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0월 1일 화요일

[발췌: 데이비드 그레이버, 가치이론에 대한 인류학적 접근] 한국어판 서문, 서론을 대신하여 (2009)

출처: 데이비드 그레이버, 가치이론에 대한 인류학적 접근: 교환과 가치, 사회의 재구성 (그린비 2009)


※ 발췌: "한국어판 서문" 중에서,

( ... ... ) 나는 오랜 스승 살린스(Marshall Sahlins)의 권고에 따라 그가 설립한 프리클리 패러다임 프레스의 팸플릿 시리즈를 위해 『아나키스트 인류학을 위한 단상들 (Fragments of an Anarchist Anthropology)』이라는 글을 쓴 바 있었는데 이 글로 인해 나는 "저항운동에 관심을 가진 인류학자"가 아니라 "아나키스트 인류학자"로 더욱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지금도 여전히 인류학과 사회운동이 서로로부터 실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당시에도 물론 나는 한여름 내내 구슬땀을 흘리며 그즈음 나를 흥분시켰던 반자본주의 운동진영의 정치적 문제의식을[,] 이미 알고 있던 인류학적 논의들과 결합하고자 노력한 바 있었다. 그러나 이 글을 무엇보다 정치적이 발언으로 읽혀지고 또 그 결과 나 역시 인류학자라기보다는 활동가로 더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나 자신의 바람과는 얼마간 무관한 일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한국에서 처음으로 소개되는 나의 주요 저작이 무엇보다 인류학 이론을 중심적으로 다루는 글이라는 사실이 내심 반갑고 만족스럽다. 그렇다고 해서 이 책이 나름의 정치적 함의를 갖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다. 사실상 모든 훌륭한 인류학 저술들은 단지 그들이 인간이 가진 가능성에 대한 우리 자신의 인식을 확장시킨다는 바로 그 이유만으로도 언제나 이미 충분한 정치적 함의들을 갖는다고 할 수 있다. 이 책은 1980년대와 90년대 동안 내가 시카고 대학에서 만날 수 있었던 대담하고 독창적인 인류학적 사유와 논쟁들의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곳에서 공부하는 동안 나는 지적 도전정신과 창조성을 진실로 독려하고 장려하는 스승들을 만나는 행운을 누렸다. 시카고 대학은 이런 점에 있어 최선의 형태와 최악의 형태가 기이하게 결합된 공간이었다고 할 수 있다. 지적 마초주의의 의미 없는 논쟁 및 학문적 경쟁이 판을 치고 있는 한편, 그곳에는 분명 사유와 개념을 신성한 것으로 간주하면서 학생들이 오직 지식과 사유 그 자체에서 가장 큰 즐거움을 얻도록 격려하는 분위기가 공존했기 때문이다. 이 책에 소개된 개념의 대부분은 당시의 수업들 혹은 시카고 대학 교정 곳곳의 작은 커피숍들에서 진행된 논쟁의 와중에 갑자기 떠오른 영감들, 노트의 여백에 아무렇게나 휘갈겨 두었던 그런 영감들로부터 발전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시카고 대학에서의 그 시간들은, 적어도 몇 년 간은, 분명 나에게 일종의 파라다이스였다고 할 수 있다. 

   당시의 나는 소박하고 순진하게도 바로 이것이야말로 대학 본연의 모습이며 학자의 주된 임무는 사유하고 토론하며 개념들을 생산하는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그러나 이후 곧 나는 많은 경우 현실은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학교는 운영하고 가르치고 경영하는 곳이며 사유, 특히 너무 많은 사유는 사실한 부적절한 일로조차 간주된다는 사실을 배워야만 했다. 예일 대학교에서 가르치던 시기 도안 나는 지위 높은 한 교수로부터 대단히 직설적으로 내가 책을 너무 많이 내고 학생들로부터 지나친 지지를 받고 있다는 점이 문제라는 지적을 받은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곳을 떠난 지금도 나는 여전히 그들이 더 골치 아프게 여겼던 것이 나의 정치적 활동이었는지 아니면 대학이란 무엇보다 앎과 사유를 추구하는 곳이라는 나의 뚜렷한 신념이었는지에 대해 결코 확신을 가질 수 없다. 나는 실로 가장 활력 넘치고 다재다능한 지적 동료들이 대학원 교육체계에서 부적절한 인물들로 평가받고 주변화되면서 그 재능을 소진하고 마는 사례들을 무수히 보아왔다. 이는 많은 점에 있어서 대학원 교육이 창의력을 증진시키는 대신 삶에 대한 불안감과 공포를 더 많이 조장하고 궁극적으로 학생들이 처음 배움에 자신을 투신하게 만들었던 앎의 즐거움 자체를 질식시키는 기능을 수행해 왔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나는 이 책을 무엇보다 이런 종류의 책을 쓰는 것을 가능하게 했던 학풍에 대한 헌사로 간주하고 싶다. 독자들 역시 내 개념과 제안들을 단순히 받아들이는 대신 이를 그들 나름의 새로운 개념과 제안 형성을 위한 발판으로 삼아 주기를 바란다.  위대한 사상가들을 위한 기념비를 세우거나 각 학파의 신념이나 입장을 방어하는 논쟁의 생산에만 몰두한다면 사회이론은 결국 그 존재의의를 상실하고 말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서 데카르트와 하이데거로 이어지는 대륙의 정통 교육 과정을 거친 소수의 엘리트만이 사유 체계의 개념을 생산해 낼 수 있고 그 외의 사람들은 모두 그들에 대한 주석가가 되고 마는 지적 변방의 현실에서라면 이는 더욱 더 절실한 경고라고 할 수 있다. 나는 인류학이야말로 이런 식의 고류한 헤게모니에 맞서 싸우면서 사유와 개념의 전지구적 민주화를 도모할 수 있는 최적의 학문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기세등등하던 신자유주의의 구호들이 슬그머니 꼬리를 내리고 있지만 그 대안은 딱히 확보되지 않은 현재의 역사적 상황에서 이런 식의 도전적 사유는 더욱 더 절실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이 어떤 정치적 의미를 갖는다면 나는 그것이 책에서 직접 제시된 개념이나 제안들보다는ㅡ사실상 그런 식의 직접적인 정치적 제안은 거의 없다고 할 수 있는데ㅡ오히려 비록 아직 그 궁극적 함의가 무엇인지는 대단히 불분명하더라도 새로운 종류의 정치·경제적 사유들이 가능하고 또 가능해야만 한다는 사실에 대한 주장에서 기인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익숙해진 질문들, 어떻게 하면 물질적 부를 최대화할 수 있을까 혹은 가장 공정한 배분의 방식은 무엇일까 하는 그런 질문들 대신 이제 새로운 질문들을 제기할 수 있어야만 한다. 예컨대 삶에서 진정 의미 있고 중요한 것을 스스로 정의할 자유를 누리면서 자율적으로 결정된 삶의 기본적인 물적 조건을 보장받을 수 있는 사회, 이를 추구하기 위해 함께 연대할 수 있는 사회, 가치나 선물, 교환 등의 익숙한 개념들이 어쩌면 전적으로 새롭게 정의될 수도 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모두가 궁극적으로 더 풍요로워지는 그런 사회를 위해 필요한 조치들이 무엇인가 하는 바로 그런 질문들 말이다.

데이비드 그레이버


※ 발췌: "서론을 대신하여"

( ... ) 많은 인류학자들이 오랫동안 가치이론의 필요성을 절감해 왔다. 다시 말해 서로 다른 문화들이 세계를 얼마나 다른 방식으로 정의하는지에 대한 이해(...)에 더하여, 서로 다른 문화들이 무엇을 아름답고 가치 있고 중요하다고 정의하는지에 대한 이론의 필요성이 대두되어 왔던 것이다.  혹자는 이를 의미가 어떻게 욕망이 되는지에 대한 검토라고 표현할 수도 있을 터이다. 이런 작업이 이루어진다면 인류학뿐 아니라 사회과학 일반에서도 악명 높던 숱한 난제들을 해결하는 데 커다란 도움이 될 것이다. 나는 적어도 이런 이론의 대략적인 밑그림을 그릴 수 있을지, 그리고 그것을 몇 년 전 썼던 또 다른 글[주1]에서 전개한 화폐의 본질 및 부, 권력에 대한 다른 몇몇 개념들에 연결할 수 있을지 검토해 보고 싶었다.
[주]1. D. Graeber, "Love Magic ad Political Morality in Central Madacascar, 1875-1990", ^Gender and History^ 8(3), 1996, pp. 94-117.
   그러나 글을 쓰는 과정에서 예상치 모한 일이 일어났다. 글을 전개할수록 점점 더 나의 가정이나 전제들이 오늘날 사회과학에서, 혹은 적어도 스스로를 대단히 정치적인 학문이라고 생각하는 그런 분과들(사회학, 인류학, 역사, 문화이론 등)에서 상식으로 인정하는 사실들과 완전히 배치된다는 점을 확인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 차이점들을 더 분명하게 추적하지 않을 수 없었고, 그에 따라 ( ... ) 이 책은 점점 더 정치 논문, 혹은 적어도 인류학과 정치학이라는 두 학문 사이의 관계에 대한 확장된 고찰의 성격을 띠어 가고 있었다.

   [일반적 역사에 대해 저널리스트들이 자명하다고 여기는 이해 방식]을 빌리자면, 20세기의 지난 수십 년간 많은 미국의 좌파들은 그들 주위의 모든 것과 세계의 다른 부분들이 계속해서 보수화되어 가는 동안 대학과 대학원으로 후퇴해 점점 더 알 수 없는 메타이론을 엮어 내고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해체해는 일에 투신해 왔다. 좀 거친 요약일지는 모르겠으나 이런 묘사가 전적으로 틀린 것만은 아닌 것 같다. 하지만 최근의 몇몇 사건들은 같은 시기의 역사를 전혀 다르게 기술할 가능성 역시 시사하고 있다. 지난 수년 간 세계 곳곳ㅡ그리고 다소 늦은 감은 있지만 미국 내에서도ㅡ 각종 사회 운동들 특히, 신자유의주의(...)에 반대하는 운동들이 빠르게 성장해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국 내에서 소위 좌파로 불리는 사람들은 이런 변화에 거의 아무런 역할도 담당하지 못했다. 사실 그 그룹에 속한다고 생각되는 사람들 중 상당수는 그런 운동의 존재에 대해서조차 아주 희미하게만 인식하고 있을 뿐이다. 사실 현대의 비판적인 메타이론들 일반에서 신자유주의가 논의의 주제였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는 별로 놀랄 만한 일도 아닐지 모르겠다.

   그렇다면 이유는 도대체 무엇일까? 나로서는 이런 비판이론들이 사실상 놀라울 정도로 여러 가지 지점에서 신자유주의의 문제를 둘러싼 현재의 여러 쟁점들을 앞서 보여주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예를 들어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개념을 보자. 스스로를 기꺼이 "포스트모더니스트"라고 부를 학자는 거의 없다는 점에서 이 단어는 실로 문제적 용어가 되었다.  ( ... ) 80년대 이후 포스트모더니즘을 둘러싸고 벌어진 일련의 논쟁들을 우리는 다소간 풍자적인 방식으로 다음과 같이 정리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1. 우리는 지금 포스트모던 시대에 살고 있다. 세계는 변했다. 이 변화에 대한 책임은 누구에게도 없다. 이는 그저 피할 수 없는 과정의 결과일 뿐이다. 이 변화에 대해 우리가 취할 수 있는 행동 역시 전혀 없다. 가능한 것은 단지 새로운 상황에 우리 자신을 적응시키는 것뿐이다.
  2. 포스트모던한 세계 속에서 집단적인 정치 행동을 통해 세계나인간사회를 변화시키려는 시도는 이제 더 이상 가능하지 않은 것으로 간주된다.
  3. 이런 상황은 역사의 진행 과정에서 인간 주체를 위한 공간을 거의 허락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완전히 절망할 필요는 없다. 개인적인 차원에서의 합법적 정치 행동은 여전히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창조적인 소비나 전복적인 정체석 형성 같은 것들을 통해서 말이다. 이런 개인들의 선택을 우리는 정치적인 것, 또 잠재적으로 해방적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미 밝혔지만, 이는 다소간 풍자적인 요약이다. 당시에 진행된 그 이 어떤 이론의 전개도 대체로 이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 대부분이 거의 예외 없이 앞서 제시된 세 가지 주제들{주장들?}을 공통적으로 변주하며 제기했던 것 역시 사실이다. 그러면 이제 이를 대중매체에서 흔히 "지구화"로 명명하는 현상에 대한, 주로 90년대 이후 형성된 다음의 논쟁들과 비교해 보도록 하자. [ "그러면 주로 90년대 이후 흔히 "지구화"로 명명하는 현상을 놓고 대중매체에 등장했던 주장들을 앞의 세 가지 주제{주장들?}와 비교해보자."  앞뒤 흐름상 이렇게 읽어야 적절할지도 모르겠다이 독자의 추측일 뿐이다. ]
  1. 우리는 지금 지구적 시장의 시대에 살고 있다. 세계는 변화했다. 이 변화에 대한 책임은 누구에게도 없다. 이는 단지 피할 수 없는 과정일 뿐이다. 이 변화에 대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 역시 아무것도 없다. 남은 것은 단지 새로운 상황에 우리를 적응시키는 것뿐이다.
  2. 이런 상황에서 집단적인 정치 핼동을 통해 사회변혁을 추구하려는 시도는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혁명은 불가능한 꿈이여 심지어 전체주의적 악몽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는 꿈임이 이미 입증되었다. 정치 영역의 선거를 통해 사회를 바꾸려는 생각 역시 "경쟁력"의 이름 아래 포기되어야 마땅하다.
  3. 이런 상황이 민주주의를 위한 여지를 조금도 남겨 두지 않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절망할 필요는 없다. 시장 원리에 입각한 행동, 특히 개인이 소비자로서 내리는 결정 자체가 민주주의, 장차 우리가 진정으로 갖추어야 할 민주주의의 형태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 두 논의 사이에는 하나의 커다란 차이점이 존재한다. 포스트모더니즘을 찬양하는 사람들은 과학이든, 인간성이든, 민족이든, 진리든, 혹은 그 무엇이든 간에, 모든 종류의 전체주의적 체제가 무너진 세계를 하나의 기정 사실로 받아들인다. 여기에는 이제 셀 수 없는 조각들로 파편화되 세계를 다시 이어붙일 그 어떤 거대 메커니즘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이제 사물들을 측정하고 평가할 단일한 가치 기준을 상상하는 것 역시 불가능한 일이 되었다. 그러나 이와는 달리, 신자유주의자들은 전례 없는 규모의 지구적 시장, 즉, 모든 물건과 대지, 인간의 능력과 관계를 포함해 지구상의 모든 것을 하나의 단일한 가치 기준에 종속시키는 역사상 가장 거대하고 획일적인 평가 시스템의 존재를 찬양한다.

  포스트모더니즘을 찬양하는 사람들이 묘사하는 상황, 즉 모든 것이 파편화된 상황이야말로 많은 점에 있어서 바로 이 거대 단일시장의 효과에 불과하다는 사실은 점점 더 선명해지고 있다. 여타의 총체적인 가치 체계들{holistic value systems ?}과 마찬가지로 단일시장 체계 역시 그 안에 포섭되지 않는 다른 모든 것을 회의하고 해체하는 경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놀랍게도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은 이런 사실을 눈치채지 못하고 있다. 대체 그 이유는 무엇일까? 그들이 요구하는 모든 것에 정면으로 대치되는 것처럼 보이는 그런 체계를 비판할 방법을 찾는 일이 그들에게는 왜 그토록 어려운 일일까?

  이는 아마도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스스로를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 사람으로 간주하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그들은 포스트모더니즘 운동을 위한 선언문 같은 것을 작성한 일이 없다. 그들은 자신들이 단지 이런저런 종류의 구조적 힘에 의해 이미 어쩔 수 없이 발생한 현상을 기술한 뿐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점에 있어서 그들이 보여 준 태도 역시 훨씬 더 흔한 또 다른 경향의 과장된 한 표현에 불과하다. 적어도 나로서는 이런 진단이야말로 현재의 무기력 상태에 대한 가장 합당한 설명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단언컨대, "구조적 힘"만으로는 우리가 원하는 결과를 생산할 수 없다는 사실이 명백해졌으므로 이제는 실질적인 대안에 대한 간구를 더 이상 회피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이를 위해서는 먼저 "우리"가 누구인지를 결정해야 한다는 언제나의 난제를 제쳐 두고라도 막대한 이론적 습관의 변화가 요청될 것이다. 이는 사람들이 이런저런 사회적 움직임의 일부로서 역사 과정에 의미심장한 방식으로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한 인정을 요구한다. 다른 세계는 단순히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분명 창조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울러 이 과제는 이 과정에서 지식인들이 담당해야 할 마땅한 역할이 무엇이며 그들이 어떻게 과거에 너무도 자주 저질렀던 어리석은 분파적 독단주의에 빠지지 앟고 그 역할을 수행할 수 있을지에 대한 숙고 역시 포함하게 될 것이다. ( ... ... )

   ( ... ... ) 나는 여전히 만약 우리가 신자유주의 철학이라고 불릴 만한 그 무엇, 또 인간 조건에 대한 신자유주의의 가장 기본적인 가정들에 대한 대안을 찾고 있다면, 가치이론에 대한 고찰이 하나의 유익한 출발점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만일 우리가 가능한 최대한의 물질적 부와 쾌락, 권력을 추구하는 개인들이 아니라면, 우리는 과연 어떤 존재들로 정의될 수 있을 것인가? 이 책의 첫 세장은 과거 사회이론가들이 이런 문제를 어떻게 다뤄 왔으며 그들이 봉착하곤 했던 막다른 국면이 무엇이었는지를, 아울러 일견 혁신적인 것처럼 보이는 최근 이론들이 실제로는 얼마나 많은 경우 과거의 오래된 딜레마를 반복하고 있는지를 검토하는 장이다. 물론 그들 대부분이 정작 그들이 그런 딜레마를 반복하고 있을 뿐이라는 사실을 전혀 깨닫지 못한 채로 말이다. 나는 이상의 검토를 내가 이제부터 "헤라클레이토스적 전통"이라고 부를 대안적 지적 입장을 제시하는 것으로 마무리지을 것인데, 이는 일견 고정된 사물처럼 보이는 대상을 운동의 양태로서 [인식하고,] 고착된 "사회구조"처럼 보이는 것을 인간 행위의 양식으로 인식하는 전통을 의미한다. 이런 지적 전통에 입각하여, 나는 가치특정 행위가 더 큰 사회적 총체성에 통합되는 과정에서 행위자에게 의미 있는 것으로서 인식되는 방식으로 규정되어야 한다고 주장할 것이다. 많은 경우 문제의 총체성이 주로는 행위자의 상상 속에서만 존재하는 것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아울러 나는 이런 주장들을 맑스의 개념드에 대한 다소 특이한 독해에 의지해 전개할 것이다.

   책의 후반부에서는 교환과 사회적 창조성이라는 두 주제를 좀 더 집중적으로 다룬다. 이 부분은 「비즈(beads)와 화폐: 재화와 권력 이론을 위한 소기」[주2]라는 제목으로 이미 발표된 바 있는 논문으로 시작되는데 이 글에서 나는 왜 화폐로 사용되는 사물들(비즈나 조개껍데기, 금, 은 등등의)이 많은 경우 장식물 이외의 용도를 갖지 않는 물건들로 구성되는지를 탐구한 바 있었다. 이 글에서는 몇몇 인류학적 사례 연구를 자세히 소개하는데 우선 17세기 아메리카 북동부 지역의 왐펌(wampum)에서부터 프랑스 인류학자 마르셀 모스(Marcel Mauss)에 의해 유명해진 트로브리안드(Trobriand) 군도 및 마오리(Maori),콰키우틀(Kwakiutl)족의 "선물경제"에 대한 재검토,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 자신의 현장 연구 결과인 마다가스카르 메리나(Merina) 왕국의 마법과 왕실 제의들에 대한 자료가 그것이다. 이 과정에서 나는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모스의 몇몇 개념들, 특히 혁명이론의 개발에서 인류학이 담당할 수 있는 역할에 대한 그의 신념을 좀 더 부각시키고 발전시키려고 노력했다. 많은 점에서 모스의 이론은 맑스의 이론에 대한 완벽한 상보물이라 할 만하다. 맑스가 자본주의에 대한 철저한 비판에 투신했다면 모스는 궁극적으로 비교인류학의 성과를 통해 자본주의에 대한 대안적 비전을 제시하는 것에 더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양자 모두는 너무 극단적으로 추구될 경우 초래할 나름의 위험을 갖고 있다. 만약 무비판적인 열정만으로 모스의 기획을 밀고 나간다면 필시 권력의 문제를 백안시하는 순진한 상대주의로 귀착하고 말 것이다. 그러나 만일 대안적인 비전의 추구 없이 비판의 기획에 몰두하다 보면 사회 현실을 온전히 권력과 지배로 점철된 것으로 인식하고 회의주의에 빠진 나머지 변화가 어떻게 가능할 것인지를 상상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해지고 말 것이다. 나는 바로 이것이야말로 정확히 1970년대와 80년대 내내 비판이론에 있어났던 현상이며, 그처럼 많은 포스트모더니즘 이론들 신자유주의적 반동이 각인된 방식이라고 주장하고자 한다.
[주]2. D. Graeber, "Beads and Money: Notes toward a Theory of Wealth and Power", American Ethnologist 23, 1996, pp. 1-31
   ( ... ... ) 이 책의 결론은 사실 익숙한 사파티스타들의 구호처럼 "신자유주의에 저항하고 인간성을 회복하자"는 일종의 호소에 다름 아니다. 아울러 이 책은 인간적인 사회과학, 다시 말해 그것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과학"이라는 개념에 진정 가치 있는 모든 것을 다 포기하지 않는 그런 사회과학에 대한 상상을 적어도 시작이라도 해보려는 시도라고 할 수 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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