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5월 13일 수요일

'고르게 떠있는 주의'에 관하여


작성일 : 2003-12-15
저자: 문 형 춘 
출처: 2003년도 한국 임상심리학회 추계 학술대회(2003. 11. 8) 


심리학자 William James는 “주의(attention)가 무엇인지는 누구라도 다 안다”고 하였다. 그러나 지난 수십년간 이루어진 주의 연구들의 가장 중요한 성과는 주의가 간단히 정의되는 단일한 과정이 아님을 밝혀낸 것이라고 할만큼, 주의는 다양한 측면을 지닌 여러 기능들의 복합체이고, 그 기저 과정들 역시 다양하다. 우리의 감각기관에는 외부 세계로부터 끊임없이 자극들이 유입되며, 이러한 자극들에는 우리를 둘러싼 환경 속에서 일어나는 여러 사건에 관한 엄청난 양의 정보가 포함되어 있다. 하지만 우리의 인지체계는 제한된 정보처리용량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 정보를 다 처리할 수는 없다. 우리는 이들 정보들 중 그 일부만을 처리하게 되는데, 이때 작동하는 기제가 바로 ‘주의’이다. 주의가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설명하는 데에는 대체로 두 가지 관점이 있다. 
  • 첫 번째는 여과기 모형(filter model)으로서, 여기에서 주의는 입력정보를 여과시키거나 선택하는 도구로 본다. 주의가 여과기처럼 존재하면서 입력된 정보를 걸러내기 때문에, 주의라는 여과기를 통과한 정보에 대해서만 다음 단계의 처리가 일어나게 되고, 그것이 결국 우리가 의식하는 경험의 내용을 구성하게 된다는 것이다. 
  • 두 번째 모형은 주의를 용량이나 심리적 자원으로 보는 용량 모형(capacity model)인데, 이 모형에서는 주의를 일정한 크기를 가진 에너지와 같은 것으로 보는데, 외부 입력 자극 중 주의라는 에너지를 받은 자극만 계속 처리하고 그렇지 못한 자극들은 의식의 주변으로 밀려나 사라지게 된다고 생각한다(성현란 외, 2001). 
환경에 있는 수많은 대상들 중 표적대상의 정체를 지각하고, 어떤 범주에 속하는 것으로 판단하고, 또 그 내용을 기억해야 할 때, 주의는 정보의 선택과 무시를 그 핵심기제로 한다. 주의의 목적은 제한된 정보처리 체계를 보호하면서 정보처리의 정확성과 신속성을 기하는 데에 있다. 주의는 제한된 용량을 여러 대상이나 과제들에 적절하게 배정하는 체계이다. 사람이나 동물이 적응해야 하는 환경으로부터 수많은 정보가 제공되지만, 뇌의 여러 영역의 활성화에 기인한 우리의 마음은 제한된 정보처리 체계이다. 이런 이유로 제한된 용량의 정보처리 체계를 보호하려면 불필요한 정보를 여과하는 주의가 당연히 있어야 한다. 무시되는 정보는 여과되거나 약화되어 유기체의 반응 선택에 영향을 주지 못한다(김정오, 2002). 

한편 반응의 정확성과 속도를 강조하는 수행의 맥락(performance context)에서 주의를 연구한 현대의 인지심리학 연구자들과는 달리, 내담자들의 치료 현장에서 발달된 정신분석 치료에서는 또 다른 형태의 주의를 가정한다. 정신분석 치료의 창시자인 프로이드는 정신분석 치료의 주요 기법 중의 하나로 분석가의 '고르게 떠있는 주의(evenly suspended attention)'[이 용어는 원래의 독일어 gleichschwebende Aufmerksamkeit에 대한 번역이다. 때로 free floating attention으로도 번역되는데, 이것은 부정확한 번역이다(Thomä & Kächele. 1985)]를 주장하였는데, 이 주의의 특징은 앞서 살펴본 주의와는 달리 선택 없는 주의를 강조한다는 데에 있다. 선택을 하지 않고 주의를 기울이는 ‘고르게 떠있는 주의’는 따라서 일종의 역설적인 Willing-not-to-will(Langan, 1997)로 볼 수 있다. 

분석가의 ‘고르게 떠있는 주의’(잔잔히 떠있는 주의력)는 정신분석 치료에서 가장 중요한 세 가지 치료규칙인 내담자의 자유연상, 분석가의 ‘고르게 떠있는 주의’, 그리고 절제규칙 중의 하나로서, 내담자의 자유연상(마음 속에 떠오르는 것이 무엇이든 어떤 선택이나 평가없이 다 말로 표현하는 것)의 짝이 되는 기법이다. 분석가는 어떤 특별한 것을 명심하려하지 않고 지금 들리는 것, 보이는 것, 자기 내부로부터 떠오르는 것 등, 이 모든 것에 골고루 주의를 기울인다는 것인데, 분석가의 이러한 주의는 조급하게 초점 잡는 것을 막아주기도 한다(윤순임, 1995). 즉 정신분석 기법의 특징 중의 하나는 내담자와 분석가 모두 자기 속에서 떠오르는 것들에 대해 어떤 의식적이고 인위적인 영향이나, 판단, 선택, 해석 등을 배제한 채, 자신의 무의식적 활동에 자신을 맡길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본고에서는 정신분석 치료의 주요 기법 중 하나로 프로이드가 주장하였던 ‘고르게 떠있는 주의’의 개념과 그 의의 및 한계를 우선 살펴보고, 이어서 프로이드이후 이러한 주의의 개념이 어떻게 변질, 혹은 수정되었는지를 살펴볼 것이다. 이와 함께 이러한 주의와 많은 유사성을 갖고 있는 개념으로서, 동양의 불교 명상에서 수련되어온 관조(bare attention)라는 개념과 그 치료적 함의를 함께 살펴봄으로써, 서구에서 발달되어온 심리치료에 기여할 수 있는 동양 심리학의 가능성도 모색해보고자 한다. 


1. 정신분석 치료에서 ‘고르게 떠있는 주의’와 그 의의 

프로이드는 내담자의 자유연상이라는 기본규칙에 상대되는 개념으로서, 분석가에게 ‘판단을... 유보하고 관찰하는 모든 것들에 대해 치우치지 않는 주의를 기울일 것’을 반복해서 권고한다. 프로이드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근본적인 특성을 가진 최적의 주의 태도(optimal attentional stance)를 가정한다: (1) 분별의 부재, 즉 선택하고 집중하고 혹은 이해하려는 어떤 의도적 시도들을 하지 않는 것; 그리고 (2) 자각의 장(field) 내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들에 대한 고르고 동일하고 그리고 치우치지 않은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그것이다(Epstein, 1984). 

프로이드는 꿈의 해석(1900)에서 유사한 심리적 태도를 권고하였지만, 1912년까지 구체적으로 그것의 이름을 짓거나 그것에 대해 기술하지 않았다. 프로이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 기법은...매우 간단하다. 그것은 어떤 특별한 수단의 사용을 거부한다(심지어 기록하는 것도). 그것은 단순히 어떤 것에 대해 특별하게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자신이 듣는 모든 것들에도 불구하고... 똑같은 ‘고르게 떠있는 주의’를 유지시키는 것이다... 나중에 보겠지만, 모든 것에 동일한 주의를 기울이는 규칙은 내담자에게 부과되는 요구, 즉 내담자가 자신에게 떠오르는 모든 것을 비판하거나 선택하지 않고 얘기해야 하는 것의 필연적인 상대개념이다. 만일 분석가가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그는 ‘정신분석의 기본규칙’을 내담자가 준수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대부분의 이점들을 팽개쳐버리는 것이다. 분석가를 위한 규칙은 다음과 같이 표현될 수 있다: “그는 자신의 주의능력에서 비롯되는 모든 의식적 영향들을 억제해야(withhold) 하며, 자신의 ‘무의식적 기억’에 완전히 몰입해야 한다.” 혹은 그것을 순수하게 기법의 면에서 본다면, “그는 단지 경청해야 하며, 자신이 어떤 것을 기억하고 있는지의 여부에 대해 신경쓰지 않아야 한다” (Freud, 1912, pp. 111-112). 

프로이드는 이러한 치우치지 않은 주의를 내담자가 내놓는 재료에, 그리고 분석가 자신의 내적 경험에 적용함으로써, 무의식적 의미들이 결국 분석가의 의식 속에 나타나게 된다고 주장하였다:

경험에 따르면 분석가가 가장 유익하게 사용할 수 있는 태도는 ‘고르게 떠있는 주의’ 상태에서 자신을 자신의 무의식적 심리활동에 내맡기는 것, 그가 들은 어떤 것을 자신의 기억 속에 특별하게 붙잡아두지 않으려고 하면서 가능한 한 숙고하거나 어떤 의식적인 기대를 하지 않는 것, 그리고 이들 수단을 통해 자신의 무의식으로 내담자의 무의식의 흐름(drift)을 포착하는 것이다 (Freud, 1923, p.239). 

이러한 치우치지 않고, 비판단적이고, 고르게 적용되는 주의 상태가 이루어지면 프로이드가 아래에 기술한 것과 같은 어떤 조율(attunement)이 이루어질 수 있다: 

분석가는 수신기 역할을 하는 자신의 무의식이 내담자가 송신하는 무의식을 향하도록 해야한다. 소리를 전달하는 마이크에 전화 수화기가 맞춰져 있듯이, 분석가는 내담자에 맞춰 자신을 조절해야 한다. 수화기가 음파에 의해 생성된 전화선 안의 전기 진동을 다시 음파로 전환시키듯이, 마찬가지로 분석가의 무의식은 자신에게 전달된 무의식의 파생물들로부터 내담자의 자유연상을 결정했던 그 무의식을 재구성할 수 있게 된다 (Freud, 1912, p.115). 

이상과 같은 ‘고르게 떠있는 주의’라는 규칙은 내담자의 이해 받고 있다는 느낌에 기여하며, 치료를 위한 합리적인 기초를 만드는 데에 도움이 된다(Thomä & Kächele, 1985). 분석가는 ‘고르게 떠있는 주의’를 유지하는 내적 자세로 분석에 임하게 된다. 만일 분석가가 어떤 주제에 초점을 맞춘다든가 이론적 기대나 개인적 취향에 치우친다면, 분석 세팅 자체가 흐트러지고, ‘이미 다 알고 있는 자료’만을 다룰 가능성이 커진다. 분석가 자신의 이론적, 개인적 선입견과 선호에 기초해서 내담자가 말하고 있는 것에 대한 그의 이해에 자신의 의미를 끼워 넣게 되는 것이다. 정신분석 과정에서 전이현상이 일어나고 해석이 가능하게 하기 위하여 분석가가 기본적으로 절제 규칙을 지키고 익명성과 중립성으로 정신분석 과정의 흐름을 견제하는 것은 정신분석 임상이론의 초석이 된다. 무의식적 환상 등이 의식화되고 그 형태를 갖추게 되는 분석과정에서 분석가의 성찰 기능과 자신의 분석적 지각에 대한 끊임없는 객관화 작업은 정신분석이 정신분석이기 위하여 필요 불가결한 조건이다. 분석가의 이러한 노력은 나아가 분석상황에서 훌륭한 버텨주기(holding) 역할을 하며, 내담자를 이용하는 많은 위험을 줄이게 된다(윤순임, 1995; Moore & Fine, 1995).

‘의식적인 추론을 배제함으로써’(Beres & Arlow, 1974) 이루어지는 내성(introspection)의 심화는 분석가에게 매우 귀중한 정보의 원천이다. 내담자를 경청하는 가운데 유발되는 분석가 자신의 생각들, 감정들, 이미지들, 그리고 환상들을 자각하게 되는 것은(Kern, 1978; Ross & Kapp, 1962) 종종 특별히 도움이 된다(Epstein, 1984). 
분석가는 적절한 ‘고르게 떠있는 주의’를 통해, 내담자에 대한 경청(listening), 공감(empathy), 버텨주기(holding), 간직하기(containing) 등의 치료기법을 보다 효과적으로 사용할 수 있으며, 양가성과 모순들에 대한 내성을 증진시킬 수 있다. 이때 분석가는 자신의 내적 갈등 역시 버텨낼(holding) 수 있어야 한다. 중요한 것은 어떤 평가나 판단을 배제한 채,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버티는 것이다. 내담자가 제시하는 정보들이 서로 모순적일 때에도 일단은 이를 간직하고, 그 모순들을 버텨내면서 보다 정확한 의미를 탐색해볼 수 있는 것이다(윤순임, 비공식적 토론; Reiser, 1997; Helm,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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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고르게 떠있는 주의’ 개념의 변화 

그러나 이러한 주의태도는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쉬운 일이 아니다... 많은 치료자들은 자신의 이론적 및 진단적 선입견(preoccupation)을 가지고 듣거나, 혹은 마음 속에 자신의 “치료계획”을 가지고 들으며, 이와 다른 것은 간과해 버린다. 사회에 대한 가장 바람직한 적응에 대한 그들의 생각이나 사람이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한 그들의 이상을 만족시키기 위해, 내담자가 어떠해야 하는지에 관한 그들의 역전이적 생각들을 가지고 듣는다(Schachtel, 1969; Epstein, 1984에서 재인용). 
‘고르게 떠있는 주의’의 과정에서 분석가는 자신의 한계들을 발견하게 되는데, 한편으로 인간 문제들에 관한 자신의 개인적인 가정들에서 비롯된 역전이(전통적인 의미의)에 의해 방해받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의 ‘고르게 떠있는 주의’가 자기도 모르게 어떤 방향들로 향하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모든 것이 고르게 떠있는 채로 유지될 수는 없는 것이다. 우리가 관찰한 것에 대한 우리의 이해가 이미 가지고 있는 생각들에 의해 영향 받는 한 우리는 항상 능동적으로 듣게 되며, 모든 것들에 대해 동일한 주의를 기울이는 것은 원칙적으로 불가능하며, 우리는 실제로 그렇게 하지 않는다(Thomä & Kächele, 1985). 
Spence(1984)는 선입견이 없는 수동적 경청으로서의 ‘고르게 떠있는 주의’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면서, 자기도 모르는 자기 생각들의 무의식적 투사를 완전히 지각한다는 것은 자기-기만이라고 간주하였다. 또한 우리는 내담자들의 지각이 그들의 무의식 속에서 고정된 도식(fixed scheme)인 그의 이론에 맞춘다는 것, 그리고 그래서 그들의 기대들이 성취된다는 것을 발견하였다(Thomä & Kächele, 1985에서 재인용). 
한편 Reik는 주의가 항상 단지 특정 대상들에 대해서만 향해 있고 우리가 배워온 주의는 선택을 함의하기 때문에, 주의 깊은 상태가 되기 위해 어떻게 선택의 위험을 피할 수 있는지 반문하면서(Reik, 1948, pp.158,159), 정신분석에서 주의의 특성을 하나의 점에 국한되지 않고 일정 반경을 끊임없이 찾아 헤매는 서치라이트(searchlight)라는 메타포를 사용함으로써 이러한 모순을 해결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Reik의 이러한 해답들은 스스로 모순을 유발하는데, 왜냐하면 이 경우 ‘고르게 떠있는 주의’의 탐색적이고 선택적인 특성은, 때로 그리고 어떤 곳에서는 서치라이트의 동작을 멈춰야 하기 때문이다. ‘고르게 떠있는 주의’는 단지 그것이 내려오기 전까지만 떠있는 상태를 유지한다. 지각 심리학, 사고 심리학, 그리고 지식의 이론의 관점에서 보면, Reik의 제안은 순진한 믿음이며, 그는 서치라이트의 빛 뒤에는 관찰자의 개인적인 지각 및 사고 장치가 있으며, 여기에는 그의 이론적 기대들도 포함된다는 사실을 간과한 것이다(Thomä & Kächele, 1985). 
그러나 분석가에게 비교 설명 모형들을 제공하는 많은 저장된 프로그램들이 없다면, 분석가의 수신장치(receiver)와 제 3의 귀는 내담자의 연상으로부터 어떤 의미도 더 얻을 수 없을 것이다. 많은 지식과 많은 경험을 가진 분석가의 경우가 아니라면 수신장치와 제 3의 귀는 무의식의 어떤 것도 들을 수 없을 것이다. 이미 분석가는 내담자에 대해 뭔가를 알고 있으며, 때로 분석가 자신의 즉각적인 인상들을 그가 과거로부터 가지고 있는 것들과 조화시키려는 시도를 하지 않는 것 역시 불가능하며 바람직하지도 않다. 더구나 분석가는 다른 내담자들에 대한 풍부한 경험들과 넓은 이론적 지식의 창고를 가지고 있으며, 이것들은 그의 이해 시도들을 안내해준다(Moore & Fine, 1995). 
다음과 같은 Ferenczi의 얘기는 고르게 떠있는 주의의 성질을 잘 설명해주는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분석치료는 분석가에게 직접적으로 자기-모순적인(directly self-contradictory) 것으로 보이는 것을 요구한다. 한편으로 분석치료는 분석가에게 연상과 환상의 자유로운 활동(play)과, 자신의 무의식에 대한 충분한 몰입(indulgence)을 요구하고... 다른 한편으로, 분석가는 자신이 전달한 재료와 내담자를 논리적이고 철저하게 살펴보아야 한다. 그리고 그의 치료와 의사소통에서, 이러한 정신적 노력의 결과에 의해서만 스스로가 안내받을 수 있게 해야 한다(Ferenczi, 1950[1919a]; Thomä & Kächele, 1985에서 재인용). 
더욱이 변화하는 대상들을 시간 흐름에 따라 고르게 바라볼 수 있는 어떤 마음 상태가 수련을 통해 자리잡을 수 있다는 불교 심리학의 주장은, 훈련에 의해 분석가 속에 그와 유사한 마음 상태가 자리잡을 수 있다는 프로이드의 주장을 지지한다(Epstein, 1984).

신기하게도 ‘고르게 떠있는 주의’는 오랫동안 정신분석학계로부터 거의 주의를 받지 못하였다. 이 개념은 “정신분석 용어 및 개념 해설집(A Glossary of Psychoanalytic Terms and Concepts)에서도 정의되어 있지 않으며, 그리고 기법에 관한 Fenichel이나 Glover의 주요 저작물에서도 선정되지 않았다”(Lichtenberg & Slap, 1975, p. 297; Epstein, 1984에서 재인용). 또한 미국 정신분석학회에서 펴낸 “정신분석 용어 및 개념 해설집(Psychoanalytic Terms and Concepts)”(1990)에서도 이 개념은 나와있지 않았다. 이러한 주의 상태를 유지하기 어렵다는 점은 인정되어왔지만(McLaughlin, 1975), 이 개념은 “정신분석에서 가장 논의되지 않은 개념들 중의 하나이며, 분명히 가장 잘 개념화되지 않은 측면들 중의 하나이다”(Gray, 1973; Epstein, 1984에서 재인용). 
이 개념이 소개되었을 때, 그것은 일반적으로 분석가들 자신의 미묘한 선입견과 편견들에 주의를 기울일 것을 격려하거나, 혹은 분석가 자신의 내성을 심화시키도록 격려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이러한 ‘이상적 목표들’에 강조점이 주어졌기 때문에, 이들 목표들이 어떤 ‘특정한 주의 상태’로부터 유도되어 나오는 것이라는 사실은 쉽게 간과되고 말았다. 따라서 분석가들은 ‘이들 이상들을 성취하는 방법’을 적절히 충분히 모른채 그것들을 추구하게 되었다(Epstein, 1984). 
분석가들이 그들의 편견들을 제거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것, 그들의 역전이 반응들에 지속적인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는 것, 그리고 공감을 고양시키기 위해 자신들의 내성(introspection)을 촉진해야 한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지만, 그러한 기준들을 성취하는 방법, 즉 이러한 주의의 태도를 수련하고 유지시키는 어떤 구체적인 훈련도 개발되지 않았다. 실제로, 분석적 사고의 동향은 프로이드의 원래의 권고들로부터 그의 개념을 확장하고 개정하는 방향으로 이탈해왔는데, 이러한 확장과 개정은 그의 개념의 의미를 ‘희석’시켰으며, 분석가들로부터 그들의 가장 중요한 도구들 중의 하나를 박탈하였다. 
예컨대, Brenner(2000)는 ‘고르게 떠있는 주의’에 대한 프로이드의 최종적인 입장에 대해, 분석가가 내담자의 갈등들의 모든 측면들을, 즉 성적, 공격적 소망들, 이들 소망과 연결된 불안, 이들 소망에 대한 방어들, 그리고 초자아에 포함시켰던 요구들과 금지들을 경청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고 이해하면서, 분석가의 ‘고르게 떠있는 주의’가 이제 시대에 뒤떨어진 것이라고 단정해버리는데, 이러한 주장 역시 그러한 목표들을 이루기 위한 ‘방법론’으로서의 고르게 떠있는 주의의 의미를, 그리고 분석가의 ‘내적 태도’로서의 그것의 의미를 정확히 이해하지 못한 때문으로 보인다. 
Epstein(1984)에 따르면, 프로이드가 의도했던 원래 의미의 이러한 희석(dilution)의 핵심에 있는 것이 Theodore Reik의 연구이다. Reik(1948)는 프로이드의 권고를 비판하면서, ‘고르게 떠있는 주의’라는 용어를 거부하였는데, 그것은 주의가 결코 고르게 떠있지 않기 때문이다. 진행되고 있는 것은 능동적으로 돌아다니는 마음(an actively roaming mind)이라는 것이다. 그는 ‘자유롭게 떠다니는 주의(freely floating attention)’라는 용어를 제안하였다(Freedman, 1983). 
그러나 주의는 결코 고르게 떠있지 않고 대신에 능동적으로 떠돌아다닌다는 Reik의 주장은 프로이드가 매우 주의깊게 기술했던 특정 의식 상태의 본질적인 특성을 간과한 것이다. 프로이드의 설명은 모든 현상들에 대해 고르게 주목할 수 있는 능력의 발달을 가정하는데, Reik는 이것을 얻기 어려운 것이라며 거부하고, 대신에 수용적 경청과, 재료의 해석을 위한 심리내적 재조직화 사이를 오가는 분석가의 주의의 교대(shift)를 강조하였다. Reik는 프로이드가 권고한 비지시적이고(non-directed), 목적이 없고(non-purposeful), 고르게 떠있는 주의를, 적을 찾아 경험의 영역을 찾아 헤매고 있는 능동적으로 돌아다니는(actively roaming) 마음이라는 자신의 개념으로 대체했을 뿐만 아니라, ‘중요한’ 재료의 수의적 선택이라는 개념을 재도입하였다. 
이러한 Reik의 개정판은 프로이드가 제안한 특정 주의상태에 대한 분석가들 사이의 간과, 혹은 경시 경향성에 기여하였다. 그는 ‘단순한’ 경청(‘mere’ listening)과 인지적 처리(cognitive processing) 사이의 교대에 관심의 초점을 집중하도록 격려하였는데, 정신분석적 경청에 관한 최근의 논의들은(Freedman, 1983) ‘받아들이기(receiving)’와 ‘재구조화(restructuring)’ 사이의 ‘주기적 순환성(rhythmicity)’을 강조한다. 여기에서 재구조화의 특징은 ‘주의 범위를 좁히는 것, 공고화와 종합을 위해 가능성들을 줄이는 것, 그리고 객관화와 상징적 표상의 강조’이다(Freedman, 1983, p.409). 그러나 이러한 강조점의 이동은 프로이드의 원래의 제안들을 희생해서 나타난 것이다(Epstein, 1984).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분석적 주의의 정의들은 이러한 변화들을 보여주고 있다(Lichtenberg & Slap, 1975; Greenson, 1968; Langs, 1982). 따라서 분석가의 ‘고르게 떠있는 주의’ 상태를 확립하는 것은 가능할 뿐만 아니라 바람직하다는 프로이드의 원래의 주장은, 이 주제를 다룬 대다수의 분석가들에 의해 점진적으로 버림을 받은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 Schafer(1983)는 그러한 주의가 만들어내는 ‘안전한 분위기’에 대한 설명 속에서 프로이드의 원래의 권고들로 되돌아갔으며, Chasseguet-Smirgel(1984)은 내담자의 무의식과 분석가의 무의식 사이에 어떻게 소통이 가능한지에 대한 자신의 설명에서 프로이드의 개념들을 부활시켰다. W. R. Bion(1970)은 프로이드의 원래 권고들이 가진 독창적 함의들과 일관성을 유지하면서, 그러한 권고들을 상세히 설명하였다. 
Bion은 ‘심리적 활동, 기억, 그리고 소망’이 없는, 그래서 분석가가 아직 알려져 있지 않은 것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되는 최적의 마음 상태, 혹은 마음의 틀을 기술하였다. 그는 이러한 상태가 도달하기는 어렵긴 하지만 ‘훈련’에 의해 고양될 수 있는 것으로 간주하였는데, 훈련에서는 기억들과 소망들을 ‘무가치하지만 피할 수 없는’ 것으로 간주하고 그것들을 ‘버리게 된다’. 그러한 훈련들은 단순한 ‘망각’이 아닌 ‘적극적인 수련’을 포함하는데, 그것은 ‘기억과 소망을 노출시킴으로써 감수성’을 고양시키는 것이다(Bion, 1970; Epstein, 1984에서 재인용)

‘비판 능력(critical faculty)’을 중지(suspend)시킬 수 있다는 것은 프로이드 자신이 그의 저작들에서 반복해서 언급하는 그의 주된 발견이다. 실제로 이러한 비판 능력의 중지는 프로이드에게 있어서 정신분석 치료가 가능하도록 해준 것이었다(Epstein, 1984). 
여기에서 살펴본 고르게 떠있는 주의가 실제로 가능한지에 대한 이러한 논쟁들은 결국 이러한 주의의 본질적 특성과 그 과정보다는, 단순히 그 내용을 바탕으로 단선적이고 계열적으로 이 개념을 이해하려는 데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고르게 떠있는 주의는 분석가의 모든 개입들의 배경에 자리잡고 있는 기본적 태도로서, 분석 장면에서 내담자와 관련하여 드러나야 하는 것들이 있는 그대로 드러날 수 있게 해준다. ‘고르게 떠있는 주의’는 무엇보다도 분석가가 자기로부터, 내담자로부터 적절한 거리를 가질 수 있도록 도와주며, 내담자 스스로도 자신으로부터 거리를 가질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내담자를 충분히 이해하고 내담자를 도와줄 수 있는 공간(space)을 만들 수 있게 되며, 분석가가 어떤 부분이나 파편에 매이지 않고, ‘전체’를 볼 수 있게 도와주는 것이다(윤순임, 비공식적 토론). 


3. 정신분석의 ‘고르게 떠있는 주의’와 불교 명상에서의 관조 

Epstein(1984)은 주의 발달에 관한 동양적 이론들, 특히 불교의 이론들을 잘 알고 있으면 이 주제에 관한 프로이드의 최초의 권고들을 보다 정확히 이해하는 데에, 그리고 프로이드 시대 이후 세대 분석가들의 이들 권고들을 해석하는 방식에서의 분간하기 어렵지만 본질적인 이탈을 분명히 밝히는 데에 도움이 될 수 있다고 보았다. 
프로이드의 주의 개념은 모든 현상들에 대해 ‘고르게 주목할 수 있는’ 능력의 발달을 가정하는데, 이 능력은 불교 심리학에서 집중(concentration)과 마음 챙김(mindfulness)이라는 요인의 발달을 통해 도달하게 되는 능력과 유사하다. 몇몇 저자들은(Schachtel, 1969; Green, 1973) 최적의 분석적 주의에 대한 프로이드의 설명과 여러 가지 동양적인 자각 유도방법 사이의 유사성을 인식하였다. Fromm(1960, p.83)은 자유연상의 방법을 통해 의식적 사고체계를 극복하려는 프로이드의 시도를 동양의 종교적 수행들의 유사한 시도들과 비교하였지만, 분석적 주의를 고양시키기 위해 프로이드가 제안한 유사한 시도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못했다. Speeth(1982)는 프로이드의 주의 태도가 관조(bare attention), 마음 챙김(mindfulness), 혹은 선택없는 알아차림(choiceless awareness)이라는 기본적인 불교 명상 수행과 놀랄 만큼 유사하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프로이드의 ‘고르게 떠있는 주의’와 상당한 유사성을 가진 불교 명상의 觀照(Bare Attention)는 다음과 같이 정의된다: ‘연속되는 지각의 순간들에서 우리에게, 그리고 우리 안에서 실제로 일어나는 것을 명료하게 한 마음으로 알아차리는 것’(Epstein, 1984). 이러한 관조는 두 가지 기법적 패러다임들에 의해 정의된다: 주의를 전개하는 특정 형태, 그리고 정동을 다루는 특정한 방식. 인지적으로 보면, 주의는 어떤 생각, 감정, 그리고 감각이 일어나서 매 순간 자각 속으로 들어올 때, 후속적인 정교화(further elaboration)없이, 그것을 기록(registering) 하는 것으로 제한된다. 생각, 감정, 그리고 감각들이 의식 속에서 들어오고 나갈 때, 그것들의 내용이 아닌 과정에 주의를 기울인다. 정동적으로 보면, 자극들에 대해 어떤 선택이나 검열을 하지 않고, 그리고 자동반응(reaction)을 하지 않고 - 즉 선호, 논평, 판단, 숙고, 혹은 해석을 하지 않고 - 주의를 기울인다. 만일 신체적, 혹은 심리적 자동반응들이 일어난다면 그 반응들 자체가 관조의 대상들이 된다(Engler, 1982, p.32). 
훈련되지 않은 일상심을 자연스런 출발점으로 삼는 관조는 어떤 것을 변화시키려하지 않고, 대신에 마음, 정서, 그리고 신체를 그들이 존재하는 방식대로 바라봄으로써, 이러한 살펴보지 못했던 마음을 받아들이고 그것이 드러나도록 한다. 이러한 종류의 주의는 본질적으로 그 자체가 치유(healing)라는 것, 즉 이러한 주의 방략을 항상 적용함으로써 모든 불교적 통찰들을 저절로 깨달을 수 있다는 것이 바로 불교 심리학의 기본적인 교의(tenet)이다. 명상에 대한 문헌들이 신비스럽게 보일 수 있고 선사의 공안들이 때로 알기 어렵지만, 불교적 사고에는 결정적으로 중요한 오직 하나의 기본 가르침이 있을 뿐이다. 스리랑카에서 티벳에 이르기까지 모든 종파들에서 공통적인 불교적 접근들의 공통적인 하나의 주제는 다음과 같다: ‘자연 그대로의(raw) 감각들로부터 당신의 자동반응(reaction)을 분리시키면서, 바로 지금 당신이 체험하고 있는 그것에 매 순간마다 정확한 주의를 기울이시오.’ 이것이 바로 관조가 의미하는 바이다. 단지 있는 그대로의 사실, 정확한 기록, 이로 인해 마치 처음으로 보는 것처럼 사물들이 스스로 명백해질 수 있게 되고, 핵심 사건으로부터의 어떤 자동반응을 구분해낼 수 있게 된다. 
이 주제에 관한 프로이드의 저작들은 관조(bare attention)의 첫 번째 본질적 특성, 즉 그것의 편견없고 치우치지 않음을 나타낸다. 정신분석가들에게 ‘판단을... 중지하고, 관찰하는 모든 것들에게 치우치지 않은(impartial) 주의를... 기울이라’고 반복해서 권고하면서, 프로이드는 이러한 상태 속에서 심리 현상들을 독특하게 이해할 수 있다고 주장한 것이다. 이러한 단순히 경청하는 상태, 치우치지 않은 상태는 작위적이지 않고 완전히 자연스럽지만, 동시에 매우 어려운 게 사실이다. 그것은 일종의 도전인데, 치료자들은 그들의 내담자를 치료하고자 하는 소망, 내담자가 전달하는 정보들에 대한 즉시적인 결론, 그리고 내담자의 고통의 원인에 대한 그들의 통찰을 옆으로 제쳐놓음으로써, 계속해서 그들이 아직 이해하지 못한 것을 내담자로부터 들을 수 있다. 명상 수행에서 요구되듯이, 이러한 종류의 주의를 자신에게 기울이는 것, 즉 자신의 자동반응(reactivity)으로부터 자신을 분리시키는 것,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들(好惡)에 기초한 정체성으로부터, 편견 없고 비판단적인 알아차림에 기초한 정체성으로 이동하는 것 등은 훨씬 더 어려운 일이다. 관조가 명상자에게 요구하는 것은 불쾌하고 싫은 것들을 걸러내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 주어지든 모두다 받아들이는 것이다(Epstein, 1984). 
프로이드와 Bion의 간곡한 권고에도 불구하고, 분석 문헌들에서의 일반적인 경향은 분석가의 그러한 마음 상태의 중요성이나, 혹은 심지어 그것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정신분석학계는 ‘고르게 떠있는 주의’ 상태들이 훈련을 통해 개발될 수 있다고 보는 불교문헌들의 주장들을 통합시키지 못한 채, 주의는 결코 고르게 떠있지 않다는 Reik의 주장을 받아들이면서, 정신분석의 가장 기본적인 도구들 중의 하나인 치료자 주의 태도의 실천을 거부하였다. 불교 명상 수행의 ‘선택 없는 알아차림’과 프로이드와 Bion의 ‘기억과 소망으로부터 자유로운 고르게 떠있는 주의’와의 본질적인 유사성을 가정한다면, 불교 명상 수행을 ‘고르게 떠있는 주의’의 요구들에 맞게 적용하는 것이 불가능해 보이지는 않는다. 명상의 수련은 프로이드의 권고들을 명확히 이해하기 위해 자신의 주의 기술들을 수련하고자 하는 치료자들을 위해 하나의 유용한 도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동양의 전통들에서 나온 그러한 기여는 서구의 정신분석과 심리치료의 전통을 풍부하게 해줄 수 있으며, 이것은 궁극적으로 내담자와 치료자 모두에게 유익할 것이다. 변화하는 자각 대상들에 대한 ‘관조’의 꾸준한 수련을 포함하는 명상 수행은 분석적 접근의 생생함을 유지하기 위해 오랫동안 제안되어온 ‘자기-분석’(Freud, 1937; Ross & Kapp, 1962; Ticho, 1967; Gray, 1973)의 유용한 보조수단이 될 수 있을 것이다(Epstein, 1984에서 부분적 재인용). 


‘고르게 떠있는 주의’의 진정한 목표는 분석가의 무의식으로부터 내담자의 무의식으로의 소통이다. 이러한 무의식의 소통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분석가는 직접 보지 않고 직접 듣지 않은 것들에 대해 알기 어려울 수밖에 없다. 그리고 두 사람의 무의식이 소통되는 정신분석적 대화에서 이들 무의식들은 결국 자아의 통제 하에서 의식으로 통합된다. 여기에는 두 사람의 자아에서 자아로 의식화하는 과정이 포함되는데, 이때의 자아는 ‘무의식을 안고 있는 의식’(윤순임, 비공식적 토론)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자아의 능력을 통해, 무의식적인 기제들은 의식화되고 언어화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규칙은 분석가의 내적 자세에 대한 철학이지 어떤 구체적인 상황에서 실제로 중립적이었는지 아니었는지를 따져서 이해되고 해결될 일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분석가가 스스로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아는 것이며, 분석과정의 전체 흐름을 이해하는 것이다(윤순임, 2002).
‘고르게 떠있는 주의’를 방해하는 요소들이 있을 때 이를 제대로 이해하고 작업하기 위해서는, 그리고 ‘고르게 떠있는 주의’를 적절하게 회복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훈련분석이 필요하다. 이를 통해 분석가 자신의 내적 동기, 갈등, 기대, 개인적 선호 등을 작업할 수 있다. 훈련분석과 함께 자신의 사례에 대한 수퍼비젼 역시 ‘고르게 떠있는 주의’의 유지를 방해하는 분석가 요인을 스스로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될 수 있는데, 자신의 역전이를 잘 살펴봄으로써 역전이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들을 치료에 활용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고르게 떠있는 주의’의 개념은 어떤 구체적인 내용들을 가리킨다기보다는 분석가가 가져야할 하나의 ‘이상적인 태도’로 간주된다. 이러한 주의는 하나의 이상이며, 최고의 분석가에 의해 오직 그것에 근접한 상태만이 가능하다고 믿는다(Sharpe, 1950, p.18; Epstein, 1984에서 재인용). 이러한 태도는 분석 실제에서 일종의 ‘등대’ 역할(윤순임, 비공식적 토론)을 하며, 이를 통해 분석가는 분석가의 길을 잃지 않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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