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료: http://enc.daum.net/dic100/contents.do?query1=b03g0932a
378 이탈리아 펠라고~1455. 12. 1 피렌체.
이탈리아 르네상스 초기의 대표적 조각가.
그가 제작한 피렌체 대성당의 세례당 청동문 〈천국의 문〉(1425~52)은 15세기초 이탈리아 미술의 위대한 걸작 중 하나로 꼽힌다. 다른 작품으로는 오르산미켈레 교회의 청동상(1416~25) 3점과 시에나 대성당의 부조(1417~27) 등이 있다. 또한 그는 미술사와 미술이론에 관해 3편의 논문을 썼다(→ 르네상스 미술).
그의 어머니는 1370년 치오네 기베르티와 결혼하여 피렌체에서 가까운 펠라고에서 살았다. 그러다가 어머니는 피렌체로 가서 바르톨로 디 미켈레라는 금세공인과 내연관계로 살았다. 치오네가 죽자 그들은 1406년 결혼했으며 로렌초 기베르티는 어린시절을 바르톨로의 집에서 보냈다. 기베르티의 생부가 누구인지는 분명하지 않으며 그도 때에 따라 아버지를 다르게 얘기했다. 그러나 어린시절 로렌초는 바르톨로가 자기 아버지라고 생각했으며 어린 그를 금세공인으로 훈련시킨 사람도 바로 바르톨로였다. 그림공부도 했는데 저서의 자서전 부분에서 밝힌 것처럼, 그는 1400년에 한 화가와 함께 피렌체를 떠나 페사로의 통치자인 시지스몬도 말라테스타를 위해 일하러 갔다.
기베르티는 1401년 피렌체 대성당 세례당의 청동문 1쌍을 만들 사람을 뽑는다는 소식을 듣고 곧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와 6명의 다른 미술가들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바치는 성서의 내용을 네잎무늬 모양의 청동부조로 제작하라는 지시를 받았고, 이 심사에서 기베르티와 필리포 브루넬레스키만이 통과되었다. 기베르티가 출품한 작품은 완벽한 금세공 기술을 구사하여 우아하고 생동감이 넘쳤다. 1402년 심사위원단이 그를 청동문의 제작자로 선정함에 따라 이 젊은 미술가는 곧 인정을 받고 이름을 떨치기 시작했다. 1403년 바르톨로 디 미켈레의 공방과 계약이 체결되어 그 공방은 갑자기 피렌체에서 가장 유명한 곳이 되었으며 1407년 로렌초는 합법적으로 그 작업을 넘겨받았다.
청동문 제작작업은 1424년까지 계속되었으나 기베르티는 이 작업에만 몰두하지는 않았다. 그 대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를 디자인했으며 정기적으로 대성당 공사 감독자의 건축고문 역할도 했다. 그러나 그가 나중에 주장한 것처럼 브루넬레스키와 공동으로 돔형 천장 공사를 한 것 같지는 않다. 1412년경 양모와 옷감 상인들의 조합인 아르테 데이 메르칸티 디 칼리말라(Arte dei Mercanti di Calimala)는 그에게 여러 길드의 공공건물인 오르산미켈레 교회의 외부 벽감(壁龕)에 그들의 수호성인인 세례자 요한을 실물크기보다 큰 청동상으로 만들어달라고 부탁했다. 이 일은 대단한 작업이었으며 기베르티가 금세공인의 범주를 벗어나는 첫 출발이 되었고, 사실상 그것은 피렌체에서 처음으로 제작된 큰 청동상이었다. 1416년 기베르티는〈성 요한〉상을 성공적으로 완성하여 이듬해에 금도금을 했다. 이 작품에서 보여준 기술적인 완성도와 참신한 스타일로 기베르티는 다른 두 조합으로부터도 오르산미켈레 교회의 벽감에 비슷한 크기의 청동조각상을 만들어달라는 주문을 받았다. 은행가 길드를 위해 1419년에〈성 마태오〉상을 만들었고, 1425년에는 양모업자 길드를 위해〈성 스테파누스〉상을 만들었다.
이 두 작품으로 기베르티는 막 이름을 날리기 시작한 젊은 조각가 도나텔로와 난니 디 방코와 공개적인 경쟁을 치르게 되었다. 그들은 기베르티가 오르산미켈레 교회에 첫 조각상을 세운 뒤에 그 곳에 석상을 만들어 세웠던 것이다.〈성 요한〉상은 흐르는 듯 주름진 옷을 입고 있는 연약해 보이는 인물 상이었다. 이것은 미술사학자들이 말하는 국제 고딕(International Gothic) 양식으로서, 14세기 후반에 이미 유럽을 휩쓸었으나 15세기초의 피렌체에서는 상당히 새로운 것이었다. 기베르티의〈성 요한〉상은 부드럽게 흘러내리는 옷주름과 면밀하게 관찰하여 표현한 소규모의 세부묘사로 이루어진 실물보다 큰 조각이다. 도나텔로의〈성 마르코〉와 〈성 게오르기우스〉, 난니 디 방코의〈성 필립보〉와〈4명의 성자 Quattro Coronati〉도 기베르티의 인물상만큼 컸으나 그 크기에 맞게 각 부분을 실물보다 크게 구성한 작품이었다. 이 새로운 육중한 고전적 인물상들이 보여주는 대담성과 힘은 기베르티에게 하나의 도전이었으나, 그는 뒤의 작품들을 성공적으로 완성하여 이에 대응함으로써 피렌체 미술계에서 지도적 위치를 유지했다.
그의 10대와 20대는 그 자신과 작업실이 발전하던 시기였다. 1413년까지 그는 세례당 문을 위한 모형제작과 틀의 주조를 대부분 완료했고, 많은 조수를 거느리면서 작업장을 원만하게 운영해갔다. 1417년에는 시에나에 있는 성당의 세례반(洗禮盤)을 위해 청동부조 2점을 제작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지만 너무 바빠서 시에나 당국의 압력을 받으면서도 10년 뒤에야 완성했다. 1419년 교황 마르티누스 5세가 피렌체에 머물 때 그는 교황의 법의(法衣) 단추와 왕관을 만들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 작품들은 진기한 돌이나 귀금속으로 만든 다른 기베르티의 작품들처럼 지금은 남아 있지 않다.
이무렵 그는 양모가공업자인 바르톨로메오 디 루카의 16세 딸 마르실리아를 아내로 맞이했다. 그녀는 곧 두 아들을 낳았는데 토마소를 1417년에, 비토리오를 그 다음해에 낳았다. 그의 아들들은 나중에 그의 일을 도왔으며 특히 비토리오는 그가 죽고 나서 그의 사업을 이어나갔다. 기베르티는 예술적 성공으로 많은 재산을 모으기도 했는데, 현재 남아 있는 1427년의 납세신고서에는 그의 명의로 된 피렌체 내의 재산과 교외의 토지 그리고 상당한 금액의 정부채권이 기록되어 있다. 여러 해 동안 그의 재산은 계속 늘어났다. 그는 보수도 많았지만 일처리에 빈틈없는 사업가이기도 했다. 그는 피렌체의 유지였고 동시대 예술가들 중에서도 부유한 사람이었다.
기베르티는 다른 예술가들의 작품에도 깊은 관심을 가졌으며 적극적으로 관여했다. 그들 중 도나텔로, 파올로 우첼로, 미켈로초, 베네초 고촐리 등 몇 명은 한때 그의 작업장에서 조수로 일한 사람들이다. 그리고 기록에 따르면 기베르티는 화가 프라 안젤리코가 그린 〈리나이우올리 Linaiuoli〉제단화의 틀을 디자인했다고 한다. 그는 "도시의 주요 작품 중 내 손으로 만들거나 디자인하지 않은 것은 거의 없다"고 주장했는데 지나친 과장은 아니었다. 기록되지 않은 작품으로서는 6개의 평면묘석과 석관이 중요작으로 꼽힌다. 기베르티가 디자인이나 모형을 제공함으로써 피렌체 미술계에 끼친 영향은 실로 막대하다. 그는 자신의 지식과 재능을 다른 사람과 나누는 데에 관대하고 자유로웠던 것 같다. 1452년에〈천국의 문〉의 2번째 문 2짝을 완성하기 훨씬 전에, 그 작업을 위해 만든 인물상과 모형 등을 산타아눈치아타 교회의 키오스트로 베르데(녹색 화랑)에서 일하던 프레스코 화가들과 대성당의 대리석 성가대석을 만들던 조각가 루카 델라 로비아에게 먼저 공개했다. 물론〈천국의 문〉의 영향은 완성된 뒤에 더욱 커졌다.
45세 때 기베르티는 첫번째 문을 완성했다. 이 문은 20년 이상의 노력을 기울인 작품이며 이탈리아에서 제작된 국제 고딕 양식의 주요 조각작품이다. 그러나 가장 나중에 제작된 문에서는 인물의 몸을 감싼 우아한 옷주름보다 몸 자체를 강조하는 좀더 고전적인 양식으로 바뀌어 약간의 변화를 보여준다. 기베르티는 그가 알고 있는 고대 로마의 인물흉상과 조각석관에 바탕을 둔 표정이 풍부하고 느낌이 강한 인물상들을 창조했다. 첫번째 문의 성공으로 곧 2번째 문에 대한 계약을 칼리말라 조합과 체결했으나 시와 길드의 정치적·재정적 사정으로 5년간 작업에 착수하지 못했다.
첫번째 문을 완성한 뒤 기베르티는 10년간에 걸쳐 회화적 공간을 조성하고 우아하고도 생동감있는 인물을 창조해 내는 새로운 수법을 탐구했다. 1420년대 후반의 그의 작품을 보면 분명히 뒤로 물러나는 일련의 면들로 더욱 공간감을 느끼게 표현되어 있다. 그의 저부조에서는 인체의 양감과 깊은 건축적 공간이 묘사되어 있다. 그 예가 바로 시에나에 있는 부조들인데, 다티 무덤(도미니쿠스 수도회의 총회장 레오나르도 다티의 평면 묘석을 장식하는 청동판)과 피렌체에 있는 2개의 성골함〈카사디산체노비우스 Cassa di S. Zeno-bius〉(성인의 삶을 새긴 부조가 있는 청동관)와〈프로투스, 히야신스, 네메시우스의 성골함〉(세 순교자의 청동유골함)이 그것이다.
이무렵 기베르티는 피렌체의 새로운 미술에 감명받아 시각예술에 대한 이론적 논문을 쓰고 있던 젊은 인문주의 학자 레온 바티스타 알베르티를 만난 듯하다. 그들은 아름다움이란 고대미술에 대한 그들의 공통된 생각과 동일하다는 데에 의견을 같이했기 때문에, 알베르티가 자신의 책 〈회화에 관하여 De pictura〉에서 밝힌 생각이 그 생각을 시각적으로 표현한 기베르티의 2번째 문에 있는 3부조판(이삭·요셉·솔로몬)보다 앞서는 것인지는 알 수가 없다. 그들 모두 고대미술의 아름다움은 바로 자연의 이상화라고 생각했다. 자연의 본질을 파악한다는 것은 바로 삶에서 시각적으로 가장 두드러지는 특징인 동작을 묘사함으로써 삶을 드러낸다는 것이었다.
알베르티는 논문에서 인물을 자연스럽게 표현할 때 공간배경을 사실적으로 나타내기 위해 평평한 회화면이나 저부조에 공간감을 주는 원근법 체계를 쓸 것을 제시하고 있다. 기베르티의 부조작품 3개는 르네상스 회화예술에 대해 알베르티가 논술한 것을 구현해 놓은 것처럼 보인다. 그러므로 그의 작품을 평가할 때는 작품의 아름다움과 매력뿐만 아니라 새로운 이론이 융합되어 있다는 점도 반드시 고려해야 한다. 기베르티 자신도 매우 자랑스럽게 10점의 부조를 모두 다음과 같이 만들었다고 주장했다.
"눈으로 보는 바에 따라서 즉, 실제로 가까운 것은 크게 보이고 멀리 떨어진 것은 작게 보이는 원리에 따라 배경을 설계했다."
기베르티가 쓴 〈코멘타리 Commentarii〉(1447경)는 그의 인문주의적 관심을 더욱 잘 보여준다. 이 저술은 3권으로 되어 있다. 제1권은 고대미술의 역사에 대해 라틴 작가들이 쓴 책을 읽고 요약한 것이다. 그는 이 책에서 고대미술의 우수성은 실제와 이론이 일치하는 데 있다고 확신하고 있다. 제2권은 바로 앞 시대의 미술에 대해 썼는데, 그는 몇몇 시에나 화가들과 그의 책에서만 언급된 구스민이라는, 14세기 후반 북유럽의 금세공인을 존경한다고 밝혔다. 이 책에는 그의 자서전도 들어 있는데 이를 통해 그는 미술사에서 자신의 위치를 정립하였다. 제3권은 좀더 이론적인 것으로 보이나 현재 남아 있는 필사본은 필연적인 것으로 불완전하다. 이 저서를 보면 기베르티가 피렌체 르네상스 운동에서 자신의 지도자적 위치에 대해 자신감을 갖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자신이 인문주의 학자처럼 고대미술을 되찾고 연구하는 데 관심이 있으며, 새로운 고대양식을 발전시켜 우아하고 아름다운 작품을 자유로이 창조해낸 인물이라고 자부했다.
C. Lowenthal 글 | 李順珠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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