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4월 18일 금요일

시장 그리고 나


번역하면서 되새기게 되는 몇 구절을 다시 생각해봅니다. 이렇게 뽑아본 글을 보며 내일 다시 생각해 보렵니다. 며칠 전입니다. 어느 대형 서점이죠. 큰 복합 쇼핑 공간 안의 서점입니다. 주로 사진들과 광고가 많이 들어있는 여성지와 패션지를 약 십수 권을 사시면서 거스름돈 포함해 현금으로 이십만 원을 내시는 분을 봤습니다.

유효수요(effective demand)의 파워!
쇼핑의 파워!
유 갓 더 파워!(You got the power!)


순간 기죽고 싶었지만 아래 번역문구가 떠올랐습니다. 쇼핑이란 행위와 아울러, 현대를 사는 개인의 자기 얼굴은 어떤 것일까를 다시 생각해 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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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증은 구미 사회에서 갈수록 늘어나는 흔한 정신질환이라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이런 우울 증세에는 살면서 아무 의미도 없다는 느낌이 오래 지속되는 일종의 공허감이 동반되는 경우가 흔하다. 다들 삶이 즐거운 시간들의 끝없는 연속이라고 생각하는 사회 환경에서 공허한 느낌이 밀려오게 되면 누구나 마음을 가누기 어렵게 된다. 침묵을 동반하는 이런 곤혹감은 경악할 정도로 늘고 있는 청년층 자살의 주된 요인이다. 이렇게 존재감의 뿌리까지 파고드는 '실존적 우울감(existential depression)'에 대응하는 일상적인 반응은 쇼핑하러 가는 것이다. 특히 일상 생필품 이외의 품목들을 사러가는 쇼핑은 우리 의식 속에 깊숙이 스며든 일련의 강력한 연상기제와 연결돼 있다. 우리는 소유하는 것이 힘을 얻는 것이라고 느끼게 만드는 섬세한 교육환경에서 살고 있다. 사실 소유는 우리 사회에서 권력의 원천이다. 우리의 잠재의식에는 물건을 지배하는 힘이 곧 삶을 지배하는 힘―적어도 우리 삶을 지배하는 힘―이라고 속삭이는 연상기제가 뿌리 깊게 침투해있다.

쇼핑이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수단으로 자리 잡은 활동이라면, 지금 모든 도시들을 화려하게 장식하고 있는 쇼핑몰은 우리가 그러한 힘을 동경하며 짓고 있는 신전(神殿)이다. 겉모습만 본다면 쇼핑몰은 다양한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는 편리한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쇼핑몰에는 세심하게 설계된 강력한 심리학이 작용하고 있다. 재래시장이나 바자회, 또 교외 지역의 중심상가와는 달리, 쇼핑몰은 오로지 돈을 쓰는 소비자들의 행위만이 이루어지도록 설계돼있다. 쇼핑몰은 바깥세상과는 전혀 다른 느낌을 준다. 쇼핑몰은 바깥의 적의에 찬 사나운 세상으로부터 차단된 별개의 시공처럼 소비자들을 빨아들인다. 어느 쇼핑몰이든지 그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우리는 무슨 명상의 경지에 들어선 듯 황홀경에 직면한다. "여기 펼쳐진 온갖 상품들이 그대에게 복을 주리라"는 주문이 우리의 오감을 향해 달려드는 동안, 우리 의식은 본말이 전도된 채 우리 앞에 자유가 열리고 있다는 최면에 걸린다. 저 모든 좋은 상품들과 그것들이 상징하는 힘이 우리를 위해 거기에 있다고 느끼게 되는 것이다.

구매 행위에 이러한 심리적 기능이 있다는 것은 우리가 무상으로 얻은 상품을 대하는 태도에서 선명하게 드러난다. 무슨 이유에서든 우리는 돈을 지불하고 얻은 상품에 비해 공짜로 얻은 상품을 덜 귀하게 여긴다. 우리 자신의 돈을 쓰게 되면, 우리는 구입하는 대상에 우리 자신의 일부를 투자하는 행위를 하는 것이다. 즉 우리 안에만 머물던 자아의 권능을 우리 육체의 경계선 밖으로 확장하는 것이다. 집안 텃밭에서 키운 재료를 먹으며 만족을 느낄 때처럼 시장의 문화와는 별개의 규범이나 정서가 공짜 상품을 경시하는 태도에 앞서는 경우도 꽤 있다. 그러나 아이들에게서는 이것이 명확하게 드러난다. 현대의 아이들은 가게에서 산 물건이라야 열망하고 가지고 싶어 한다. 집에서 직접 만든 음식이나 의류 또 장남간들을 대할 때, 아이들은 소비 행위가 가져다주는 마력을 느끼지 못한다. 아이들은 용돈을 저축해서 사는 물건이나 부모가 '희생한' 돈으로 얻게 되는 물건이 엄청난 가치가 있는 것이라고 배우게 된다. 돈을 대가로 얻게 된 물건은 아이들에게 구매력의 행사에서 나오는 나만의 권력이란 것의 묘미를 느끼게 해준다.

쇼핑몰에는 시장의 장터에서 이루어지던 공동체적 기능은 전혀 없으며, 그 유일한 기능은 판매하는 것이다. 쇼핑몰은 판매 행위를 통해 소외된 사람들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려고 한다. 극히 모순된 말로 들리겠지만, 쇼핑은 일종의 공동체감을 되찾으려는 시도다. 폭스와 레어스(Fox and Lears)는 소비가 담당했던 사회적 기능의 변화를 추적한다.

20세기 미국의 중산층 대다수와 노동계급에 속하는 다수의 미국인들은 끊임없이 '좋은 생활'을 추구하는 삶과 동시에 되풀이해서 무력감을 확인하는 삶을 이어왔다. 우리 문화를 지배하는 제도들은 소비자에게 공동체 생활에 참여하는 보람된 활동을 제공한다는 의도를 밝혀왔지만, 대부분 이 제도들이 제시해온 것은 개인으로서 시장에 참여한다는 공허한 전망이었다.


사람들이 공동체 의식과 소속감을 찾게 되는 것은 당연하다. 산업 자본주의의 도래와 함께 예전의 공동체들은 해체되고 경제적 개인이라는 새로운 인간형이 등장했다. 동시에 사회는 전혀 새로운 의미를 지닌 존재로 탈바꿈했고, 이 사회변혁의 진폭은 지역의 공동체 차원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나라 전체를 포괄하는 것이었다. 예전에도 늘 그랬던 것처럼 사람들은 새로운 사회에 적응하는 길은 적합한 사회적 행동양식들을 받아들이는 것임을 감지하기 시작했다. 그 새로운 행동양식들은 소득과 물질적 취득을 중시했고 모든 것에 우선해서 사람들이 원하는 것이 이것이었기 때문에, 소유욕의 발현은 일종의 공동체감을 발견하는 수단이 됐다. 그러나 이렇게 해서 생기는 공동체감이라는 것은 얼마나 고독한 것이었겠는가! 그것은 다른 사람들과의 상호작용이 아니라, 아무 인간관계의 흔적도 남아있지 않아 인격성이 사라져버린 상품을 시장에서 구매하는 행위에 의존하는 것이다. 마치 사회가 인정하는 상품을 사는 행위로 일종의 소속감을 돈을 주고 산다는 듯한 양상이다. 우리는 주변의 사람들은 거들떠보지도 않으면서 슈퍼마켓과 옷가게의 진열대에서 공동체감을 찾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내 존재가 세계 속에 함몰되는 듯한 느낌, 단조롭고 고된 삶의 역정을 따라 지친 몸이나 끌고 가려고 이 세상에 던져진 것인가라는 느낌이 밀려올 때는 누구나 우울감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쇼핑은 이렇게 엄습해오는 실존적 우울감에 대한 반응이다. 우리는 잠시나마 쇼핑을 통해 그 속박감에서 벗어나고자 반항하는 것이다. 더욱이 쇼핑 행위에는 우리가 붙들려 있는 세계와 삶에 도전한다는 심리까지 들어있다. "나는 저걸 살 돈이 없어, 젠장! 그래도 사고 말거야!" 우리를 집어삼키려는 시스템을 향해 지르는 욕설이다. 그렇지만 쇼핑은 궁극적인 위안이 될 수 없다. 우리는 쇼핑으로 더 깊은 수렁에 빠져든다. 구매 행위에서 얻을 수 있는 순간적인 권력감은 또다시 채워 넣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공허감을 더욱 크게 파놓을 뿐이다. 그것은 모래늪에서 빠져나오려고 발버둥치는 것처럼, 몸부림을 치면 칠수록 우리는 더 깊은 진창 속으로 빨려 들어갈 뿐이다. 그 종국적인 의미에서 소비 행위는 패배를 인정하는 것이다. 이런 양상의 소비는 천천히 죽어가는 것과도 같다.

실존적 공허 속에 허우적대며 부(富)를 좇으려 아우성치는 것은 현대 사회에만 고유한 현상은 아니다. 물질적 부에 매달리는 욕망은 오직 더 큰 욕망만을 불러올 뿐이어서, 이렇게 찾으려는 행복은 그저 헛된 꿈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은 수백 년을 이어온 깨달음이다. 괴테(Goethe)는 이 깨달음을 『파우스트』에서 이야기한다.

헛된 욕망을 좇아 부질없이 달려가봐야

그 결실이 영근다 한들 더 큰 욕망에 목마를 뿐이다.

그런데 예전에는 소수의 사람들만이 이 허황된 행동을 좇을 수 있었으나, 지금은 대다수 일반인들이 본분으로 삼는 일이 됐다. 물질적 취득이 허황되다는 개인 사례들이 허다해지고 있지만, 언제 어느 곳에 있더라도 우리는 돈의 힘이 옳다는 메시지들의 폭격 속에 살고 있다. 돈의 위력은 전혀 거짓이 아니다. 돈이 많은 사람들은 우리 사회에서 힘을 행사한다. 그러나 그들이 행사하는 힘은 오로지 물질적인 자원을 지배하고 또 다른 사람들을 지배하는 통제력을 소유한다는 의미밖에 없다. 끊임없이 물질적 축적을 추구하는 데 몰입하는 사람들은 그들 스스로 의식도 못할뿐더러 통제도 할 수 없는 내면의 충동과 채울 수 없는 욕구에 휘둘리는 사람들이다.

요즈음은 소비 행위가 사람들과 접촉하는 사회 참여의 수단으로도 변했다. 즉, 전화 서비스, 정보통신, 인터넷은 사람들이 세계와 접촉할 수 있는 수단으로서 장려된다. 그러나 E.J. 미샨이 1960년대에 지적했던 것처럼, 그 어마어마한 통신의 진보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이웃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인간의 역사상 최악의 수준으로 떨어졌다. 실질적인 접촉이 사라짐에 따른 그 정적의 빈 공간을 쇼핑몰, 라디오 광고, 공항 대합실의 TV에서 흘러나오는 상업용 배경음악과 같은 의미 없는 잡음과 오락거리들로 애써 채우려는 행동들이 유발됐다. 이와 같이 고요와 정적을 불편해하는 것은 현대 사회의 한 현상이지만, 적어도 급속한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심화되기 시작했다. 존 스튜어트 밀은 인구밀도의 증가와 도시화가 가져온 심리적 충격을 일찍이 눈여겨본 사람 중의 하나였다. "사람이 어쩔 수 없는 상황에 의해 같은 종족들에 둘러싸여 지내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니다. 홀로 있을 수 있는 방법이 아예 사라져버린 사회는 이상이라고 하기에는 척박하기 짝이 없다. 생각과 인격의 깊이를 조금이라도 다지려면 홀로 지내는 시간이 꽤 있다는 뜻으로 본 고독은 아주 긴요한 것이다."

'너무 외로우면서도(too much loneliness)' '홀로 지낼 시간은 별로 없다(not enough solitude)'는 것이 우리 시대의 고통이라는 말이 나올 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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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가 미국의 헬시네이션닷컴(HealtiNation.com)에 들러보니 우울증을 소개하는 비디오(Depression Videos)가 있어 붙여 본다. 나중에 한 번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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