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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정치과정의 현안 가운데 경제성장만한 고민거리도 없다. 지금처럼 정책의 성공 여부가 경제성장으로 판가름 나는 시대는 일찍이 없었다. 어느 나라든 자신들이 얼마나 진보했는지 일인당 소득을 기준으로 다른 나라와 비교한다. 일인당 소득수준을 높이려면 더욱 빠르게 성장하는 길밖에 없다. 높은 성장률이 국가적 자존심의 근거가 되는가 하면, 낮은 성장률은 부유한 나라에게는 무능하다는 비판의 빌미가 되고 가난한 나라에게는 불쌍하다는 동정의 이유가 되기도 한다. 일정 기간 저성장을 경험한 나라는 국가 차원의 노심초사에 빠져 ‘도대체 어디가 잘못된 것이냐’라든가 국민성에서부터 국가 전체적으로 뭔가 결함이 있는 게 아니냐는 문제를 놓고 좌우파 논객들이 열띤 설전을 벌인다.
‘국민의 행복을 향상시키고 더 나은 사회로 가려면 경제가 더 성장해야 한다.’ 어느 신문을 펼치든 이처럼 주장하는 정치인이나 평론가의 발언이 하루가 멀다 하고 지면에 오른다. 분기별로 경제통계, 보다 정확하게는 국민계정national accounts이 발표되면 그때마다 언론의 대대적 보도가 뒤따른다. 국민총생산GNP의 성장을 눈에 띄게 뽑아 써내려가는 기자들의 논조를 보면 마치 한 국가가 얼마나 발전했는지 보여주는 절대적 지표를 손에 쥔 듯하다. GNP는 일류 통계학자들이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국민계정 시스템에 따라 산출하는 숫자인데, 번영의 척도로서 조금도 이론의 여지가 없다는 분위기다. GNP 성장이 기대치를 달성하거나 그 이상이면 정부 지도자들은 그들의 성과를 두고 의기양양해한다. 반대로 성장이 기대치에 못 미치면 야당들은 정부를 무능하다고 공격한다. 지나간 유구한 역사에서 국가 지도자들이 약속으로 내걸었던 것은 자유와 평등, 국민교육, 도덕의 함양, 국가 자존심의 회복이었다. 하지만 오늘의 국가 지도자들이 약속하는 것은 ‘더 높은 경제성장률’이다.
구미권의 주력 정당들은 전부 ‘성장 망상growth fetish’에 사로잡혀 국민계정의 포로가 돼버렸다. 정당마다 사회정책의 차이는 있더라도 ‘정부의 최우선적 목표는 경제성장이어야 한다’는 입장만큼은 너와 내가 따로 없다. 경제성장은 아무도 도전할 수 없는 신성불가침의 목표다. 각 정당은 선거전에서 서로 싸우면서도 하나같이 경제 운영의 개선을 통해 경제성장을 높이겠다고 약속한다. 어떤 문제를 거론하더라도 해결책은 거의 다 ‘경제성장률을 높이자’는 것이다. 실업률이 너무 높다, 경제성장만이 고용을 창출할 수 있다. 학교와 병원의 예산이 부족하다, 성장이 예산을 늘려줄 것이다. 환경보호에 들어가는 비용이 너무 부담스럽다, 이것도 해결책은 경제성장이다. 빈곤의 수렁이 너무 깊다, 성장이 빈곤층을 구제해줄 것이다. 소득분배가 불평등하다, 일단 성장을 하면 골고루 형편이 나아질 것이다. 이전 세대들은 누리지 못했던 것들, 그 꿈같은 가능성들이 경제만 성장하면 다 실현될 거라는 이야기를 우리는 수십 년 동안 들어왔다. 여가를 즐길 시간이 계속 늘어날 것이며 무료 서비스도 확충될 것이다. 편리한 기기들 덕에 고된 가사노동도 줄어들고 저마다 윤택한 삶의 기회가 주어질 것이다. 짜릿한 우주여행을 떠날 날도 멀지 않았으며, 웬만한 질병은 거의 다 완치될 것이다. 이처럼 경제성장의 매력은 한도 끝도 없다.
이처럼 경제만 성장하면 장밋빛 세상이 열릴 거라고 했지만, 21세기에 막 들어선 우리 앞의 현실은 충격적이기만 하다. 구미권 세계는 50년이 넘도록 고도성장을 꾸준히 이어왔다. 그 덕분에 같은 기간에 평균 실질소득은 몇 배나 증가했다. 그럼에도 일반 대중이 삶에서 느끼는 만족은 고도성장하기 전보다 나아지지 않았다. 경제성장은 더 나은 삶을 위한 것인가? 진정으로 경제성장의 목적이 그것 말고 다른 게 아니라면, 경제성장은 실패한 것이다. 이 사실을 뒷받침하는 근거는 제2장에서 제시할 테지만, 여기서 잠시 독자들은 스스로 이 질문을 해보기 바란다. “삶의 전체적인 면에서 지금 사람들은 4~50년 전에 비해 더 행복한가?” 이 질문에 거의 모든 사람이 “아니다”라고 답할 것이다.
현대 사회에서 경제성장의 역할을 따져보면 따져볼수록, 경제성장에 대한 우리의 강박관념은 주물신앙(주물呪物, fetish, 즉 영험한 마력이 있다고 숭배하는 대상을 받들어 모시는 집착이나 애착)처럼 보인다. 경제성장은 한 해에 생산되는 재화와 서비스의 양이 얼마나 늘었느냐는 지극히 평범한 관념에 불과하다. 하지만 좀 더 면밀하게 분석해보면, 경제성장이라는 관념에는 ‘형이상학적인 미묘함과 신학적인 우아함이 넘쳐흐른다’. 경제가 성장하면 일반인들이 손에 쥐는 화폐소득이 늘어난다. 화폐소득이라는 보편적 등가물universal equivalent의 형태를 취한다는 점에서, 경제성장의 결과는 당연히 소비할 여력이 늘어났다는 것보다 훨씬 큰 의미를 띠게 된다. 현대 사회에서 소득의 증대는 세상 사람들이 희망과 계획을 몽땅 쏟아붓는 삶의 목적 그 자체다. 제3장에서 논의하겠지만, 사실 현대 사회에서 개인이 자신의 자아를 창조하고 재생산하는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더 많은 소득을 버는 행위가 돼버렸다. 그러니까 경제성장이 중요한 이유는 소비에 충당할 재화와 서비스의 양이 늘어나기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경제성장이 사람들에게 불러일으키는 흥분과 경제성장으로 더할 나위 없는 행복이 보장될 거라는 믿음 때문이다.
1930~1940년대에 파푸아뉴기니에서는 풍요의 새 시대가 눈앞에 다가왔다는 일종의 신앙운동이 급격하게 확산되었다. 원주민들은 초자연적인 존재가 보내주는 ‘화물cargo’이 당도하면 새 시대가 열릴 거라고 믿었다. 당시 난데없이 항공기와 선박들이 나타나서 식민지 관리들에게 화물을 건네주는 광경이 보이자 원주민들 사이에 이런 신앙이 번지기 시작했다. 이 ‘화물숭배cargo cult’ 신도들은 상징적인 활주로와 창고를 만들어놓고 화물의 도래를 애타게 기다리면서 전통적인 생계 활동마저 속된 일로 치부해 포기해버렸다.
선진국에 사는 사람들은 화물숭배를 원시적인 미신이라고 비웃을지도 모르겠지만, 현대 사회가 경제성장에 집착하는 모습은 화물숭배와 다를 것이 별로 없다. 화물숭배나 성장 망상이나 똑같이 물질적 재화에 신비한 힘을 부여한다. 물질적 재화를 얻으면 지상낙원이 열린다고 믿는 것도 똑같다. 그 낙원에 이를 수 있는 길도 비슷해서, 한쪽은 더 많은 화물이고 다른 쪽은 더 많은 돈이다. 두 쪽 모두 일반인들더러 신앙을 지키라고 설교하는 예언자들이 있다. 한쪽에선 더 많은 화물─다른 쪽에선 더 많은 돈─이 당도하는 날, 신자들 앞에 황홀한 세상이 열릴 거라는 설교 소리가 들린다. 또 두 사회에서 군림하는 지배자들의 정의도 비슷하다. 화물숭배자들을 지배했던 식민주의자들은 대량의 화물을 가진 사람으로 정의되는 한편, 성장 망상에 사로잡힌 사람들 위에서 군림하는 지배자들은 거액의 돈을 가진 사람으로 정의된다. 또한 두 사회 모두 많은 화물이나 많은 돈을 손에 넣으면 누구라도 엘리트 집단에 들어가게 된다는 믿음이 널리 퍼져 있다. 현대 구미 사회의 사람들은 화물이 난데없이 나타나는 게 아니라 생산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 점에서 원주민들과 다를지도 모른다.
하지만 구미 사회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난데없이 큰 재산을 거머쥘 수 있다고 믿는다. 피라미드 판매나 복권에 매달리는가 하면, 주식 투기와 탈세를 궁리하기도 하고, 졸부가 될 수 있다는 별의 별 일확천금의 비책에 솔깃해한다. 오죽하면 졸부가 되는 방법을 가르쳐줍네 하고 책 쓰는 일밖에 하는 게 없는 사람들이 종종 졸부가 되기도 한다. 화물숭배자들과 다를 바 없이 구미 사회에도 횡재할 기회를 잡는 일이라면 일상적인 직장생활과 같은 전통적인 생계 활동마저 기꺼이 내던지려는 사람들이 많다.
‘성장의 망상체계妄想體系growth fetishism’는 선진국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개발도상국들도 그에 사로잡혀 있기는 마찬가지다. 식민통치가 떠날 때 남겨놓은 가장 끈질긴 유산이 바로 이것일 것이다. 이 나라들은 달리 선택할 만한 길이 별로 없다. 경제성장을 최대한 추구하는 궤도에서 이탈하려고 들면 틀림없이 ‘시장’이 가혹한 보복에 나설 것이다. 만약 시장의 관심 밖이어서 그럴 일이 없더라도, 그때는 국제통화기금IMF이나 세계은행World Bank이 처벌을 하려고 들 것이다. ‘아시아의 기적’은 성장의 기적이었다. 아시아의 작은 호랑이들은 구미 선진국들이 만들어놓은 성장률 게임에서 그들을 물리치겠다고 작정한 것인지, 매년 8~9%, 심지어 10%에 달하는 높은 성장률로 10년에서 20년에 달하도록 고도성장의 기염을 토해내는 법을 배웠다. 대단한 역사의 반전이 일어났다는 듯이 1980년대 서구의 평론가들과 시장의 논객들은 동아시아의 성장 실적을 따라잡지 못하는 자국 정부를 호되게 꾸짖었고, 결국 작은 호랑이들이 채용했던 전략은 구미 선진국들이 따라야 할 모델이 되었다. 그 모델이란 대체로 신속한 무역자유화의 추진과 임금 인하, 노동시장의 ‘유연성’, 조세와 사회보장의 대폭적인 축소를 뜻했다. 동아시아의 호랑이들은 선진국들로부터 배워야 할 교훈을 너무도 잘 배웠던 게 분명했다. 이제 이 나라들이 교사가 되었고, 구미권 정치 지도자들은 착실한 학생이 되었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바로 8%가 4%보다 높기 때문이다. (...중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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