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2월 10일 화요일

궁정사회 (한길그레이트북스 056)

노르베르트 엘리아스 지음 / 박여성 옮김 | 한길사 펴냄


책 소개: 

「문명화 과정」으로 유명한 엘리아스의 저작. 엘리아스는 이 책에서 서구의 문화적 뿌리는 궁정의 사회문화적 질서라는 테제를 제시하고 있다. 예컨대 절대권력의 표상으로 간주되는 루이 14세는 분산된 권력을 한 곳에 통합하는 궁정의 권력 메커니즘을 창출했다. 이를 뒷받침한 것이 앙시앵 레짐(구체제) 특유의 결합태인 궁정사회다. 엘리아스는 앙시앵 레짐의 궁정과 궁정사회가 사회를 어떻게 '구성'했는지 모색하고 있다.
앙시앵 레짐의 궁정에서는 모든 사람들이 서열, 특권 및 이권을 둘러싼 강력한 경쟁의 압력을 받았다. 이런 강력한 경쟁은 서로가 서로를 건드리지 않는 '경직성'을 만들어 냈다. 사회가 경직되면서 발전하게 된 것은 궁정예법과 의식 같은 비실용적인 것들이었다.
역사적인 사실로부터 권력 자체의 형성과 권력의 중앙집중이라는 근대적 권력질서를 추출해 낸 것은 엘리아스의 큰 공이다. 궁정사회가 지나간 시대의 유물이 아니라 다가오는 시대의 역학까지 가늠해 주는 주제라는 점에서 볼 때 500여 년의 조선왕조를 거친 우리로서는 흥미로운 주제임에 분명하다.

저자 소개
노르베르트 엘리아스(Norbert Elias) 

브레슬라우의 중산층 유태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인문계 고등학교를 다니면서 고대 그리스로마시대의 대가들과 괴테, 실러시대의 독일 고전문학을 두루 섭렵한다. 이때 얻은 독일문학에 대한 그의 폭넓은 지식은 훗날 「문명화과정」의 역사실증적 분석에 중요한 밑거름이 된다. 1924년 브레슬라우 대학에서 신칸트학파의 철학자 리하르트 회니히스발트를 지도교수로 하여 박사학위 논문 「이념과 개인」(Idee und Individuum)을 쓴다. 그는 이 논문에서 칸트의 '아 프리오리'(a priori)를 반박하면서 칸트가 모든 경험에 앞서 주어져 있다고 설정했던 선험은 실제로 시간 또는 자연적·도덕적 법칙의 인과관계라고 주장한다. 종래의 철학적 인간관인 '폐쇄적 인간'을 부정하려 했던 엘리아스의 관점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이러한 입장을 철회하고 수정한 다음에야 비로소 그의 학위논문은 통과될 수 있었다.
1930년 프랑크푸르트에서 만하임의 지도로 교수자격 논문 「궁정사회」(Die hofische Gesellschaft)를 쓰기 시작한다. 그러나 1933년 나치정권이 등장하고 유태인에 대한 탄압이 시작되면서 엘리아스의 교수자격심사가 중단되고 만다. '결합태 사회학', '문명화과정의 이론'과 같은 독창적인 사회학적 사유를 역사적 실증연구와 결합시켰던 엘리아스의 대표적 저서 「문명화과정」은 이미 1930년대에 출판되었지만, 몇몇 소수의 사회학자나 역사학자들에 의해 언급되거나 인용되었을 뿐 오랫동안 영국·미국이나 독일 사회학계에서 주목받지 못했다. 1977년 프랑크푸르트 시가 수여하는 아도르노 상을 수상한 후, 엘리아스의 이름은 비로소 사회학을 넘어서 여러 학계에 널리 알려지게되었고, 1968년에 독일에서 재판된 그의「문명화과정」은 1978년 영어로 번역되었다. 독일 사회학회가 1975년 그를 명예회원으로 추대함으로써 그의 복권은 완벽하게 이루어졌다. 

책 표지 글
앙시앵 레짐의 궁정은 우리가 지금까지 몰두해 왔던 사회학 연구의 세부적 대상인 인간이 형성한 봉건사회나 대도시 같은 사회구성체에 관한 어떠한 연구보다도 많은 문제를 사회학자들에게 제기한다. 그런 '궁정'에서는 수백 아니 종종 수천 명의 사람들이, 나라를 무소불위로 지배하고 자신의 뜻에 따라 모든 사람의 운명·지위·생계·흥망성쇠를 상당한 정도로 그리고 일정한 한계 내에서 좌우한다고 믿어왔던 왕을 섬기며 보좌하고 그와 친교를 맺어왔다.
물론 이때 그 봉사자와 국외자는 쌍방간에 행사했던 특유한 억압기제를 통하여 한 장소에 얽매인 사람들이었다. 어느 정도 확고한 서열과 깍듯한 예법이 그들을 결속하였다. 그러한 결합태 속에서 자신의 우월성을 드러내거나 무엇을 관철하려는 필요성은 그들 모두에게 오로지 하나의 특유한 각인, 즉 궁정인의 특징을 부여한다.

그러한 결합태를 핵심축으로 형성할 수 있었던 사회영역의 구조는 무엇이었는가. 권력기회의 분배, 사회적인 욕구, 종속관계는 이 사회영역 안에 있는 사람들이 여러 세대에 걸쳐 이 결합태, 즉 궁정과 궁정사회 안에서 살아가는 데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가. 궁정사회의 구조로부터, 궁정사회 속에서 출세하거나 그렇게 되기를 원했던 사람들에게 어떠한 요구가 제기되었는가. 대략 말하자면 그것들이 앙시앵 레짐의 궁정과 궁정사회라는 사회구성체가 사회학자들에게 던지는 몇 가지 질문이다. -노르베르트 엘리아스

차례/내용
차례
결합태 : 궁정사회를 움직이는 매커니즘 

1. 사회학과 역사학 
2. 문제제기를 위한 일러두기 
3. 사회구조의 지표로서의 주거구조 
4. 궁정과 귀족의 결탁 
5. 궁정예법과 의식 : 사회적인 권력구조의 기능으로서 인간의 행동과 성향 
6. 궁정예법과 특권기회를 통한 왕위 계승 
7. 사회 전체의 권력을 누적하는 기능체인 프랑스 궁정사회의 형성과 발전 
8. 궁정화과정에서 배태된 귀족적 낭만주의의 사회적 기원 
9. 혁명의 사회적 기원 

부록 1. 구조적 갈등이 없는 국가가 존재할 수 있다는 견해에 대하여 
부록 2. 궁정- 귀족주의 경제윤리의 이해 : 궁정귀족사회 대규모 가계의 집사장의 지위에 대하여 
엘리아스 연보 
옮긴이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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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브로 리뷰: 
루이 14세를 보라. 젊었을 때부터 어느 왕보다 많은 수의 화려한 자화상을 남긴 그는 프랑스 왕정에서 절대권력을 확립했던 인물이다. 그가 어떤 식으로 권력을 유지했는가는 베르사유궁이 정확하게 웅변하고 있다. 베르사유궁은 바로크 시대를 대표하는 건축물인 동시에 소유자로서의 국왕이 가지는 권능의 표시였고 왕의 거처이자 1만 명 정도가 살았던 궁정사회 전체의 하숙집이었다. 고위 귀족들은 언제나 궁전에 머물거나 매일 출근 도장을 찍었고 루이 14세는 이들을 늘 반겼다고 한다. 자신을 태양왕으로 신격화시키며 절대권력의 표상으로 부각된 그가 귀족을 가까이 하며 귀족의 모든 일을 미행하고 보고할 스위스인 보초를 고용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역사사회학자 노르베르트 엘리아스는 그의 대표작인 「문명화과정」에서 규범과 질서로 문명화된 중세의 상류층을 통해 근대적 합리성의 구축과정을 그렸다. 이번에 출간된 「궁정사회」는 그들이 궁정인으로서 왕과 함께 중앙집권이라는 근대적 권력질서의 메커니즘이 만들어지는 궁정사회를 형성하는 과정에 집중했다. 두 권의 저작에서 추출된 공통개념이 바로 ‘결합태’인데 궁정사회는 궁정인으로 길들여진 구성원들의 모든 관계를 지휘 감독하는 기능복합체이며 이것이 바로 루이 14세로 대표되는 프랑스 절대주의 궁정이다.
앙시앵 레짐의 궁정에서는 나라의 흥망성쇠와 각 개인의 운명과 지위를 손에 쥐고 있었던 왕에게 수천 명의 사람들이 봉사하고 친교를 맺어왔다. 왕과 귀족은 서열과 예법이라는 억압장치를 통해 결속된 존재들이었고 그 억압장치는 바로 당사자들의 특권을 드러내주는 지표이기도 했다. 왕의 지위 또한 전체 조직 속에서 상호의존과 맞물림을 바탕으로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이다.
생-시몽 공작은 궁정인의 전형으로 자제력과 폭넓은 지식이라는 궁정적 합리성을 갖춘 인간형으로서 사교계를 주름잡으며 한때 대공이자 상원의원으로 궁정에서 권력투쟁을 벌였던 인물이다. 그러나 사실상 생-시몽은 루이 14세의 총애를 받지 못해 궁정의 뒷켠에서 음모에 가담하고 자신의 문재(文才)를 발휘해 궁정생활을 집필하는 일에 만족해야만 했다. 루이 14세는 귀족들의 의존도를 높이기 위해 그들의 적대감을 이용하고 서로를 이간질시키고 견제하면서 궁정의 권력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자신도 궁정의 상호의존관계에 얽힐 수밖에 없었다. 자기 스스로 권력 장치에 굴복하지 않는다면 남에게도 통하지 않기 때문이다.
루이 14세는 사교활동이 궁정에만 집중되길 원했다. 궁정인들에게 직장생활과 사생활을 분리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었지만 사교활동은 자신들의 존립과 신분상승을 위해 꼭 필요한 일이기도 했다. 궁정의 사교활동은 긴장이완과 만족, 즐거움이라는 사적인 기능과 자기주장의 장이자 출세의 도구라는 양면을 지닌다. 그들은 사교세계에서 축출 당하지 않기 위해 많은 돈을 지출할 수밖에 없었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수입과는 무관하게, 지출만큼은 서열에 맞는 과시를 의무화한 하나의 신분 윤리였다. 루이 14세 이후 궁정권력의 이러한 성격은 사교활동의 장이 궁을 벗어나 궁정귀족의 거주지, 더 나아가 자본가들의 호텔로 이동하면서 살롱문화가 촉발되는 배경을 이룬다.
결국 궁정권력은 귀족과 경쟁관계에 있던 시민계급 속으로 퍼져나갔고, 확대된 권력은 귀족의 힘을 잠식했고 혁명으로 이어졌다. 왕은 귀족을 견제하기 위해 시민계급의 정치적 등장을 옹호하기도 하였으나, 혁명은 절대왕정 체제 자체를 전복했다. 엘리아스의 견해에 따르면 결론적으로 국가, 정당정치, 시민사회로 분화된 근대권력의 성격은 궁정권력의 메커니즘을 모방한 시민계급의 권력이라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근대권력의 민주주의는 절대왕정의 확대, 궁정권력의 전 사회적 확대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해도 좋으리라. 궁정권력은 부패를 막는 것이 아니었고 절대권력을 위해 부패를 이용하는 메커니즘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오늘날의 부패도 그렇다. 궁정권력의 예법과 서열은 오늘날 정당정치의 형식에서 발견되고 있으며,‘노블레스 오블리주’는 귀족만이 아니라 전 사회 구성원에게 요구되는 덕목이 되었다. 그리하여 사회 구성원 전부가 궁정권력에 참여하는 근대권력의 메커니즘이 탄생한 셈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민주주의의 기원이 썩 훌륭한 것은 아니었던 셈이다. (김은선 kong@libro.co.kr/리브로)

※ 알라딘 독자 서평 (자료: http://blog.aladdin.co.kr/736214123/342003)

대왕정의 권력 메커니즘에 대한 진지한 성찰

기존의 서양 역사학에서 16-18세기는 이상하게도 나름대로의 특성을 지닌 독립된 시기로 연구되지 못했다고 볼 수 있다. 사회경제사의 관점에서 봤을 때에 이 시기는 왕과 귀족이 농민을 착취하는 봉건제의 연장이었고, 제도사와 정치사의 관점에서 봤을 때에는 19세기의 국민국가를 준비하는 근대국가의 시발점이었다. 즉 이 시기는 언제나 중세의 아류로서 끝내는 없어져야 할 찌꺼기이거나, 19세기의 유럽국민국가가 되기엔 아직 무르익지 못한 풋내기였다.

기존의 관점들에 대해 미시적인 권력의 문제를 기본 관점으로 채택한 엘리아스는 중세와도 다르고 19세기와도 다른 이 시기만의 특성을 밝히고 있다. 중세 봉건제 권력의 바탕이 끊임없이 분열되고 통합되는 토지에 있었고, 19세기 부르주아 권력의 바탕이 늘 유동적인 자본에 있었다면, 이 시기의 권력의 바탕은 아무도 그 실체를 알지 못한 채 이용하면서 동시에 복종해야만 했던 왕에게, 더욱 정확히 말하면 '왕의 자리'에 있었다. 

왕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개인으로서의 왕은 전통귀족과 대검귀족이라는 한 부류와 부르주아 출신의 상인과 법복귀족이라는 한 부류 사이를 조정하고 중개하면서 권력의 균형을 유지했다. 이는 다시 양자에 대한 왕권의 개입을 극대화 할 수 있는 계기를 산출했다. 엘리아스는 이와 같은 절대왕정의 메커니즘을 앙리 4세에서 시작되어 루이 15세 시기로 끝나는 프랑스 절대주의 역사로 제시하고 있다.(이러한 관점에서 '문명화 과정II'는 중앙집권적 권력이 형성되는 과정을 14세기부터 고찰하고 있으며, 이 '궁정사회'에 대한 충분한 참고서가 된다.)

이와 같은 역사학적인 중요성 외에도 역사현상을 분석하는 그의 사회학적 이론틀의 중요성을 간과할 수 없다. 엘리아스가 강조하는 '결합태', 즉 'figuration' 이라는 개념은 한 사회가 구성되는 상호의존적인 권력의 기본 구도를 다층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한 사회는 개인의 계획대로 산출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들간의 복잡한 상호의존관계를 통해 모습을 갖추게 된다. 

예를 들어 궁정사회라는 커다란 권력의 틀은 왕이 의도한 모습은 아니었으며, 그가 모르는 사이에 그의 의도마저도 종속시킨 사회적인 공통의 권력구도 였다. 그것은 권력의 게임에 동참한 모두의 몸에 새겨진 보이지 않는 규칙이었기 때문에, 이 게임의 참가자들로서는 아무런 문제도 제기 할 수 없었던 삶의 기본태도였다. 엘리아스의 말대로 그것은 후천적으로 획득된 것, 즉 '하비투스habitus'(라틴어 '소유하다habere'의 과거분사)이다.

궁정사회란 바로 이러한 결합태의 특수한 한 종류이다. 그러므로 엘레아스의 입장을 밀고나간다면, 인간사회의 권력구조를 파악할 때 그 기본은 늘 탈주하려는 권력의 분산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공통지반의 모습을 갖추어 나가는 권력의 피드백작용이 된다. 메를로-퐁티의 지각하는 코기토를 연상시키는 이러한 그의 지적은 역자가 주를 통해 누누히 강조하고 있듯이 체계이론과 밀접한 관련성을 갖으며, 탈구조주의의 주장과는 또 다른 방식의 권력에 대한 관점을 제시한다.

뒤늦게야 서구지성사에 영향을 끼친 엘리아스 작업의 중요성은 시대를 앞서간 새로운 관점을 바탕으로 추상적인 이론의 차원에서나 구체적인 역사의 차원에서 진지한 문제를 던졌다는 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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