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5월 24일 일요일

[발췌:애쓰모글루/로빈슨,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 1장, 가깝지만 너무 다른 도시


출처: 대런 애쓰모글루, 제임스 A. 로빈슨 (2012).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 최완규 옮김/장경덕 감수/시공사 펴냄.
기타자료: 구글도서

※ 발췌 (excerpts): pp.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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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가깝지만 너무 다른 도시 


1.1 갈라진 도시 (p. 27)

  ( ... ... ) 미국의 제도가 멕시코를 비롯한 다른 라틴아메리카 국가보다 경제적 성공에 훨씬 더 크게 기여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으려면 초기 식민지 시대에 각기 사회가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당시에 비롯된 제도적 차이가 오늘날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차이를 이해하기 위해 북아메리카와 라틴아메리카의 식민지가 형성된 시기로 거슬러 올라가보자.


1.2 부에노스아이레스의 건설 (p. 31)

1516년 에스파냐의 항해사 후안 디아스 데 솔리스Juan Diaz de Solis는 남아메리카 동부 해안의 광활한 어귀에 도착했다. 뭍에 오른 데 솔리스는 이곳을 에스파냐의 땅이라 선언하고 이 강에 리오 데라 플라타Rio de la Plata(은의 강)라는 이름을 붙였다. 현지 인디오가 온몸을 은으로 치장했기 때문이다. 강어귀 양편에는 서로 다른 원주민들이 살았다. 지금의 우루과이 땅에는 차루아스 이닏오가 살았고 아르헨티나의 영토가 된 팜파스 대초원 지대에는 케란디 인디오가 살았는데, 이들 모두 이방인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원주민들은 작은 집단을 이뤄 사냥과 채집 생활을 했으므로 강력한 권한을 가진 중앙정치기구가 없었다. 에스파냐 영토를 넓히려고 새로운 지역을 탐사하던 데 솔리스는 바로 그런 차루아스 인디오 무리에게 몽둥이찜질을 당해 목숨을 잃고 말았다.

  1534년 여전히 희망을 버리지 않던 에스파냐는 페도르 데 멘도사Pedro de Mendoza의 지휘하에 1차 정착민을 파견했다. 같은 해 정착민들은 부에노스아이레스 땅에 도시를 건설했다. 유럽인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이상적인 곳이었을 법하다. 부에노스아이레스라는 말 자체가 '맑은 공기'를 뜻할 정도로 기후가 쾌적하고 온화했다. 하지만 에스파냐 1차 정착민은 오래가지 못했다. 이들이 좇던 것은 맑은 공기가 아니었다. 자원과 노동력을 착취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문제는 차루아스와 케란디 인디오가 고분고분 말을 듣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이들은 에스파냐인에게 음식을 제공하길 거부했고 강제로 붙잡는다 해도 일을 하지 않았다. 활과 화살로 새 정착촌을 공격하기도 했다. 에스스파냐인들은 굶주림에 시달려야 했다. 제 손으로 직접 음식을 마련해야 하는 지경에 이르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부에노스아이레스는 이들이 꿈꾸던 모습이 아니었다. 원주민에게 강제노동을 시킬 수도 없었고 빼앗을 은이나 금도 존재하지 않았다. 데 솔리스가 발견한 은은 사실 서쪽으로 한참 멀리 떨어진 안데스산맥에 자리 잡은 잉카제국에서 온 것이었다.
  In 1534 the Spanish, still optimistic, sent out a first mission of settlers from Spain under the leadership of Pedro de Mendoza. They founded a town on the site of Buenos Aires in the same year. It should have been an ideal place for Europeans. Buenos Aires, literally meaning "good airs," had a hospitable, temperate climate. Yet the first stay of the Spaniards there was short lived. They were not after good airs, but resources to extract and labor to coerce. The Charruas and the Querandi were not obliging, however. They refused to provide food to the Spaniards, and refused to work when caught. They attacked the new settlement with their bows and arrows. The Spaniards grew hungry, since they had not anticipated having to provide food for themselves.  Buenos Aires was not what they had dreamed of. The local people could not be forced into providing labor. The area had no silver or gold to exploit, and the silver that de Solis found had actually come all they way from the Inca state in the Andes, far to the West.

  에스파냐인들은 살기 위해 몸부림치면서도 더 많은 보물과 복속시키기 쉬운 원주민들을 찾아 사방으로 원정대를 보냈다. 1537년, 그중 한 원정대를 후안 데 아욜라스가 지휘했다. 이들은 잉카제국으로 향하는 길을 찾기 위해 파라나 강을 따라 올라갔다. 그 과정에서 과라니 인디오를 만난다. 옥수수와 카사바를 재배하는 농경문화를 영위하며 정착생활을 하는 원주민이었다. ( ... ) 과라니의 저항을 간단히 물리친 데 아욜라스는 지금의 파라과이 수도로 남아 있는 누에스트라 세뇨라 데라 아순시온(아순시온 산타 마리아의 성모 마리아)이라는 이름의 도시를 건설한다. 데 아욜라스와 그의 부하들은 과라니의 공주들과 결혼해 곧바로 신흥귀족의 지위를 꿰찬다. 기존의 부역 및 조세징수체계를 받아들이고 자신들이 그 고삐를 쥔 격이어서 애초부터 이들이 창설하기를 바란 식민지 형태였다. 그로부터 4년도 안 돼 에스파냐인이 죄다 신도시로 떠나버리면서 부에노스아이레스는 버려진 땅이 되고 말았다. 
  ( ... ... ) After a brief conflict, the Spanish overcame Guarani resistance and founded a town, Nuestra Senora de Santa Maria de la Asuncion, which remains the capital of Paraguay today. The conquistadors married the Guarani princesses and quickly set themselves up as a new aristocracy. They adapted the existing systems of forced labor and tribute of Guarani, with themselves at the helm. This was the kind of colony they wanted to set up, and within four years Buenos Aires was abandoned as all the Spaniards who'd settled there moved to the new town.

  '남아메리카의 파리'를 만들고자 팜파스 대초원의 비옥한 농경지대에 터를 닦아 유럽양식의 대로들이 들어선 대도시 부에노스아이레스에 다시 정착민이 몰려든 것은 1580년이 돼서였다. 부에노스아이레스를 버리고 과라니 인디오를 정복한 사례만 보더라도 당시 유럽인들이 아메리카 대륙을 어떤 식으로 식민지화하고자 했는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초기 에스파냐인이나 앞으로 살펴볼 영국 식민주의자들이 역시 제 손에 흙을 묻힐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누군가 대신 땀을 흘리고 금은보화는 자기들이 독차지하길 원했다.


1.3 에스파냐의 식민지 전략 (p. 33)

  데 솔리스, 데 멘도사, 데 아욜라스 이전에도 쟁쟁한 탐험가들이 미대륙을 찾은 바 있었다. 1492년 10월 12일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바하마제도의 섬 하나를 발견한 것이 시발점이었다. 에스파냐가 본격적으로 영토를 확장해 미 대륙을 식민지화하기 시작하면서 많은 일들이 벌어졌다. 1519년 에르난 코르테스는 멕시코를 침략했다. 15년 후 프란시스코 피사로는 페루로 원정을 나갔고, 페드로 데 멘도사가 리오 데라 플라타로 향한 것은 그로부터 2년 후였다. 이후 1세기 동안 에스파냐는 남아메리카 대륙 중부, 서부, 남부 대부분을 정복하고 식민지로 삼았다. 한편 포르투갈은 동쪽으로 브라질을 복속시켰다.

  에스파냐의 식민지 전략은 그 효과가 탁월했다. 멕시코에서 코르테스가 완성한 전략이었는데 적대적인 원주민을 굴복시키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인디오 지도자를 포로로 잡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이 전략 덕분에 에스파냐인은 인질로 잡은 지도자의 부를 빼앗고 휘하 토차민으로부터 공물과 식량을 얻어낼 수 있었다. 그런 다음 원주민 사회에서 신흥귀족 세력으로 입지를 굳혀나갔다. 기존에 시행되던 조세, 공물, 특히 강제노역체제를 고스란히 손에 넣은 것이다. 

  1519년 11월 8일, 코르테스 원정대는 아즈텍제국의 수도 테노치티틀란에 도착했다. ( ... ) 그 후에 벌어진 일은 1560년대 프란체스코회 수사 베르나르디노 데 사하군이 남긴 유명한 고문헌인 '피렌체 사본'에 자세히 기술되어 있다.

  ( ... ... )

  [①라틴아메리카 이야기] 아즈텍에 대한 군사 정복은 1521년에 마무리되었다. 누에바 에스파냐(뉴스페인)의 총독으로 임명된 코르테스는 가장 값진 자산인 원주민을 이른바 엔코미엔다encomienda라는 제도를 통해 분배하기 시작했다. [②유럽의 스페인 이야기] 에스파냐 남부는 8세기부터 이슬람교도인 무어인이 장악했다. 15세기 들어 에스파냐가 남부 국토회복운동을 벌이면서 공신에게 토지를 분양하기 위해 처음 도입한 제도가 바로 엔코미엔다였다. [③ 라틴아메리카 이야기] 하지만 신세계에서는 과거보다 해악이 훨씬 컸다. 일정수의 인디오와 토지를 엔코멘데로encomendero라 부르는 에스파냐 귀족에게 부여하는 제도로 변질된 것이다. 인디오는 엔코멘데로에게 공물과 노역을 제공해야 했다. 엔코멘데로는 인디오를 기독교로 개종시키는 책무에 대한 대가라는 핑계를 댔다. 
  The military conquest of the Aztecs was completed by 1521. Cortés, as governor of the province of New Spain, then began dividing up the most valuable resource, the indigenous population, through the institution of the ^encomienda^. The ^encomienda^ had first appeared in 15th century Spain as part of the reconquest of the south of the country from the Moors, Arabs who had settled during and after the 8th century. In the New World, it took on a much more pernicious form: it was a grant of indigenous peoples to a Spaniard, known as the ^encomendero^. The indigenous peoples had to give the ^encomendero^ tribute and labor services, in exchange for which the ^encomendero^ was charged with converting them to Christianity.

  엔토미엔다의 정황을 후대에 가장 생생하게 남긴 것은 도미니카회 수사 바르톨로메 데 라스카사스였다. ( ... ) 1542년에 발간된 그의 저서 《서인도제도 파괴에 대한 간략한 보고서》 ( ... ... )  [니카라과에서의 엔코미엔다:]
정착민은 각자 할당된 도시에 거처를 마련한다(법적으로는 이를 엔코미엔다라 칭한다). 원주민을 강제노역에 동원하고 가뜩이나 부족한 식량을 독차지한다. 대대손손 땀 흘리며 작물을 길러온 원주민의 토지도 빼앗는다. 정착민은 신분이나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원주민이라면 모조리 자신의 하인으로 삼아 밤낮으로 쉴 새 없이 부려먹는다.
[오늘날 콜롬비아에 해당하는 뉴그라나다에서의 엔코미엔다: ]
에스파냐인은 장기적으로 마지막 한 줌의 황금까지 모조리 빼앗겠다는 일념으로 으레 그래 왔듯이 도시와 그곳에 거주하는 원주민을 나눠 갖는 전략을 폈다(언제나처럼 엔코미엔다를 시행한 것이다)…. 또 늘 그렇듯이 원주민을 하찮은 노예로 취급했다. 원정대를 이끄는 수장은 왕을 사로잡아 예닐곱 달 동안 인질로 삼고 터무니없이 많은 황금과 에메랄드를 요구했다. 보고타의 왕은 겁에 질린 나머지 고문하는 이들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일념으로 집 한 채를 온통 황금으로 채워 넘기라는 요구도 들어주었다. 그러기 위해 왕은 황금을 찾아오라고 원주민을 파견했고, 이들은 각자 손에 얼마간의 보석을 쥐고 돌아왔다. 하지만 ( ... ... )

1.4 미타의 부활 (p. 37)

  멕시코에서 완성된 정복 전략과 제도는 에스파냐 제국의 다른 지역에서 너도나도 모방하기에 바빴다. 가장 효과적으로 활용된 사례를 들라면 역시 피사로가 페루를 정복할 때였다. ( ... ... )
  • [앞에 피사로에 대한 언급이 있었는지]
  • The strategy and institutions of conquest perfected in Mexico were eagerly adopted elsewhere in the Spanish Empire. Nowhere was this done more effectively than in Pizarro's conquest of Peru. ( ... ... )

  피사로는 페루의 툼베스라는 도시의 인근 해안으로부터 남쪽으로 진군해 나아갔다 1532년 11월 15일, 그는 가하마르카라는 고원도시에 당도했다. 잉카제국의 황제 아타우알파가 진을 치고 있던 곳이었다. [... 스페인 원정대의 만행과 약탈 묘사 ...]

   ( ... ... )

  이 시점에서 에스파냐 원정대는 잉카제국 원주민에 눈독을 들였다. 멕시코에서처럼 잉카제국 사람들은 엔코미엔다로 할당되었다. 피사로를 떠난 정복자들은 저마다 엔코미엔다를 꿰차게 된 것이다. 초기 식민지 시절 엔코미엔다는 노동력을 장악하고 통제하기 위한 기본 제도로 활용되었지만 뒤이어 강력한 맞수가 등장한다. 1545년 디에고 구알파라는 인디오가 지금의 볼리비아가 있는 안데스산맥 고지대에서 원주민의 사원을 찾고 있었다. 일순 불어 닥친 강풍에 내동댕이쳐진 그의 눈에 은광석 한 무더기가 들어왔다. 엄청난 양의 은맥을 발견한 것이다. 에스파냐 원정대는 이 은광을 '엘 세로 리코(풍요로운 봉우리)'라고 칭송했다. 이 은광을 중심으로 포토시Potosi라는 도시가 번창했다. 절정기였던 1650년대에는 당시 리스본이나 베네치아보다 많은 16만 명의 인구가 살았다.

  ( ... 은광 채굴과 노동력 착취 ... )

  ( ... ... )


1.5 잉글랜드의 북아메리카 식민지화 (p. 43)


1.6 새로운 통치 모형 (p. 49; p. 23)

  The Virginia Company was intended to be a moneymaking enterprise, and after two disastrous years, there was no whiff of profit. ( ... ... )

   ( ... ... )

  에스파냐가 멕시코와 중남아메리카 대륙에서 성과를 거둔 전략이 북아메리카에서는 통하지 않는다는 첫 번째 교훈을 얻는 데 12년이나 걸린 꼴이었다. 이후 17세기 내내 두 번째 교훈을 두고 투쟁의 역사가 계속되었다. 경제적으로 성장 가능한 식민지를 건설하는 유일한 대안은 개척민이 투자를 하고 땀 흘려 일할 의욕이 생길 만한 인센티브를 주는 제도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북아메리카를 개척하면서 잉글랜드 지도층은 에스파냐가 그랬던 것처럼 걸핏하면 식민지의 소수 엘리트층을 제외한 나머지 개척민의 정치·경제적 권리를 극도로 제한하는 제도를 수립하려 들었다. 하지만 버지니아 사례에서 보듯 그런 모형은 번번이 무너져 내렸다.

  버지니아 회사의 전략이 수정된 직후 어느 때보다도 야심적인 시도가 있었다. 1632년 잉글랜드 왕 찰스 1세가 체서피크 만 북부의 1,000만 에이커에 달하는 토지를 볼티모어 경인 세실리우스 캘버트에게 하사한 것이다. 메릴랜드 특허장Charter of Maryland은 볼티모어 경에게 그가 원하는 어떠한 방식으로든 정부를 구성할 수 있는 전폭적인 재량권을 부여했다. 헌장 제8조에는 볼키모어 경이 "토지를 하사한 취지에 따라 상기 지방의 탁월하고 만족스러운 통치를 위해 어떤 종류의 법이라도 정하고 만들어 집행할 수 있는 자유롭고 완전한 절대권력을 가진다" 명시되어 있다.
( ... ... ) The Charter of Maryland gave Lord Baltimore complete freedom to create a government along any lines he wished, with clause VII noting that Baltimore had "for the good and happy Government of the said Province, free, full, and absolute Power, by the Tenor of these Present, to Ordain, Make, and Enact Laws, of what Kind soever."
  볼티모어 경은 장원사회를 건립하기 위한 구체적인 계획을 마련했다. 17세기 잉글랜드 지방을 북아메리카 대륙에 걸맞게 이상적으로 변형한 형태였다. 먼저 토지를 수천 에이커의 대지로 나누고 지주로 하여금 경영하게 했다. 지주는 소작농을 부릴 수 있고, 소작농은 토지를 관장하는 엘리트 계층에 세금을 내는 구조였다. 1663년 후반, 앤서니 애슐리-쿠퍼 경 등 8명의 영주가 캘롤라이나를 건립할 때에도 이와 유사한 시도가 있었다. 애슐리-쿠퍼 경은 잉글랜드의 내로라하는 철학자이자 그의 서기였던 존 로크와 함께 캐롤라이나 기본 헌법Fundamental Constitution of Carolina을 제정했다. 이전에 만들어진 메릴랜드 특허장과 마찬가지로 이 문서 역시 지주 엘리트 계층이 장악하는 엘리트 위주의 계급 사회 건설을 위한 청사진이라 할 수 있다. "우리는 군주제하에서 살고 있으니 이 지역 역시 군주국의 일부다. 따라서 이 지역 정부는 그런 군주제에 가장 부합하는 형태로 구성되어야 한다. 이에 따라 다수가 참여하는 민주제 설립을 피해야 한다."
Baltimore drew up a detailed plan for creating a manorial society, a North American variant of an idealized version of 17th-century rural England. It entailed dividing the land into plots of thousands of acres, which would be run by lords. The lords would recruit tenants, who would work the lands and pay rents to the privileged elite controlling the land. Another similar attempt was made later in 1663, with the founding of Carolina by 8 proprietors, including Sir Anthony Ashley-Cooper. Ashley-Cooper, along with his secretary, the great English philosopher John Locke, formulated the Fundamental Constitutions of Carolina. This document, like the Charter of Maryland before it, provided a blueprint for an elitist, hierarchical society based on control by a landed elite. The preamble noted that "the government of this province may be made most agreeable to the monarchy under which we live and of which this province is a part; and that we may avoid erecting a numerous democracy."
  ( ... ... )

  버지니아에서 가혹한 규칙을 강제 시행하려는 시도가 실패했듯이 메릴랜드캐롤라이나에서도 같은 형식의 제도를 만들려는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실패 원인도 비슷했다. 세 가지 사례 모두 정착민을 엄격한 계층 사회에 예속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만 입증했을 뿐이다. 그도 그럴 것이 신세계에서는 정착민이 선택할 수 있는 대안이 수두룩했다. 따라서 규제를 가하는 대신 자발적으로 일할 의욕이 생기도록 인센티브를 제공해야 했다. 머지않아 이들은 더 많은 경제적 자유와 정치적 권리를 요구하고 나섰다. 메랠랜드 정착민 곧 자기들만의 토지를 달라고 요구했고 볼티모어 경은 이들의 압력에 굴복해 의회를 창설하기에 이른다. 1691년 메릴랜드 의회는 국왕을 설득해 메릴랜드를 왕실 직할 식민지로 선포하게 했다. 볼티모어 경이 이끄는 지주의 정치적 특혜를 없애버린 것이다. 캐롤라이나에서도 이와 유사한 투쟁이 오랫동안 계속되었고 이번에도 두 손을 든 것은 지주들이었다. 사우스캐롤라이나 역시 1729년 잉글랜드 왕의 직할 식민지로 거듭난 것이다.
Just as the attempt to impose draconian rule in Virginia failed, so did the plans for the same type of institutions in Maryland and Carolina. The reasons were similar. In all cases it proved to be impossible to force settlers into a rigid hierarchical society, because there were simply too many options open to them in the New World. Instead, they had to be provided with incentives for them to want to work. And soon they were demanding more economic freedom and further political rights. In Maryland, too, settlers insisted on getting their own land, and they forced Lord Baltimore into creating an assembly. In 1691 the assembly induced the king to declare Maryland a Crown colony, thus removing the political privileges of Baltimore and his great lords. A similar protracted struggle took place in the Carolinas, again with the proprietors losing. South Carolina became a royal colony in 1729.

  1720년대 들어서는 앞으로 미합중국이 될 13개 식민지 모두 비슷한 통치 구조를 가지게 되었다. 하나같이 총독 한 명과 유산계급 남성만 참여하는 의회로 구성되었다. ( ... ... ) 바로 이런 의회와 그 지도자들이 힘을 합쳐 만들어낸 것이 미합중국 독립의 전신이라 할 만한 1774년 제1차 대륙의회First Continental Congress였다. 이들 의회는 구성원을 결정할 권리와 과세에 대한 권리 또한 가지고 있다고 믿었다. 그러다 보니 이미 모두 알다시피, 잉글랜드 식민정부로서는 골칫거리가 아닐 수 없었다.
By the 1720s, all, all the 13 colonies of what was to become the United States had similar structures of government. In all cases there was a governor, and an assembly based on a franchise of male property holders. ( ... ... ) The assemblies believed they had the right to determine both their own membership and the right to taxation. This, as we know, created problems for the English colonial government.

1.7 미국 헌법 vs. 멕시코 헌법 (p. 55)


1.8 아이디어와 특허제도  (p.61)


1.9 경로 의존성의 산물  (p. 66)


1.10 다른 길을 걸은 두 억만장자  (p. 69)


1.11 세계 불평등 이론을 제기하며  (p. 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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