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4월 2일 토요일

대안적 척도

2장 “성장과 행복”의 4절 “대안적 척도” 중에서


(... 전략 ...) 소비하는 기계로 파악되는 인간과 시장가치를 토대로 구축된 개념 체계를 따른다 하더라도, 성장에 대한 집착이 사태를 악화시킬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는 어렵지 않다. 한편에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진보의 척도는 지난 수십 년간 형편이 좋아졌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다. 하지만 다른 한편에서 대다수 사람들은 사회 자체가 악화 일로를 걷고 있다고 불만을 토로한다. 그렇다면 무릇 우리가 사용하는 진보의 척도가 사태를 잘못 파악하고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국가의 진보를 계측하는 척도, 즉 국내총생산GDP이나 국민총생산GNP은 가격 시스템과 서로 뗄 수 없는 관계다. 이 척도를 따르면, 임의의 활동이 국가의 행복에 기여하는가를 판단하는 기준은 판매를 목적으로 하는 생산 활동인가 여부이다. 그리고 판매되는 분량만큼만 국가의 행복에 기여하는 것으로 평가된다. 즉 화폐 거래가 번영을 정의하는 특징이 된 것이다. 이처럼 국가의 행복을 계측하는 방식은 대단히 중요한 두 가지 영역을 빠뜨리고 있다. 하나는 가족과 공동체가 행복에 기여하는 영역이고, 또 하나는 자연환경이 베풀어주는 행복의 영역이다. 이 두 가지는 우리의 행복에 결코 빠질 수 없는 매우 중요한 것이지만, 시장의 바깥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도외시된다.

(...) 경제는 성장하는데 (적어도 일정한 소득 수준을 넘어서면서부터) 사람들은 그만큼 더 행복해지지 못한다면, 경제성장이라는 것이 실제적인 행복의 증진 요인들을 희생시키면서 추진되는 게 아니냐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행복의 결정 요인들을 좀 더 폭넓게 거론하고 국가발전의 척도로 GDP를 대체할 만한 수량적 지표를 구축하는 작업이 추진되었다. 그런 대안적 지표 중 하나가 바로 ‘참진보지표Genuine Progress Indicator, GPI’인데, ‘지속가능한 경제복지지표Index of Sustainable Economic Welfare, ISEW’로도 불린다. (...) 이와 같이 GPI는 경제성장으로 생기는 ‘혜택(수익)’과 ‘대가(비용)’ 양 측면을 모두 반영하는 국가 차원의 대차대조표를 산출한다.

(... 중략 ...) 

〈그림2〉에 영국과 미국, 호주의 GPI 집계 결과가 나와 있다. 나라마다 여건이 다름에도 불구하고 놀랄 만큼 일관된 유형이 드러난다. 일인당 GDP는 1950년대 이래 꾸준하게 늘었지만, 국가 번영의 요소를 보다 폭넓게 반영하는 GPI는 이보다 훨씬 느린 속도로 증가했으며, 1970년대부터는 정체하거나 감소하고 있다. 그 즈음부터 경제성장이 초래하는 비용이 그 혜택을 능가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만약 GDP를 국가적 행복의 척도로 삼게 되면, 이 나라 국민들은 1950년대보다 훨씬 나은 생활을 하고 있고, 그들의 형편은 시간이 지날수록 줄곧 향상되었다는 결론을 내려야 한다. 그리고 만약 우리가 GDP를 국가적 행복의 척도로 간주하게 되면, 지금의 젊은이들은 그들의 부모 세대보다 훨씬 좋은 생활을 누리고 있는 것으로 봐야 된다. 하지만 국민계정에 빠져 있는 몇 가지 요인들을 계산에 포함시키면, 이런 이야기와는 전혀 다른 결과가 나온다. 즉 이 세 나라의 경제성장은 모두 ‘사회적 자본’과 자연자본은 물론, 산업자본과 사회간접자본을 소모함으로써 유지되는 양상이다. 이것은 결국 미래 세대가 써야할 부의 창출 여력에까지 큰 구멍을 내는 양상으로 지금의 경제성장이 진행되는 모습이다.

(... 중략 ...)

(...) 경제는 자신에게 필요한 것을 사회와 자연의 영역에서 끌어다 쓴다. 그렇게 끌려 들어온 것들은 가격 꼬리표를 획득해야만 국민계정에 포함될 수 있다. 경제는 자신에게 필요 없는 것들(유휴 노동자나 중독성 폐기물)은 모조리 내뱉어버린다. 바로 그로 말미암아 이런 문제들은 더 이상 국민계정에 나타나지 않는다. 우리 행복에 기여하는 활동들도 시장 부문으로 넘어간 것이라야 중요성이 인정된다. 우리의 행복을 감소시키는 시장의 ‘부작용’은 다시 사회와 환경의 영역으로 넘겨지고, 더 이상 시야에 보이지 않는다. 경제는 자신에게 필요한 것에만 가치를 부여한다. 자신에게 필요 없는 것은 아무런 가치도 없다.

성장 망상의 옹호자들은 경제 외부의 생활 요소들은 각각이 ‘독특한’ 별개의 문제들이며, 그로 인해 정부의 개입이 필요하더라도 정책 대응이 시장의 활동을 방해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공동체 및 가족생활의 쇠퇴와 자연의 악화는 경제와 무관한 것이 아니다. 상업과 노동시장, 소비지상주의는 이러한 쇠퇴와 별개의 문제가 아니다. 놀랍게도 우리의 국가적 행복의 척도인 GDP는 계속 오르기만 한다. 공식적인 숫자만 본다면 삶은 더 좋아졌어야 마땅할 것이다. 시장 밖에서 생기는 문제들을 따로 떼어내 별개의 문제로 취급할 수 있다는 주장은 더 이상 타당하지 않다. 사회생활과 환경의 악화는 그 문제의 핵심인 성장의 망상체계에 초점을 두고 들여다봐야만 한다.


※ 다음 자료에서 일부를 발췌. 
클라이브 헤밀턴, 
 성장 숭배: 우리는 왜 경제성장의 노예가 되었는가 
2장. “성장과 행복” 중 4절 “대안적 척도”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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