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2월 14일 월요일

[자료]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I_일상생활의 구조'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

자료: http://solidarity.tistory.com/155
출처: 세희의 moreSolidar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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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즉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1권 일상생활의 구조에서 다루는 내용은 거의 움직이지 않는 역사, 인간과 그를 둘러싼 환경의 관계에 관한 역사, 느리게 흐르고 변화하며 집요하게 반복하고 끝없이 되풀이되어 순환하는 역사[3]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 불투명한 영역, 흔히 기록이 불충분하여 관찰하기 힘든 영역이 시장 밑에 펼쳐져 있다. 그것은 어느 곳에서나 볼 수 있고 어마어마한 규모로 존재하는 기본 활동의 영역이다. 지표면에 자리 잡고 있는 이 폭넓은 영역을 나는, 더 알맞은 이름이 없어서, ‘물질생활’ 혹은 ‘물질문명’이라고 명명했다”[4]
 그가 말하는 물질생활, 즉 사람들이 먹고 입고 거주하는 양식은 15세기부터 18세기에 이르기까지 큰 변화가 없었는데 이러한 구조를 파악하는 것은 한 시대의 경제활동이나 독점을 이해하기 위해 선행되어야 했으며 이를 위해 그가 사용한 물질적 도구는 인구와 물질(식량, 의복, 주거, 기술, 화폐, 도시)이었다.
  • 우선 그는 인구의 문제를 다룬다. 그는 인구의 증가가 물질적 발달로 이루어지지만 이러한 물질적 발달 속에서 인간의 수는 결과인 만큼 원인이기도 하다고 말한다. 
  • 다음으로 그의 관심은 평범한 사람들의 의식주 문제로 옮겨간다. 이어 그는 인력, 축력, 수력, 풍력과 목재, 석탄 등이 어떻게 이용되어 왔으며 어떻게 기술축적이 이루어졌는가를 서술한다. 
  • 이렇게 경제적 토양을 다진 다음 브로델은 경제활동의 기본적 도구와 틀에 대해 관심을 옮기는데 화폐와 도시가 그것이다.
결국 브로델이 일상생활의 구조라고 이름붙인 1권에서 다루고 있는 내용은 밀, 쌀, 옥수수와 같은 일상양식, 음식과 음료, 주택, 의복처럼 오랜 시간의 흐름에도 쉽게 변하지 않는, 장기지속의 시간대에 속한 것들이다. 그는 복수의 중첩된 시간개념 중에서도 바로 이 장기지속을 가장 중요한 요소로 파악했는데 바로 이러한 점 때문에 그는 역사의 변하지 않는 측면만을 지나치게 강조하고 변화를 경시하며 결정론적이라는 비판을 받아왔으며 앤서니 기든스는 공론화 이론을 통해 브로델을 레비-스트로스와 동일시하고 구조 속에서의 개인의 역할을 복권하려 하기도 했다. 아날학파의 역사학에 정통한 피터 버크 역시 그러한 평가를 내린다.
“그는 분명히 사건을 지나치게 평가절하하고 그것이 구조를 파괴할 수도 있다는 것을 간과하였다. 그의 결정론 역시 상당한 정도로 심각하다. 그는 인간 개개인을 운명의 수인으로 간주하였으며, 사태의 진행과정에 영향을 미치려는 그들의 시도를 궁극적으로 무용하다고 생각하였다.”5)
“그의 주인공 필레페 2세는 사실상 역사의 진행을 바꿀 힘이 없는 반영웅에 가깝다. 그러나 브로델이 레닌 시대의 러시아에 대해 글을 쓰려고 했다면 과연 그는 역사 속에서의 개인의 역할을 그토록 쉽사리 평가절하할 수 있었을 것인가?”6)
이러한 오해를 받을 만도 한 것이 사실 그가 장시[장기]지속의 예로 들고 있는 기후나 지리와 같은 요소는 레비-스트로스가 말하는 구조와 가까울 만큼 오랜 시간 지속을 갖는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하여 다음 인터뷰 내용은 이러한 주장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듯 보인다.
“그(페브르)는 얼마나 지리학적 설명을 복잡하게 만들었던가? 그는 거의 모든 결정론을 깨부수고 말았다. 나는 이러한 일괄적인 폐기를 믿지 않는다. 어느 정도의 결정론은 존재한다. 그렇지 않다면 공간은 자신의 생생한 실체를 박탈당한 꼴이 되고 말 것이다.”7)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장기지속 개념을 구조와 완전히 동일시하거나 결정론으로 보는 것은 조금 지나친 면이 있다. 그가 말하는 구조시간이 쉽사리 소모시키지 못하며 아주 느리게 움직이는 하나의 현실[현실을 실재實在로 읽고 싶은 생각]이긴 하지만 변화의 가능성 자체가 닫혀있지 않다는 점에서 구조주의에서의 구조와는 결정적인 차이점이 있으며 브로델 스스로는 장기지속이라는 개념을 오히려 구조주의에 대한 저항의 의미로까지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에게 있어서 구조의 현상, 그것은 지속되는 현상이다. 그것은 레비-스트로스나 몇몇 프랑스의 사회학자, 철학자들의 구조주의와 전혀 관계가 없다.”8)
“어떤 구조는 오랫동안 살아남아서 무수히 많은 세대의 고정적인 요소가 되고 있다. 그러한 구조들은 역사의 길을 막아서서 역사의 흐름을 방해하고 그럼으로써 역사를 형성한다. 그런가 하면 다른 구조들은 훨씬 빨리 소멸한다. 그러나 모든 구조는 역사의 받침대이자 동시에 장애물이다. 장애물로서의 구조는 인간 및 인간의 경험이 거의 넘을 수 없는 한계를 이룬다. 예컨대 어떤 지리적 틀이라든가, 생물학적 사실, 생산성의 한계, 심지어 여러 가지 심성의 틀 등을 얼마나 깨뜨리기 힘든지를 생각해 보라.”9)
레비스트로스의 구조가 시간을 초월한 공시적 구조라면 브로델의 장기지속은 다만 그것이 상대적으로 오래 걸리는 것이 문제일 뿐 시간의 흐름과 더불어 궁극적으로 붕괴된다는 점에서 단순한 지속에 불과하다고 볼 수 있다. 더구나 장기지속적인 구조가 인간의 자유와 우연의 역할을 제한하고 배제한다고 하더라도 이러한 한계를 확인하는 것이 곧바로 역사에서의 인간의 역할을 부정하는 것이라고 볼 수는 없다. 따라서 브로델의 장기지속 개념에 대해 결정론적 문제를 지적하는 것은 적절하지 못하다. 차라리 나는 그의 이론에서 장기지속의 변화를 가능하게 하는 원인이나 방법이 체계적으로 제시되지 못하고 있다는 점, 다양한 시간층위간의 영향관계나 상호작용에 대한 설명이 부실한 점, 만약 기후나 지리와 같은 장기지속적인 요인들이 결국은 변화할 것이라고 하더라도 그러한 변화가 엄청난 시간을 필요로 할 뿐만 아니라 인간의 힘이나 우연한 사건에 의해 발생하기 힘들다면 장기지속에 대한 관심의 집중이 대체 어떤 함의를 줄 수 있느냐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어쩌면 이는 진보로서의 역사를 설명하는데 유용했던 기존의 내러티브 형식을 포기한 브로델의 필연적 결과라 평가할 수도 있을 것이다. 따라서 역사를 진보의 관점으로 보는 시각을 견지하려 한다면 차라리 장기지속과 콩종크튀르, 사건사의 시간이라고 굳이 나눈 분절된 세 가지 시간대의 틀이 아닌 다양한 시간대의 중첩이라는 틀만 받아들여 자본주의를 분석해 보는 것은 어떨까? 분명히 자본주의는 자본주의라는 큰 틀 속에서도 상업자본주의에서 산업자본주의, 금융자본주의 등으로 모습을 바꾸며 나타나고 있지 않은가.

브로델의 콩종크튀르라는 개념은 분명히 맑스주의에서 말하는 ‘정세’와 유사한 부분이 있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브로델의 중첩된 시간개념을 맑스주의에 끌어들일 수 있다. 구체적으로 중첩된 시간개념은 알튀세르의 중층결정(과잉결정) 개념과 연결될 수 있는데 중층결정이란 헤겔이 말한 것과는 달리 모든 현상이 근본적 모순으로 환원되지 않으며 오히려 다양한 조건의 외부적 조건들이 기본 모순 자체에 영향을 끼친다는 개념이다. 예컨대 자본주의가 기본적으로 자본가와 노동자의 모순 내지는 대립이라고 규정되지만 특정한 시기에는 제국주의와 식민지의 모순이 전면에 나타나고 또 어떤 때는 남성과 여성의 모순이 사회 전체의 모순으로 등장하면서 다른 모순들이 그 모순에 응축되고 그것의 작동을 통해서 작용하게 된다10)는 것이다. 긴 호흡의 기본 모순과 그보다 짧은 호흡으로 순환되는 외부 조건들 사이의 상호작용! 알튀세르의 이론을 받아들여 다양한 시간대의 중첩 개념에 적용하면 브로델의 이론에서 다른 시간대간의 영향관계나 상호작용에 대한 설명이 부족하다는 비판에 대한 설명이 어느 정도 가능해 질 수 있을 뿐 아니라 알튀세르가 말하는 중층결정이 일어나게 되는 원인을 콩종크튀르 또는 자본주의보다 짧은 시간대의 역사라는 관점으로 설명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은 포스트모더니즘적 비판에 대해서도 자본주에 기본 모순이 존재한다는 태제를 방어할 수 있는 이론적 기반이 될 수 있지 않을까?

브로델을 맑스주의적 입장에서 비판적으로 받아들인 사례로는 역시 세계체계분석론자들을 빼 놓을 수 없다. 특히 지오반니 아리기의 경우는 콘트라티예프 순환을 콩종크튀르의 예로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브로델이나 월러스틴과 달리 이를 비과학적이라며 배척하고 헤게모니 순환에 초점을 맞춘 체계적 축적순환 개념을 만들어낸다. 하나의 세계 헤게모니가 우위에 서는 것은 헤게모니 국가가 지배적 위치를 점하는 어떤 특수한 축적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것인데 그러한 축적구조가 순환하면서 헤게모니의 교체가 이루어져 왔다는 것이다.
  •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그[아리기]는 축적순환 과정을 헤게모니의 상승과 하강국면, 즉 실물적 팽창 기간과 금융적 팽창 기간으로 나눈다. 초기 실물적 팽창기간에는 생산과 고용, 이윤율이 상승하지만 차츰 이윤율이 하락하면서 실물부문에 대한 투자가 줄고 금융적 팽창이 시작되고 결국 헤게모니 자체의 위기를 맞게 된다는 것이다. 
  •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의 설명에서 새로운 축적체제의 형성은 기존의 축적순환이 끝나고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그 이전 금융적 팽창기와 겹치고 이 새로운 축적체제의 금융적 팽창기는 또 다른 새로운 축적체제의 형성기와 겹친다는 점이다. 그의 이러한 모델을 현실에 대입시켜보면 지금까지 헤게모니 순환은 네 번 진행되었으며 제노바, 네덜란드, 영국, 미국이 그 주인공들이다. 그리고 아리기는 현재의 미국이 2003년 이라크 전쟁을 전후로 최종적 위기에 접어들었다고 분석한다. 실제로 일본의 경제성장에 주목하던 그는 최근 중국을 중심으로 한 동아시아 연구에 몰두하고 있는데 과연 그의 생각대로 중국이 새로운 헤게모니의 중심이 될지는 좀 더 두고 볼 일이다.
지금까지 브로델의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1권에서 다루고 있는 일상생활의 구조라 불리는 장기지속의 영역을 통해 그러한 관점이 우리에게 주는 함의를 비판적으로 고찰해 보았다. 브로델 이후 급성장한 아날학파의 역사가들은 실증주의적 역사학에 조소를 퍼부으며 역사학의 방법들에 쇄신이 필요하다고 말해왔다. 한편 맑스주의는 역사유물론과 같은 기본개념들을 토대로 총체적이고 일관적인 시각으로 사회의 움직임을 설명해 왔다. 광범위한 영향력을 발휘해 온 이 두 조류는 낡은 역사학을 거부함으로써 나란히 걸어가기도 했고 서로를 경계하며 격렬히 논쟁하기도 했다.11) 성급한 판단일 수 있겠으나 맑스주의와 새로운 역사학과의 합류는 새로운 도약을 낳을 수 있을 것이다. 맑스주의는 도그마에 빠지는 것을 경계하면서 새로이 축적된 이론적 도구들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사용해야 한다. 현재의 신자유주의적 금융세계화의 광풍을 가장 잘 설명하고 극복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지점에서이다. 이는 분명 이론의 포기가 아니라 쇄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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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최갑수, 「페르낭 브로델」, 『이론』, 제 7호, pp.212-213
2. 페르낭 브로델, 『역사학 논고』, 이정옥 역, 민음사, 1990, p.9
3. The Mediterranean and the Mediterranean World in the Age of Philip II, Vol. 1, pp.20-21(최갑수, 「페르낭 브로델」에서 재인용)
4. 페르낭 브로델, 주경철 옮김,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I-1, 까치, 1995, p12
5. 피터 버크, 곽차섭 옮김, 『역사학과 사회 이론』, 문학과 지성사, 1994, p.234
6. Ibid, p.247
7. 브로델의 인터뷰, Magazine littéraire, 11월, 1984, p.18(김응종, 『아날학파』에서 재인용)
8. Une leçon d'historie, p.157(김응종, 『아날학파의 역사세계』에서 재인용
9. 페르낭 브로델, 『역사학 논고』, 이정옥 역, 민음사, 1990, pp.55-56
10.이진경, 「마르크스는 이데올로그가 아니다」, 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124659.html
11. 기 부아, 「역사유물론과 ‘아날 학파’」,『이론』, 제 9호, p.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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