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프리드리히 니체. 《도덕의 계보: 하나의 논박서》 1887. 다음 번역서 중의 일부. 《선악의 저편·도덕의 계보》 김정현 옮김. 책세상 펴냄. 2002(초판 5쇄 2006).
※ 발췌: p. 3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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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약속할 수 있는 동물을 기르는 것─이것이야말로 자연이 스스로 인간에게 부여한 바로 그 역설적인 과제 자체가 아닐까? 이것이야말로 인간에 관한 본래의 문제가 아닐까? ... ... 이 문제가 높은 수준에서 해결되었다는 사실은 망각의 힘이라는 반대 방향으로 작용하는 힘을 아주 중하게 여기는 사람에게는 한층 놀라운 일로 보일 것임이 틀림없다. 망각이란 천박한 사람들이 믿고 있듯이 그렇게 단순한 타성력vis inertiae이 아니다. 오히려 이것은 일종의 능동적인, 엄밀한 의미에서의 적극적인 저지 능력이며, 이 능력으로 인해 단지 우리가 체험하고 경험하며 우리 안에 받아들였을 뿐인 것이 소화되는 상태(이것을 '정신적 동화'라고 불러도 좋다)에 있는 동안, 우리 몸의 영양, 말하자면 '육체적 동화'가 이루어지는 수천 가지 과정 전체와 마찬가지로, 이것이 우리의 의식에 떠오르지 않는다. 의식의 문과 창을 일시적으로 닫는 것, 우리의 의식 아래 세계의 작동 가능한 기관이 서로 협동하든가 대항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소음과 싸움에서 방해받지 않고 있는 것, 새로운 것, 특히 고차적인 기능과 기관에 대해, 통제하고 예견하며 예정(우리의 유기체는 과두적인 조직으로 만들어져 있기 때문이다)하는 데 다시 자리를 마련하기 위한 약간의 정적과 의식의 백지 상태tabula rasa─이것이야말로 이미 말했듯이, 능동적인 망각의 효용이며, 마치 문지기처럼 정신적 질서와 안정, 예법을 관리하는 관리자의 효용이다 : 여기에서 바로 알 수 있는 것은 망각이 없다면 행복도, 명랑함도, 희망도, 자부심도, 현재도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저지 장치가 파손되거나 기능이 멈춘 인간은 소화불량 환자에 비교될 수 있다(비교할 만한 것 이상이다─). 그는 그 무엇도 '해결'할 수 없다... ... 이러한 망각이 필요한 동물에게 망각이란 하나의 힘, 강건한 건강의 한 형식을 나타내지만, 이 동물은 이제 그 반대 능력, 즉 기억의 도움을 받아 어떤 경우, 말하자면 약속해야 하는 경우에 망각을 제거하는 기억을 길렀던 것이다 : 이것은 결코 한 번 새겨진 인상을 다시 벗어날 수 없다는 수동적인 상태가 아니며, 단순히 한 번 저당잡힌 말[言]을 마무리할 수 없다는 소화불량도 아니고, 오히려 다시 벗어나지 않으려는 능동적인 의욕 상태, 일단 의욕한 것을 계속하려는 의욕, 즉 본래적인 의지의 기억인 것이다 : 따라서 근원적인 "나는 하고자 한다," "나는 하게 될 것이다"와 의지의 본래적인 분출, 그 의지의 활동 사이에는 새로운 낯선 사물과 상황, 심지어는 의지적 행위 자체인 하나의 세계가 이러한 의지의 긴 연쇄 고리를 뛰어넘지 않고도 아무 걱정 없이 끼어들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의 전제가 되는 것은 무엇이란 말인가! 이와 같이 미래를 미리 마음대로 처리하기 위해, 인간은 필연적으로 일어나는 사건을 우연적인 사건과 구분하고 인과적으로 사고하며 먼 앞날의 일을 현재의 일처럼 보고 예견하며, 무엇이 목적이고 무엇이 그 목적의 수단인지 확실히 결정하고 대략 계산하며 산출할 수 있는 방법을 배워야만 하지 않는가! ─ 약속하는 인간이 그렇게 행동하듯이, 결국 그러한 방식으로 스스로의 미래를 보증할 수 있기 위해서, 인간 자신은 우선 스스로 자기 자신의 관념에 대해서조차 예측할 수 있고 규칙적이며 필연적인 존재가 되었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2.
바로 이것이야말로 ^책임^의 유래에 관한 오랜 역사이다. 약속할 수 있는 동물을 기른다는 저 과제는, 우리가 이미 이해한 것처럼, 그 조건과 준비로 우선 인간을 어느 정도까지는 필연적이고 같은 모양으로 서로 동등하게 규칙적으로 따라서 예측할 수 있게 ^만드는^ 좀더 상세한 과제를 함축하고 있다. 내가 '풍습의 도덕"이라 부른 저 거대한 작업(《아침놀》, 9, 14, 16절을 참조할 것)─ 인류가 지속되는 오랜 세월 동안 인간이 자기 자신에게 행한 본래적인 작업, 즉 인간의 ^역사 이전의^ 작업 전체는 비록 그것에 또한 너무나 많은 냉혹함, 포학, 우둔함과 무지가 포함되어 있다 하더라도, 이 점에서는 의미가 있는 것이며 대단히 정당한 것이 된다 : 인간은 풍습의 도덕과 사회적 강제라는 의복에 힘입어 실제로 예측할 수 있게 ^만들어졌다^. 이에 반해 우리가 거대한 과정의 종점, 즉 나무가 마침내 그 열매를 무르익게 하고, 사회성과 풍속의 윤리가 무엇에 이르는 수단에 불과했다는 것이 마침내 드러나는지점에 서서 본다면, 우리는 그 나무에 가장 잘 익은 열매로 ^주권적 개인^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이는 오직 자기 자신과 동일한 개체이며, 풍습의 윤리에서 다시 벗어난 개체이고, 자율적이고 초유니적인 개체(왜냐하면 '자율적'과 '윤리적'은 서로 배타적이기 때문이다), 즉 간단히 말해 ^약속할 수 있는^ 자기 자신의 독립적인 오래된 의지를 지닌 인간이다.─ 그와 같은 인간 안에는 마침내 성취되어서 자기 안에서 살아 있는 것이 된 것을 온갖 근육을 경련시킬 정도로 자부하는 의식이, 본래의 힘과 자유에 대한 의식이, 인간 일반에 대한 완성된 감정이 보인다. 실제로 ^약속할 수 있는^ 자유롭게 된 인간, 이러한 ^자유^의지를 지배하는 자, 이러한 주권자─그는 약속을 할 수 없으며 자기 자신조차 보증할 수 없는 모든 사람에게 자기가 얼마나 뛰어났는지를, 얼마나 많은 신뢰와 두려움과 경외심─그는 이 세 가지를 모두 '^받을 만한 가치가 있다^'─을 불러일으키는지 어찌 모를 수 있겠는가!─이렇게 자기 자신을 지배하는 것과 더불어, 환경을 지배하는 것도 그리고 자연과 의지가 모자라 신뢰할 수 없는 모든 피조물을 지배하는 것도 필연적으로 그에게 맡겨져 있다는 것을 어찌 모를 수 있다는 말인가? '자유로운' 인간, 즉 오랫동안 지속되어 부수기 어려운 의지를 소유한 자는 이렇게 소유할 때 또한 자신의 ^가치 척도^가 있다 ; 그는 자신을 기준으로 하여 타인을 바라보며, 존경하기도 하고 경멸하기도 한다. 그는 필연적으로 자신과 동등한 자, 강한 자, 신뢰할 수 있는 자들(약속할 수 있는 자들)을 존경한다.─즉 주권이 있는 자처럼 육중하고 드물게 서서히 약속하는 자, 자신의 믿음을 아끼는 자, 그가 신뢰할 때는 ^두드러지게 하는^ 자, 불행한 일이 있음에도, 자신의 말을 '운명에 대항하여' 지킬 만큼 충분히 자신이 강한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신용할 수 있는 말을 타인에게 주는 자를 존경하는 것이다 ─ : 또한 필연적으로 그는 약속할 수 없으면서 약속하는 허약 체질의 경솔한 인간에게는 발길질을 해댈 것이며, 입에 약속을 담고 있는 그 순간 이미 약속을 깨버리는 거짓말쟁이에게는 응징의 채찍을 가할 것이다. ^책임^이라는 이상한 특권에 대한 자랑스러운 인식, 이 희한한 자유에 대한 의식, 자기 자신과 운명을 지배하는 이 힘에 대한 의식은 그의 가장 밑바닥 심연까지 내려앉아 본능이, 지배적인 본능이 되어버렸다 : ─ 만일 그 스스로 이에 대한 한 단어가 필요하다고 가정한다면, 이것을, 이 지배적인 본능을 무엇이라 부르게 될 것인가? 그러나 의심할 여지 없이 이 주권적 인간은 그것을 ^양심^이라고 부른다... ...
3.
자신의 양심이라고? ... ... 우리는 여기에서 최고의, 거의 기이한 모습으로 접하게 되는 '양심'이라는 개념의 배후에는 이미 오랜 역사와 형태의 변천이 있다는 것을 미리 짐작할 수 있다. 자기 자신을, 더욱이 긍지를 가지고 보증할 수 있는 것, 또한 자기 자신을 ^긍정할 수 있다는 것^─이것은 이미 말했듯이, 하나의 잘 읽은 열매이며, 또한 ^만숙(晩熟)한^ 열매이기도 하다 : ─ 이 열매가 얼마나 오래 떫고 신 채 나무에 매달려 있어야만 했던가! 그리고 훨씬 오랫동안 그러한 열매는 전혀 볼 수가 없었다. ─ 분명히 모든 것이 나무에서 준비되었고 바로 그 열매가 성숙하는 것을 위해 성장해갔음에도 그 누구도 그 열매를 약속할 수 없었을 것이다!─ "어떻게 인간이라는 동물에 기억을 만들 수 있을까? 어떻게 부분적으로는 우둔하기도 하고, 부분적으로는 멍청하기도 한 이 순간적인 오성, 이 망각의 화신에게 언제나 기억에 남는 인상을 각인할 수 있겠는가?" ... ... 누구나 생각해볼 수 있듯이, 이러한 태곳적부터 내려오는 문제는 부드러운 대답과 수단으로는 해결되지 않았다. 아마 심지어는 인간의 역사 이전 시기 전체에서 인간의 ^기억술^만큼 더 무섭고 섬뜩한 것은 없을 것이다. "기억 속에 남기기 위해서는, 무엇을 달구어 찍어야 한다 : 끊임없이 ^고통을 주는 것^만이 기억에 남는다"─ 이것은 지상에서 가장 오래된 (유감스럽게도 가장 오래 지속된) 심리학의 주요 명제다. 오늘날까지도 지상에서 인간이나 민족의 생활 속에 장엄, 진지함, 비밀스러움, 음울한 색조가 있는 곳에서는 어디서나, 일찍이 지상 모든 곳에서 약속하고 저당 잡히고 서약을 할 때 얼마간의 공포가 ^영향을 끼친다는^ 사실을 사람들은 말하고 싶을지도 모른다 : 과거가, 가장 오래 지속되고 깊이가 있으며 냉혹한 과거가, 우리가 '진지'해질 때, 우리에게 숨결을 불어넣어 우리 안에서 용솟음쳐 오른다. 인간이 스스로 기억을 만들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여길 때, 피나 고문, 희생 없이 끝난 적은 없었다. 가장 소름끼치는 희생과 저당(첫 아이를 바치는 희생도 여기에 속한다), 가장 혐오스러운 신체 훼손(모든 종교는 그 가장 깊은 근거에서 잔인성의 체계다)─이 모든 것의 기원은 고통 속에서 가장 강력한 기억의 보조 수단이 있음을 알아차린 저 본능에 있다. 어떤 의미에서는 금욕주의 전체가 이에 속한다 : 몇 개의 관념들은 지워질 수 없고 눈앞에 있는 것, 잊을 수 없는 '고정된' 것이 될 수밖에 없는데, 이것은 이러한 '고정 관념들'을 통해 신경과 지성의 전 조직에 최면을 걸기 위한 것이다.─ 금욕주의적 절차와 생활 형식들은 이 관념들을 그 외의 모든 관념과의 경합에서 떼어내어 '잊을 수 없는' 것으로 만들기 위한 수단이다. 인류가 '기억에 남겨둔 것'이 나쁘면 나쁠수록, 인류의 관습의 모습은 더욱 무섭게 된다. 특히 형법의 냉혹함은 인류가 망각을 극복하고, 사회적 공동 생활의 몇몇 원시적 요건들을 순간적으로 감정과 욕망의 노예가 된 이러한 사람들의 기억 속에 ^자리잡게^ 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는지 알 수 있는 척도를 제공해준다. 우리 독일인들은 확실히 스스로를 특별히 잔인하고 냉혹한 민족이라고 생각하지 않으며, 더군다나 특별히 경박하고 무위도식하며 지낸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 그러나 '사상가의 민족'(말하자면 오늘날에도 최대의 신뢰와 진지함, 무취미, 객관성을 그들에게서 찾을 수 있으며, 이러한 속성으로 인해 유럽의 모든 고관을 육성할 권리가 있다고 ㅜ장하는 ^저^ 유럽 민족)을 기르기 위해, 지상에서 얼마만큼의 노고가 있었는지를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의 고대 형벌 제도를 살펴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이 독일인들은 자신의 천민적 근본 본능과 그에 뒤따르는 야수같이 거친 언행을 통제하기 위해, 스스로 무서운 수단을 사용하여 기억하게 만들었다 : 예를 들면 돌로 쳐 죽이는 형벌(─이미 전설이 되어 있듯이 맷돌을 죄인의 머리 위에 떨어뜨리는), 수레로 사지를 찢어 죽이는 형벌(형벌의 영역에서 독일의 천재가 가장 독창적인 창의성과 특이성을 발휘한), 말뚝으로 꿰뚫어 죽이는 형벌, 말로 찢어발기거나 밟아 죽게 만드는 형벌['사지를' 찢는], 범인을 기름이나 포도주로 삶는 형벌(14세기나 15세기에도 행해졌다), 인기 있었던 살가죽 벗기는 형벌('가죽끈 만들기'), 가슴에서 살점을 저며내는 형벌, 그리고 또 범죄자에게 꿀을 발라 이글대는 태양 아래 파리떼가 우글거리게 놓아두는 형벌 등 고대 독일의 형벌을 생각해보라. 그러한 모습이나 전례의 도움으로 사람들은 마침내 사회 생활의 편익을 누리고 살기 위해 ^약속^했던 일에 관해 대여섯 가지의 "나는 원하지 않는다"는 것을 기억 속에 담게 된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이와 같은 기억 덕분에 사람들은 마침내 '이성에' 이르렀다! ─ 아, 이성, 진지함, 감정의 통제, 숙고라고 불리는 이 음울한 일 전체, 인간의 이러한 모든 특권과 사치 : 이것을 위해 얼마나 값비싼 대가를 지불했단 말인가! 모든 '좋은 것'의 근저에는 얼마나 많은 피와 전율이 있단 말인가! ... ...
4.
그러나 죄의식, 전체적인 '양심의 가책'이라는 저 다른 '음울한 사실'은 도대체 어떻게 세상에 나타났단 말인가?─이 문제를 가지고 우리는 우리 도덕의 계보학자들에게로 되돌아가보자. 다시 한번 말하거니와─아니 내가 아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던가?─그들은 전혀 쓸모가 없다. 다섯 뼘 정도에 해당하는 단순한 '현대적' 경험만이 있을 뿐이다. 과거에 대한 지식도 없고, 과거를 알고자 하는 의지도 없다. 더욱이 역사적 본능도 지니고 있지 않ㅗ, 바로 여기에 필요한 '제2의 시각'도 지니고 있지 않으면서─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덕의 역사를 연구하고자 한다 : 그러한 결과로 끝나는 것은 당연한데, 이것은 단순히 진리를 다루기 어렵기 때문만은 아니다. 지금까지의 이들 도덕의 계보학자들은, 예를 들어 '죄Schuld'라는 저 도덕의 주요 개념이 '부채Schulden'라는 극히 물질적인 개념에서 유래되었다는 것을 막연하나마 생각해본 적이 있었던가? 아니면 형벌이 일종의 ^보복^으로 의지의 자유와 부자유에 관한 어떤 전제와도 무관하게 발전해왔다는 것을 막연하나마 생각해본 적이 있었던가?─ 그런데 오히려 '인간'이라는 동물이 '고의', '과실', '우연', '책임 능력'과 그 반대 개념들을 매우 원시적으로 구분하기 시작하고, 형벌을 측정할 때 이를 고려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먼저 ^고도의^ 인간화의 단계가 필요할 정도였다. 오늘날에는 넘나 진부해졌고 겉보기에는 자연스럽고도 어찌할 수 없는 저 사상, 도대체 정의감이 어떻게 지상에 나타났는가라는 문제를 설명해야 하고, "범죄자는 형벌을 받는다. 왜냐하면 그는 달리 행위할 수도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는 내용을 담지해야만 했던 사상은 극히 뒤늦게 달성된 인간의 판단과 추리의 교묘한 형식이다. 이 형식을 처음부터 있었던 것으로 잘못 여기는 사람은 고대 인류에 관한 심리학에 거친 손길로 폭행하는 것이 된다. 인류 역사의 오랜 기간을 통해 악행의 주모자가 자신의 행위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이유로^, 즉 오직 죄를 지은 자만이 벌을 받아야 한다는 전제 아래 형벌을 받았던 것은 ^아니다^ :─ 오히려 형벌은, 오늘날 역시 부모가 아이들에게 벌을 주는 것처럼, 고통스러운 피해에 대해 가해자에게 표출하는 분노로 가해졌던 것이다. 그러나 이 분노는, 모든 손해에는 그 어딘가에 ^등가물^이 있으며, 심지어 가해자를 ^고통^스럽게 해서라도 실제로 배상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관념에 의해 억제되고 변용되었다. 이 원시적으로 뿌리 깊은, 아마 이제는 더 이상 그 뿌리를 뽑을 수 없을 것인 관념, 즉 손해와 고통은 등가라는 관념은 어디서 힘을 얻었던 것일까? 나는 이것이 ^채권자^와 ^채무자^ 사이의 계약 관계에 있다는 사실을 이미 밝혔다. 이 계약 관계는 대체로 '권리의 주체'가 존재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오래된 것이며, 그 입장에서 보면 다시 매매, 교환, 통상, 왕래라는 근본 형식으로 환원되는 것이다.
5.
이러한 계약 관계를 눈앞에 생생히 그려본다는 것은 물론 앞에서 언급한 것으로 처음부터 예상할 수 있는 것이지만, 그러한 관계를 만들고 승인했던 고대 인류에 대해 많은 의혹과 저항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바로 이 관계에서 ^약속이 이루어지게 된다^. 바로 이 관계에서 약속하는 자에게 기억^하게^ 하는 것이 문제가 된다. 의심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여기가 냉혹함, 잔인함, 고통을 찾아내는 발굴장이 될 것이라는 사실이다. 채무자는 자신이 되갚을 것이라는 약속에 신용을 불러일으키기 위해서, 자신이 한 약속의 진지함과 성스러움을 보증해주기 위해서, 그리고 자기 자신에게는 상환을 의무나 책임으로 자신의 양심에 새기기 위해서, 계약의 효력은 그가 상환하지 못할 경우 채권자에게 그가 그 외에 '소유'하고 있는 어떤 것, 그 밖에 그의 권한에 있는 것을, 예를 들면 자신의 육체나 자신의 아내, 혹은 자신의 자유, 또는 자신의 생명 역시 저당 잡히는 것이다(혹은 특정한 종교적 전제가 있는 곳에서는 심지어 자신의 축복이나 영혼의 구원까지도, 마침내는 무덤 속의 평안까지도 저당 잡히는 것이다 : 이렇듯 이집트에서는 채무자의 시페는 무덤 속에서도 채권자 앞에서는 안식을 얻을 수 없었다 ─ 바로 이집트인에게서도 이러한 안식은 물론 중요한 의미가 있었다). 더구나 특히 채권자는 채무자의 육체에 온갖 종류의 능욕과 고문을 가할 수 있었다. 예를 들면, 부채 액수에 적합해 보이는 크기만큼의 그의 육체에서 살로 도려낼 수 있었던 것이다 :─ 오래전부터 곳곳에서는 이러한 관점에서 사지 하나하나와 신체의 각 부분을 정확하게, 부분저그로는 무서울 정도로 세세하게 ^합법적으로^ 가격을 산정해왔다. 로마의 12표법이 그러한 경우 채권자가 잘라낼 수 있는 분량의 많고 적음은 증요하지 않다("좀더 많이, 또는 좀더 적게 잘라낼지라도 그것은 불법이 아니다")라고 선포했을 때, 나는 이것을 이미 좀더 자유롭고 좀더 크게 계산하고 있는, ^로마^의 법률관을 나타내는 증거이자 진보라고 생각한다. 이 배상 형식 전체의 논리를 명료하게 해본다면, 이는 충분히 기묘하다. 등가는 다음과 같이 주어졌다. 즉 손해에 대해 직접적인 이익을 받는 대신 (즉 금전이나 토지, 어떤 종류의 소유물로 보상을 받는 대신) 채권자에게는 배상이나 보상으로 일종의 ^쾌감^을 누릴 권한이 주어졌다.─ 이는 자신의 권력을 무력한 자에게 마음껏 발휘할 수 있다는 쾌감이기도 하며, "악을 저지르는 즐거움을 위해 악을 저지른다"[주]15 육욕적 쾌락이기도 하고 폭행을 즐기는 것이기도 하다 : 이러한 즐김은 채권자의 사회적 지위가 낮고 천할수록 더 높게 평가되며, 채권자는 그것을 좀더 높은 신분에 있는 자가 맛보는 좋은 한입의 음식, 아니 그 맛보기로 가볍게 여길 수 있었다. 채무자에게 '형벌'을 가함으로써 채권자는 일종의 ^지배권^에 참여한다 : 그리하여 마침내 그 또한 한 인간을 '아래에 있는 존재'로 경멸하고 학대할 수도 있다는 우월감을─아니면 최소한 실제의 형벌권, 형벌 집행권이 이미 '당국'에게 넘어갔을 경우에는, 그 사람이 경멸당하고 학대받는 것을 ^보는^ 우월감을 한번 맛볼 수 있는 것이다. 보상이란 즉 잔인함을 지시하고 요구하는 권리를 가지도 있다는 데서 성립한다.
6.
'죄', '양심', '의무', '의무의 신성함' 등과 같은 도덕적 개념 세계의 발생지는 ^이^ 영역, 즉 채무법이다.─ 그 개념 세계의 발단은 지상에서의 모든 대사건과 마찬가지로 철저히 오랫동안 피로 물들었다. 저 세계는 근본적으로 피와 고문이라는 어떤 냄새를 단 한 번도 완전하게 씻어버린 적이 없지 않은가라고 덧붙여 말해도 되지 않을까? (심지어 늙은 칸트에게서도 그런 적이 없다{심지어 늙은 칸트에게서도 그런 냄새가 나지 않는가??}: 정언명법에는 잔인함의 냄새가 난다... ... ) 이와 마찬가지로 여기에서도 '죄와 고통'이라는 저 무섭고 아마도 풀어버릴 수 없게 된 관념의 결합이 처음으로 고정되었다. 다시 한번 물어보건대, 고통은 어느 정도까지 '부채'를 보상할 수 있는 것일까? 고통스럽게 ^만드는 것^이 최고로 만족을 주는 정도까지이며, 피해자가 손해에 대한 불쾌감을 함께 염두에 두면서, 손해를 이상한 반대의 쾌감과 바꾸는 정도까지이다 : 고통스럽게 ^만드는 것^─이것은 진정한 ^축제^였으며, 이미 말했듯이, 채권자의 신분이나 사회적 지위에 위배되면 될수록 더 높은 값을 지닌 어떤 것이었다. 이것은 추측하여 말하는 것이다 : 왜냐하면 이러한 지하에 파묻힌 일들을 밝히는 작업이 고통스럽다는 사실을 차치하더라도 철저히 규명하는 것은 힘든 일이기 때문이다. 이 경우 '복수'라는 개념을 그 와중에 서툴게 사용하는 사람은, 통찰을 좀더 쉽게 하기보다는, 오히려 더 덮어보리고 모호하게 할 뿐이다(─ 복수 자체는 실로 "고통스럽게 만드는 것이 어떻게 보상이 될 수 있는가?"와 같은 문제로 귀결된다). 어느 정도까지 ^잔인함^이 고대인의 성대한 축제의 환락을 이루고 있었는지, 그들의 거의 모든 환락의 구성 요소로 뒤섞여 있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잔인성을 향한 욕망이 얼마나 소박하고 순진하게 나타났는지, 바로 '사심 없는 악의'(또는 스피노자의 말로 하자면, 악의 있는 동정)를 그들은 얼마나 근본적으로 인간의 ^정상적인^ 속성으로 여겼고─따라서 양심을 단호하게 ^그렇다^라고 긍정하는 것으로 여겼는지, 이러한 사실을 온 힘을 다해 생각해보는 것은, 내가 보기에는 잘 길들여진 가축(말하자면 현대인, 말하자면 우리)의 섬세한 감각에, 더욱이 그 위선에 거스르는 일이다. 좀더 깊이 있는 안목을 가진 사람은 아마 오늘날에도 역시 인간의 가장 오래되고 근본적인 이러한 축제의 환락을 충분히 인식할 수 있을 것이다. 《선악의 저편》 229절에서(그 전에 《아침놀》 18절, 77절, 113절에서) 나는 고급 문화의 역사 전체를 일관되게 관통하는 (그리고 어떤 중요한 의미에서 생각해본다면, 심지어 역사를 형성하기까지 하는) 잔인함이 점점 더 정신화되고 '신성화'되는 것을 조심스럽게 지적했다. 어쨌든 사형, 고문, 이단자의 처형 없이는 가장 큰 규모의 제후의 결혼식이나 민족 축제를 생각할 수 없었고, 또 주저하지 않고 자신의 악의나 잔인한 조롱을 쏟아낼 수 있었던 사람 없이는 귀족적 가정 생활을 생각할 수 없었다는 것은 그리 먼 이야기가아니다(─ 공작 부인의 궁정에서 읽히고 있는 《돈키호테》를 떠올려보라 : 우리는 오늘날 《돈키호테》의 어느 부분을 읽어도 혀에 쓰디쓴 맛을 느끼며 거의 고문 당하는 듯한 가책을 갖는데, 이는 저작자나 동시대인들에게는 대단히 이상한 일이며 이해될 수 없는 일일 것이다.─ 그들은 이것을 책 가운데 가장 명랑한 책으로 전혀 양심의 가책 없이 읽었으며, 이 책을 읽고 거의 죽도록 웃었다). 고통을 보는 것은 쾌감을 준다. 고통스럽게 만드는 것은 더욱 쾌감을 준다.─ 이것은 하나의 냉혹한 명제이다. 하지만 그 밖에도 아마 이미 원숭이도 시인하게 될 오래되고 강력한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근본 명제이다 : 왜냐하면 원숭이는 기이한 잔인함을 생각해냄으로써 인간을 이미 충분하게 예고하고 있으며, 마치 인간의 '서곡을 연주하는 것' 같다고 설명되고 있기 때문이다. 잔인함 없는 축제란 없다 : 인간의 가장 오래되고 긴 역사는 이렇게 가르치고 있다─그리고 실로 형벌에서도 ^축제적인 것^이 많이 있다!─
7.
덧붙이자면, 나는 이러한 사상으로 삶의 권태라는 시끄럽고 삐걱삐걱 소리가 나는 물방아에 우리의 염세주의자들이 새로운 물줄기를 대는 데 도와줄 의도가 전혀 없다. 반대로 인류가 자신의 잔인함을 아직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던 그때가 염세주의자들이 존재하는 현재보다 지상에서의 삶이 더 명랑했다는 사실을 분명히 입증해야만 한다. 인간의 ^인간에 대한^ 수치가 커져가는 상황에 따라 인간을 뒤덮고 있는 하늘의 어둠은 점점 더 확산되었다. 피로에 지친 염세주의적 눈길, 삶의 수수께끼에 대한 불신, 삶에 대한 구토에서 나오는 얼음같이 찬 부정─이러한 것들은 인류의 ^최악^의 시대를 나타내는 표식이 아니다 : 이러한 것들은 늪이 존재할 때, 그에 속하는 늪의 식물들이 존재하는 것처럼, 오히려 세상에 알려진다.─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은 그 덕분에 '인간'이라는 동무이 결과적으로 자신의 모든 본능을 부끄럽게 여기게 된 병적인 유약화와 도덕화에 관한 것이다. '천사'(여기에서는 더 가혹한 용어를 사용하지 말자)가 되는 도중에 인간한 저 상한 위와 설태가 낀 혓바닥을 양육했으며, 이로 인해 인간은 동물적인 즐거움이나 순진함을 역겨워했을 뿐만 아니라, 삶 자체가 무미건조해졌다.─ 이렇게 해서 인간은 자기 자신 앞에서 때때로 코를 쥐고 서서, 교황 이노센트 3세와 함께 비난하면서도 자신이 혐오하는 것의 목록을 만든다 [불결한 생식, 모태에서의 구역질 나는 양육, 인간을 발육시키는 물질의 더러움, 지독한 악취, 침의 분비와 오줌과 대변의 배설']. 고통이 언제나 생존에 ^반대되는^ 논증 가운데 첫 번째 논증으로, 생존의 최악의 의문 부호로 활보해야만 하는 오늘날, 이와는 반대로 판단했던 시대를 떠올려보는 것이 좋으리라, 왜냐하면 사람들은 고통스럽게 ^만드는 것^ 없이는 지낼 수가 없었으며, 그 안에서 최고의 매력을, 삶에 이르는 진정한 유혹물을 보았기 때문이다. 아마도 그 당시─유약한 사람에게는 유혹의 말이 되겠지만─고통은 오늘날처럼 그렇게 고통스럽지 않았다. 가장 훌륭한 체질을 가진 유럽인들도 거의 절망하게 하는 심한 내부 염증에 걸린 흑인들(이들을 선사시대 인간의 대표로 본다면─)을 치료해 본 적이 있는 의사라면 적어도 그런 결론을 내리게 될 것이다. 흑인들에게서 내부 염증의 고통은 유럽인이 겪는 정도는 ^아니다^. (인간의 고통을 느낄 수 있는 감수성을 표시하는 곡선은 상층 문화에 속하는 만 명 내지 천만 명의 상층부를 경험하자마자, 실로 이상하게 갑자기 하강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나 개인도 지금까지 과학적 연구의 목적으로 해부용 칼로 연구된 모든 동물의 고통을 전부 합쳐도, 한 명의 신경질적인 교양 있는 여성의 하룻밤의 고통에 비하면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의심치 않는다.) 게다가 아마도 잔인함에 대한 쾌감 역시 사실은 사라질 필요가 없을 것이라는 가능성도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 : 다만 쾌감은 오늘날 고통이 더 심하다는 사정에 비추어 승화되고 섬세해지는 것이 필요하다. 그것은 말하자면 상상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으로 번역되어 드러나고, 그것들에게서는 가장 섬세하고 위선적인 양심에까지도 아무런 혐의를 일으키지 않을 만큼 오직 안심할 만한 명칭으로만 장식된 채 드러나야 할 것이다('비극적 연민'이란 그러한 한 명칭이며, '십자가에 대한 향수'라는 것도 또 하나의 다른 명칭이다). 사실 고통에 대해 사람을 분격하게 하는 것은 고통 자체가 아니라, 고통의 무의미함이다 : 그러나 고통 속으로 비밀스러운 구원 장치 전체를 집어넣어 해석한 그리스도교에게도, 모든 고통을 방관자적 입장이나 고통스럽게 만드는 자의 입장에서 해석할 줄 알았던 고대의 소박한 인간에게도 그러한 ^무의미한^ 고통이란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 숨겨지고 알려지지 않으며 목도되지 않은 고통을 세상에서 처리하고 이를 솔직히 부정할 수 있기 위해서, 당신의 인간들은 거의 신과 모든 높이와 깊이를 가지고 있는 중간 존재들을, 즉 숨겨진 곳에서 서성거리기도 하고 어둠 속에서도 보며, 흥미 있는 고통스러운 광경을 쉽게 놓치지 않는 그 어떤 존재를 발명할 필요까지 있었다. 그러한 발명 덕분에 그 당시 사람들의 삶은 언제나 스스로를 잘 이해했으며 스스로를 정당화하고 자신의 '재난'을 정당화하는 술책에 능통했다. 오늘날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아마 다른 보조적인 발명(예를 들어 수수께끼로서의 삶이라든가 인식 문제로서의 삶)이 필요할 것이다. "신이 그것을 바라보고 즐거워하는 재난은 모두 정당하다" : 선사적 감정의 논리는 이렇게 울려퍼진다.─이것은 진정 선사적 논리였을 뿐인가? ^잔인한^ 광경을 즐기는 친구로 생각된 신들─오, 이 태고의 관념 자체가 어느 정도까지 우리 유렵의 인간화에도 파고들어와 있는 것일까! 이 점에 관해서는 칼뱅이나 루터아 상의해보아도 좋다. 어쨌든 ^그리스인들^ 역시 그들 자신의 신들을 행복하게 해주기 위해서 잔인함의 즐거움보다 더 좋은 간식을 바칠 줄 몰랐다는 것은 확실하다. 당신은 도대체 호메로스가 자신의 신들로 하여금 인간의 운명을 내려다보게 한 것은 어떤 눈이었다고 생각하는가? 근본적으로 트로이전쟁과 그와 유사한 비극적이고 무서운 사건들은 어떤 궁극적 의미를 지니고 있단 말인가? 의심할 여지 없이 이것들은 신들을 위한 ^축제극^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 그리고 이러한 것에 대해서 시인이 다른 사람들보다 '신적인' 속성이 있는 한, 시인들을 위한 축제극이기도 했다 ... ... 후에 그리스의 도덕 철학자들이 도덕적인 논쟁이나 유덕자의 영웅주의나 자기 가책을 신의 눈이 내려다보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은 이와 같은 것이다 : '의무를 진 헤라클레스'는 무대 위에 올려졌으며, 그 자신도 그것을 알고 있었다. 목격자 없는 덕행이란 이 배우의 민족에게는 전혀 생각할 수 없는 것이었다. '자유의지', 즉 선악에서 인간이 절대적 자율성을 가지고 있다는 발명은 당시 유럽을 위해 처음으로 만들어진 저 대담하고도 숙명적인 철학자의 발명이었지만, 이는 무엇보다도 인간과 인간의 덕행에 대한 신들의 관심이 ^결코 고갈될 수 없다^는 생각을 인정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닌가? 이러한 지상의 무대에서 진실로 새로운 것, 진실로 전대미문의 긴장, 갈등, 파국은 결코 없어서는 안 될 것이다 : 완전히 결정론적으로 생각된 세계란 신들에게는 알 수 있는 세계이며, 결과적으로 곧 싫증이 나게 된다.─ 이러한 ^신들의 친구인^ 철학자들이 자신의 신들에게 그러한 결정론적인 세계를 요구하지 않은 것에는 충분한 이유가 있다! 고대 인간은 모두 연극과 축제 없이는 행복을 생각할 수 없었던, 근본적으로 공개적이고 근본적으로 명백한 세계로 '관중'을 세심하게 고려했던 것이다.─그리고 이미 말했듯이, 대단한 ^형벌^에도 실로 축제적인 것이 많이 있다! ... ...
8.
우리의 연구 과정을 다시 시작해본다면, 죄의 감정과 개인적인 의무의 감정은 이미 우리가 보아왔듯이, 그 기원을 존재하는 가장 오래되고 근원적인 개인 관계에, 즉 파는 자와 사는 자, 채권자와 채무자의 관계에 두고 있다 : 여기에서 비로소 개인이 개인과 상대했으며, 여기에서 비로소 개인인 스스로를 개인과 ^견주었다^. 이러한 관계를 이미 인정할 수 없을 정도로 저급한 문명은 발견된 적이 없다. 값을 정하고 가치를 측정하고 등가물을 생각해내며 교환하는 것─이것은 어떤 의미에서 사유^라고^ 할 수 있을 만한 인간의 원초적 사유를 미리 지배하고 있었다 : 여기에서 가장 오래된 종류의 명민함이 길러졌고, 마찬가지로 여기에서 인간이 다른 동물에 대해 가진 긍지나 우월감의 싹도 최초로 얻었다고 추정할 수 있을 것이다. 아마 '인간manas'이라는 우리의 용어도 바로 ^이러한^ 자기 감정의 그 무엇인가를 표현하는 것이리라 : 인간이란 가치를 재고 평가하고 측정하는 존재, '평가하는 동물 자체'로 묘사된다. 사고 파는 것은 심리적인 부속물과 더불어, 심지어는 어떤 사회 조직 형태나 집단의 시초보다 더 오래된 것이다 : 오히려 교환, 계약, 죄, 권리, 의무, 보상 등의 감정의 싹은, 동시에 힘과 힘을 비교하고 측정하고 계산하는 습관과 더불어, 개인의 권리라는 가장 초보적 형식에서 이제 가장 조야하고 원시적인 사회 복합체 (다른 유사한 복합체와 비교하여)로 ^이행^했다. 눈에 이제 이러한 관점에 초점을 맞추게 되었다 : 움직이기는 어렵지만 일단 움직이기만 하면 단호하게 같은 방향으로 계속 나아가는 고대인의 사유에 특유한 저 둔중한 일관성으로, 곧 "어느 사물이나 그 가격을 지닌다. ^모든 것^은 대가로 지불될 수 있다"는 중요한 일반화에 이른 것이다.─ 이것은 ^정의^의 가장 오래되고 소박한 도덕의 규준이며, 지상에서의 모든 '호의', 모든 '공정', 모든 '선한 의지', 모든 '객관성'의 발단이다. 이러한 최초 단계에서의 정의란 거의 동등한 힘을 지니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서로 타협하고 조정을 통해 다시 '합의'하려는 좋은 의지이다.─ 그리고 힘이 열등한 자에 관해 말하자면, 그들 상호간에 조정할 수 있도록 ^강제하는^ 선한 의지인 것이다.─
9.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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