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고병권 지음. 다이너마이트 니체: 고병권과 함께 니체의 <선악의 저편>을 읽다. 천년의상상 펴냄. 2016.
※ 발췌: pp. 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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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개구리의 퍼스펙티브
01_ 인식 배후의 충동 - 앎의 의지
( ... ... ) 니체가 철학을 비평할 때 관심을 두는 또 하나의 요소는 해당 철학을 지배하는 충동이다. 그는 플라톤의 이데아론이 옳은가를 따지기 이전에 그에게 왜 그런 이론이 필요했을까를 생각했다. 즉 이론의 기본 동기를 읽어내는 것이다. 따라서 니체의 플라톤주의 비평은 오류를 교정하기 위함이 아니다. 그가 플라톤주의의 전복이나 타도를 외쳤을 때에는 플라톤주의를 지배하고 플라톤주의를 통해 지배욕을 드러내는 충동을 겨냥한 것이었다.
《선악의 저편》 제1장의 첫 소절은 '진리'가 아니라 '진리에의 의지' ( ... ) 니체가 '철학'과 관련해 던진 첫 번째 물음은 진리가 아니라 진리를 지배하는 동기, 충동, 의지에 대한 거시다. 진리란 무엇인가가 아니라, 무엇이 진리를 원하는가? ( ... )
가치들의 대립이라는 편견
진리 추구가 충동의 산물이라고 했지만, 혹시 진리는 그 자체로 원할 만한 것이 아닐까? ( ... ) 그러나 니체는 묻는다. "우리는 진리를 원한다고 가정했는데, 왜 진리가 아닌 것을 원하지 않는가? 왜 불확실성을 원하지 않는가? 왜 심지어 무지를 원하지 않는가?" 정말 진리가 그토록 가치 있는 것인가? 진리에 대한 의지를 묻는 순간, 우리 앞에 다가오[는] 것은 "진리의 가치 문제"다.[주]4
( ... ) 철학자들은 진리가 어떤 특정한 사심이나 충동과 관련된다고 결코 생각하지 못한다. 그 이유는 철학자들이 오랫동안 '가치들의 대립에 대한 믿음'에 오랫동안 빠져 있기 때문이라고 니체는 말한다. 가치들의 목록 한펴네는 진리, 이성, 참된 것, 좋은 것, 올바른 것이 있고, 다른 편에는 오류, 허구, 충동, 나쁜 것, 부당한 것 등이 있다. 그래서 진리처럼 순수하고 참된 것이 사심이나 충동 등에서 나온다고는 생각하지 못한다. 니체가 보기에 이것이야말로 큰 편견이다. 도덕적 행동이 명예욕이나 이기심에서 생겨날 수 있듯이, '진리에의 의지'도 '기만에의 의지'에서 생겨날 수 있다. 대립적인 가치들로 갈라놓는 경계선이 이런 생각을 막는다. 왜 ( ... ) 그 경계선이 피상적임을 깨닫지 못했을까. ( ... )
오류의 가치
왜 우리는 '진리'가 '오류'나 '가상'보다 가치 있다고 생각하고, '확정된 것das Bestimmte'을 '불확정적인 것'보다 가치 있다고 생각할까. ( ... ) 그러나 생명의 보존과 강화에 있어서는 '오류'도 '진리'만큼이나 소중하다. 이 점이 니체 철학의 독특한 면도다. ( ... )
니체는 '판단의 오류'를 지적했다고 '판단에 대한 반론'이 이루어진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주]7 설령 어떤 판단이 '오류'였다 해도 무가치한 판단은 아니라는 뜻이다. 오히려 생존에 관한 한 우리는 오류의 덕을 보고 있다. 《즐거운 지식》에서 니체는 '논리적 동물의 생존'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한다. 세상에는 먼지 하나도 똑같지 않기에 논리학의 가장 기본인 '동일성'을 받아들이려면 사물을 '대강' 보는 눈이 필요하다. 예컨대 우리는 사람들 각각의 차이를 대강 생략할 때 모두를 묶어 '인간'이라 말할 수 있다. 우리가 숲을 보는 것도 그 덕분이다. ( ... ) 이것은 생존의 문제이기도 하다. 어제 먹고 '죽다 살아난' 버섯과 '같은 종류'의 버섯을 전혀 '다른' 버섯으로 인식하는 종족이 있다면 그들의 생존 가능성은 낮을 것이다. 그러므로 '논리적 동물'은 어느 정도 '비논리성'을 통해 생존 가능하며, '논리적인 것'은 '비논리적인 것'을 어느 정도 전제한다.
우리가 세계를 인식하는 수단인 '힘', '물체', '원인과 결고', '운동과 정지' 등등의 개념도 마찬가지라고 니체는 말한다. ( ... ) 우리는 그런 개념들을 통해 세계를 인식하고 또 그 인식에 기초해 살아간다. '진리' 자체가 우리가 "스스로를 보존하기 위해 ... ... 필요로 하는 어리석음의 일종"일 수 있다.[주]10 살아가는 데에 오류와 어리석음이 필요하다는 말을 이해한다면, 그래서 "삶의 조건들 중에는 오류도 있다"는 것을 안다면, 그것만으로도 당신은 이책의 제목 '선악의 저편'에 설 수 있다고 니체는 말한다. ( ... ... )
02_ 철학자들의 편견
참된 세계와 가상 세계
현대 철학의 형이상학적 면모. 먼저, 칸트는 인식을 인간 경험의 한계 너머까지 확장할 수 있다고 믿는 형이상학자들을 비판했다. 그의 형이상학 비판은 형이상학의 한계와 범위를 정하는 것, 이성의 월권적 사용을 막는 것을 의미했다. ( ... ) 《순수이성비판》에서 이성이 경험적 원리의 도움 없이 경험 세계에 대한 참된 인식을 가질 수 잇는지[를 논의하며], 이를 '선험적 종합 판단'의 문제라고 불렀다. 경험에 의존하지 않는 선험적(초월론적) 판단이면서 인식의 확장을 가져오는 종합적 판단이 어떻게 가능한가. 이 물음에 대한 칸트의 답변은 동어반복이라고 니체는 지적한다. 왜냐하면 칸트는, 선험적 종합 판단이 어떻게 가능하냐는 물음에 우리에게 그런 능력이 있다고[만] 답하기 때문이다. 니체에 따르면, 칸트의 답변은 딱 세 단어로 요약된다. "어떤 능력에 의해서."[주]35 물론 칸트는 이 세 단어로 말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좀처럼 이해할 수 없도록 아주 까다롭고 심오하게 말했다. 그러나 니체가 보기에 칸트의 물음과 답변은 비유컨대 이런 식이다. '아편은 어떻게 우리를 잠에 빠지게 하는가?' '아편에 잠을 자게 하는 힘(성분)이 있기 때문이다.'
( ... ) [니체는 이렇게 말한다.] "이제 마침내 '선험적 종합 판단이 가능한가?'라는 칸트의 물음을 '왜 그러한 판단에 대한 믿음이 필요한가?'라는 물음으로 바꿔야만 할 때가 왔다."[주]36 사실 칸드 시대는 형이상학자의 망상이 승승장구하던 때가 아니었다. 오히려 위협적으로 등장한 것은 신안과 도덕이 아니라, 경험과 감각을 중시하는 과학이었다. 이성의 왕국과 도덕의 왕국 사이에 그어놓은 칸트의 경계선은 과연 어느 왕국을 지키기 위한 장벽이었을까. ( ... ) 칸트의 답변은 유럽의 도덕주의자, 신비주의자, 예술가, 기독교인, 반계몽주의자를 흥분시켰다. 당시 유럽에 밀려든 "강력한 감각주의", 곧 모든 인식과 지식이 경험적 감각에서 왔다는 생각과 맞설 해독제를 칸트에서 찾은 것이다. 왜 칸트의 물음과 답변이 필요했던가. 니체의 대답은 이렇다. 생존을 위해서는 오류도 필요하듯, 어떤 시기 어떤 사람들에게는 선험적 종합 판단이 진리라는 믿음이 필요했던 것이라고. 당시 독일인, 더 나아가 꽤 많은 유럽인에게는 '감각주의에 맞설' 해독제나 수면제로 칸트 철학이 필요했다고.
둘째, 원자론. 현대 철학자들은 고대의 원자론을 더 이상 진지하게 믿지 않는다. 어떤 '정지하고 있는 최후의 것', 가장 기본적인 단단한 덩어리에 대한 형이상학적 믿음을 더 이상 갖고 있지 않다. 그렇다면 이 믿음은 완전히 사라졌는가. 그렇지 않다. 니체가 보기에 원자에 대한 믿음은 매우 은밀한 곳, 언뜻 보면 원자론의 적대자들(원자론의 후계자인 유물론에 적대적이었던 이들) 안에 보존되어 있다. 기독교의 '영혼 원자론'이 그것이다. 기독교인은 영혼을 육체와 달리 영원하고 불가분한 단자, 즉 원자라고 생각한다. ( ... ) 니체는 이런 믿음을 학문에서 추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영혼 개념 자체를 버릴 필요는 없다. 오히려 영혼과 우리 심리 세계를 새롭게 파악할 개념이 '새로운 심리학자들'에 의해 만들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 ... ... )
셋째, 유기체(생명체)의 가장 기본적인 본능으로서 '자기 보존' 본능. 여기에도 형이상학적 잔재가 있다. 생리학자는 모든 유기체에 기본적으로 자기 보존 본능이 있다 말하곤 한다. 그리고 유기체의 모든 행동을 이 본능에 입각해 설명하려 한다. 그러나 니체가 보기에 "자기 보존"은 유기체 행동의 '원인'이라기보다 "간접적이고 자주 나타나는 결과 중의 하나일 뿐"이다. 생명은 그 자체로 '힘에의 의지'로서 힘의 발산이지, 또 다른 형이상학적 원리를 끌어들이면 안 된다. 니체는 여기서 스피노자의 코나투스conatus를 떠올린다. 그는 목적론을 그토록 비판했던 스피노자가 자기 보존 본능, 즉 코나투스를 목적론적 원리로서 끌어들인 것을 안타깝게 생각한다. 스피노자가 "불필요한 목적론적 원리"를 끼워넣었다는 것이다.[주] ( ... ... )
[주] ( ... ... ) 이처럼 자기를 관철하려는 사물의 현행적 본질이 '코나투스'인데, 인간의 경우에는 충동이나 의지, 욕망 등으로 나타난다. 이렇게 해석하면 스피노자의 코나투스를 니체의 '힘에의 의지'와 그리 멀지 않은 개념으로 볼 수도 있다.
넷째, 물리학(자연과학)의 확실성에 대한 믿음. 물리학은 '감각에 대한 믿음'에 기초해 성립한 것인데, 사람들은 이 믿음을 믿음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 물리학은 세계에 대한 '해석'이 아니라 '설명'이라는 것이다. ( ... ) 그러나 감각 또한 자극에 대한 하나의 해석임을 이해하지 못하는, 감각에 대한 물리학자의 순진한 믿음은 또 다른 신앙일 뿐이다. ( ... ... )
( ... ... ) 니체는 감각이 세계의 실재를 보여준다는 순진한 믿음을 갖지 않았고, 감각 너머에 참된 세계가 실재한다는 사고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결국 문제는 '퍼스펙티브적인 것'이다.
오래된 습관에서 생겨난 편견
( ... ... ) 너무 당연해 증명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많은 것들은 나의 판단이기 이전에, 나를 지배하는 습관, 관습, 전통, 문화의 판단(내 판단 이전의 선판단)이다. 니체는 그중 몇 가지를 지적한다.
첫째,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와 같은 '직접적 확실성'. ( ... ... ) 니체는 데카르트의 코기토에서 '주체'오 '활동'에 대한 사람들의 습관적 편견을 확인한다. 데카르트는 이런 식으로 추론했다. <사유라는 활동이 이루어지고 있는데, 그것이 활동인 한 주체가 있어야 한다. 그 주체가 바로 나이다.> 니체는 이런 추론이 언어 습관과 관련 있다고 말한다. 우리는 술어에 주어를 붙이는 습관이 있다. "사람들은 여기서 문법적 습관에 따라 '사고라는 것은 하나의 활동이며, 모든 활동에는 하나의 주체가 있다"고 생각한다.[주]43
《도덕의 계보》에서 니체는 '번개'를 예로 들어 이를 설명한 바 있다. 사람들은 '번개가 친다Es blitzt'라고 말한다. 우리는 'blitzt'를 어떤 것의 작용이라 생각해 주어 'Es'를 꼭 쓰려 한다. 하지만 사실 우리는 '치는 것'과 '번개'를 구분할 수 없다. 언젠ㄱ 한 번은 '치는 것', 즉 '섬광'을 '번개'라고 불렀고, 그다음에 다시 섬광이 나타날 때 '번개가 친다'고 표현한다. ( ... ... )
03_ 퍼스펙티브적인 것 - 이것은 해석이지, 텍스트가 아니다
우리는 특정한 조명 속에서 사물을 바라보고 세계를 해석한다. 생물학적, 시대적, 문화적, 언어적 등등의 조명 속에서만 세계는 우리에게 드러난다. 세계에 대한 해석 이전에 하나의 해석으로서 세계가 우리 앞에 펼쳐져 있으며[??], 우리는 우리에게 해석된, 다시 말해 우리에게 나타난 그 세계를 살아간다. 이 점에서 "퍼스펙티브-광학"은 우리 삶의 방식이자 조건이다.
플라톤이 추구한 이데아 세계는 말하자면 해석이 존재하지 않는 세계이다. 우리 세계에 해석이 존재하는 이유는 플라톤식으로 보자면 '이 세계'가 완전히 어둡지도, 충분히 밝지도 않기 때문이다. 완전히 어둡다면 아무것도 볼 수 없으니 해석이 존재하지 않을 것이고, 완전히 밝다면 모두가 하나의 실재, 하나의 진리를 볼 터이니 해석이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니체에게는 보편적인 문, 보편적인 조명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것은 보편화의 환상이며, 눈과 조명에 대한 오해이다. 모든 생명체는 어떤 눈을 가졌고, 어떤 조명 아래 사물을 본다. ( ... ... ) 니체가 '퍼스펙티브저인 것'을 "모든 생명의 근본 조건"이라 부른 것은 이 때문이다.[주]57 개구리가 본 것은 플라톤이 생각한 실재가 아니지만 그렇다고 플라톤이 생각한 가상도 아니다. 그것은 개구리가 해석한 세계이고 개구리가 살아가는 세계이다.
( ... ... ) 그런데 니체의 퍼스펙티비즘은 단지 우리가 특정한 퍼스펙티브를 통해 세계를 바라본다는 점을 지적하는 데 머물지 않는다. 이는 니체의 퍼스펙티비즘의 절반에만 해당하는 이야기다. ( ... ... ) 니체는 퍼스펙티브적인 것을 부인하는이들, 그래서 진리의 확실성만 추구하는 이들, 심지어 '허무'일지라도 확실하기만 하다면 그것을 위해 죽는 편이 낫다고 생각하는 이들을 병들었다고 생각한다. 말하자면 이런 태도는 "지쳐 있는 영혼의 징후"라는 것읻. 이처럼 니체의 비평이 개입하는 것은 퍼스펙티브들을 대하는 태도의 차원에서다. 그에 따르면 건강한 이들[은] 오류조차 생명을 위해 기꺼이 활용한다. ( ... ) 삶에 필요하다면 '불멸의 영혼'이나 '낡은 신' 개념조차 다시 탈환할 것이다.[주]61
니체는 이런 맥락에서 플라톤적 사유 방식의 고상한 면모를 부각하기도 한다.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는 것"만을 확실한 것으로 생각하고, 그런 문제에만 매달려온 이들을 플라톤은 "감각 천민"이라고 불렀다. 니체에 따르면 "플라톤적 사유 방식의 매력은 바로 감각 충족에 대한 반항에 있다." 플라톤은 감각에 휘둘리지 않고, 온갖 형형색색의 감각에 차가운 '개념 그물'을 던져 그것들을 지배하려 했다. ( ... ... )
니체가 서문에서 보여준 플라톤 비판을 이런 맥락에서 다시 음미할 필요가 있다. 니체는 플라톤의 퍼스펙티브가 오류라고 비판하지 않았다. 문제 삼은 것은 '퍼스펙티브적인 것'에 대한 플라톤의 태도, 즉 플라톤의 '퍼스펙티브들에 대한 퍼스펙티브'였다. ( ... ... ) 그러므로 니체가 퍼스펙티비즘을 통해 묻고 싶은 바는 ( ... ) 당신은 얼마나 다양한 퍼스펙티브를 체험했는가. 당시은 몇 칸이나 되는 영혼의 사다리를 가지고 있는가. 당신은 얼마나 깊은 곳까지 내려가 보았고 얼마나 높은 곳까지 올라가 보았는가. 나는 니체의 이런 물음이 '진리가 무엇이냐'라는 물음보다 백배 천배 고상하다고 생각한다.
04_ '어쩌면' - 도래하는 철학자의 부사
니체는 '도래하는' 존재들, 이를테면 '새로운 종류의 철학자'. '새로운 심리학자'. ( ... ) 등을 지칭하면서 '어쩌면'이나 '혹시' 등으로 옮기는 부사 'vielleicht'를 계속 사용한다. ( ... ) 어떤 의미에서[는] 위험한 가정의 철학자 ( ... ... )
( ... ... ) 니체의 '어쩌면'이라는 부사를 두고 데리다는 "아직 존재하지 않는 것 혹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을 "완전히 현재적으로" 말하는 방식이라고 했다.[주]77 즉 이미 결정된 것으로 보이는 과거를 다시 유동하게 하는 말이고,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도래하도록 당기는 말이다. 그러므로 '어쩌면'이라는 부사는 '지금 여기'에 도래할 '사건'을 사유하게 하는, 도래하는 것을 맞이하는 실천적 단어다.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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