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서 《전문가의 독재》 중에서
9.6 두뇌 유출
이제 이 부의 첫머리에 국가주의에 관해 언급했던 두뇌 유출에 대해 다시 거론해 보자. 두뇌 유출 당사자들이 본국으로 송금한 국외 소득 자료가 축적됨에 따라 두뇌 유출이 재앙적이라는 생각이 일정 정도 신빙성을 잃었다.
경제학자들은 개인들이 자기 나라에서 기능 개발에 투자하는 이유 중에는 이민도 있다는 점을 지적했다. 기능 습득을 위해 많이 희생함으로써 얻는 보상은 노동자가 국내뿐 아니라 국외에서도 일할 수 있을 때 더 높아진다. 노동자가 국외에서 일할 수 없어서 보상이 떨어진다면, 그 노동자가 기능 개발에 투자할 개연성도 작아질 것이다. 국외로 나가는 이민을 억제해서 두뇌 유출을 막으면, 애초부터 ‘두뇌’가 되려고 투자할 사람도 줄어들 것이다. 새로 탄생할 두뇌가 줄어든다면, 결국 그 손실이 두뇌 유출을 막아서 지킬 수 있는 두뇌 숫자를 상쇄하고 말 것이다. 더욱이 한 나라가 국내뿐 아니라 국외로 수출되는 일정 유형의 유능한 노동자들을 잘 배출한다면(가령 필리핀 간호원), 그것은 축하해 마땅한 일이지 가로막을 일이 아니다.
‘공식적 발전’이 시작된 이래 이처럼 상식적인 논점을 깨닫는 데 수십 년이 걸렸다는 사실은 발전에서 국가주의적 강박증이 얼마나 심했는지를 말해 준다. 이제는 두뇌 유출의 부정적 효과와 긍정적 효과 모두를 고려하는 논의가 마침내 원조 기관에서도 용인되고 있다.
그래도 두뇌 유출의 주된 수혜자, 즉 나라 밖으로 떠나는 두뇌 유출 당사자들에 대한 고려는 여전히 금지되어 있다. 두뇌 유출자들에게는 발전의 배반자라는 오명이 따라붙고, 그들이 이민에서 얻는 이득은 불법적인 것처럼 여겨진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손의 원리는 이민에서도 잘 작동한다. 두뇌 유출자들에게 지불되는 임금은 그들이 세계적 산출에 기여하는 가치를 반영한다. 두뇌 유출자들이 저임금 일자리를 버리고 고임금 일자리로 옮겨가면, 그들의 생산성은 늘어난다. 그들은 그들 자신만을 이롭게 하는 게 아니라 세계의 발전 전체를 이롭게 한다. 오직 국가주의적 강박 관념만이 그러한 세계적 발전의 이득을 무시하려고 할 것이다.
두뇌 유출자들에 반대하는 논거 중 하나는 그들을 교육하는 고국의 비용이 들어갔으니, 그들을 떠나지 못하게 강제하거나 그 교육비를 토해 내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주장은 미심쩍을 정도로 이민 문제만을 특이하게 취급하는 것이다. 교육받은 내국인이 국내에 살면서 무언가 다른 (가령 수도원에 들어간다든가 노동을 하지 않고 가사와 육아에 전념하는 등의) 이유로 그 나라의 생산에 가담하지 못한다고 해 보자. 이런 사람들에게 벌금을 물리자고 주장할 수 있는가?
9.7 웨스트버지니아의 사라진 공화국
강압적인 국가주의에 관한 우리의 이중 잣대를 또 다른 소재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같은 나라 안에서 다른 곳보다 더 가난한 지방의 문제를 살펴보는 것이다. 두뇌 유출이 피해를 유발한다는 논리는 그 피해가 가난한 나라의 문제든 같은 나라 안의 가난한 지역 차원의 문제든 동일하다. 그러나 지역 차원의 문제에 대해서는 별로 주목하지 않는다.
웨스트버지니아는 미국에서 두 번째로 가난한 주다. 1957년 9월 캄캄한 그믐날 밤, 그곳에 살던 두 사람의 두뇌 유출자들이 두 아이(그중 어린 아이는 생후 2주였다)를 데리고 오하이오 강을 건넜다. 북서쪽의 오하이오 주로 가서 일자리를 구하려던 것이다. 두 사람 모두 웨스트버지니아 대학을 졸업했고, 그중 남자는 박사 학위까지 취득했다. 두 살 때 아버지의 사망으로 거의 빈곤의 나락으로 떨어진 그는 자신의 운명에서 탈출하고자 교육을 바탕으로 더 나은 생활을 찾아 나섰다. 하지만 그러려면 좋은 일자리가 필요했는데, 좋은 일자리들은 웨스트버지니아가 아니라 오하이오에 있었다.
이 여정에 함께했던 생후 2주의 아이가 바로 나였다. 1950~2000년 사이 애초 2백만 명에 불과했던 웨스트버지니아에서 80만 명이 (나의 숙모와 숙부, 사촌을 포함해) 그곳을 떠났다. 아무도 내 부모를 향해 웨스트버지니아를 배신했다고 비난하지 않았으며, 그들에게 들어간 교육비를 웨스트버지니아에 토해 내라고 요구하지 않았다.
9.8 유령 나라
발전에서 빈곤 경감의 수단으로 이민을 적대시하는 태도는 이민이 남아 있는 사람들에게 정말로 ^이로울^ 때에도 계속되었다. 웨스트버지니아를 떠나는 이민의 큰 원인은 그 지역 석탄 산업의 장기적 쇠퇴 때문이었다. 무엇보다 철도가 자동차로 대체됨에 따라 에너지 수요가 석탄에서 석유로 넘어가는 추세가 결정타였다. 그러니 웨스트버지니아는 창조적 파괴의 희생양이었던 셈이다. 게다가 광산이 기계화됨에 따라 웨스트버지니아 석탄 산업의 고용은 석탄 생산량의 감소보다도 빠르게 줄어들었다. 주력 산업인 석탄이 망하는 길로 들어서자 웨스트버지니아의 다른 산업들도 악영향을 입었다.
이제 뛰어난 두뇌의 이동에만 주목하는 관점에서 벗어나 숙련 노동자와 비숙련 노동자 모두의 인구 이동을 고려해 보자. 웨스트버지니아의 거대한 인구 유출은 숙련 노동자와 비숙련 노동자가 둘 다 이동했다는 것을 시사한다. 이 두 집단을 한데 묶어서 경제학자들이 애용하는 ‘노동’이라는 개념으로 사용해 보자. 그리고 웨스트버지니아를 잠비아와 비교해 보자. 잠비아 역시 구리 산업의 쇠퇴로 인해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잠비아는 이 장의 첫머리에 소개한 ‘의사 도둑질’을 언급한 논문이 주목했던 나라다. 미국으로 이민을 떠난 잠비아의 의사 쿤즈 데사이는 잠비아 사람들 중에는 예외적인 경우였다. 대부분의 잠비아 사람들은 다른 나라의 이민 규제 때문에 이민을 갈 수 없었다. 이제 우리의 초점을 단지 두뇌 유출에서 벗어나, 모든 잠비아 사람들에 대한 국외 이민 금지가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살펴보도록 하자.
논의를 하는 김에─역시 숙련 노동과 비숙련 노동을 구분하지 않은 채─노동에 대한 수요·공급 분석을 해 보자. 이 분석은 랜트 프리체트가 「호황 가도의 도시와 유령 나라」라는 논문에서 제시한 것이다. 웨스트버지니아와 잠비아는 둘 다 외부적인 경제 요인(각각 석탄 및 구리 수요의 붕괴)이 국지적인 노동 수요의 붕괴를 초래하는 사태에 직면했다. 만일 이민이 불가능하고 그 지역의 노동 공급이 변하지 않으면, 노동 수요의 붕괴로 임금도 붕괴될 수밖에 없다. 대략 이와 같은 사태가 잠비아에서 일어났다. 그로 인해 197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1인당 소득이 지속적으로 떨어졌다.
하지만 노동 수요의 붕괴에 대응해 수많은 사람들이 다른 곳으로 떠날 수 있다면, 결과는 달라진다. 사람들이 떠나면 고향의 노동 공급이 줄어든다. 웨스트버지니아에서 그랬다. 노동 수요가 줄어드는 속도만큼 국지적인 노동 공급이 줄어들면, 남아 있는 사람들의 임금이 붕괴될 이유는 없다. 실제로 웨스트버지니아는 인구가 대대적으로 유출되던 동안, 1인당 소득의 상승 속도가 줄곧 미국 평균의 상승 속도와 동일했다. 웨스트버지니아는 인구 유출 때문에 가난해진 것이 아니다. 웨스트버지니아는 인구 유출이 시작되기 전부터 이미 가난했던 것이고, 인구 유출 덕분에 더 가난해지지 않은 것이다.
반대로 잠비아는 구리 산업의 붕괴와 같은 엄청난 충격을 입을 때 사람들이 다른 곳으로 빠져나갈 수 ^없었다^. 그 때문에 잠비아는 실제로 더 가난해졌다. 프리체트는 ‘유령 도시ghost town’ 현상과 그가 ‘유령 나라ghost countries’로 불러야 한다고 제안한 현상을 대비했다. 유령 도시는 탄광이 폐쇄돼서 사람들이 떠나가는 곳인 반면, 유령 나라는 그와 반대로 사람들이 떠날 ^수 없기^ 때문에 광산이 폐쇄돼서 대폭 가난해지는 나라를 말한다. 그런 나라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감옥인 셈이다.[주]11
9.8 무리드파
이민이 남아 있는 사람들에게 긍정적 영향을 미치는 또 다른 방식은 이민을 떠난 사람들이 남아 있는 사람들에게 국제적 무역 및 금융 네트워크의 징검다리 역할을 해줄 때다. 서방 도시들에는 그 실례를 보여주는 집단이 하나 있다. 놀랍게도 그들이 없는 곳이 없을 정도인데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이들이 얼마나 넓게 퍼져 있는지 확인해 보려면, 뉴욕이나 파리·마드리드·밀라노에서 아프리카풍의 길거리 소매점 아무 데나 들러 세네갈에서 왔느냐고 물어보라. 그렇다는 답을 들을 게 거의 확실하다. 그들이 무리드Mouride파이냐고 물어보라. 이 질문에도 그들은 그렇다고 답할 것이다.
무리드는 세네갈에 있는 이슬람교 종파의 하나로 국제적인 상인 네트워크로 진화했다. 그들은 그들끼리 물건을 구매할 자금이나 창업 자금을 융통해 주며, 세네갈에 있는 가족에게 국제 송금도 해 주고 서로 융자도 해 준다.[주]12
19세기 말 세네갈이 프랑스의 식민 통치하에 있던 1883년, 프랑스와 세네갈의 엘리트를 비판하는 회교도 아마두 밤바 음바케Ahmadou Bamba Mbacké(1853~1927)가 무리드파Mouride brotherhood를 설립했다. 밤바는 종교적 구원의 길로 열심히 일할 것과 금욕적 생활, 집단의 단결을 주창했다. 그는 사망하기 전에 무리드파를 위한 성스러운 도시 투바Touba를 건설했다. 그가 묻힌 곳도 여기다.[주]13 오늘날 투바는 세네갈의 수도 다카르 동쪽 자동차로 4시간 거리에 있는 두 번째로 큰 도시다.
무리드파 사람들이 억세고 부지런히 일하던 시기는 프랑스 식민 통치 때 땅콩 생산이 급증할 때와 일치한다. 그래서였는지 그들은 독립 이전부터 쭉 땅콩을 장악하게 되었다. 그러나 1970년대 말~1980년대 초 가뭄과 땅콩 가격 하락으로 인해 많은 무리드파 사람들이 다른 기회를 찾아 나섰다. 그들 중 특히 프랑스·미국·스페인·이탈리아 등지로 이민을 떠나는 사람들이 많았다.[주]14
무리드파 사람들은 이민을 가로막는 가시적이고 비가시적인 장벽에도 불구하고 꾸준하게 이민을 떠났다. 그들은 보통 이민 갈 사회의 언어나 사회 규정에 대한 아무런 지식도 없이 이국 땅에 도착했지만, ^다히라스dahiras^라는 모임을 통해 자립하는 데 필요한 도움을 받았다. 다히라스는 신규 이민자를 위해 주거 및 금융, 정서적 지원에 더하여 업무 훈련이나 조언을 제공해 주는 남자들의 (최근에는 여성도 참여하는) 집단이다.
무리드파 사람들의 경제활동 네트워크를 형성해 준 것은 이 상호 부조와 신뢰 네트워크였다. 이 네트워크의 본부는 여전히 세네갈에 있다. 다카르의 산다가Sandaga 시장에는 물결 모양의 철판 지붕을 덮은 가판대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데, 이곳이 무리드파 사람들의 월스트리트다. 무리드파 상인이 뉴욕에서 전자제품이나 화장품을 사고, 이탈리아에서 핸드백과 구두를, 파리에서 의류를 사기 위해 세네갈을 떠날 때면, 카라KARA 국제 환전소의 산다가 시장 지점에 현금을 예치한다. 카라는 웨스턴유니온Western Union(미국에 본사를 둔 국제적 금융·통신 회사)처럼 기능하지만, 순간적으로 결제가 이루어지고 비용도 훨씬 적게 든다. 무리드 상인은 뉴욕에 도착하자마자 산다가 카라 지점에서 맡긴 금액을 뉴욕의 브로드웨이에서 인출할 수 있다.[주]15
무리드 상인은 뉴욕에서 추가적인 신용을 이용할 수도 있다. 뉴욕의 할렘 지역(흑인 거주 지역)에 가면 ‘리틀 세네갈’로 불리는 무리드 커뮤니티가 있는데, 세네갈 이민자들이 모여 사는 116번가와 말콤엑스 대로 주변이다. 무리드 상인은 이곳 이민자들 중 한 사람으로부터 돈을 빌리면 된다. 이러한 거래를 처리하는 데 계약서나 공증인 증명, 담보가 전혀 필요하지 않다. 무리드 상인이 뉴욕에 머무는 동안 세네갈에 있는 그의 가족이 식품이나 돈이 필요할 수 있다. 그러면 상인은 산다가에 있는 무리드 상인에게 전화를 걸면 된다. 그러면 그의 가족은 당일 산다가의 자그마한 상점에서 현금을 지급받을 수 있다.
무리드파 사람들은 아주 신속하면서도 비용도 거의 안 드는 금융 거래를 일종의 시스템으로 구축했다. 국제 원조 기관들이 세계 곳곳의 미소 금융microfinance 프로젝트를 지원하고 있지만, 뚜렷한 성과 없이 엇갈리는 결과만 보았다. 하지만 무리드파 사람들은 수십 년 동안 스스로 자부할 만한 미소 금융의 대단한 성과를 이룩했다. 그럼에도 거의 모든 사람들이 이러한 성과를 간과했다.
그들의 촘촘한 네트워크는 시장 정보의 교환에도 기여한다. 무리드파 상인은 그들의 네트워크에서 얻는 정보를 바탕으로 뉴욕시 차이나타운에서 플라스틱 황새 조형물을 사서 프랑스 동쪽 스트라스부르에 오는 독일 여행객들에게 판다. 그들이 공급하는 가격을 스트라스부르의 상인들이 따라잡지 못할 것임을 잘 알기 때문이다.[주]16
무리드 네트워크는 세네갈에 남은 사람들과 국외로 나간 사람들을 포함해 다수의 구성원들에게 번영을 가져다주었다. 세네갈 카올락Kaolack 출신의 폴Fall 다섯 형제는 ^다히라스^에서 성장해 의류 거래상으로 돈을 벌기 시작했다. 이민을 떠난 맏형 체이크 음바케 폴Cheikh Mbacke Fall은 1973년 뉴욕에 도착해 카메룬의 어느 사업가에게 팔려고 CD를 매입했다. 그 후 8년 동안 그는 한국인 사업 동반자와의 합작 사업으로 아프리카 시장에 판매할 가발을 개발했다.[주]17
체이크는 세네갈에 돌아와 혼자서 세네갈의 가발 시장을 일구었다. 그와 한국인 사업 동반자는 세네갈 최초의 가발 제품 공장을 가동했다. 체이크의 동생들은 맏형의 사업을 지원하기 위해 카올락을 떠났다. 그중 하나인 압두 라하트Abdouh Lahat는 뉴욕에서 미용 제품과 전자 제품을, 사우디아라비아에서 향수와 텔레비전을, 홍콩에서 라디오를 수입해서 맏형을 거들었다. 1990년대에 폴 형제들은 세네갈의 화장품과 신발 시장에 진입했다. 화장품은 영국과 미국에서 수입했고, 신발은 대만에서 수입했다.
폴 형제는 국제적인 무리드 네트워크를 활용해서 무리드 안팎의 사업 참여자들과 동반자들의 거래 대금 결제를 무사히 처리했다. 카올락의 후미진 마을에서 시작한 폴 형제의 사업은 전 세계에 퍼져 있는 무리드파 사람들을 한 세대 내에 그들의 사업에 활용했다.
9.9 결론
개인의 권리냐 국가의 특권이냐 하는 문제에서 이민은 발전의 태도를 감별하는 탄광 속 카나리아와도 같다. 잠비아를 떠나 부유한 나라로 향하는 유능한 전문가를 적대시하는 것은 ‘잠비아’라는 땅 덩어리에 사는 집단을 중시하는 태도를 보여주지만, 그와 동시에 잠비아 사람들의 개인적 권리는 중시하지 않는 태도를 드러내 준다.
그뿐 아니라, 발전을 국가 영토 내에 갇힌 자족적인 것으로 여기는 편견은 무리드파 사람들처럼 내국인 이외의 다국적인 요인이나 집단이 경제 발전에서 발휘하는 역할을 볼 줄 모른다는 점도 보여준다. 다음 장에서는 국외적 요인을 배제한 국가적 요인이라는 것이 흔히 생각하는 것만큼 중요한 게 아니라는 증거를 좀 더 살펴본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