가격의 상승 효과가 겹치면서 부가 늘고 소비와 투자를 자극한다. 투기와 경제 전반 사이의 되먹임이 강화되면서 자산가격에 탄력이 붙고 그 상승세가 지속된다. 
  • 과도한 낙관론이 자리 잡는다. 레버리지를 이용한 투자자, 즉 빌린 돈으로 자산을 사려는 투자자들이 늘어나면서 신용 공급이 급격히 증가한다. 매수자가 늘어나니 자산가격이 오르고, 자산가격이 오르니 더 많은 매수자가 몰리는 자기실현적 예언이 눈앞의 현실로 벌어진다. 광기(mania)가 사람들을 사로잡는다.
  • 한편, 경제활동이 거품의 팽창에 빨려드는 동안 경제의 불균형은 점점 누적된다.
 (4) 위기와 불안
  • 역사상 전례가 없는 비상식적인 수준까지 자산가격이 폭등한다.
  • 어느 순간 소리 없이 “누군가가 매도”하면서 자산가격의 상승세가 주춤거리는 불안 국면이 시작되거나, “누군가가 부도”를 내면서 돌발적인 위기가 출현하기도 한다.
 (5) 거품의 붕괴 또는 패닉
  • 급등을 이어온 자산가격이 상승 행진을 멈추면 가파른 폭락이 돌발하는 경우가 많다. 투자자들은 지금까지 투자 결정을 부추겼던 광기에서 깨어나면서 공포에 질려 팔아 치우기에 급급한 패닉에 휩싸인다.
  • 자산가격의 폭락이 이어지고 기업과 금융기관이 파산하면서 경제 활동이 연쇄적으로 무너지는 붕괴가 나타난다. 신용경색과 비관론이 확대되면서 정규적인 경제 활동을 중개하는 금융 기능이 마비된다.
(6) 궁극적 대여자의 성공적 개입 또는 붕괴와 패닉의 후속 파장 지속
  • 이러한 위기 상황에서 마침내 궁극적 대여자(the lender of last resort)의 효과적인 개입으로 패닉이나 붕괴 과정이 멈출 때까지 금융위기는 경제 전반에 가공할 충격을 미친다.

■ 금융위기가 몰고올 파탄과 후속파장의 경제적 부담을 줄이려면 궁극적 대여자의 효과적이고 기민한 개입이 필요할 때가 많다. 그러나 잘못 개입하면 위기가 악화될 수도 있다.
  • 투기적 광기와 신용 팽창은 경제정책으로 원천봉쇄할 수 없다는 것이 역사의 교훈이다. 통화당국이 통화 공급을 억제하고 신용 팽창을 규제해도 시장은 정책과 제도를 우회해 신용을 팽창시키는 새로운 금융상품과 금융혁신을 만들어낸다.
  • 따라서 거품의 형성을 원천적으로 예방할 수 없다면 금융위기로 치닫지 않도록 정책당국은 자산가격 추이와 위험한 자금조달 유형을 예의주시하고 기민한 대응책을 준비하고 있어야 한다. 경기확장이 점점 더 세게 그 강도를 높여 가면, 패닉이 촉발되지 않도록 하면서 확장의 강도를 늦추어야 한다.
  • 일단 금융위기가 발생했거나 피할 수 없다면 궁극적 대여자가 구원투수로 나서야 하지만, 경제행위자들의 도덕적 해이(모럴 해저드)를 예방하기 위해 시점 선택과 정책 선택에 능숙하고 단호하게 대처해야 한다. 붕괴가 발생한 후에는, 채무 지불능력이 없는 기업들이 파산할 때까지 충분한 시간을 기다려야 한다. 그러나 “뛰어난 수영 선수들마저 익사할 때까지 시간을 끌지 말아야 한다.” 개입시점이 너무 빠르거나 너무 늦어서도 안 되며, 구제 대상이 너무 제한적이어도 안 되고 너무 방만해서도 안 되기 때문이다.

댓글 2개:

  1. 글 잘 읽었습니다.예전에 책을 읽어서 기억이 가물가물한데 이렇게 정리해주셔서 감사합니다.(제 블로그 글에 쓰신 덧글도 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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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남의 책을 번역해 던져놓는 번역가가 아니라, 저자의 메시지를 우리 언어문화권의 독자들에게 새로 만드는 번역가이어야겠다는 생각에 만들어본 요약이었습니다. 도움이 되셨다면 기쁜 일입니다. 앞으로 책을 주제로, 아니면 그와 관련된 문제를 주제로 의견을 주고받는 관계가 많이 생겼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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