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1월 15일 토요일

‘자본주의와 다툴 필요도 없이 자본주의를 놓아주자, 그것이 가장 효과적인 투쟁이다’



몇 해 전의 일이다. 세계 굴지의 거대기업이자 국내 일류회사에서 막 퇴사한 50대 직장 선배를 만났다. “우리 부모 세대는 자식 취직시키려고 뼈 빠지게 일했다. 내가 부모가 되어 보니 다시 뼈 빠지게 일하며 또다시 자식 취직시키는 모델로 살고 있더라. 이건 살 만한 삶의 모델이 아니다.” 생계와 자식 교육에 매진하는 우리 시대 직장인들의 삶을 이보다 더 잘 요약해줄 말도 없는 것 같았다. 자식 공부시키고 취직시키려고 뼈 빠지게 일하느라 자신을 건사했던 부모를 제대로 돌보며 살기도 어려운 경우가 많으니, 이 말의 행간에는 족히 두 세대 넘어 세 세대의 삶이 투영되어 있다. 예컨대 한국전쟁 후 가족을 책임졌던 1세대의 이런 삶이 투영되어 있다. “논밭 다 팔아서 자식 공부시켰더니 그 자식이 평생 안 쓰고 저축해도 다시 그 땅을 살 수 없더라.” 농촌 어느 노부부의 일화이지만, 그간의 극심한 부동산 투기를 생각하면 이 일화에 국한되는 이야기는 아니다. 한편 그런 논밭을 팔아 공부했던 2세대는 다시 그 땅을 살 수 없을 뿐 아니라, 그들의 자녀인 3세대는 요즘 대학을 나와도 취직할 일자리가 별로 없다.

지금 대다수 사람들이 사는 현실은 대체로 이렇다. 우리나라가 고도성장기에 진입한 1960년대 이래 경제가 50년 넘게 성장하는 동안, 사이사이 경기후퇴나 위기 국면은 있었지만 평균적인 일인당 소득수준은 꾸준하게 상승했다. 여러모로 삶의 외형도 커졌고 누릴 수 있는 상품과 서비스도 다양해져서 삶의 질도 높아졌다고 하는데도, 대다수 보통 사람들은 그렇게 느끼지 않는다. 사실 중위소득층 주변에 포진한 중산층은 줄어들고 빈곤층은 늘어난 반면, 상위 소득층이 소유하는 재산 비중은 더욱 높아져 불평등의 양극화는 갈수록 심해지고 있다.[주1]

다시 말해, 웬만한 사람들이 큰 욕심 없이 웬만큼 살아가는 것이 아주 팍팍해지고 있다. 형편이 어려워서 이런 ‘팍팍한 표준’을 방어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사정이 더욱 절박하다. 생활고를 비관해 자살하는 사람들이 그렇고, 밥을 굶는 아이들의 가정이 그러하며, 목숨을 걸고 투쟁하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그 한계선을 방어하려고 몸부림치고 있다. 어쩌면 화장실에서 식사를 해야 하는 도시 비공식 부문의 연로하신 근로자들은 논밭을 팔아 자식을 공부시켰던 그 1세대의 여러 얼굴 중 하나일 것이다. 물론 그 반대편의 삶도 있다. 연휴 때마다 바닷가와 스키장으로 놀러가거나 해외여행을 떠날 여유가 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값비싼 명품을 취미 삼아 수집하고, 성형 수술에 큰돈을 쓰는 사람도 있다. 갖가지 부동산과 금융자산을 소유하며 경제생활을 영위하는 상위 소득층 몇 퍼센트에 드는 사람들의 소비생활이야 이보다 더욱 화려할 것이다.

이렇게 팍팍하고 척박해진 삶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이야기가 분분하다. 경제성장률만 높이면 모든 문제가 나아질 거라는 사람들이 있다. 이명박 행정부는 이 방향으로 가고 있다. 대규모 토목공사를 벌이고 고환율과 자유무역 정책 등으로 수출 주도형 대기업에 전권을 부여하며 양적 성장에 치중한다. 한편 1990년대 이후 경제가 성장해도 실업이 줄지 않는 ‘고용 없는 성장’의 문제를 지적하는 사람도 있다. 성장도 중요하지만 성장의 과정 자체에 분배를 악화시키는 요인이 내재하는 것으로 보이니, 성장의 질적 문제를 들여다보고 이를 보완할 (분배·복지·산업 정책 등의) 정책을 병행해야 한다는 시각으로 이어질 수 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불평등한 조세제도와 기형적인 부동산 정책의 문제를 지적하는 사람도 있다. 이 밖에도 세부적인 문제에서 다양한 견해가 나올 수 있을 것이다.

이 같은 다양한 견해들은 언뜻 보기에 서로 충돌하는 것 같지만, 다른 눈으로 보면 커다란 부분에서 같은 생각을 공유한다. 바로 경제가 성장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반대로 경제가 제로 성장을 한다거나 역성장을 하는 것에는 모두가 반대할 것이다. 책은 이처럼 경제성장을 당연시하는 사고방식에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무엇보다 한 해 동안 판매를 목적으로 생산되는 재화와 서비스의 양이 얼마나 늘었느냐는 극히 평범한 관념에 불과한 경제성장에 온 사회가 과도하게 집착하여, 경제성장이란 관념이 망상妄想의 지경에 이르렀다고 주장한다. 그 강박관념이 한낱 몽상으로 끝나면 좋겠지만, 살아 움직이는 이데올로기로 둔갑해서 경제는 물론, 정치, 사회, 문화, 그리고 개인의 심리에 이르기까지 사회 전체를 조직하고 시스템을 재생산하는 체계화된 망상으로 진화했다고 지은이는 주장한다. 그리고 이 망상이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의료, 심리, 지구와 궤도권 우주에 이르기까지 곳곳으로 번지며 저지른 실상을 고발한다.

언뜻 듣기에는 황당한 이야기처럼 들릴지 모른다. 실제로 노동당 의원으로 호주의 한 주에서 재무장관을 역임한 마이클 에건은 “터무니없고 위험한 좌파의 헛소리”라고 혹평했다. 하지만 책은 2003년 호주에서 베스트셀러에 오를 만큼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얻었고, 2009년 호주 멜번 히긴스 지역구의 연방의회 보궐선거에 녹색당 후보로 출마한 지은이는 득표율 32.4%로 자유당에 이어 2위를 기록한 바 있다. 어떤 사람들에겐 헛소리일지 몰라도 진지하게 경청하는 사람들도 많다는 이야기다.

우선, 책은 경제가 더 성장해도 사람들은 더 행복해지지 않는다는 점을 지적한다. ‘이스털린의 역설’로도 불리는 현상으로, 일정 소득 수준을 달성한 다음부터는 소득이 늘어도 행복은 나아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지은이는 한 발 더 나아가, 경제성장이 행복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불행이 경제성장을 지탱해준다고 지적한다. 즉 현대 소비자본주의는 사람들의 불만족 상태를 계속 조장해서 자신의 존재를 유지하고 있으며 광고산업의 본질적 역할이 바로 그것이라고 주장한다(이에 대해서는 2장과 3장에 걸쳐 많은 지면을 할애해 설명한다).

또 사람들은 경제가 성장하면 더 행복해지는 것이 당연한 듯 말하지만, 오히려 경제성장으로 말미암아 행복을 주던 많은 요소들이 파괴되고 있는 게 현실이라는 것이다. 마이어스D. G. Myers가 《미국의 역설》에서 요약한 1960년부터 90년대 중반 사이에 벌어진 미국 사회의 변화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이혼율이 2배 늘었고, 10대 자살률이 3배 늘었으며, 공식 기록된 폭력범죄는 4배, 감옥에 수감돼 있는 죄수의 수가 5배, 미혼모가 낳은 신생아 비율이 6배 늘었고, 우울증은 제2차 세계대전 전에 비해 10배 늘었다는 사실이다. 지은이는 이러한 사회적 병리가 더 많이 벌어서 더 많이 소비하는 경제성장과 더불어 사회를 묶어주는 공동체적 가치가 붕괴되고 가정이 파괴되는 현상과 별개의 것이 아니라고 환기시킨다. 특히 소비사회에서 개인의 자의식이 멍드는 현상에 주목하면서 소비 행위의 의미와 마케팅의 역할을 집중 조명한다(주로 3장에서 다루어진다).

지은이는 경제성장에 집착해온 구미권 사회의 강박관념에도 불구하고 소득이 늘면 더 행복해질 거라는 전제가 명백한 실패로 끝났다는 사실이 현대 자본주의의 커다란 모순이라고 지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치권은 경제성장을 부르짖고 개인들은 더 부자가 되려고 안달하는 사회 분위기는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된 방향이라는 것이다. 그러느라 사람들은 더욱 불행해질 뿐 아니라 후대가 누려야 할 자연환경까지 망치고 있으며 성장에 집착한다고 해서 선진국에서도 여전히 잔존하는 빈곤이 해결되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물론 이런 주장은 지은이도 인정하듯 빈곤의 경제적 문제가 웬만큼 해결된 부유한 나라들을 대상으로 하는 이야기다.

비정규직 노동자가 1천만에 육박하고 사회 양극화의 심화로 빈곤율이 늘어나는 우리나라에 대해서 책은 어떤 이야기를 하고 있는가? 우리나라의 특수한 문제를 다루는 내용은 없지만, 지은이가 분석하는 현대 소비자본주의의 보편적 문제와 그에 대응하는 정치철학에서 몇 가지 시사점을 찾을 수 있을 듯하다. 우리나라도 세계화되어 가는 소비자본주의 흐름을 따라가고 있는 것만은 분명한 만큼 구체성은 약할지 몰라도 추상적 수준에서 의미 있는 논의 포인트를 하나하나 결합해갈 수 있을지 모른다.

첫째, 전후 50년이 지나는 동안 세계 자본주의의 중심축을 이루는 선진국 자본주의가 산업자본주의industrial capitalism에서 소비자본주의consumer capitalism로 이행하는 형태 변이를 일으켰다는 시각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지은이는 이 변화가 봉건제에서 산업자본주의로 넘어갈 때의 진폭만큼이나 사회를 움직이는 동력에 커다란 변화를 불러왔다고 본다. 시스템 차원의 동인은 예나 지금이나 자본의 이윤 추구이지만, 이윤을 추구하는 기업의 행위에서 비용절감보다는 제품 차별화, 마케팅, 브랜드 투사 등의 활동이 결정적으로 중요해졌다는 점이다. 이게 뭐 대수냐, 미시적인 변화가 아니냐고 생각할 수 있지만, 문제는 그로 인해 자본주의가 시스템을 재생산하는 방식이 질적으로 변했다는 데 있다. 하나는, 마케팅 우위를 노리는 경쟁이 거세지면서 사람들이 먹고 자고 즐기고 생각하는 각종 문화 형태가 시장의 식민지로 점령당했다는 점이다. 또 하나는, 소비의 의미도 그에 따라 크게 변했다는 점이다. 사람들은 이제 물질적 필요를 충족하기 위해 제품의 ‘효용’을 소비하는 게 아니라, 마케팅이 만들어내는 ‘상징적 의미’를 소비하는 존재로 변했다. 여러 가지 문화상품을 소비하는 행위가 사람들이 자아를 창조하고 자의식을 확인하는 일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에 따라 노동자를 포함한 대다수 보통 사람들의 정체성과 사회구조에 대한 인식, 정치적 성향이 생산과 고용보다는 소비 행위에 의해 결정되는 부분이 늘어나게 되었다고 지적한다.

쉽게 말해, 산업자본주의 시대에 자본은 노동을 착취해서 물건을 만들기만 하면 대체로 그냥 팔렸다. 이제 소비자본주의 시대는 자본이 노동을 착취할 뿐 아니라 광범위한 문화 공간에 뿌려놓은 상징을 매개로 사람들의 자의식을 지배함으로써 상품을 사게끔 만드는 세상이 되었다는 것이다. 여기서 지은이가 강조하는 논점은 예전에는 생산 영역에서 결정되는 일률적인 계급 정체성이 사람들의 자의식에 큰 영향을 미쳤지만, 이제는 생산 영역보다 소비 영역에서의 행동이 사람들의 자의식에 미치는 영향이 커졌다는 점이다. 지은이는 이러한 변화의 배경으로 장기간의 경제성장과 기술발전, 그에 동반하는 물질적 생활수준의 지속적인 향상, 그리고 고용주에 대한 노동자들의 예속성 약화(자율성 확대)를 들고 있다. 요약하면, 예전에는 권력과 억압, 그리고 저항이 생산의 영역에서 전개되었지만, 소비자본주의 시대에는 그 무대가 소비의 영역으로, 나아가 보다 광범위한 정치적 사회 공간으로 옮겨갔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내용의 논의는 3장, 4장, 6장, 8장에서 여러 주제를 검토하면서 차례차례 다뤄진다.)

이와 같은 소비자본주의 담론은 여러 각도로 다시 생각해볼 만한 소재일 것이다. 서구 좌파 정당이 몰락한(혹은 좌파적 정체성을 상실한) 부분적 원인을 그들의 전통적 지지 기반이었던 노동계급의 정체성이 소비자본주의의 도래에 동반하여 변하게 되었다는 데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볼 수 있다. 우리나라도 대단위 사업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이 생산 영역에서 계급적 동질성을 느끼는 산업도 어느 정도 있겠지만, 나머지 대부분의 산업에서는 노동자들이 생산 영역에서 자각하는 계급성은 극도로 희박해졌고, 지은이가 말하듯 각자의 소비 생활에서 여러 가지로 차별화되는 다양한 자의식이 부유浮游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점도 진중하게 생각해볼 만한 대목이다.

둘째, 책에 흐르는 논지로부터 소비자본주의에서 자본의 권력이 재생산되는 방식을 다른 관점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과연 자본가 계급이란 집단이 생산수단을 독점하고 있고, 노동자들은 그들에게 노동력을 팔지 않으면 달리 생존할 방도가 없는 탓에 자본의 권력이 발생하고 유지되는 것일까? 절대 빈곤이 광범하게 존재했던 산업자본주의 때는 그랬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는 게 지은이의 시각이라고 본다. (옮긴이로서 책을 풀이하는 말이기도 하지만, 그 이전에 한 사람의 독자로서 다른 독자들에게 던지는 토론 포인트이기도 하다.) 지금 소비자본주의 시대에는 대다수 보통 사람들이 더 부자가 되고 싶다는 욕망, 소득을 더 많이 벌면 행복해질 거라는 대단한 망상에 빠져 있기 때문에 자본의 권력이 유지된다는 것이다. 생산수단의 독점도 정치적 폭압도 아닌, 너나 할 것 없이 부자가 돼야겠다는 ‘성장의 망상체계’가 막대한 정치권력을 기업계에 넘겨준다는 말이고, 그로 말미암아 성장 제일주의로 치닫는 사회 병리가 심화된다는 의미다. 그래서 지은이는 신자유주의를 ‘성장의 망상체계’의 시녀라고 말한다. 국가의 정치적 권한을 사적 시장에 넘겨주는 일은 분명 신자유주의 세력이 벌인 일이지만, 근원적으로 신자유주의가 힘을 행사하는 원천은 ‘성장의 망상체계’라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빈곤 문제에 대해 다시 생각할 부분이 있다. 과연 지금 풍요로운 선진국을 비롯해 우리사회에 존재하는 빈곤이 보릿고개라고 말하듯 수십 년 전의 절대 빈곤과 같은 성질의 것인가? 오히려 정치적 의지만 있다면 빈곤을 배려할 여러 가지 자원과 방법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국가적으로 경제성장률을 좀 더 높여야 한다(개인적 차원에서는 돈을 더 벌어야겠다)는 강박관념 때문에 그러한 자원과 방법을 희생시키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일자리를 늘리는 방법은 사적 기업이 성장해서 그들의 의지에 따라 신규 채용을 확대하는 길밖에 없는가? 사적 시장에 잠식되어 가는 지역 공동체를 시장 시스템과 다른 방식으로 일구면서 시장이 도외시하는 생산을 조직하고 일자리를 분배하는 방법은 없는가? 경제성장이 다른 모든 것에 우선한다는 강박관념에서 벗어나 좀 덜 벌고 덜 소비하고 더 적은 시간을 일하며 사는 것이 행복을 찾는 길이라고 많은 사람들이 확신할 때, 이러한 가능성들이 오히려 쉽게 열릴지도 모른다. 쉽게 말해, 웬만큼 사는 너와 내가 덜 일하고 가족과 공동체를 돌보는 데 더 많은 시간과 정력을 투여한다면, 다른 사람에게 분배해줄 일자리가 생길 수 있고 딱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배려할 공동체 자원은 늘어날 수 있다.

셋째, 이렇게 보면 저자가 주창하는 ‘축소이행downshifting’을 꼭 호주나 다른 선진국처럼 풍요로운 나라에나 적용할 수 있는 행동이라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 축소이행은 많이 벌어서 많이 소비하고 그러기 위해 오래 일하는 다람쥐 쳇바퀴 도는 생활의 공허함을 깨닫고, 각자의 참자아를 찾아 자기를 실현하자는 목표로 ‘덜 일하고 덜 벌어서 덜 소비하며 살자’는 생활철학이다. 그렇게 절감한 시간을 시장의 전횡으로 황폐해진 공동체와 가정과 자연환경을 돌보는 데 쓰자는 윤리학이다. 이러한 마음가짐으로 살 때, 오히려 시장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많은 사회 병리가 해결될 수 있고, 누구는 주 60시간을 과로하며 일하고 또 누구는 일자리가 없어 인생을 망치고 자살까지 하게 되는 부조리를 해결할 수 있을 거라는 정치철학이다. 나아가 성장의 망상체계에 홀려서 자신도 불행해지고 자본 권력만 더욱 강고히 만들어주는 데 일생을 바치지 말자는 ‘매우 얌전하지만 근본적인’ 정치 투쟁의 출사표다. 그래서 지은이는 자본의 권력을 ‘파괴’할 필요도 없이 자본의 권력을 ‘무시’하자고 말한다. (이러한 논의는 주로 8장에서 또 부분적으로 6장에서 다루어진다.)

넷째, 책은 2003년에 출간된 만큼 1990년대 서구 정치권에 출현한 자칭 중도좌파 정치노선인 ‘제3의 길Third Way’에 대해 근본적이고 신랄한 비판을 제기한다(5장). 현 정부 들어서 신자유주의적 퇴행 정치가 본색을 드러내는 마당에 제3의 길에 대한 비판이 매력적으로 읽히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과연 우리나라에 제3의 길이라고 할 만한 정치 노선이 있었는지도 논란거리일 것이다. 하지만 앞으로도 정책의 실체는 신자유주의와 다름없으면서 현란한 수사를 동원해 중도적 외피로 가장하려는 움직임을 경계해야 한다는 의미에서는 충분히 읽어둘 가치가 있다.

* * *

번역에 사용된 몇 가지 용어의 배경에 대해 언급하면 다음과 같다. 우선, 원저에서 경제성장을 가리키는 ‘growth’와 결합해 등장하는 ‘growth fetish’와 ‘growth fetishism’의 역어를 선정하는 문제가 있다. 영어를 비롯한 구미 언어 문화권에서 ‘fetish’라는 말에는 인간이 영험하고 신통한 마력이 있다고 믿는 주물呪物이란 의미가 들어 있다. 이 말뜻과 짝을 이룰 때는 ‘fetishism’이 주물신앙이라는 의미로 쓰인다. 칼 마르크스는 이에 착안하여 《자본》의 1권, 1장 “상품”의 마지막 절인 4절에서 상품의 ‘fetishism’을 거론할 때, 인간과 상품의 관계를 주물신앙에서 인간이 주물에 의해 지배되는 전도된 관계에 비유해 설명했다. 그 이유에서 마르크스 식이나 그에 인접한 논의에서 주물과 같은 말뜻으로 쓰이는 물신物神이 도입되어, ‘상품 물신성commodity fetishism’이나 ‘물신화(혹은 물신주의)fetishism’와 같은 역어가 사용되었다. 한편 ‘fetishism’은 이와 같은 마르크스 식의 의미나 주물신앙이란 의미로만 사용되는 게 아니라, ‘성애적 욕망과는 관계없는 물건(혹은 특정 신체 부위)에 성적 흥분과 만족이 전도되어 고착된다’는 의미로도 쓰이고, 성적 욕구와는 무관하지만 그 정도로 ‘강박적이고 과도한 집착이나 애착’이라는 의미로도 쓰인다. 이러한 의미의 ‘fetishism’과 짝을 이룰 때 ‘fetish’는 전도된 성적 욕구의 표적으로 고착된 대상, 혹은 그 정도로 집착하거나 애지중지하는 물건을 가리킨다.

구미 문화권에서는 이 같은 다양한 말뜻과 어감의 스펙트럼을 ‘fetishism’이란 낱말 하나에 모두 투영해서 화자의 논지와 이미지를 전달할 수 있다. 이를테면 ‘growth fetishism’이란 똑같은 말로써 경제성장이란 평범한 사태를 사람들이 주물처럼 숭배한다는 이미지를 투영할 수도 있고, 돈을 더 벌려는 사람들의 집착이 마치 전도된 성애적 욕구처럼 변질돼서 GDP 성장률이나 투자 수익률만 떠올려도 성적 흥분에 도취하듯 사람들이 자지러지고 정신을 못 차린다는 이미지를 투영할 수도 있다. 여기서 출발어(영어)에서 도착어(한국어)로 문화 경계를 넘는 과정에서 번역어 선정의 문제가 발생한다. 우리말에서는 ‘물신’이라든가 ‘숭배’라든가 ‘집착’이나 ‘애착’과 같은 의미들이 서로 다른 명사로 범주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중 어느 하나를 선택하면 다른 것들을 전달할 수 없다. 본래 명사 어휘들에는 특정 문화권이 세상을 범주화하는 사고방식이 들어있는 것이다.

이미 유입돼있는 마르크스 식의 용어를 쓰자면, ‘성장 물신주의growth fetishism’와 같은 역어를 선택할 수도 있겠지만, 이 방법은 좋지 않다고 보았다. 왜냐하면 책의 저자는 마르크스의 유물사관을 포함해 모든 형태의 역사적 결정론과 목적론적 철학을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입장이기 때문이다. 원저의 핵심 개념의 역어로서 저자의 근본 취지에 반하는 어감이 젖어있는 용어를 선택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한편, ‘페티시’나 ‘페티시즘’이란 말을 그냥 외래어로 가져오는 것은 저자의 논지를 전달하는 데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해서 이 방법도 버리기로 했다(게다가 페티시란 말은 매혹과 애착이 물건에 ‘고착’된다는 의미로 유입돼있는데, 이런 말뜻을 경제성장이라는 ‘동적인’ 사회 현상과 결합해봐야 어감 충돌이 생긴다고 봤기 때문이다).

다른 해결책으로 출발어 어휘의 사전적 어의에 얽매이지 않고, 그 대신 저자가 전달하려는 핵심 논지 속에서 ‘인간(혹은 사회)’과 ‘fetish’ 그리고 ‘fetishism’이란 말들이 어떠한 의미 관계를 맺는지 주목하는 방법을 생각할 수 있다. 그래서 각 용어 사이의 의미장 관계를 재생할 수 있는 우리말 어휘를 물색하는 것이다.

우선, ‘fetish’라는 말은 인간이 신비한 마력이 있다고 믿는 대상이든, 전도된 성적 욕구의 표적으로 고착된 대상이든, 인간이 집착하고 애지중지하는 대상, 즉 물건을 가리킨다. 그래서 그 물건만 보면 인간의 마음과 심리가 ‘매혹되고 강박되고 장악된다’는 것이 인간과 ‘fetish’ 간의 동적 관계다. 이런 의미 관계는 “인간이 망상妄想에 홀려서 정신을 못 차린다”는 이미지로 재생할 수 있다. 그리고 ‘fetishism’은 주물신앙을 뜻하든, 물건에 고착되는 전도된 성욕 혹은 성욕과는 무관한 고질적인 집착과 애착을 뜻하든, ‘인간으로 하여금 일정한 행동유형을 따르도록 힘을 행사하는 끈질긴 병리나 습관’인 셈이다. 이와 같은 인간과 ‘fetishism’ 사이의 의미 관계는 한번 걸려든 망상이 더 큰 망상을 불러서 한 순간의 일시적 망상을 넘어 “인간 스스로 하나의 원리처럼 체계화된 망상을 만든다”는 이미지로 재생할 수 있다. 이렇게 보면, 출발어 어휘의 사전적 어의에서 이탈하더라도, ‘망상’과 ‘망상체계’라는 역어를 이용하여 다음과 같이 저자의 핵심적 문제 설정을 재생할 수 있다.
경제성장이라는 관념은 이제 사람들을 홀리는 “망상fetish”으로 변질됐다. 그리고 이 망상이 더 큰 망상으로 번져서 마침내 경제는 물론, 정치, 사회, 문화 그리고 개인의 심리와 잠재의식에 이르기까지 사회 전체를 조직하고 시스템과 이데올로기를 재생산하는 체계화된 망상, 즉 “성장의 망상체계growth fetishism”로 진화했다.[주2]
그 밖의 용어에 대해 간략히 언급하면, 이미 두루 통용되는 ‘소비사회consumer society’라는 역어를 사용했다. 소비사회는 상품의 사용가치보다 상품에 포장되는 상징적 의미와 그와 관련된 사회적 위상이 소비의 지배적 대상이 되는 사회를 말한다. 그리고 ‘소비자본주의consumer capitalism’라는 용어를 택했다. 종종 경영학과 소비자 문화론 등의 분야에서 ‘소비자 자본주의’로 쓰기도 하지만, 책에서 자본주의의 단계를 구분할 때 ‘산업자본주의industrial capitalism’와 대조해서 쓰인다는 점에서 ‘소비자본주의’가 더 어울린다고 보았다. ‘소비지상주의consumerism’는 ‘소비주의’라고 옮길 때도 많지만, 이 용어가 ‘소비가 덕이다’라는 관념을 부추기는 사회 풍조를 가리킬 뿐 아니라 ‘소비자 주권consumer sovereignty’을 내세우는 자유주의 정치철학을 근저에 깔고 있다는 점에서 좀 더 강한 어감을 주는 ‘소비지상주의’가 어울린다고 보았다. 한편 저자는 소비자의 행동 측면을 주목하는 말로 ‘소비사회’란 용어를 쓰면서, 그러한 소비자 행동을 유도하는 기업의 행동 측면을 주목하는 말로 ‘marketing society’를 사용한다. 이 말은 광고와 브랜드 구축, 각종 후원 활동, 상품 기획과 노출을 비롯해 소비자 유형을 만들어내고 소비자 행동을 조작하는 기업의 마케팅 활동이 일반 대중의 일상적 생활을 좌지우지하는 사회란 뜻이다. 이러한 뜻을 담기에는 ‘마케팅 사회’보다는 강한 어감을 담을 필요가 있다고 보아서 ‘마케팅 지배 사회’라는 역어를 선택했다. 본문에 자주 등장하는 ‘the West’, 혹은 ‘Western society’는 서유럽과 미국, 캐나다, 그리고 일본과 호주 등 선진국들을 주로 가리키는데, 명시적으로 지역을 지적하지는 않는다. 문명사적인 배경에다 사회, 문화, 경제 등이 복합된 지역 구분이니 경계가 분명하지는 않지만, 대체로 서유럽 문명에 역사적 뿌리를 두면서 경제력이 앞서는 선진 자본주의권으로 이해하면 좋을 것으로 보인다. 주로 ‘구미권’ 혹은 ‘구미 사회’로 옮겼다.

2011년 1월 10일
※ 다음 역서에 붙이는 역자의 글. 《성장 숭배: 우리는 왜 경제성장의 노예가 되었는가

[주1] 2010년 중산층 보고서(고려대 강성진 교수와 매경 공동 조사)에 따르면 1997~2008년 사이 중위소득의 50~150%로 폭넓게 정의한 중산층의 비율은 73.6%에서 63.2%로 떨어졌고, 중위소득의 50%에 못 미치는 빈곤층은 63만 가구에서 149.4만 가구로 두 배 이상 늘었다. 또 2008년 1월 한국보건사회연구원 남상호 연구위원의 <가계자산 분포와 불평등도의 분해>에 따르면 자산 보유 면에서도 상위 1%(괄호안은 상위 10%)의 순자산 보유 비율은 1999년 9.7%(46.3%)에서 2006년 16.7%(54.3%)로 늘었다. 대체로 IMF 구제금융 이후 불평등과 양극화는 악화일로에 있다.

[주2] 한 가지 부언할 것은, 마르크스의 개념으로서 ‘fetishism’은 상품을 주물이나 물신처럼 사람들이 집착하고 숭배한다거나, 상품이라는 부(富)의 역사적 형태가 모든 인격적 관계를 물질적 관계로 전도시키는 성격이 있다는 데서 끝나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상품 물신성’이나 ‘상품 물신화’라는 말은 ‘상품에는 물신적 성격이 있다’거나 ‘사람들이 상품을 물신처럼 떠받든다’는 의미다. 이 의미는 마르크스가 피력했던 ‘fetishism’의 한 측면에 불과하다. 가장 넓고 또한 본질적인 의미에서 그가 주장했던 ‘fetishism’은 자본주의에서 상품이 그 자체의 논리에 따라 화폐, 자본으로 진화하면서 인간 활동의 전반을 조직하는 원리라는 것이다. 즉 ‘사회를 조직하는 원리이자 사람들의 의식을 지배하는 이데올로기’라는 의미에서는 마르크스의 ‘fetishism’과 저자의 ‘growth fetishism’ 사이에는 아무 차이도 없다. 철학적 입장과 역사관, 그리고 경험한 시대가 다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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