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료:
- 1차 출처: http://blog.aladdin.co.kr/ertt/group/438404?CommunityType=AllView&page=7
- 원출처(추정): 홍기빈이 2004년 '말'지에 기고한 '진보이념의 새로운 지평을 찾아서'란 연재 중 제2회(해방에 대하여)
- 원출처 소개글: http://www.adollangel.pe.kr/entry/폴-스위지-역사와-정면대결한-거목의-위대한-패배
추정 부제: 해방되려면 지배해야 하는 아이러니 속에서
지은이: 홍기빈
***
서양 언어에서 해방의 뜻을 담은 낱말은 어원의 갈래로 볼 때 크게 emancipation, affranchissement, liberalization의 세 가지 계통으로 정리할 수 있다. 지난 호에서는 emancipation에 대해 살펴 보았다. 이번엔 그 두 번째 갈래인 affranchissement의 기원과 이 단어에 담겨 있는, ‘해방에 대한 서양 문명의 상상력’을 음미해 볼 차례이다.
‘해방’에도 암수 구별이 있을까
지난 호에서 설명했듯이 emancipation은 여자나 아이들이 절대권력의 ‘꼰대’로부터 풀려나오는 해방을 일컫는 의미이다. 영어 이외의 유럽 언어에서 이 단어는 항상 여성 명사이다. 반면 affranchissement이라는 불어 단어와 이탈리아어의 affrancamento는 모두 남성 명사로 쓰인다. 해방을 나타내는 단어가 이렇게 여성과 남성 명사로 갈라져 있다는 것이 묘한 생각이 들게 한다. 과연 ‘해방’에도 암수가 따로 있는 것일까. 혹시 유럽 문명의 역사에서 ‘여성 및 아이들의 해방’과 ‘남성의 해방’이 다른 의미를 가진 것은 아닐까.
물론 유럽 언어의 명사에 존재하는 남성, 여성 구별을 자연적인 남성, 여성과 연결지어 과대해석하는 것은 넌센스이다. 또 현대로 오면서 여성 명사인 emancipation 계통과 남성 명사인 affranchissement 계통은 그 의미가 서로 뒤섞여 오늘날엔 별 차이 없이 사용되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어떤 단어의 기원과 발전 경로를 따져보는 시도가 그렇게 웃기는 일은 아니다. 17세기 이탈리아 사상가인 비꼬가 강조했듯이 말이란 것은 인간이 자신에게 주어진 객관 세계를 주관적으로 체화하면서 생겨나는 것이다. 또 인간은 이렇게 만들어진 말을 통해 세계를 바꾸고 역사를 창조해 나간다. 따라서 단어란 것은 결코 우연하게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동시대의 인간들이 보편적으로 겪어야 하는 당대의 현실, 그리고 이 현실을 당시의 사람들이 이해하던 방식이 함께 녹아들어 있는 것이다.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다음 세대도 그 단어를 계속 사용하는 한 이전 세대의 현실(그리고 그 현실을 이해하던 방식)에 크게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어원을 이해한다고 해서 그 낱말의 본질을 파악했다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 언어의 기원과 변화의 경로를 당대의 역사적, 사회적 맥락 속에서 음미해 보는 것은 그 문명의 심성 깊이 들어가는 중요한 통로임에 분명하다.
‘프랑크인이 되는 것’이 해방?
affranchissement이라는 단어는 afranchir라는 고대 불어에서 나왔다. 그 의미는 ‘프랑크 인으로 만들어 준다’는 것이다. 어째서 ‘프랑크인이 되는 것’이 ‘해방’의 의미를 갖게 된 갈까.
프랑스 지역의 옛 이름은 ‘갈리아’이다. 이곳에 살던 고대 켈트 족의 분파인 골(Gaul) 족의 이름에서 온 말이었다. 그런데 이 지역은 케사르에게 정복되어 로마 제국의 영토로 편입되면서, 골 사람들과 로마인들이 상당히 동화되어 원주민들의 켈트어 대신 라틴어가 공통의 언어로 되어 있었다. 그런데 서로마 제국이 멸망하고 게르만인들이 밀려들어오게 되면서 이곳의 종족 구성은 다시 복잡해진다. 그 때까지 라인강변에서 멈추는 듯이 보였던 게르만의 일파 프랑크족이 클로비스 왕의 영도하에 5세기 말 부터 본격적으로 라인강 서쪽으로 진출하면서 이주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샤를르마뉴 대제의 프랑크 제국이 형성되는 8세기 동안 이 지역은 프랑크 족의 확실한 지배 아래 편입되고, 결국 오늘날 프랑스의 모체가 된다.
그러나 이 프랑크인들이 지배 종족이 된 이유가 전체 프랑스 지역에서 숫적으로 우세했기 때문인 것은 결코 아니었다. 게르마니아 숲속에서 뛰쳐나온 일개 부족에 불과한 프랑크인들이 광활한 갈리아 지역 전체에 뿌리박은 터줏대감이 될 만큼 세를 불릴 수는 없었다. 골-로마 원주민들이 두툼한 피자였다면 프랑크인들은 그 위에 살짝 얹힌 토핑처럼, 적은 인원으로 그나마 곳곳에 흩어져 있었다.
그래서 프랑크인이 문화적, 언어적 주도권의 행사로 그들의 게르만어를 공용어로 만들 수 있었던 지역은 지금의 네덜란드 지방 정도였다. 다른 지역에서는 거꾸로 라틴어에 뿌리를 둔 골-로마 원주민들의 로망스어가 주도적 언어로 오늘날 프랑스어의 모태를 이루었다.
숫적으로는 열세였지만 프랑크 인들은 분명히 지배 종족이었다. 걔중에는 물론 귀족들도 있었지만, 보병으로 전쟁에 참여한 평민 프랑크족이 다수였다. 그리고 이 ‘평민 프랑크족’들은 피지배민인 골-로마인과 구별되는 ‘자유민’으로 프랑스 땅에 살고 있었다.
이러한 프랑크인들의 모습이 당시 사람들에게 어떻게 비쳤는지에 대해서는 바로 이 ‘프랑크’에서 파생된 영어 형용사 frank(솔직한)의 의미에서 짚어볼 수 있다. 그러나 이 단어는 우리 말의 ‘솔직함’에 담긴 ‘진실성’ ‘순수함’ 등의 의미는 가지고 있지 않다. 그 대신 ‘누구의 눈치에도 구애됨 없이 말을 돌리거나 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내뱉는다’는 의미이다. 지금은 없어진 용법이지만, 물질적으로 너그럽다는 뜻도 있었다.
이런 태도들은 정복당한 피지배민으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오로지 지배 종족으로서의 프랑크인들만 가질 수 있는 것이었으리라. 이 frank라는 단어가 동사로 쓰이는 모습에서도 고대 프랑크인들이 가졌던 특수 신분의 흔적이 다시 드러난다. 이 말은 어떤 사람이 복잡한 검문검색이나 부당한 통행료를 내는 일 없이 ‘무사통과’한다는 의미를 갖는다. 그래서 일정하게 배타적인 멤버쉽을 요구하는 ‘사교계에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게 된다’는 의미 또한 갖고 있다. 또 그가 보내는 우편물은 그저 서명 한 줄이면 우표를 붙이지 않고도 즉각 배달된다는 의미도 이 frank에 담겨 있다.
지배로서의 자유
중세가 무르익고 장원 제도가 정착된 훗날 이 ‘자유민’(프랑크인)이란 어떤 의미였을까. 프랑스의 자유민(vilain: 영국에서의 vilein은 반대로 농노를 의미)들도 영주의 장원을 구성하는 일원이란 점에서는 농노와 다를 바가 없었다. 하지만 그 둘 사이에는 중요한 차이점이 있었다. 그것은 ‘자유민’만이 ‘몸과 소유물의 처분에 있어서 자유’라는 점이었다.
중세의 농노들은 기본적으로 ‘몸과 소유물의 처분에 있어서’ 영주의 사유물이었다고 보아야 한다. 물론 고대의 노예들과 달리 몇 가지 중요한 점에서 자신들의 권리를 인정받기는 했다. 그러나 농노의 권리는 무소불위한 영주의 권리를 일정하게 ‘제한’할 수 있다는 소극적 성격이 더 강했다. 장원이란 기본적으로 영주가 로마법의 ‘절대적 소유권(dominium)’ 같은 것을 휘두를 수 있는 공간이었기 때문이다. 영주가 인정하지 않은 상태에서 농노가 자신이 기르던 가축을 매매할 경우 이는 무효이다. 또 다른 장원의 처녀와 결혼하여 애를 낳을 경우, 그 아이들을 두 장원의 영주들이 나누어 가져가는 일은 종종 있었다.
반면 ‘자유민’들은 영주의 ‘절대적 소유권’에 속한 존재가 아니었다. 그래서 ‘지유민’은 마음대로 장원을 떠나거나 영주를 국왕의 법정에 고소할 수도 있었다. 마음에 드는 누구와도 결혼할 수 있었으며 자기 소유의 가축이라면 마음껏 처분할 수도 있었다. 달리 말하자면, 이 ‘자유민’들은 자신의 몸, 가족, 소유물 등에 대해 ‘절대적 소유권’을 행사할 수 있는 독자적 주체였다고 볼 수 있다.
이 같은 의미에서의 ‘프랑크인을 만들어 주는’ 행위가 바로 affranchissement로서 ‘해방’이었던 셈이다. 이는 그저 ‘손에 묶인 차꼬만을 풀어’주고 차가운 길거리로 내모는 emancipation으로서의 ‘해방’과는 분명히 다르다.(본지 6월호 「고작 ‘꼰대’로부터의 ‘해방’인갯 참조) ‘프랑크인’은 자기 몸의 자유 뿐 아니라 자신의 사유물(토지, 가족 구성원 등)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그의 ‘자유’는 단지 ‘꼰대로부터 풀려난 상태’를 의미하는 공허한 것이 아니다. 이것은 자신의 지배 하에 들어 있는 사물과 인간들을 마음대로 처분하고 지배할 수 있다는, 아주 구체적이고 적극적인 의미를 가진 자유이다.
중세 후기 이후엔 도시나 길드처럼 일정한 숫자의 인간들이 모여 스스로의 자치 단체(corporation)를 만들어 왕권으로부터 그 법적 존재를 인정받는 일들이 많았다. 이 단체들은 중세의 기독교 유럽을 촘촘히 감싸고 있는 봉건 권력의 그물망에서 독립된 ‘자유민’으로 새로 태어나는 셈이었다. 그런데 이 새롭게 태어난 인간 집단으로 구성된 법인(法人)들은 결코 적수공권으로 세상에 내던져지는 아기들이 아니었다. 아예 태어날 때부터 일정한 배타적이고 독점적인 권리- 이를테면 런던 지역의 은행권(bank note) 발행을 독점한다든가 -를 가지고 있었다. 이런 배타적 영업권을 가진 법인들의 탄생은 그야말로 지배 종족의 한 사람으로서 ‘프랑크인의 탄생’(franchise)에 걸맞는 것이었다.
여성 명사와 남성 명사의 차이
해방을 의미하는 emancipation와 affranchissement의 차이는 여성명사와 남성명사 뿐만이 아니다. 기원의 역사적 맥락이 다른 것이다. 전자는 아이들과 여자들을 ‘수갑을 풀어 꼰대로부터 해방시켜준다’는 의미의 로마법 용어를 기원으로 한다. 그러나 가진 것도 갈 곳도 없이 그저 수갑만 풀어주는 해방의 상태는 결국 새로운 종속으로 이어질 수 밖에 없다는 아이러니를 필자는 이미 논한 바 있다.
반면 이 남성 명사 affranchissement은 저 광활한 갈리아 땅을 짓밟은 정복민 프랑크인을 기원으로 하고 있다. 그리고 그 의미는 단순히 ‘꼰대에서 풀려나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몸과 재산에 배타적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 지배 종족의 일원으로 자리잡는 것을 뜻하는 것이었다.
필자는 이 ‘프랑크 인’의 성별을 따져보고 음미하는 것은 서양 문명의 심성 속에 자리잡은 ‘해방’에 대한 상상력을 이해하는 데 결정적인 열쇠 중 하나라고 믿는다. 그 ‘프랑크 인’은 여성인가 남성인가 아니면 어느 쪽도 될 수 있는 중성인가. 아주 최근까지 유럽 역사에서 이렇게 ‘배타적 재산권을 행사할 수 있는 자유인’은 오로지 남성에게 부여되었던 권한이었음이 분명하다.
서양의 정치적 전통에서 ‘자유롭다’는 말은 ‘그 누구의 의사에도 종속되지 않는다’는 의미에 바탕하고 있다. 그리고 그렇게 자유로운 자들이 평등한 ‘시민’으로서 공동체 전체의 정치적 의사 결정에 참여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누구의 의사에도 종속되지 않는 자율성을 누리려는 사람은 자신의 자유 의지와 생활을 스스로 실현해 나갈 수단(means: 이 말이 ‘재산’이라는 뜻도 가지고 있음에 주목하라)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결국 자유로운 자로서의 시민은 스스로의 사유 재산과 가족 구성원에 대한 지배권을 가진, 남자 어른이 될 수 밖에 없다는 점을 디드로는 그의 「시민(citoyen)」이라는 글에서 분명히 하고 있다.
따라서 똑같은 남자 어른이라고 해도 자기 재산을 갖지 못한 하인이나 노동자 등이 시민권을 갖는 평등한 ‘프랑크 인’이 될 수 없다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런 논리적 귀결이다. 계몽주의 사상의 완성자이자 근대의 나팔수였던 칸트마저 ‘피고용자들은 참정권을 가진 능동적 시민이 될 수 없다’고 했던 것은 바로 이러한 논리에 기반한 것이었다. 평등, 계몽주의 등 프랑스혁명의 메아리가 울려 퍼졌던 근대 서구에서 여성에게 투표권이 주어진 것은 기껏 20세기에 들어와서이다. 이토록 지연된 이유 중 하나는 수천년간 이 같은 독특한 논리적 구조가 서구 문명의 정치적 전통과 사고 방식을 지배했기 때문일 것이다.
타인을 약탈하기 위한 해방
그렇다면 정말 서구 문명의 ‘해방’엔 암수컷이 따로 있었던 것일까.
어떤 역사적 개념 속에 잠재하는 성적 편향을 짚어내는 것은 단순한 호사가의 관심사를 넘는 중요성을 가진다. 그 개념에 잠재한 문제점과 한계를 남성도 여성도 아닌 온전한 ‘인간’의 관점에서 반성하고 비판하는 작업의 시작이 되기 때문이다. 이 ‘거침없이 활개를 치고 다니며 가족과 재산을 지배하는 프랑크인’이 되는 해방은 과연 우리가 희구하는 인간 해방의 이상을 온전하게 모두 담아낼 수 있는 것일까. 아니면 정말 ‘마초’ 냄새가 풀풀나는 이 해방은 또 다른 고통과 모순으로 귀결되고 마는 것일까.
‘지배 종족의 일원’이 되는 것을 ‘해방’으로 정의한다면, 해방은 항상 다른 사물이나 인간에 대한 ‘지배’를 전제해야 성립될 수 있다. 이런 논리를 계속 밀고 가면, 나의 해방은 항상 누군가의 속박을 대가로 가능하다는 결론이 도출되고 만다. 그렇다면 이런 해방을 추구한다는 것은 의미있는 일인가. 이 지점에서 우리는 자칫 허무주의로 빠질 수 있다. 예컨대 어차피 인간 세상의 진리는 약육강식이며, 우월한 자가 열등한 자를 지배하는 것은 우주 삼라만상을 꿰뚫는 자연의 섭리이다. 지배당하는 것은 어차피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게 마련이다. 별 걱정 말고 나 혹은 우리들 자신의 ‘해방’에나 골몰하면 된다는 것이다.
이 같은 ‘해방’의 개념이 낳은 끔찍한 사례 하나를 소개한다. 옛날 아테네에서는 노예를 제외한 모든 평민 남성들을 재산의 크기와 무관하게 ‘프랑크 인’으로 만들어 준 적이 있었다. 이것이 오늘날 서양의 자유주의자들이 입만 벌리면 자랑으로 떠벌이는 ‘아테네 민주주의’이다. 그러나 자유주의자들은 ‘아테네 민주주의’가 어떤 재난을 몰고 왔는지에 대해서는 입을 다무는 듯 하다. 재산이 없거나 빈곤했던 그 빈민들은 명실상부한 ‘프랑크인’이 되기 위해 이웃 도시를 약탈했던 것이다. 이 가난한 ‘프랑크인’들은 틈만 나면 함대를 출정시켜 이웃의 도시 국가를 학살하고 약탈할 계획만 세웠고, 국가는 점차 그러한 계획을 수행하는 해적 본부로 전락했다. 잔인한 학살로 초토화되는 이웃 도시는 계속 늘어갔고 , 나중에는 도시 전체가 타락한 인간의 집단으로 변해 가게 되었다. 이것이 투키디데스, 플라톤, 소크라테스 같은 고귀한 영혼들이 하나같이 아테네의 민주주의에 대해 진저리를 치게 된 원인이었다.
현대에 들어와서도 비슷한 일이 한 번 더 벌어졌다. 19세기 후반 이후 서구 노동 계급은 정치적 권리와 사회경제적 권리를 함께 신장시키게 된다. 그런데 이와 동시에 진행된 사태가 유럽 각국의 팽창적 제국주의와 호전적 군국주의였다는 점은 깊이 음미해보아야 한다. 이런 상황과 관련, 레닌은 ‘부르주아지에게 매수된 소수의 상층 노동귀족’에게 책임을 돌렸다. 미심쩍은 주장이다. 왜냐하면 당시 영국, 프랑스, 독일 등에서 실질 소득이 개선된 것은 소수 노동귀족이 아닌 노동계급 전반에 걸친 현상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수한 일반 서민과 노동자들이 ‘징고(Jingo)!’를 외치며 열광적으로 전쟁에 참여했던 것도 이 같은 ‘음모론’으로는 설명하기 어렵다.
해방과 지배의 아슬아슬한 커플
이렇게 ‘해방’이 ‘지배’와 한쌍이 되는 역설은 민족국가가 성립되는 시대에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국제 체제는 동질적인 주권 민족 국가들로 구성된다’고 가르치는 서구의 국제정치학 교과서는 심각한 위선을 내포하고 있다. 이미 19세기 말에 일본의 후쿠자와 유기치가 냉철하게 간파했듯이, 사실상 근대 국제 체제는 소수의 평등한 주권 국가들과 그들이 지배하는 대다수의 식민지 나라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아리기(Giovani Arrighi)도 지적하고 있지만, 15세기의 스페인과 포르투갈 이래 오늘날까지 근대 민족 국가의 형성에서 식민지의 창출은 사실상 필수불가결한 요소였던 것이다. 그래서 ‘민족 해방’을 이루고 국가 창출에 성공한 이탈리아와 독일의 제 2제국이 가장 먼저 착수했던 것은 식민지 경영이었고, 1890년 명치헌법의 반포를 통해 근대 국가의 틀을 완수한 일본이 제일 먼저 시작한 일도 대만과 조선의 합병이 아니었던가. 결국 근대 국가라는 서구 문명의 민족적 삶의 틀은 다른 민족에 대한 수탈과 지배를 통해서만 가능한 것이었던 셈이다.
숱하게 지적된 바이지만, 모든 지구인들에게 남녀노소할 것 없이 저 ‘프랑크인’의 물질적 생활을 하도록 몰고가는 이 지구적 자본주의의 시대에 자연과 인간에 대한 지배가 어떻게 확장되고 있는지도 잊지 말아야 할 점이다.
이렇게 ‘지배’와 한쌍이 되는 ‘해방’의 개념은 과연 인간 해방의 궁극적인 이상이 될 수 있을까. 혹시 파멸적인 종말로 치닫는 것은 아닐까. 아무 대책없이 수갑만 풀어주는 해방인 emancipation이 결국 ‘새로운 꼰대에의 종속으로 귀결될 수 밖에 없다’는 아이러니를 우리는 저난 호에서 본 적이 있었다. 아마도 이 affranchissement이라는 해방도 그에 필적하는 아이러니로 충만해 있을 것이다.
‘과연 지배를 언제까지 유지하고 확장할 수 있을까. 그 지배의 대상이 사라질 때에는 어떻게 될 것인가. 또 나보다 더 강한 자들이 나를 지배하면서 ‘해방’되려고 할 때에는 어떻게 되는 것인가. 이 조건이 하나라도 어긋나는 순간에는 나는 다시 종속 상태로 떨어지게 되지 않을까. 이처럼 위태위태한 것이 해방이란 말인가.’
이 affranchissement는 수의학 용어로 수컷 돼지의 거세를 뜻하는 말이기도 하다. ‘프랑크 남성을 만들어 준다’는 말이 이제 ‘남성성을 제거한다’는 정반대의 의미로 쓰이고 있는 것이다. 지난 호의 emancipation이 ‘새로운 주인에게 예속’이란 뜻으로 변해버린 18세기 영국 영어의 아이러니에 필적하는 역설이라 아니할 수 없다. 모름지기, ‘함부로 휘둘러 대다가 잘리는’ 수도 있을 것이다. 또 오히려 욕망의 원천을 끊어내어버림으로서 ‘지배’와 ‘해방’의 지겨운 변증법에 시달려온 숫돼지를 편하게 풀어주는 것이 역설적이지만 진정한 해방일 지도 모른다.
※ 메모: 어쩌면 읽을 수 없었을 이 글을 몇몇 블로거들 덕분에 읽게 됐다. 요즈음 5년 전 《말》지 몇 월호에 나왔다고 도서관 가서 찾아볼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하지만 그때그때 자신의 블로그에 기록하는 블로거들 덕분에 편안히 인터넷 공간에서 음미할 수 있는 것이다.
답글삭제그런데 좀 다른 생각도 든다. 공자나 예수가 말했다는 이야기라고 해서, 그 출처(누가, 언제, 어디서, 무슨 제목으로, 등등)가 불분명하면 원래 그 이야기를 한 사람의 가치를 전달하기 힘들다. 그래서 블로거들이 출처를 분명히 하고, 자기 생각 또한 그로부터 분리해 선을 긋는 자세가 아쉽다. 검색엔진이 아무리 좋다 한들, 인터넷에 올라온 페이지들에서 <6하 원칙>을 찾기 어렵다면, 인터넷 또한 문명의 이기로 이용하기 부담스러운 곳으로 되지 않을까 걱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