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가 핵전쟁으로 치달을 뻔했던 쿠바 미사일 위기 직후 1962년의 일이다. 그 무렵 거리에서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 선생과 마주쳤다. 미사일 위기는 그녀에게도 충격적인 일이었지만, 평소 그녀의 뿌리 깊은 확신을 더욱 굳건히 해준 사건이기도 했다. 그 몇 해 전에 출간된 『인간의 조건(The Human Condition)』에서 아렌트는 엔지니어든 누구든 물건을 만드는 사람은 자기 일터의 주인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정치가 더 높은 위치에서 물리적 노동을 이끌어줘야 함을 뜻하는 말이었다. 그녀가 이러한 확신에 도달한 것은 1945년 로스앨러모스(Los Alamos) 프로젝트의 결과로 최초의 핵폭탄이 만들어졌을 때였다. 미사일 위기가 닥치자 2차 세계대전의 기억이 채 가시지 않은 미국인들은 또다시 심한 공포감에 휩싸였다. 순식간에 뉴욕의 거리가 싸늘하게 얼어붙었지만, 아렌트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무덤덤했다. 그녀는 내가 이 사건을 제대로 보고 교훈을 얻기 바랐다. 그 교훈이란 물건을 만드는 사람들은 보통 자기가 무얼 하고 있는지 모른다는 것이다.
인류가 스스로를 파멸시킬 물건을 발명할 수 있다는 아렌트의 우려는 구미 문화의 뿌리인 그리스신화의 판도라(Pandora) 이야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판도라는 “명령을 어긴 프로메테우스를 처벌하려고 제우스가 지상에 내려 보낸”[주1] 발명의 여신이었다. 헤시오도스(Hesiodos)는 『노동과 나날(Works and Days)』에서 판도라를 “모든 신들이 모여 만들어낸 고약한 선물”로 묘사했다. 판도라가 전에 없던 신기한 것들로 가득한 그녀의 상자(이야기에 따라서는 단지라고도 나온다)를 열자, “고통과 악이 튀어나와 인간 세상에 퍼졌다”고 헤시오도스는 전한다.[주2] 그리스문화가 자기 모습을 갖춰가는 동안 그리스인들 사이에는 판도라가 인간 ^내면^의 한 속성이라는 생각이 점점 짙어만 갔다. 즉 인간이 만든 물건으로 구축된 문화는 항상 화를 자초할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는 생각이다.
그야말로 인간 내면의 순진한 무엇이 이런 위험을 부를 수 있다. 호기심 많은 인간은 순전히 의혹과 흥분에 홀린 채 일을 저지른다. 그래서 판도라의 상자를 여는 것까지는 아무 탈이 없는 행위라는 근거 없는 이야기를 지어낸다. 로스앨러모스 프로젝트를 지휘했던 로버트 오펜하이머(Robert Oppenheimer)의 업무일지는 아렌트가 최초의 대량 살상 무기를 보면서 인용할 만한 내용이었다. 오펜하이머는 확신에 찬 어조로 이렇게 술회했다. “무언가 매력적인 기술이 눈에 띄면, 우리는 일단 달려들어 일을 벌인다. 그러고는 그 기술이 성공한 뒤에야 그것으로 무엇을 할지 따져본다. 원자폭탄은 바로 이런 식으로 만들어졌다.”[주3]
시인 존 밀턴(John Milton)이 그린 아담과 이브의 이야기에도 호기심에 잠재된 위험이 묘사돼있다. 여기서 오펜하이머 역할로 등장하는 주인공은 이브이고, 밀턴이 묘사한 이 태초의 기독교적 광경에서 인간은 성애(性愛)에 대한 갈망이 아니라 지식에 대한 갈망으로 인해 화를 자초한다. 현대로 넘어와서도, 할 수 있는 일이면 무엇이든 해봐야 한다고 생각하는 게 인간의 본성이라고 봤던 라인홀드 니부어(Reinhold Niebuhr)의 저술에도 판도라는 강력한 이미지로 살아 있다.
아렌트 세대는 어마어마한 자기 파괴의 공포를 체험했다. 엄청난 숫자에 달하는 대량 살상은 아연실색할 정도였다. 20세기 전반부에 적어도 7000만 명이 전쟁터와 집단수용소, 강제노동수용소에서 죽어갔다. 아렌트는 이러한 대량 살상을 맹목적인 과학과 무지막지한 관료주의가 만들어낸 합작품으로 봤다. 관료들에게는 주어진 일을 해내는 것만이 문제였고, 죽음의 수용소를 기획한 나치 책임자 아돌프 아이히만(Adolf Eichmann)은 그러한 관료주의의 화신이었다. 시키는 일만 했을 뿐이라는 그를 아렌트는 ‘일상의 탈을 쓴 악(banality of evil)’이라고 불렀다.
전쟁이 아니더라도 오늘날의 물질문명에서 인간이 자초하는 자기 파괴의 양상은 아찔한 숫자로 나타나고 있다. 한 예로 자연에서 100만 년이나 걸려야 생성되는 화석연료를 인류는 지금 단 일 년 만에 써버리고 있다. 생태계 위기에는 인간 스스로 화를 부르는 판도라의 이미지가 깃들어 있다. 기술도 이 위기를 바로잡는 데 의지할 만한 동맹군이 못 될 것 같다.[주4] 천체물리학자 마틴 리즈(Martin Rees)는 모든 게 로봇으로 작동되고 일반인들이 이를 통제할 힘을 잃어버리는 세상을 묘사하고 있다. 그러한 세상이 아직 눈앞의 현실은 아니라고 해도, 적어도 그 가능성만큼은 초소형 전자기술(마이크로일렉트로닉스microelectronics) 혁명이 열어놓았다고 그는 보고 있다. 그가 내다보는 미래의 모습 중에는 인간이 스모그를 제거할 요량으로 만든 초소형 자기복제 로봇이 오히려 생물권(biosphere)을 모조리 집어삼키는 기괴한 사태도 있다.[주5] 이보다 좀 더 눈앞에 닥친 일들은 농산물과 가축을 조작하는 유전자공학이다. ..... (중략) ..... 고대 신화에서 판도라 상자 속의 무시무시한 저주는 인간의 잘못에서 비롯된 게 아니었다. 신들이 분노한 탓이었다. 세속의 역사로 넘어온 판도라 공포는 신화보다 더 혼란스럽고 종잡기가 어려워졌다. 원자폭탄 개발자들은 호기심에서 이 일을 시작했다가 죄의식까지 떠안게 됐다. 의도한 것은 아니라고 해도 호기심에서 비롯된 결과를 변명하기는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오펜하이머와 라비(I. I. Rabi), 레오 질라드(Leo Szilard)를 비롯해 로스앨러모스 프로젝트에 참여했던 많은 사람들은 원자폭탄을 만든 일로 죄의식에 휩싸였다. 오펜하이머의 일기에는 인도의 신 크리슈나(Krishna)의 말이 적혀 있다. “나는 세상을 파괴하는 죽음의 화신으로 변했다.”[주9] 전문가들이 자신의 전문 지식을 두려워하는 이 고약한 역설은 어떻게 풀어야 할 것인가?
.... (중략) ....
근 50년 전에 아렌트 선생과 공부할 때 그녀의 철학은 많은 영감으로 번득였지만, 판도라의 상자 안을 들여다보기에는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간이 만드는 물건들과 구체적인 행위를 다루는 데까지는 파고들지 못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아렌트는 항상 만족스럽게 답해주는 좋은 선생은 아닐지 몰라도, 균형을 깨고 혼란을 유발하며 논증을 유도하는 그 이상의 훌륭한 선생이었다. 아렌트가 판도라를 다룰 때 부딪쳤던 난관은 (그때는 희미했고 지금은 좀 더 분명해졌지만) 아니말 라보란스(Animal laborans)와 호모 파베르(Homo faber)를 구분했던 것에서 비롯되는 것 같았다. 이 두 가지는 일하는 인간의 이미지다. 그녀는 이 두 가지를 쾌락과 놀이, 문화가 배제된 인간의 조건으로 보았던 만큼 인간에게는 가혹한 개념이었다.
아니말 라보란스는 굴레를 짊어진 짐승처럼 매일 고된 일을 되풀이해야 하는 인간, 즉 ‘일하는 동물’이다. 아렌트는 세상과 차단된 채 일에 몰입해 있는 인간의 모습을 떠올림으로써 ‘일하는 동물’의 이미지를 더 확장했다. 원자폭탄을 ‘매력적’인 문제로 느꼈던 오펜하이머의 상태나 효율적인 가스실을 만들려고 절치부심했던 아이히만의 상태는 다름 아닌 일하는 동물인 것이다. 그 일이 되게 하는 것 이외에는 아무런 생각이 없는 상태다. 아니말 라보란스에게는 일 그 자체가 목적이다.
반면 아렌트가 말하는 호모 파베르는 다른 종류의 일, 즉 공동의 삶을 만드는 인간의 이미지다. 여기서도 그녀는 예로부터 이어져온 이 관념을 더욱 확장했다. 라틴어 ‘호모 파베르’는 ‘제작자(man as maker)’를 뜻하는 단순한 말이다. 이 표현은 르네상스 시기의 철학과 예술에 갑자기 등장한다. 앙리 베르그송(Henri Bergson)은 아렌트보다 두 세대 전에 이 용어를 심리학에 적용했는데, 그녀는 특수한 방식으로 정치철학에 적용했다. 호모 파베르는 물질적인 노동과 행위를 판단하는 존재다. 아니말 라보란스의 동료가 아니라, 그 위에 선 상위자다. 즉 그녀는 우리 인간이 두 가지 차원에서 살고 있다고 본다. 하나는 우리가 물건을 만들며 사는 차원이다. 이런 상태에 있는 우리는 그저 일에 함몰된 채 도덕이나 윤리를 모른다. 동시에 우리는 이보다 높은 다른 차원에서도 살고 있다. 이 차원에서 우리는 만드는 일을 멈추고, 서로 어울려 토론과 판단을 시도한다. 아니말 라보란스는 “어떻게?”라는 질문밖에 하지 않는다. 호모 파베르는 “왜?”를 묻는다.
그러나 이러한 구분은 현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경시하는 잘못된 생각으로 보인다. 아니말 라보란스에 머물러 있다고 해도 인간이라는 동물은 생각할 줄 아는 존재다. 현장의 작업자들이 토론하는 화제가 사람에 대한 것이 아니라 작업 대상인 물건이라고 해도, 분명히 그들은 작업 중인 일을 화제로 서로 이야기하는 것이다. 아렌트는 어디까지나 노동이 완료된 뒤에야 인간의 의식이 등장한다고 분명한 선을 긋는다. 즉 일할 때는 일만 할 뿐이고 일이 끝나고 나야 제대로 생각을 하게 된다는 말이다. 과연 인간은 일하는 동안 아무 생각도 의식도 없는 것일까? 이렇게 보기보다는 인간의 의식(즉 우리의 생각과 감정)이 일하는 과정 내부에 갇혀 있다고 보는 게 좀 더 균형 잡힌 시각이다.
어찌 보면 극히 당연한 이야기다. 하지만 판도라의 상자를 다룰 때는 아주 중요한 포인트다. 모두에게 화를 부를 일이라면 일하는 과정 중에 하는 생각을 눈여겨봐야 하기 때문이다. 일이 끝난 뒤에 가서 대중에게 ‘문제 해결’을 맡겨봐야 일이 벌어진 현장에서는 이미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뒤일 때가 대부분이다. 개입은 그 전에 일찌감치 시작되어야 한다. 그리고 물건을 만드는 일이 어떤 과정으로 처리되는 것인지 보다 충실하게 제대로 이해한 상태에서 개입이 이루어져야 한다. 이러한 개입은 아렌트와 같은 성격의 사상가들이 물질을 보는 태도에 비해 물질주의적 견지를 더 밀고나가는 개입이다. 판도라에 본격적으로 대처하려면 좀 더 공격적인 문화적 물질주의(cultural materialism)가 필요하다.
물질주의(materialism)라는 말은 주의 깊게 살펴봐야 한다. 지나간 정치사에서 맑스주의가 이 말속으로 들어와 유물론의 이미지가 들러붙었는가 하면, 일상생활 면에서는 소비자들의 환상과 탐욕을 가리키는 물질만능주의라는 이미지도 들러붙어서 이제는 이도 저도 아닌 텅 빈 말이 돼버렸다. ‘물질주의적’으로 생각한다고 하면 무슨 뜻일까? 물질에 바탕을 둔다거나 물질에 근거해서 생각을 한다는 말처럼 들린다. 하지만 우리는 지금 우리 스스로 만든 것도 아니고 잘 알지도 못하는 컴퓨터나 자동차 같은 물건을 쓰면서 살고 있으니, 이렇게 쓰는 물건(즉 물질)이 과연 바탕이고 근거인 것인지 그 의미는 모호하기만 하다. 한편, ‘문화(culture)’라는 말을 두고, 언젠가 문학 비평가 레이몬드 윌리엄스(Raymond Williams)는 이 말의 현대적 쓰임이 수백 가지에 달한다고 헤아렸던 적이 있다.[주14] 이처럼 문화란 말이 자라는 야생의 정원을 보면, 대개 두 개의 커다란 화단으로 나뉜다. 한쪽 화단에서 문화는 예술만을 뜻한다. 다른 쪽 화단에서는 종교와 정치, 사회 전반에 걸쳐서 일정한 부류의 사람들이 공유하는 신념들을 뜻한다. 적어도 사회과학 분야에서 ‘물질문화(material culture)’가 거론되는 것을 보면, 직물이나 전자회로기판 또 생선구이 같은 물건을 다룰 때 대상 그 자체로 눈여겨볼 가치가 경시되는 일이 너무 많다. 그 대신 사회적 규범과 경제적 이해, 종교적 신념이 그런 물건을 만드는 과정에 판화 찍듯 그대로 반영된다고 본다. 즉 물건 그 자체는 뒷전으로 밀려난다.
그러니 새로운 의미로 새롭게 시작해야겠다. 찾아야 할 답이 단순하지야 않겠지만, 단순히 이런 질문을 던져보자는 것이다. 구체적인 물건을 만드는 과정이 우리 자신의 어떤 모습을 드러내주는가? 우리가 물건을 다루며 배우는 행위는 직물의 질을 판별하거나 물고기를 제대로 잡는 방법에 대해 심사숙고하는 자세를 요구한다. 질 좋은 천이나 잘 만든 요리에서 우리는 좋고 훌륭하다는 것, 즉 ‘선(善, good)’의 폭넓은 범주들을 탐색할 수 있다. 즐거움을 주는 좋은 점들이 그런 물건의 어느 구석에서 발견되며 어떤 방법으로 그렇게 만든 것인지, 물건에 담긴 인간의 모습을 그려내려는 것이다. 문화적 물질주의자들은 물건 그 자체를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들여다보면서, 물건들이 어떻게 종교적 · 사회적 · 정치적 가치를 만들어낼 수 있는지 알고 싶어 한다. 다시 말해 물건을 만드는 아니말 라보란스가 호모 파베르를 안내하는 존재인지도 모른다.
노년에 접어든 지금, 뉴욕 북서변의 그 거리를 다시 떠올리게 된다. 당시 청년기의 내가 아렌트 앞에서 펼치지 못했던 주장, 사람들은 자신이 만드는 물건을 통해서 자기 자신에 대해 배울 수 있다는 주장을 하고 싶다. 또한 물질문화가 중요하다는 주장을 펼치고 싶다. 노년의 아렌트 선생은 호모 파베르의 판단력이 인류가 자초할 화로부터 인류를 구할 수 있을 거라는 데 희망을 걸었다. 나는 나이가 들면서 일하는 동물로서의 인간에 희망을 거는 쪽으로 변하고 있다. 판도라 상자 속의 공포는 줄일 수 있으며, 물질적 삶을 좀 더 인간적인 모습으로 만들어갈 수 있다. 우리가 물건을 만드는 과정을 더 잘 알게 되기만 한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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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 책에서 일부를 발췌. "Prologue: Man as His Own Mak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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