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1월 8일 수요일

[발췌 읽기: 고병권, 다이너마이트 니체] 2장 빛의 외투를 걸친 은둔자


출처: 고병권 지음. 다이너마이트 니체: 고병권과 함께 니체의 <선악의 저편>을 읽다. 천년의상상 펴냄. 2016.

※ 발췌: p.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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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장 빛의 외투를 걸친 은둔자

01_ 철학자에게 건네는 충고

여러 가지 잡다한 가치들의 대립에 시선을 빼앗기지 말라.

선한 행동이 선한 동기에서만 나온다거나 참된 것이 참된 것과만 관계한다는 생각은 잘못이다. 사람들이 칭송하는 도덕적 행동도 얼마든지 부도덕한 동기에서 나올 수 있으며, 진리에 대한 열정도 무지나 오류 때문에 불타오를 수 있다.

진리만큼이나 오류도 가치가 있다. 우리 삶은 진리만큼이나 오류를 필요로 하며, 더 근본적으로는 우리의 체험 자체가 일종의 과장이며 축소이고 생략이다.

철학자이자 인식의 친구인 그대들이여 ... ... 순교하지 않도록 조심하라! 또 조심해야 할 것은 악의적 시기심과 복수심이다. 이런 위험에 직면할 때는 차라리 "옆길로 피해가"고 '가면'을 쓴 채 지내는 것이 낫다. 주위에 자신의 휴식이 되어줄 '정원 같은 사람'이 있다면 그곳에서 가벼운 고독을 유지하는 것도 좋다.

그러나 아무리 고결한 자라도 자기만의 성에 숨어서는 진정한 인식자가 될 수 없다. 진정한 인식자라면 성 '아래로' 내려가야 하고 사람들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평범함을 기이함으로 보는 눈을 가져야 한다. 척도나 규칙, 평균에서 벗어나는 예외 이상의 것들에 더 큰 흥미를 느껴야 한다. 그러고는 가면을 쓰고 위장한 채 '불편한 교제'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불편하고 악취 나는 곳에 뛰어든 시간이 필요하다. 자신만의 '은밀한 장소'로 퇴각하지는 말라.

척도, 규칙, 평범을 연구할 때 운이 좋다면 철학자는 냉소주의를 도우미로 만날 수 있다. 철학자라면 냉소주의의 저속한 영혼 속에 스쳐가는 성실한 그 무언가를 포착해야 한다. 냉소주의자는 평범이나 규칙의 비속함을 알아차리는 사람이다. '구역질 나는 것에 섞여든 매혹적인 것', '가장 지저분한 인간'에 깃든 '가장 깊이 있고 예리한 인간'을 읽어낼 줄 알아야 한다.

그러나 '분노하는 인간'에게서는 얻어들을 만한 것이 별로 없다. 사람들은 분노에 휩싸였을 때 인식에서 멀어진다. 물론 자신과 세계와 신을 물어뜯는 분노하는 인간이 도덕적으로는 더 높이 평가받을 수 있다. 하지만 인식하는 자의 입장에서 보면 분노하는 사람만큼 범속하고 무심하며 배우지 않으려 드는 사람도 없다. 분노한 사람보다 더 많은 거짓말을 하는 사람은 없다.

정말로 무언가를 바꾸고 싶다면 더욱 냉정해져야 한다.

02_ 스타일, 템포, 뉘앙스


"어떤 사람이 자신의 길을 걷고 있는지는 걸음걸이를 보면 알 수 있다."

"내가 걷는 것을 보라. 자신의 목표에 다가서는 자는 춤을 춘다."

걸음걸이와 표정을 봄으로써 말보다 더 많은 것을 알아낼 수 있다. ( ... ) 스타일과 템포를 모른 채 어떤 작품을 옮겼다면 제아무리

"충실하게 뜻을 옮긴 번역이라 하더라도 ... ... 거의 위작"이다.


뉘앙스의 기술을 갖추지 못한 젊은이들의 독서는 미숙하며 난폭하다. 이들은 진리와 가상이 단지 "음영과 색조의 차이"일 수 있음을 모른다. 미묘한 음영과 색조의 차이를 알지 못한 채, 사람이나 사물에 대해 '예 아니면 아니오'로 달려들면 나중에 반드시 대가를 치른다. ( ... ) 물론 젊은이들의 영혼은 그리 쉽게 진정되지 않는 법이어서 섬세한 기술 없이 분노와 불신을 표출하고, 결국 자기를 향해 난폭하게 날뛰는 일도 많을 것이다. "그 영혼은 얼마나 초조해하며 자기 자신을 찢어놓을까."

작가와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스타일을 읽어내야 하지만, 스타일은 이해를 가로막는 것이기도 하다. ( ... ) 말하자면 문체란 저자가 펜으로 찔러 남긴 흔적이지만, 독자가 저자에게 함부로 접근할 수 없게 만든 방어막이자 가면이다. 그러므로 스타일(문체)는 독자나 청중을 택하는 장치로 기능한다.

"글을 쓸 때 사람들은 이해되기를 원하는 동시에, 이해되지 않는 것도 원한다. 누군가가 책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이 그 책에 문제가 있음을 뜻하지는 않는다. ( ... ) 즉 저자는 '어느 누군가'에 의해 이해되기를 바라지 않았던 것이다. 모든 고귀한 정신과 취향은 자신을 전달하려 할 때, 청중도 선택한다. 그는 청중을 선택함으로써, '다른 사람들'에게는 차단기를 내린다. ( ... )"


03_ 철학자의 권리와 양심

세계가 '가상'일지 모른다는 의심과 '직접적 확실성'을 믿는 순짐함은 문제이지만, 그럼에도 자기 앞에 나타난 것을 의심하고 "^정직한^ 대답"을 간절히 원하는 태도에는 뭔가 귀중한 것이 있다. 정직을 끝까지, 설령 그 과정에서 도덕과 충돌하더라도 꺾이지 않고 끝까지 밀고 가는 것. '방법의 양심', '방법의 도덕' ( ... ... )


04_ 힘에의 의지

'힘에의 의지(Wille zur Macht)'

'충동들의 실재'

'충동의 삶'

세계를 일종의 '작용'으로 이해하는 한에서 물리학자가 내놓은 '힘(Kraft)' 개념은 불충분하다.[주]

[주] 여기서 니체가 비판한 물리학자의 '힘Kraft' 개념과 '힘에의 의지'에서 사용된 '힘Macht' 개념은 다르다. 나는 후자가 '능력'이나 '역량(고정된 현실 양으로석 아니라 잠재력으로서)'에 가깝다고 이해한다. 불행히도 우리는 니체가 섬세하게 구분한 두 단어를 모두 '힘'이라는 말 하나로 옮기고 있다. '권력에의 의지'는 '힘에의 의지'만큼이나 많이 유통된 번역어인데 'Macht'가 '정치적 권력'으로 오해될 여지가 있어 마땅한 번역어가 아니다. 지금으로서는 일단 '힘에의 의지'[라는 표현]을 사용하지만, 이것이 '물리적인 힘', '역학적 힘'과 구분해(일종의 보완으로서) 나온 개념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한국어로는 알 수 없는 인용문}

" '힘Kraft'이라는 우쭐한 개념--이 개념으로 우리의 물리학자는 세계에서 신을 창조했는데--은 여전히 보완될 필요가 있다. 그것[힘 개념]은, 내가 '힘에의 의지'로서, 즉 힘(능력, Macht)의 표명에 따른 지치지 않는 요청으로, 혹은 힘Macht의 사용이나 실행으로, 창조적 충동 등으로 표현하는, 내적 세계에 배당되어야 한다. 물리학자들은 '원격 작용'을 자신들의 원리에서 제거할 수 없다: 반발력(혹은 견인력)도 마찬가지다. 그것은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우리는 모드 운동, 모든 '현상', 모든 '법칙'을 단지 어떤 내적 사건의 징후로서 파악할 수밖에 없으며, 종국적으로는 인간의 유비를 이용할 수밖에 없다. 동물에 있어서 그 모든 충동들을 힘에의 의지로부터 이뜰어내는 일은 가능하다: 유기체적 생명의 모든 기능을 이러한 하나의 원천에서 끌어내는 것도 마찬가지다." [주]46─《힘에의 의지》 619절; 《유고 (1884년 가을~1885년 가을)》, 1885, 36[31].

사실 물리학적 '힘Kraft'은 그 자체로 매우 형이상학적 개념이다. 물리학자들은 종종 '힘'을 물리적 현상의 '원인'으로 제시하지만, [이러한] '힘'은 현상에 대한 기술이지 현상의 원인이 아니다. "힘이 한 번이라도 증명되었던가? 아니다. 아주 낯선 언어로 번역된 작용들(효과들, Wirkungen)이 있었을 뿐이다." 사과가 왜 떨어졌는가라는 물음에 '어떤 힘(중력)'이 당겼기 때문이라 한다면 우스꽝스러운 답변이 될 것이다. 그 힘(중력)은 특정한 질량을 가진 사과가 어떤 속도(가속도)로 떨어진 현상의 기술이지 원인의 기술이 아니다. ( ... ... ) 인력이든 척력이든, 이런 힘들은 현상이고, 작용이며, 파생물이다. 일차적인 것이 아니며, 히 힘들을 품기도 하고 발산하기도 하는 어떤 것을 전제한다. [주]49

( ... ... )


05_ 도래할 소수를 위하여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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