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즈음의 쇠고기 수입과 광우병 공포는 정말로 대단한 난리판인 것이 분명한 것 같다. 세상이 나를 버리면 나도 세상을 버리겠다는 '각오'로 신문을 안 보고 사는 이 사람에게도 그 시끄러운 이야기가 들려오니 말이다. 적과 생사를 갈라야 하는 전쟁에서 가장 무서운 전쟁은 적의 무기(아니 적 그 자체가)가 무엇인지 모를 때라고 했던가?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전쟁은 통신전이요, 정보전이라고 들은 것 같은데, 요즈음은 아우성만 울려퍼지는 와중에 '통신'의 질서도 없고, '정보'의 출처도 없으며, 돌아다니는 정보를 판단해야 하는 공신력이 있어야할 기관의 '지식'도 신뢰할 수 없는 것 같다. 그 아우성에 가려 '적'은 더 보이지 않는 것 같다. 이런 증후군이야말로 무서운 공포다.
사실 신문과 방송을 보고 싶지 않은 이유는 자사의 필요와 이해에 따라 이랬다 저랬다 수시로 논조를 바꾸는 언론이 냄비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하기야 법률을 생산하는 국회가 수시로 끓었다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잊어버리는 더 대단한 냄비일지도 모르겠지만, 누가 더 대단한지 아리송할 정도로 막상막하다. 냄비 증후군에 대한 사회심리나 사회병리적 연구도 필요하겠지만, 냄비 증상에 엿보이는 수많은 공통점 중의 하나는 남의 말(입장, 가치)을 무시하고 자기 것만 주장하는 가히 병리적인 강박관념이다. 주*) 그래서 이런 인터넷 공간에 서있는 나를 잠시 생각해본다. 무슨 이야기를(메시지), 누구에게(청자) 말하고 싶은가, 그래서 이 화자와 청자 사이에 어떤 의미관계를 맺고자 하는가(가치)? 통신규약의 출발은, 첫째로 나라는 일인칭의 의지로부터 시작하고, 둘째로 들을 사람인 이인칭의 의중을 탐색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 생각에 배용준이 나왔던 영화, "스캔들"과 요즘의 "냄비 매트릭스" 세계가 겹쳐지는 모습이 떠올랐다. 거기에다 예전에 자청해서 시작했던 어떤 비공식 정책연구의 내용이 겹쳐지기에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앞으로 정보화를 지금과 달리 어떻게 해야 좋겠는가?"가 주된 테마였는데, 원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온라인 시대의 정치활동에 인터넷을 어떻게 잘 쓸 수 있겠는가?"라는 질문도 함께 주문을 받았었다.
이런 질문들에 대한 해답을 찾는 게 아니라, 그런 질문들이 놓인 틀을 다시 생각하자는 다음과 같은 논조의 결론을 맺었다.
"온라인 세계와 오프라인 세계를 구분하는 것은 편지 속의 세계와 편지 밖의 세계를 구분하는 것과 똑같다. 온라인만을 통해 무얼 이루겠다는 것은 편지만 써서 세상을 바꾸려는 것과 다름없다. 성적 유희만이 관심거리인 세상에 인테넷을 도입하면 인터넷은 성적 유희의 도구로 활용될 것이다. 또 도박만이 관심거리인 세상에 인터넷을 도입하면 인터넷은 그날로 도박의 도구로 활용될 것이다. 인터넷과 편지는 그저 통신수단일 뿐이다. 인터넷을 의미있게 쓸 수 있는 방법은 인터넷 바깥의 세상에서 찾아야 한다."
한편, 배용준이 출연했던 영화 <스캔들>을 보면, 외국의 소설이 영화로 만들어진 <위험한 관계Liaison Dangereuse>의 플롯을 그대로 베끼다시피했지만, 요즈음 세상에 던져주는 의미가 있다. "편지"라는 통신수단이 극히 "유용하게" 활용된다는 점이다. 그야말로 편지가 성적 유희를 목적으로 남자가 여자의 마음을 휘두르는 "철저한" 도구로 활용된다. 목적과 도구를 혼동하지 않는 도구에 대한 정확한 인식이라는 의미에서다.
더불어 극중의 배용준은 전도연을 너무도 잘 파악하고 있었다. 그러기에 편지도 "정확하게 사용"되어 "목적을 달성"했다. 번역하던 책에서 아주 인상적인 인용문을 만났었다. 1960년대 영국의 경제학자였다고 한다.
"그 어마어마한 통신의 진보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이웃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인간의 역사상 최악의 수준으로 떨어졌다."
미샨E.J. Mishan, 《경제성장의 대가The Costs of Economic Growth》
1960년대에 나온 말이지만, 오히려 지금의 세상에 더 어울리는 날카로운 지적이 아닐 수 없다. 인간이 서로에 대해 <알고 있는 바>가 척박해진다면, 고성능의 그 많은 통신수단이 무슨 의미가 있다는 말인가? 나는 그래서 아직도 구식 핸드폰을 바꾸지 않고 있다. 정작 중요한 것은 핸드폰의 사양이 아니라, 그리운 인간인 것이다! 그리고 환경도 있다 .
앞으로 짬을 내어, <인터넷과 "메타 밸류에이션"의 추억>이라는 제목으로, 한동안 시대를 풍미하며 수많은 개미와 기관들의 포트폴리오를 쓰레기로 만들었던 인터넷과 정보화의 배후에 대한 사유를 이어가고자 한다.
주: *) 냄비 증후군에는 일방통행의 병리도 있지만, 신뢰결핍이라는 병리도 있다. 부딪는 냄비끼리도 신뢰가 없지만, 제3의 어느 중재자에 대해서도 믿을 수 없다는 신뢰결핍이다. 그 밖에 더 연구할 만한 특징들이 많을 것 같다. 사회병리학자들의 진지한 연구 과제가 되었으면 좋겠다. 사실 우리 사회의 어느 분야도 이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것 같다. 죽 끓듯 바뀌는 교육정책과 그 근저에 있는 교육의 문제는 어디서부터 어떻게 봐야 할까? 여기에서도 두 가지 증상이 눈에 뜨인다. 첫째, 자기 말만 한다. 둘째, 서로 믿지 못한다. 지금의 정부도 사실 자기 말만 하고 있는 격이다. 그 이전의 정부도 물론 그랬다. 그 이전의 이전의 정부도 그랬다. 과연 5년 후의 교육정책이 이 5년의 경험을 제대로 용해해서 연속성을 유지할 거라고 누가 예상할 수 있을까? 모름지기 이 증후군에는 스스로 악화시키는 되먹임이 작용하고 있을 것이다. 진지한 자세로 사실을 확인하고 새로운 지식을 탐구하는 "차가운(냉철한) 이성"이 "뜨거운(넋나간) 냄비"에 압도당하는 세월을 우리가 살아왔는지도 모른다. 그러다 보니 사회공학적으로 '냄비들'을 재생산하고 양산해왔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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