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물질문화를 다루는 삼부작 가운데 첫 책이다. 각각 완결된 책으로 쓸 생각이지만, 세 권 모두 판도라 상자의 위험을 주제로 다룬다. 이 책, 『장인(匠人, The Craftsman』은 기예(技藝)의 경지로 일하는 장인의식에 대한 것이다. 간단히 말해 물건을 잘 만드는 기능이 그 주제다.[*] 두 번째 책은 침략과 열정을 관례적인 의례로 다듬어내는 정교한 기술을 다룬다.[**] 세 번째 책은 지속 가능한 환경을 만들고 그 속에서 살아가는 데 필요한 기능을 모색한다. 세 권의 책 모두 논의를 풀어가는 화두는 ^기술(technique)^이지만, 인간의 사고와 무관하게 흘러가는 공정으로서의 기술이 아니라 문화로 구현되는 기술이다. 즉 특정한 생활양식을 수행하는 기술에 대한 것이다. 이와 같은 프로젝트를 구상한 것은 내가 언제고 결실을 맺어보고자 노력해왔던 나 자신의 패러독스에서 비롯됐다. 나무를 깎고, 병사를 훈련시키며, 태양 집열판으로 전기를 만드는 일을 세밀히 들여다보면서, 철학의 관점에서 이러한 인간 행위의 의미를 찾아내보자는 일이다.
‘장인의식(craftsmanship)’을 산업사회의 도래와 더불어 시들어버린 생활방식으로 이해할 때도 있지만, 잘못된 생각이다. 장인의식은 면면히 이어지는 인간의 기본적 충동이며, 일 자체를 위해 일을 잘해내려는 욕구다. 장인노동은 숙련 육체노동보다 훨씬 넓은 영역에 스며있다. 컴퓨터 프로그래머와 의사, 예술가들의 일에도 장인의식이 살아있다. 아이를 기르는 일도 장인의 실기(實技, craft)처럼 연습해 숙달하면 더 나아진다. 시민으로서 행동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이 모든 영역에서 장인의식은 객관적인 기준을 중시하며, 일 자체에 주목한다. 그러나 장인의 원칙과 의지는 사회경제적 조건 때문에 장해에 부딪힐 때가 많다. 예컨대, 학교에서 질 좋은 교육에 필요한 도구를 마련해주지 못하기도 하고, 일터에서 품질을 추구하는 열망을 제대로 인정해주지 않을 때도 있다. 비록 장인의식을 추구하는 개인이 일에 대한 자부심에서 보람을 느낄 수도 있지만, 이렇게 보람을 느끼는 일도 녹록지만은 않다. 장인은 무엇이 뛰어난 것이냐는 객관적인 품질 표준들이 서로 충돌하는 상황에 자주 직면한다. 어떤 일을 그 자체를 위해 잘해보려는 욕망은 경쟁의 압력이나 좌절감, 혹은 강박관념 때문에 상처를 입기도 한다.
이 책은 이러한 차원에서 기능과 의지, 판단을 탐색하는데, 특히 손과 머리 사이의 긴밀한 관계에 주목한다. 뛰어난 장인은 누구나 구체적인 작업과 생각 사이를 오가는 대화를 하게 되고, 이 대화는 반복적인 습관으로 진화한다. 이러한 습관이 문제를 푸는 일과 문제를 찾는 일 사이의 리듬을 만든다. 손과 머리를 오가는 상호작용은 아주 다양한 일에서 나타난다. 벽돌을 쌓고, 음식을 요리하며, 놀이터를 설계하고, 첼로를 연주하는 일 등이 다 그런 일들이다. 물론 이런 일을 하다가 주저앉을 때도 있고, 충분히 숙달하지 못할 때도 있다. 기술을 적용할 때 생각이 배제된 채 순전히 기계적으로 되는 일은 없듯이, 기능을 닦을 때도 저절로 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서구문명은 손과 머리를 같이 연결해 쓰고 장인의식의 욕구를 인정하고 고무해주는 일에서 뿌리 깊은 장애를 겪어왔다. 이러한 문제들은 이 책의 1부에서 탐색한다. 1부의 내용은 마스터와 도제가 불평등한 관계에서 함께 일하는 작업장들의 이야기로 시작된다(중세 금세공인의 동업조합과 안토니오 스트라디바리(Antonio Stradivari)와 같은 악기 명인의 공방, 또 현대적인 실험실 등이 예로 등장한다). 또한 기계에 대항하는 장인의 싸움도 살펴본다. 이 역사는 18세기에 처음으로 발명된 로봇에서도 나타나고, 계몽주의의 바이블로 통하는 디드로(Diderot)의 『백과전서(Encyclopedia)』에도 그려져 있다. 이어서 19세기 산업기계에 대한 공포가 불거질 때도 이 싸움이 나타났다. 장인의 물질의식은 벽돌을 제작하는 장구한 역사에서 잘 드러난다. 이 역사는 고대 메소포타미아에서 우리 시대로 이어지며, 이름 없는 작업자들이 물건에 불과한 이런 사물들에 어떻게 자신의 흔적을 남겼는지 보여준다. .... (중략) .... 이 책은 장인이 일하는 방식으로부터 우리가 물질적 현실에 발 딛을 기준점을 찾을 수 없겠느냐는 문제를 고찰함으로써 결론을 찾는다. 지난 역사는 여러 가지 잘못된 구분을 강요해왔다. 행동과 이론을 분리하는 것을 비롯하여 기술과 표현, 장인과 예술가, 제작자와 사용자를 분리하는 구분선 등이 그런 것들이다. 현대 사회는 이러한 역사적 유산을 떠안고 중병을 앓고 있다. 하지만 지난날 장인의 삶과 그들이 갈고 닦은 실기의 역사를 들여다보면, 오늘날에도 솜씨 좋은 장인처럼 삶을 능숙하게 사는 데 지침이 될 만한 색다른 대안을 발견할 수 있다. 도구를 쓰는 방식, 몸동작을 조직하는 방식, 물건을 보는 사고방식이 바로 그러한 단서가 엿보이는 구석들이다.
.... (중략) ....
삼부작의 마지막 책은 좀 더 확실한 대상, 즉 지구 자체를 돌아본다. 우리가 직면한 천연자원 문제와 기후변화 문제는 주로 인간이 저질러서 생긴 물리적 위기다. 판도라는 이제 신화에 머물지 않고 일상적인 자기 파괴의 상징이 돼버렸다. 이 물리적 위기에 대처하려면, 우리가 만드는 물건들도 바꿔야할 뿐 아니라 물건을 사용하는 방법도 바꾸지 않으면 안 된다. 지금과는 다른 건축 방법과 운송 방법을 배워야 할 것이고, 우리가 물자를 덜 사용하는 데 익숙해지도록 새로운 의례, 즉 새 관행을 개발해야 할 필요가 있다. 즉 환경을 훌륭한 솜씨로 돌볼 줄 아는 장인이 되어야 한다.
현재 ^지속 가능하다(sustainable)^는 말이 이러한 종류의 일이나 기술을 뜻하는 것으로 쓰이고 있는데, 그 의미를 들여다보면 좀 특징적인 구석이 있다. ^지속 가능성^은 고령의 마틴 하이데거가 꿈꿨던 것처럼, 자연과 더불어 보다 조화롭게 살면서 우리 자신과 지구 자원 사이에 균형을 이루는 것을 뜻한다. 즉 서로 대립하는 힘 사이의 평형과 화해라는 이미지가 이 지속가능성의 밑바탕에 깔려있는 철학이다. 환경문제에 대처할 실기를 창출해야 한다는 입장에서 보면, 이런 철학은 적합하지도 않고 충분하지도 않다. 생산 방법과 소비 관행을 변혁하려면 우리 자신에 대한 좀 더 근본적인 자기비판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동안 우리가 자원을 활용해온 방식을 바꿀 만한 좀 더 강력한 자극은 우리 자신을 우연이나 운명에 의해 남의 땅에 떠밀려온 이민자처럼 보는 태도에서 나올 것이다. 즉 자기 땅처럼 함부로 지배할 수 없는 낯선 땅에 들어선 이방인처럼 말이다.
사회학자 게오르크 지멜(Georg Simmel)은 주변을 편안하게 느끼고 자기 땅이라고 생각하는 토착민보다 이방인이 (고통은 더 따르겠지만) 더욱 면밀히 탐색하면서 적응하는 기술을 배운다고 지적한다. 아울러 이방인은 자신이 들어가는 사회를 더 객관적으로 바라본다고 설명한다. 토착민에게는 그곳 생활이 그저 자연스러울 뿐이겠지만, 이방인은 그렇게 당연하다고 느낄 수 없기 때문이다.[주15] 인류가 물질세계와 맺고 있는 관계를 바꾸려면 이만저만한 변화가 필요한 게 아니다. 어쩌면 우리가 이 땅에서 스스로를 축출해 이방인이 돼버렸다는 의식을 가져야만, 실제로 우리 행동을 변화시킬 수 있고 우리의 소비 욕망을 억제할 수 있을는지 모른다. 세계와 균형을 유지하면서 편안하게 거주한다는 꿈은 우리 스스로 저질러놓은 이 자기 파괴적인 현실과 맞서는 일을 피하고, 그저 관념 속의 자연으로 도피하려는 태도를 낳을 위험이 있다. 적어도 이와 같은 생각이 지금까지와는 다른 기술로서 환경문제에 대처할 실기를 이해하고자 하는 나의 출발점이고, 이 세 번째 책을 『이방인(The Foreigner)』이라고 이름 붙인 이유기도 하다. 환경문제에 필요한 실기는 지금 우리에게 아주 요원한 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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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자료에서 일부를 발췌. "Prologue: Mas as His Own Maker," 리처드 세넷Richard Sennett, 《장인The Craftsm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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