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4월 12일 토요일

비와 나를 섞으며

며칠 전 아침, 일에 지쳐 있을지 모를 어느 분에게 업무적인 전자우편을 띄우면서 스트레스가 될지 모를 그 편지 밑에 좀 엉뚱한 추신이라도 달아보자는 생각에 시 같지 않은 시를 짤막히 적어 붙였습니다.


비는 같은 비로되,
지난 번 비는 무겁더니
내가 비가 되어 대지를 적시고 싶어서인가
오늘 비는 상큼하기 그지 없구나.


이렇게 추신을 달면서 속마음으로 웃음지었습니다. 상대편에서 어떻게 받아들일지 몰라도, 적어도 아침에 길을 나서며 부딪는 종달새 소리 정도의 기쁨은 되리라고 저 혼자 좋아했습니다. 사실은 그 전날에 인간의 감정을 생각하다가 흐린 하늘을 올려다보며 얼굴을 적시는 빗물에 제 정감을 이입하다가 적어봤던 글이었습니다. 자신의 우울감이나 우울 증세가 심각하다고 말했던 어느 분을 떠올리며 스며든 정취였습니다. 우울감을 생각하다가 왜 비가 생각났고 대지가 생각났는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아마도 제가 그렇게 우울했을 때 자연을 벗 삼아 스스로를 추스렸던 기억 때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또 우울이라는 마음 상태와 하늘이 내려주는 비가 어느 정도 어울렸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인간의 감정은 탐구해도 탐구해도, 오리무중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지감(止感)>이란 말을 되뇌게 될 때가 있습니다. 이 말이 희노애락애오욕의 칠정을 거두라는 말로 들립니다만, 아무튼 오묘한 게, 또 맹랑한 게, 인간 감정인 듯합니다.


<집착> <상실> <우울> <허무> <증오> <무력> ...


이렇게 나누어 보는 감정의 범주들이 다 다른 것 같으면서 일정 부분은 서로 겹쳐 있다고 저는 느낍니다.
  • 너무 집착이 강하다 보면 상실감이 커지기 마련이고, 상실이 우울이나 허무로 번지기도 하지만, 증오와 무력으로 번지기도 합니다.
  • 나라는 존재감의 뿌리가 흔들릴 때면 우울감이 밀려옵니다만, 우울의 극단으로 치닫다 보면 허무마저 잊게 됩니다. 허무할 여유가 없을 정도로 우울할 때도 있습니다. 허무와 우울의 차이는 정확히 정의할 수는 없어도 웃을 여유가 있느냐 없느냐는 차이라고 봅니다. 그런 의미에서는 우울과 허무는 차원을 달리 합니다.
  • 아닌 게 아니라 허무의 극단으로 치닫다 보면, 내심 미소를 지을 여유까지 생길 때도 있습니다. 그 미소는 우울감과는 전혀 다른 감정입니다. 둘 다 긍정적인 감정이 아니라는 공통점은 있지만, 허무감은 우울감보다 좀 더 열린 감정 상태라고 봅니다.
  • 허무와 우울이 겹칠 때 종횡무진으로 펼쳐지는 인간 감정의 변이는 위험할 정도로 다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허무와 우울이라는 감정 자체도 그 테두리가 무정형한 것이기에 이 둘이 겹친다는 말 자체가 말 장난일 것입니다. 다만, 어떤 행동을 해석할 때 붙여대는 용어일지도 모릅니다.

왜 이렇게 인간의 감정은 그 감정의 주인인 인간이 부릴 수 없다고 진단될 만큼 어려워진 것일까? 계속 연구해 보렵니다. 사실 저도 상당 부분 그 연구를 하면서 살고 있는 중입니다.

연구의 주체는 나요, 그 대상도 나입니다. 남들은 거울에 비친 나일 뿐입니다.



어느 불경에 나왔다는 다음 구절에서 그 앎이란 우리말로 지식도 아니요, 영어로 knowledge도 아니라고 봅니다.


應所知量 順業發顯(응소지량 순업발현)

앎의 그릇에 따라 업이 이어지기 마련이다.


知量을 <앎의 크기>라고 표현하기에는 본래 경전의 의미를 담기 어렵다고 보여져서 저는 <그릇>이라고 옮겨봤습니다. 언어를 초월한 앎일 것이라고 저는 보기에, 크기라는 의미까지 부여하기가 부담스러웠기 때문에 그릇이라는 은유를 택해 봤습니다. 제 해석일 따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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