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1월 7일 화요일

[발췌 읽기: 고병권, 다이너마이트 니체] 서장


출처: 고병권 지음. 다이너마이트 니체: 고병권과 함께 니체의 <선악의 저편>을 읽다. 천년의상상 펴냄. 2016.


※ 발췌: pp. 17~47.

* * *

지은이의 말

이 책은 니체의 《선악의 저편》에 대한 강독이다. 그는 입문을 원하는 이들에게 《선악의 저편》과 《도덕의 계보》를 권한 바 있다.

( ... ) 이 책은 니체를 통한 내 단련과 배움의 기록이다. ( ... ... )



서장: 비평 혹은 기다림에 대하여

01_ 미래 철학의 서곡

니체는 《선악의 저편》 부제를 '미래 철학의 서곡Vorspiel einer Philosophie der Zukunft'이라고 달았다. 서곡, 그러니까 이 책은 일종의 예고이고 기다림이다. 마치 산 위에 몰려드는 먹구름이 번개에 대한 예고이자 기다림이듯, 이 책은 미래 철학, 즉 도래하는 것의 징후로 가득 차 있다. 하지만 얼마나 많은이들이 '기다림'과 '가만히 있음'을 혼동하는가.  ─ p.17.

기다림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게 아니라 기다리는 것이다. 문이 열리기를 기다리는 자는 문을 두드리고, 열매 떨어지기를 기다리는 자는 나뭇가지를 흔든다. 니체의 말을 빌리자면 우리는 무작정 기다리는 자들, "허구한 날을 기다리는 자들", 그렇게 "땅을 지키고 가게를 지키는 자들"이 되어서는 안 된다. 오직 끊임없는 물음과 시독 속에서만 우리는 기다렸다 말할 수 있다. "시도와 물음 그것의 나의 모든 행로였다."[주]1 니체는 자신의 기다림을 그렇게 표현했다.

( ... ... ) 15세기 유대교 경전의 어느 필사본에는 이런 그림이 있다고 한다. 도시의 성문이 보이고 그 위에 문지기가 있다. 저편에는 말을 탄 메시아가 있고 그 앞에 선지가(예언자)로 보이는 청년이 성문을 향해 다가선다. ( ... ) 메시아의 진입을 준비하고 잇는 듯한데 도대체 무엇을 하려고 문에 다가가는가. 문은 이미 열려 있는데 말이다. 이 물음에 조르조 아감벤은이런 답변을 내놓았다. "그것은 바로 문을 닫아버리는 것이다."  ( ... ... )

( ... ... ) 사실 복음서로 역사적 예수를 정확이 알기는 어렵다. 당시 예수 공동체는 엄청난 탄압을 받았기에 매우 "격앙된 상태"에서 복음서를 썼고 그것으로 자신들의 생각을 전파하려 했다. "싸움과 선전의 목적과 관련해서만 이해될 수 있는 특징들"이 덧붙여진 것이다. 니체에 따르면 복음서 속 예수는 초기 예수 공동체의 "조잡성으로 번역된" 결과물이다.[주]12 ( ... ) 하지만 니체는 복음서에[는] 순진무구함도 있다고 말한다.[주]13 특히 복음을 전하는 구세주에게는 "아이와 같은 천진함"이 있다. 이것이 니체가 말하는 백치 예수다. 그는 "누구든지 신의 자식"이며 "신의 자식으로서 누구나 동등하다고"고 했다. 또한 예수 자신에게만 적용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했다.[주]14 ( ... ... ) 그런데 이 순진한 바보가 "모든 종교, 모든 제의, 모든 역사, 모든 자연과학, 모든 세계 경험, 모든 지식, 모든 심리학, 모든 서적, 모든 예술을 넘어서"[주]15 버렸다. 단지 '내적인 빛' 하나로 말이다. 예수는 진리를 '근거'를 대 입증하려 하지 않았다. 그런 것은 고급문화, 고급교양을 갖춘 엘리트들이나 하는 행동이다. ( ... ) 그러나 바보는 그렇게 행동하지 않는다. 바보는 체제의 근거나 원리, 율법에 입각하지 않는다. 그는 그런 것을 모른다. 다만 자신의 내적인 빛과 자기 안의 기쁨과 긍정 하나만을알 뿐이[다].

흥미롭게도 니체는 《선악의 저편》에서 '진정한 철학자'의 형상을 이런 '바보'에서 찾고 있다. 그에 따르면 진정한 철학자는 영리하고 박식한 현자가 아니라 끊임없이 모험과 시도를 감행하는 '달갑지 않은 바보'다.[주]16 현실을 너무나 잘 알기에 '죽어지내는 현자'가 아니라 별 가망 없는 일에 뛰어드는 '살아 있는 바보' 말이다 (이는 제1장에서 자세히 다룰 것이다).

니체에 따르면 예수의 말은─석가나 노자의 말과 마찬가지로─'죽은 현자'의 말과 대립한다. 아니, '말' 자체가 죽은 것이므로 예수는'말'과 대립한다. "그는 말, 공식, 법칙, 신앙, 교의와 대립한다. 그는 단지 가장 내적인 것에 대해 말할 뿐이다. ( ... ) 그것들도 비유로서의 가치만을 가질 뿐이다."[주]17  메시아를 도래하게 하는 것은 말도 교리도 의식도 율법도 심지어 기도도 아니다. 예수는 "오직 복음적 실천"만이 신에게 이르는 길임을,아니 "그 실천이 바로 '신'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런 점에서 예수는 일종의 '자유정신'이었다.[주]18 그는 법의 문을 닫아버렸다. 당대 원칙과 통념과 상식의 효력을 멈추게 했다. 그때만이 메시아가 도래하기 때문이다. ( ... ... )

( ... ) 그는 이런 식으로 '나'를 이중화했다. '나'는 '나'를 찾아가며, '나'는 '나'를 기다린다. 그 길 위에서 '나'는 '나'가 되어가고 있다.

여기서 '기다림'은 '되어감'과 같다. 나 자신의 기다리는 행위가 나 자신이 되어가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좀처럼 우리 자신을 기다리지 않는다. 여러 가지 이유로 우리는 우리 자신을 만나기 위한 치열한 물음과 시도를 포기해버린다. 어리다는 이유로, 늙었다는 이유로, 여자라는 이유로, 가난하다는 이유로, 우리는 우리 자신이었을 존재를 만나지 못한 채 죽는다.[주]24 '도래하는 나'를  만나지 못하게 하는 온갖 위협과 회유─우리에게 불가능을 가르치는 율법과 지식─에 굴복하는 것이다. 니체가 "우리는 자기 자신을 알지 못한다"[주]25라고 했을 때, 그것은 인식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기다림의 문제, 다시 말해 시도와 실험의 문제이기도 하다. 나는나를 어디까지 기다려보았는가, 나는 나를 어디까지 시도해보았는가. ( ... ... )


02_ 플라톤주의에 대한 투쟁 - 진리가 여성이라면

이제 《선악의 저편》 서문을 읽어보자. 특히 첫 문장을 충분히 응미하자. "진리가 여성이라면 ... ." 니체는 이 서문에서 플라톤주의에 대한 투쟁을 명시한다. 흥미로운 점은 그가 플라톤주의의 문제를 에로스, 곧 사랑의 문제로 제기한다는 사실이다. ( ... ) 앎과 에로스, 이 문제를 누구보다 먼저 제기한 사람은 사실 소크라테스였다. 철학이 소크라테스와 더불어 시작되었다고 한다면, 그것은 그가 '진리'가 아니라 '진리에 대한 사랑'을 말했기 때문일 것이다. ( ... ... )


매력 없는 플라톤주의 1 - 수줍음에 대한 문지

니체는 플라톤주의를 '독단적 철학'이라고 불렀다. ( ... ) "진리가 여성이라면"이라고 가정한 뒤 니체는 말했다. "독단주의자인 한에서 모든 철학자는 여성을 잘못 이해한다."[주]32 독단주의는 여성(=진리)을 대하는 나쁜 태도, 나쁜 스타일이다. 진리가 여성이라면 "소름 끼칠 정도의 진지함과 무례한 집요함"을 가진 철학자를 어떻게 생각할까. 자신을 두른 베일을 모두 발가벗기겠다고 달려드는 남성을 말이다.

독단주의자는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람이다. ( ... ) "다 그럴 이유가 있어서 숨겨진 것들을 벗겨내고 드러내어 빛 속에 세워두려 했던 저 이집트 젊은이들이 갔던 좁은 길을 이제[는] 걸어가지 않을 것이다. 결코 그러지 않을 것이다. 이 조야한 취향,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진리를 추구하겠다'는 진리에 대한 의지, 진리에 대한 사랑에 빠진 이 젊은이들의 광기는 우리의 기분을 상하게 한다. ... ... 우리는 베일을 벗겨낸 후에도 진리가 그대로 진리로 머물러 있으리라는 것을 더 이상 믿지 않는다. 이것을 믿기에[는] 너무 오래 살았다. ( ... ) 자연이 수수께끼와 현란한 불확실함 [알려지지 않도록 한 것] 뒤에 감추어둔 부끄러움을 더 존중해야 한다."[주]34 ─ 《즐거운 지식》 제2판 서문, 4절. ─ p.33. ( ... ... )


매력 없는 플라톤주의 2 - 독특함에 대한 무지

독단주의자는 사물의 매력이 독특함에 있다는 걸 모른다는 점에서도 문제다. 그는 다른 이의 고유성이나 독특성에 무관심하다. 그는 보편적 진리 하나만 믿는다. 그리고 자기 견해가 바로 진리라고 생각한다. 그는 진리가 '퍼스텍티브적인 것'임을 부인한다. 이를테면 플라톤은 '올바른 것'이란 그렇게 '보이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인 것'이라고 했다. 플라톤은 진리를 위해 단 하나의 올바른 눈, 단 하나의 퍼스텍티브만을 허용한다. 이런저런 견해가 경쟁하겠지만 결국 옳은 것은 하나라는 것이다.

그러나 니체는 그런 보편적이고 초월적인 눈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에 따르면 '퍼스펙티브적인 것'은 "모든 생명의 근본 조건"이다.[주]40 즉 모든 생명체는 저마다의 퍼스펙티브로 파악한 세계 속에서 살아간다. 예컨대 거미는 거미의 퍼스펙티브를 따라 나타난 세계를 살고, 개구리는 개구리의 퍼스펙티브를 따라 나타난 세계를 산다. 인간도 마찬가지다. 이들 중 어떤 동물이 더 참된 세계를 사는 것이 아니다. 각각의 퍼스펙티브는 오류와 한계를 갖지만 나름의 힘과 미덕 또한 갖고 있다. 플라톤주의는 불행히도 이 각각의 퍼스펙티브가 갖는 독특성을 이해하지 못한다.('퍼스펙티브적인 것'은 1장에서 상세히 다룰 것이다).

( ... ... )


03_ 현대성에 대한 비평 - 가능한 시대에 밀착해서 가능한 시대로부터 멀리

《선악의 저편》에서 니체는 당대 철학, 종교, 학문, 예술, 정치를 강하게 비판한다. ( ...  ... ) 니체는 고대가 아니라 현대의 뿌리에서 플라톤을 만난 것이며 플라톤 비판이 어떻게 철저한 현대성 비판인지 이해할 필요가 있다. 비평이란 이처럼 당대 사유의 '뿌리'까지, 그 '근거'까지 내려가 그것의 '근거 없음'을 드러내는 일이다. ( ... ... )

( ... ... ) 이것은 니체가 본 '현대 민주주의'의 모습이기도 했다. 독특함이나 특이성이 없는 커다란 무리의 생산, 평범성과 획일성, 보편성이 지배하는 세계. "유럽의 민주화 운동"은 한마디로 "유럽인들이 서로 닮아가는 과정"이었다.[주]60 그에게 현대 민주주의란 특이성들의 평등 체게가 아니라 특이성 없음의 평등 체제로 보였던 것 같다.

( ... ) 플라톤은 민주주의의 적대자였다. 니체는 현대 민주주의를 플라톤주의에서 시작한 운동의 연장선[으로] 본다. 말하자면 모두 "하나이면서 동일한 역사"이다. 이들은 모두 허무주의(니힐리즘)의 역사를 다룬다. 허무주의란 삶의 활력과 의지를 없애는 의지이다. 서구 허무주의의 역사는 플라톤처럼 '저 세계'에 참된 존재를 정립하고 척도(본)로 삼아 '이 세계'에서의 삶을 평가절하하는 것으ㅗ 시작해(부정적 허무주의), 척도가 되는 고차적 가치들을 평가절하하는 것으로 나타났다가(반동적 허무주의), 나중에는 아예 평가하는 일 자체를 평가절하하는 식으로 나타나기도 한다(수동적 허무주의). 니체가 보기에 독특성들이 사라지고 모두 하나의 무리로 평등한 현대의 민주주의, 더 이상 긴장을 조직하거나 유지할 수 없는 현대의 민주주의는 이런 허무주의 운동의 귀결점이었다. ( ... ... )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