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5월 16일 금요일

번역과 대화: 어려운 용기, 시원한 대답

주식이라는 금융자산에 대한 장기 투자의 효과를 의심하는 사람들이 많다. 증권회사에 오래 다닌 어느 친구도 번번이 한 달짜리 코스피 200 옵션에 도박을 하면서도, 10년 이상의 주식 투자에 대해서는 유달리 회의적이다. 그래서 작년에 번역했던 책, 《투자의 덕장은 지는 게임을 안 한다(가칭)Winning the Loser's Game》(이건/김홍식 옮김,출간 예정)에 나와 있던 미국 주식시장의 통계를 말해줬다. 즉 주식투자 수익률은 연간 단위로 매우 들쑥날쑥하지만 보유기간 5년을 넘어 10년부터는 (수익률의 표준편차로 계산한 위험을 포함해서) 확실한 플러스 수익률이 나온다는 통계적인 사실이다. 그래도 그 친구는 고개를 갸우뚱한다. "우리나라 시장은 다르지 않을까?"

이런 말을 들을 때는 미칠 것 같다. 정말 답답하다. 통계의 신빙성은 모집단이 클수록 확실해진다. 미국과 우리나라 주식시장 제도에 얼마나 세부적인 차이가 있을지는 몰라도, 별로 크지 않다. 주식시장의 공통적 속성이 훨씬 크다. 미국의 보다 큰 모집단(시가총액의 규모와 종목수, 거래량)과 보다 긴 시간의 통계에서 나온 결과는 남의 나라 자료라고 우습게 볼 성질이 아니다. 일단 자본주의인 것이고, 주식시장은 "자본주의라는 DNA가 피우는 꽃"이다. ... 그전에 매달 옵션으로 날리는 도박 대금을 내게 주면, 이 약세장 구간을 통째로 인덱스펀드에 담아 사겠다고 한 적이 있었다. 원금은 그 친구 것이되 그 수익금은 나이 들어 찾아서 술이나 한잔 먹을 때 쓸 내 운용보수이니, 원금도 남고, 수익도 붙고, 친구와 어울릴 재료도 되니 얼마냐 좋냐고.

요즈음 번역 중인 책에서 비슷한 통계를 또 만났다. 미국 주식시장을 1926년부터 2005년까지 근 70년이 넘는 기간에 대해 투자기간별로 수익률과 투자위험을 계산한 것인데, 투자의 보유기간 구분은 1년, 5년, 10년, 15년, 20년, 25년으로 조사되어 있다. 역시 10년부터 위험을 고려한 연평균 수익률이 확실하게 플러스로 나와 있다. 여기서 투자기간의 자료값은 투자의 시작 연도와 완료 연도를 여러 가지로 정해 표본들을 지정해놓고 분석한 결과들이다. 투자기간 25년의 연평균 수익률이 10.5%이고 수익률 분포가 7.94%~17.24%라는 것은 25년짜리 여러 투자기간 표본들의 수익률 결과가 그렇게 나왔다는 뜻이다.


그런데 논리를 풀어가는 이 책의 본문 내 통계분석 기간(1926-2005)과 통계분석 결과를 산출한 그래프에 표시된 기간(1950-2005)이 서로 다르게 나와 있어서, 1926년부터 수익률 실적을 따진 것인지, 아니면 1950년부터 따진 것인지가 불분명했다. 전자이냐 후자이냐가 별로 중요한 차이가 아닐 수도 있겠지만, 내가 보기에는 꽤 중요해 보였다. 왜냐하면 전자라면 79년의 경험을 근거로 나온 결론이라는 이야기이고, 후자라면 55년의 경험에 그치는 것이기 때문에, 전자라면 더 신빙성이 높아진다는 말이 된다.

그래서 저자에게 문의를 할까 말까 고민하다가, 용기를 내서 문의하기로 했다. 근 6년 만에 영문을 작성하니 잘 안 써졌지만, "Questioning a detail about the 9th edition of A Random Walk"라는 제목으로 문의 메일을 저자에게 띄웠다.

그런데 순식간에 답장이 왔길래, 사뭇 놀랐다. 아니나 다를까, "부재중 응답 메시지"였다. 그래서 5월 23일 전에는 답장 받기 틀렸다는 생각에 포기하고 넘어갔다.


웬걸, 다음날 아침에 보니 전자우편 받은편지함에 답장이 덜컥 와있는 것이다. 사뭇 궁금한 마음에 편지를 열어보니 다음과 같은 내용이었다.


내가 아쉬워하는 부분만을 답해준 단 네 단어짜리 간결 담백 그 자체의 답장이었다.

내 나이는 40대요, 이 책의 저자는 70대이고, 살아온 문화권도 다른 데다,나는 별 볼 일 없는 번역가요, 상대방은 유수한 대학의 100만부 이상의 베스트셀러를 낸 저명한 교수다. 사실 그래서 전자우편의 영문을 작성하면서도 제한된 공간에서 예의와 격식을 차리느라 나름 애를 썼었지만, 그 교수의 메시지는 마치 그런 "예법"이 무슨 의미냐고 되묻는 듯 필요한 알맹이만 던져주었다.

과연, 책에서도 군더더기 말이 없더니, 전자우편은 더욱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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