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4월 18일 금요일

시간 지평이 분명한 투자

바야흐로 급속한 고령화 추세로 들어선 우리나라에서 투자는 시간이 갈수록 중요해지고 있다. 은퇴와 노후 생활을 대비해야 하는 사람들이 늘어남에 따라서, 투자는 이제 재산을 불린다는 좁은 의미에서 벗어나 노후 생활을 대비하는 프로그램이라는 폭넓은 의미로 바뀌게 될 것이다. 예전에는 투자할 여윳돈이 있는 ‘돈 많은 사람들’이나 손실 위험을 기꺼이 감수하겠다는 ‘용감한 사람들’이 투자라는 개념을 적극적으로 고려했었지만, 이제는 주식시장만 해도 개인투자자 층이 두텁게 형성될 정도로 관심이 높아진 지 오래다. 또 미용실에서 차례를 기다리다 보면 해외투자 펀드에 대한 이야기가 들려올 정도로 간접투자 상품의 저변도 많이 넓어졌다.

오래전부터 서서히 형성되어온 이러한 개인들의 추세에는 은퇴와 노후생활에 대비해야 한다는--그것도 나 스스로 대비하지 않으면 누구도 대비해 주지 않을 것이라는--무의식적인 강박관념이 자리 잡고 있다. 투자에 대한 진지한 시각에서 이 강박관념을 풀어줄 논의가 아쉽다. 옵션 시장에 참여하는 개인투자자들의 거래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나듯이, 시장 참여자들의 행태는 진지한 투자라기보다는 도박판을 방불케 한다. 쏟아지는 재테크 서적과 경제전문 방송의 주식투자 프로그램들을 보면, 홈트레이딩 시스템의 주가차트로 도배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투자에 대한 진지한 논의를 판가름하는 최소한의 기준을 옮긴이는 이렇게 제시하고 싶다: ‘투자의 시간지평이 설정되지 않은 모든 이야기는 진지하지 않다.’ 즉 투자에서 가장 크고 중요한 변수는 시간이며, 투자할 시간투자자의 목적에 따라 심사숙고하지 않는 모든 논의는 도박판으로 안내하는 지름길들이다. 온갖 재테크 서적들과 방송 프로그램을 주의 깊게 관찰해볼 필요가 있다. ‘투자할 시간’을 명시적으로 밝히는 논의가 과연 몇 개나 있는가?
그 흔한 기술적 분석에서 만고불변의 진리인 양 따오는 '지지선'과 '저항선', '쌍봉'과 '쌍바닥', 머리어깨형과 역머리어깨형 등의 기술적 생김새(techical patterns)는 3주나 3 개월의 시간지평에서 볼 때와 5년, 10년의 시간지평에서 볼 때에 전혀 다르게 보일 뿐 아니라, 5년, 10년의 지평에서 볼 때는 아예 존재하지 않을 때도 있다. 내가 어느 지평에 서 있느냐를 잊은 채 아무리 다각도로 시장을 본들 그것은 모두 환상일 뿐이다. (어느 경제전문방송의 주식고민상담소 같은 프로그램에서 어느 '전문가'가 마치 주가차트를 자신이 그려내는 그림인 양 청산유수로 설명하는 모습을 보고 든 생각이다. "저기 저 창세기의 창조주처럼 주가 흐름을 읽어내는 사람은 과연 어느 시간지평에 서 있는 것인가?")

《위대한 가치투자자 캐피탈 그룹》은 투자의 시간지평을 명확하게 설정하는 ‘진지한 투자 전문가들’의 이야기다. 이런 진지한 투자 전문가들이 1931년 임직원 8명에 운용자산 1200만 달러로 시작해, 2003년 임직원 6000명에 운용자산 6500억 달러가 넘는 세계적인 투자회사로 성장하는 과정을 총 15개 장으로 조목조목 다루고 있다. 캐피탈 그룹이 투자하는 시간지평은 10년을 기본으로 하고 있고, 이보다 더 길어지기도 한다. 뮤추얼펀드에 투자하는 고객이 투자 자금을 10년 동안 맡기려면, 투자회사에 대한 철석 같은 신뢰가 없이는 불가능하다. 이 책은 캐피탈 그룹을 만든 사람들이 어떻게 그러한 신뢰를 쌓아왔는가를 보여준다. 캐피탈 그룹의 뮤추얼펀드에 투자하는 에드워드 존스라는 증권회사의 투자자들은 심지어 뮤추얼펀드를 후손들에게 유산으로 물려주기까지 한다. 이러한 투자 목적의 시간지평은 30년을 넘기도 한다. 우리나라에서 10년이나 30년에 걸친 장기투자를 하는 사람이 없지야 않겠지만, 수익의 재투자와 복리증식이 결합되는 장기투자의 어마어마한 위력을 진지하게 안내해주는 곳이 없는 현실에서 보면, 감동적으로 읽히기도 한다. 또 투자자와 전문가가 맺는 두터운 신뢰관계가 부럽기까지 하다. 주가가 폭락을 거듭하며 시장이 무너진 뒤 “의혹이 밀물처럼 일 때 신규 펀드를 출시”하는 캐피탈 그룹에 투자자들은 기꺼이 돈을 맡긴다.

우수한 투자실적이 입증되지 않고는 고객의 신뢰가 생길 수 없다. 우수한 투자실적과 고객들의 철석 같은 신뢰가 어떻게 뿌리를 내리게 됐는지를 드러내기 위해, 지은이 찰스 D. 엘리스는 1920년대로 거슬러 올라가 캐피탈 그룹의 이야기를 풀어내기 시작한다. 독자들은 1920년대부터 2000년대에 이르기까지 미국 투자업계에서 요란한 펀드 광고 하나 없이 묵묵히 “자기 일”만을 해온 캐피탈 그룹의 투자 전문가들이 어떻게 일해 왔는가를 볼 수 있는 좋은 기회다. ‘여윳돈’을 투자하는 것도 아니요, ‘용감하게’ 투자할 것도 아닌 ‘진지한 투자자’라면, ‘진지한 투자 전문가들’의 솔직한 이야기들을 알아둘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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