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홍식, 「브로델이 들려주는 자본주의라는 이름의 히드라 이야기」
※ 다음 역서의 해제에서 일부를 발췌:
[이전 소절: Ⅰ. 삶과 이야기, 그리고 시간] 누구나 삶이 있고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린아이의 태를 벗은 자식에게 “나는 이렇게 살았단다”라고 이야기할 때도 있고, 먼 조상이 어떻게 살았다는 이야기를 전해들을 때도 있습니다. 나의 삶이든 남의 삶이든, 삶을 이야기하는 방식에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 중략 ...) 개인의 삶이든 어느 사회의 삶이든 무엇이 변했고 무엇이 변하지 않았는가 하는 것은 그 삶의 내부를 들여다보는 중요한 관점이 될 수 있습니다. 가령 우리는 밥을 먹고, 자동차를 타며, 스마트폰을 쓰면서 살고 있습니다. 밥(즉 쌀)과 자동차, 스마트폰은 그저 생활에 필요한 물건일 뿐이지만, 우리가 사는 삶의 시간대를 말해주기도 합니다. (... 중략 ...) 세월을 이기는 장사는 없다고들 말하지만, 이처럼 어떤 삶의 요소나 생활양식, 사회관계 혹은 그 무엇이 됐든 간에 시간의 세파에 굴하지 않고 수백 년 심지어 수천 년에 걸쳐 오래 지속되는 현상을 가리켜, 브로델은 ‘장기 지속longue durée’이라는 단순한 말로 불렀습니다. 그는 과거가 됐든 현재가 됐든 인간의 삶을 이해하려면 변하지 않고 오래 지속되는 것들, 그러한 삶의 요소들을 바탕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또한 인간은 과거에서 현재로 또 미래로 이어지는 단선적인 시간을 살고 있는 게 아니라고 보았습니다. 우리는 지금 분명히 오늘을 살고 있지만, 동시에 수천 년을 이어온 시간과 그보다 덜 오래된 시간, 바로 며칠 전부터 시작된 시간이 겹겹이 포개져 있는 다중적(혹은 중층적) 시간대temporalité multiple를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Ⅱ.‘구조’라는 이름의 인간의 조건을 세월의 무게에서 찾다
브로델이 역사를 이해하는 실타래로 장기 지속을 마음속에 품었던 것은 그의 대표적인 두 가지 저작 중 하나로 16세기 지중해의 역사를 구상하던 1940년대 초반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제2차 세계대전의 포성이 사라지기 전 독일의 포로수용소에서 초고를 쓰기 시작한 이 책은 브로델의 박사 학위 논문이기도 했는데, 전쟁이 끝나고 서너 해 지나 1949년에 초판이 나왔습니다. 이어서 브로델은 마르크 블로크와 뤼시앵 페브르가 일군 역사 학술지 『아날: 경제, 사회, 문명
Annales: Economies, Sociétés, Civilisations』의 편집을 1956년부터 맡아 지휘하며(1956~1968), 고등학술연구원 제6부의 학장(1956~1972)으로서 활동합니다. 브로델이 정치와 외교를 비롯한 사건 중심의 역사를 고집하던 기성 ‘소르본학파’에 강력하게 반발하는 동안 정력적인 젊은 역사학도들이 휘하에 모여들어 아날학파 2세대를 형성했고, 『아날』을 이끌던 12년 사이에 브로델은 마침내 프랑스 역사학계의 중앙 무대를 점령하게 됩니다.
이 시기 초반, 아마도 그의 의욕이 가장 불타올랐을 즈음인 1958년에 장기 지속을 역사학뿐 아니라 모든 사회과학 방법의 중심에 두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매우 논쟁적인 논문을 『아날』에 발표합니다. 브로델이 「역사와 사회과학: 장기 지속」이라고 이름 붙인 이 글을 보면 역사를 “시간 지속의 변증법dialectique de la durée”이라고 표현하는 대목이 눈에 뜨입니다. 무슨 말인지 쉽게 알아듣기 어렵지만, 궁금증을 잠시 접어둔 채 그의 말을 몇 마디 들어보면 이렇습니다.
인간의 삶을 구성하는 다중적이고 ^모순적contradictoire^인 여러 가지 시간, 그처럼 사회적으로 진행되는 시간의 지속[은] 과거의 실체일 뿐 아니라 씨실과 날실처럼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적 삶을 짜는 피륙[입니다.]……빠르게 지나가는 시간과 천천히 흐르는 시간, 이 둘 사이에는 활발하고 밀접한 ^대립opposition^이 끊임없이 일어납니다. 우리 역사가들이 보기에 이러한 대립이야말로 사회적 실재의 핵심에 존재하며 다른 어느 요소보다도 중요한 것입니다. 과거가 됐든 오늘의 현실이 됐든, 모든 사회과학의 방법론에서 이 같은 사회적 시간의 다중성을 선명하게 의식하는 것이 필수 불가결한 일입니다……우리가 1558년에 있든 아니면 1958년에 있든, 우리를 둘러싼 세계를 파악하고자 한다면 세계를 움직이는 갖가지 힘과 조류, 움직임의 계층적 질서를 정의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들을 전부 합쳐서 다시 이해해야 합니다. 그렇게 연구하는 각 순간마다 오래 이어지는 움직임과 짧은 움직임을 구분해야 할 것입니다. 짧은 움직임은 바로 가까운 근원에서 시작된 것이고, 오래도록 이어지는 움직임은 멀리 떨어진 과거의 시간에서 비롯된 것입니다……지금 우리가 경험하는 각각의 ‘현실’ 속에는 근원과 리듬이 서로 다른 움직임들이 뒤섞여 있습니다. 즉 오늘이라는 시간은 어제 시작된 것이기도 하고, 그저께 시작된 것이기도 하며, 까마득한 옛날에 시작된 것이기도 합니다. (Fernand Braudel, “Histoire et sciences sociales: La longue durée”, Annales: Economies, Sociétés, Civilisations, 13e année, N. 4(1958), 726, 735쪽.)
독자와 함께 새겨 읽고 싶어서 ^모순적^이라는 말과 ^대립^이라는 말을 강조해 표시해봤습니다. 바로 전에 접어둔 궁금증을 이런 말들과 함께 풀어볼 수 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문맥에서 모순이라는 말은 ‘하나의 체계 속에 묶여 있지만 서로 충돌한다’는 뜻으로 이해하면 좋다고 봅니다. ‘대립’과 거의 같은 뜻입니다. 그러니까 브로델은 아주 오래전에 시작되어 지속되는 시간과 얼마 전에 시작된 시간이 서로 겹쳐 있을 뿐 아니라, 그것들끼리 서로 충돌하고 대립한다(즉 싸운다)고 생각했습니다. 서로 다른 시간들끼리 충돌한다니, 묘연하게 들리기도 하지만 달리 생각해보면 이렇게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무슨 일이든 늘 하던 대로 하자는 사람이 있고, 다른 방식으로 바꿔보자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생활양식이나 사고방식이 오랫동안 습관처럼 굳어지게 되면 스스로를 유지하려는 힘이 붙게 됩니다. 어떤 이유에서 과거의 생활양식이나 사고방식을 바꾸려는 움직임이 생기면, 오랜 시간 관성을 얻은 힘과 새로 등장한 힘 사이에 충돌과 반목이 생기기도 하고 절충과 타협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옛것을 유지하려는 힘은 긴 시간대의 힘이라고 볼 수 있고, 새것으로 바꾸려는 힘은 짧은 시간대의 힘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사실 우리 주위의 갖가지 일들을 이러한 시각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수십 년 전 어느 전자회사의 일이었는데, 그때는 제품을 설계하는 컴퓨터 지원 설계CAD를 2차원 방식으로 썼다고 합니다. 2차원 방식으로 CAD를 쓰면 설계하는 도면 하나하나에서 다뤄야 할 변수는 단순하겠지만, 실제 조립 과정에서 결합되어야 할 각 부품의 정밀도를 맞추기 어려울 것입니다. 반면 3차원 방식으로 CAD를 쓰면 서로 결합될 각 부품의 정밀도를 높일 수 있겠지만, 다양한 관측점을 반영해 각 도면을 작성해야 하는 만큼 설계 업무의 복잡도가 훨씬 높아질 것입니다. 결국 경영 혁신 부서에서 3차원 CAD의 도입을 추진했는데, 현장의 엔지니어들은 2차원 CAD의 사용을 계속 고집해서 최종적으로 3차원 CAD를 실제 업무에 적용하는 데 만만치 않은 진통과 시간이 걸렸다고 합니다. 아마도 이전과 전혀 다르고 복잡한 방식의 업무를 수용하는 데 따르는 엔지니어들의 부담이 적지 않았고 관련 부서 사이의 업무 조정도 쉽지 않았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즉 2차원 CAD라는 작업 방식의 주변에는 오랜 관습에서 형성된 긴 시간대의 힘이 포진해 있었고, 여기에 3차원 CAD가 도전장을 내고 싸움을 하다가 결국 짧은 시간대의 힘이 승리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또 우리 사회에서 쓰레기를 분리수거한 지는 얼마 되지 않으니, 재활용 기준에 따라 분리수거해 쓰레기를 처리하는 행위는 짧은 시간의 힘이고, 아무렇게나 버려 한꺼번에 매립해버리는 행위는 오랜 시간의 힘인 셈입니다. 한동안 분리수거 체계가 확대되는 듯하더니 얼마 전부터 각 생활 거점에서 분리수거한 쓰레기들도 중간 처리 과정에서 다시 섞여서 매립장으로 간다는 이야기가 많이 들립니다. 처음에는 짧은 시간의 힘에 밀리는 듯했던 오랜 시간의 힘이 다시 승리하는 형국입니다. 물론 분리수거가 잘 자리 잡지 못하는 이유는 분리수거가 유발하는 추가적 비용을 쓰레기를 처리하는 전체 시스템의 효율을 통해서 상쇄할 만한 정책의 체계와 실생활의 개조가 따르지 못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처럼 쓰레기 처리를 둘러싼 구조적 문제는 시간의 문제와 전혀 무관해 보이지만, 긴 시간과 짧은 시간이 혼재하는 중층적 시간대라는 견지에서 각 시간대가 표상하는 힘의 관계로 바꾸어 바라볼 수 있을 것입니다.
좀 더 시야를 넓혀 보면, 역사상 일어났던 모든 혁명은 짧은 시간의 힘이 긴 시간의 힘과 격전을 치르며 승리한 사례들입니다. 그만큼 엄청난 에너지가 수면 아래에 오랫동안 잠재해 있다가 짧은 기간 안에 빠른 속도로 응집해서 폭발했음을 뜻합니다. 실패한 혁명은 반대로 빠른 속도로 응집하는 짧은 시간의 힘이 긴 시간의 힘에 굴복한 셈입니다. 이렇게 보면 “빠르게 지나가는 시간과 천천히 흐르는 시간 사이에 활발하고 밀접한 대립이 끊임없이 일어난다”는 브로델의 말은 충분히 납득할 만합니다. 또한 역사를 ‘시간 지속의 변증법’이라고 했던 말도 이해할 만합니다.
따지고 보면 시간이란 것은 객관적 실체가 전혀 없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시간은 항상 관측자 자신도 아니고 시간 그 자체도 아닌 제삼의 무엇을 참조점으로 삼아 ‘변화를 정의’할 때에만 ‘존재(혹은 현상)’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해가 뜨고 지고 달이 차고 기우는 것을 보고 시간의 흐름을 알 뿐입니다. 시간의 흐름을 알려주는 시계 역시 시간 그 자체와는 다른 제삼의 무엇을 참조점으로 삼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제삼의 무엇은 해와 달이 될 수도 있고 지구의 자전을 측정하는 모종의 기계적 시스템이 될 수도 있겠지만, 문화와 관습은 물론 우리 주변에서 변화하는(혹은 다른 것들이 변하는 와중에도 변화하지 않는) 온갖 것들이 다 제삼의 참조점이 될 수도 있습니다. 브로델은 시간을 알기 위해 제삼의 참조점을 잡는 인식의 방향을 뒤집어서 사회적 실재를 알기 위해 시간을 참조점으로 삼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 참조점이 바로 중층적 시간대라는 ‘시간의 지도’인 셈입니다. 거의 아무런 변화도 없이 오래 지속되는 긴 시간대가 있고 그 위로 좀 더 빠르게 변화하는 시간대, 또 더욱 빠르게 변화하는 시간대가 공존하는 그 지도 위에 관찰 대상으로 삼는 갖가지 사회적 실재를 옮겨놓자, 그러고 그것들이 어떤 관계를 드러내는지 들여다보자는 것입니다.
보통 우리 눈에 잘 띄고 우리의 관심이 쏠리는 것들은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새로운 것들입니다. 즉 빠르게 지나가는 시간 속에서 벌어지는 일들입니다. 브로델은 그러한 단기적 시간대에 주목하는 역사를 ‘표층의 역사’라고 봅니다. 하지만 이 세계의 배후에는 천천히 흐르는 시간 속에서 장기 지속하는 ‘심층의 역사’가 자리 잡고 있다고 봅니다. 이러한 역사는 수백 년이 지나도록 거의 변화가 없어서 기껏해야 두 세대 남짓한 기간 동안 살다 가는 개인이나 집단이ㅡ행동하는 입장에서든 관찰하는 입장에서든ㅡ거의 의식하지 못할 만큼 깊은 심층의 세계에 가려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엄연히 존재하는 역사라는 것입니다. 엄연히 존재할 뿐 아니라 보이지 않는 밑바닥에서 표층의 역사를 떠받치고 또 제약하면서 천천히 밀고 나가는 육중한 힘을 행사하는 실체라고 브로델은 생각합니다. 이렇게 장기 지속하는 역사가 만들어내는 심층의 세계는 브로델에게서 크게 세 가지 의미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하나는, 인간의 조건을 결정하는 구조는 긴 시간의 흐름 속에서 만들어진다는 것입니다. 자연환경처럼 그냥 인간에게 주어진 조건이든 아니면 인간이 만들어내는 사회적 활동이든, 시간의 파괴력을 이겨내고 오래도록 존속하는 요소들이 결국 인간의 삶을 제약하기도 하고 떠받치기도 하는 여러 가지 구조물로 굳어진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 구조 안에서 살 수밖에 없는 인간이 그 구조가 어떤 구조인지 쉽게 파악하기 어려울 거라고 짐작할 수 있습니다. 달리 생각하면, 인간의 조건을 결정하는 구조는 어느 날 갑자기 생기는 것도 아니고, 선험적인 개념으로 파악할 수 있는 것도 아니며, 오로지 장기 지속의 역사 속에서 찾아야 한다는 말도 됩니다. 브로델이 역사학계는 물론, 사회과학 일반에 던졌던 가장 중요한 문제제기는 바로 이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아래에 장기 지속과 구조에 대해 비교적 명료하게 언급한 구절을 인용해봅니다.
구조라고 하면, 사회 현상을 관찰하는 사람들은 사회적 실재와 여러 부류의 사람들 사이에 형성된 무언가의 조직이나 체계 혹은 상당히 견고하게 굳어진 일련의 관계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역사가들이 보기에도 구조란 무언가의 결합이고 건축물과 같은 모습이겠지만, 그보다는 시간이 흘러도 쉽게 마모되지 않고 아주 오랫동안 지속되는 무언가의 실재를 뜻합니다. 그와 같은 구조들 중에는 오랜 시간 존속해서 세대가 수도 없이 바뀌어도 변함없이 유지되는 구조가 있습니다. 그러한 구조들은 역사에 멍에를 씌웁니다. 역사의 흐름을 옥죄고 흘러갈 방향을 결정하지요. 그러한 구조들보다 쉽게 사라지는 구조들도 있습니다. 어쨌거나 그러한 구조는 모두가 디딤돌로 작용하기도 하고 장애물로 작용하기도 합니다. 장애물로 작용할 때는 인간으로서 애써 봐도 좀처럼 넘어설 수 없는 한계와도 같습니다. 수학적으로 말하면 일정한 조건의 무수한 선분들을 외곽에서 바싹 감싸는 포락선 같은 것입니다. 지형적으로 결정된 틀이라든가 여러 가지 생물학적 조건, 혹은 생산성의 한계를 넘어서기가 얼마나 어려울지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나아가 이런저런 정신적인 한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컨대 심성의 틀 역시 장기 지속하는 감옥입니다. (Fernand Braudel, “Histoire et sciences sociales: La longue durée”,
Annales: Economies, Sociétés, Civilisations, 13e année, , N. 4(1958), 731쪽.)
단순히 생각하기에도 어떤 환경이나 제도, 생활양식 같은 것이 수백 년 세월의 무게를 이겨낼 만큼 질기다면 삶의 다른 요소들과 얼기설기 결합하며 여러 가지 사회적 구조물로 진화하게 될 거라고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구조가 존속하는 동안 인간은 그 구조의 힘에 구속(혹은 제약)될 수밖에 없고 그에 기대서 살아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위 인용문의 끝에서 지리적 제약이라든가 (아마도 생태계의 순환이나 분포, 또 질병을 포함하는 뜻에서) 생물학적 조건을 대표적인 구조로 예시하고 있습니다. 얼핏 보기에 위 문맥에서 브로델은 장기 지속을 거의 구조의 동의어처럼 쓰고 있는 듯합니다. 사람의 생각을 제한하는 이러저러한 정신적 한계라든가 오랫동안 굳어진 심성의 틀을 장기 지속하는 ‘감옥’이라고까지 말하는 걸 보면 그렇습니다. 하지만 장기 지속이 꼭 구조를 뜻하는 것만은 아닌 듯합니다. 다음 대목에서 좀 더 살펴봅니다.
둘째, 장기 지속하는 심층의 세계에서 찾아볼 수 있는 또 다른 의미는, 브로델이 본격적으로 연구했던 주제는 아니지만 반복적으로 강조하는 무의식과 관련됩니다. 사실 심층이 뜻하는 큰 부분이 무의식이기도 합니다. 또한 장기 지속하는 심층의 세계를 말하고는 있지만 딱히 구조를 뜻한다고 보기 어려운 내용과 관련됩니다. 구조를 뜻하는 장기 지속과 어떤 점에서 같고 또 다른지 음미해보기 위해 상당히 길게 인용해봅니다.
(... 중략 ...)
이 인용문에서 브로델은 겹겹이 포개져 있는 다중적 시간대를 이야기하고 있고, 그중에서도 장기 지속하는 심층의 삶이 우리가 의식하기 어려운 무의식의 깊은 곳에서 살아 움직인다고 말합니다. 또한 그렇게 일상적 관행이 되어버린 ‘물질생활’이 “우리 삶을……옥죄기”도 하지만 인간의 역사 전체를 밀고 가는 ‘힘’이라고도 이야기합니다. 장기 지속을 말하고 있는 것은 분명한데, 건물의 골격처럼 단단히 굳어버린 ‘구조’만을 강조하는 이야기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그보다는 무의식 세계에 가려 눈에 잘 보이지 않지만 어마어마한 힘으로 그 구조 자체를 만들어내고 구조 전체를 들어 나르며 매우 더디지만 항상 움직이는 거대한 힘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생각해보면, 장기 지속하는 심층의 역사는 이중적 의미를 지닌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인간의 조건을 결정하는 구조를 뜻하는 첫 번째 의미도 있지만, 구조 자체를 만들어내고 또 움직이는 거대한 동력을 뜻하는 두 번째 의미도 있습니다. 집이라는 구조물과 그 속에서 사는 인간의 모습에 비유하자면, 한번 지어놓은 집의 골격은 손대지 못하고 기껏해야 창문틀이나 바꾸고 벽지를 새로 바르며 사는 인간의 모습도 있겠고, 같은 집에 살면서도 야금야금 벽돌 하나씩 새로 쌓아서 새집을 짓는 인간의 모습도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두 번째 인간의 모습을 긴 시간을 두고 연속 촬영한 필름을 고속으로 재생할 때 드러나는 모습이 장기 지속의 두 번째 이미지라고 이해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총알같이 왔다 갔다 하는 인간의 동선 주위에 전에 없던 기와집이 새로 나타나고 처음에 있던 초가집은 창고나 마구간으로 변해가는 광경이 드러날 것입니다.
이와 같이 장기 지속과 그 심층의 역사를 이중의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 어찌 보면 당연한 것도 같지만, 달리 보면 이야기가 원점으로 돌아간 듯한 느낌도 듭니다. 처음에는 좀처럼 변하지 않는 구조라는 의미를 장기 지속에 부여하다가, 나중에는 그 구조를 포함해서 역사 전체를 밀고 가는 힘, 즉 변화의 동력이라는 의미를 부여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브로델에 관한 국내외 자료를 어느 정도 살펴보면, 그가 말하는 장기 지속이란 구조와 구조라는 감옥에 갇혀 옴짝달싹할 수 없는 인간을 뜻한다고 풀이하는 자료가 대부분입니다. 브로델이 말했던 장기 지속을 ‘장기 지속=구조=감옥’으로 이해하는 입장에서는 제가 풀이하는 장기 지속의 두 번째 의미가 지나친 해석으로 보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두 번째 의미를 추출한 바로 위 인용문은 브로델이 ‘물질생활’에 국한해서 이야기했던 것인데, 그중 마지막 구절ㅡ“인간의 역사 전체를 밀고 나가는 힘”ㅡ을 너무 확대해서 이해하는 오류를 범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사실 첫 번째 의미에서 인용한 구절은 브로델이 1949년 『지중해』 초판을 쓰고 1966년 그 재판을 쓰기 전 1958년 논문에서 했던 말이고, 두 번째 의미에서 인용한 구절은 1976년 미국 존스홉킨스 대학교에서 강의했던 내용이니 1967년 『물질문명, 경제, 자본주의: 15~18세기』 초판을 쓰고 1979년 재판을 쓰기 전에 했던 말입니다. 그러니까 두 인용문 사이에 약 20년의 세월이 흐르기도 했거니와, 브로델의 관심 주제가 많이 달라졌을지도 모릅니다. 게다가 그는 핵심 용어마저도 엄밀한 용어 정의는 피한 채 대략의 특징을 위주로 방대한 사료를 동원하는 것으로 유명하고, 그 스스로도 엄밀한 정의는 불필요할 뿐 아니라 해롭기까지 하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주] 그러니 읽는 사람이 알아서 읽어야 할 부분이 꽤 많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도 그럴 것이, 본 『자본주의의 동학』의 마지막 장 끝부분에서 브로델은 “역사는 항상 새로 시작되며 흘러갑니다. 역사는 늘 스스로 자신을 만들어내고 또 자신을 극복하면서 흘러갑니다”라고도 말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주] “나는 결코 정의하려고 애쓰지 않습니다. 적어도 내 생각을 펼쳐가는 관점에서는 그렇습니다. 미리 정의해두는 행위는 전부 개인적인 희생과도 비슷합니다……경제학자 프랑수아 페루처럼 엄밀하게 정의하게 되면 토론을 중단시키게 됩니다. 정의가 확정되고 나면 더 이상 토의를 전개할 수 없습니다. 최근의 저서 『프랑스의 정체성』 제1권을 저술할 때도 책의 마지막 쪽에 도달했을 때에야 프랑스의 정체성이란 말을 정의할 수 있었습니다.” 브로델이 숨을 거두기 두 달 전에 했던 말이다. Une leçon d’'histoire de Fernand Braudel(Châteauvallon, Journée Fernand Braudel, 18~20 October 1985), Paris: Arthaud-Flammarion. 다음 자료에서 재인용. CHENG-CHUNG LAI(2000), “Braudel’s Concepts and Methodology Reconsidered”, The European Legacy, Vol. 5, No. 1(2000), 65~86쪽.
그야 어찌 됐든, 장기 지속과 구조 사이에는 ‘장기 지속은 곧 구조를 뜻한다’라고만 이해하기 곤란한 ‘딜레마’ 같은 것이 있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오랜 세월의 무게가 누적되어 형성되는 게 구조라면, 그런 구조를 만들어내는 오랜 세월의 정체는 도대체 무엇일까요? 오래도록 변하지 않는 구조를 만들어내고 나서 역사의 무대에서 퇴장하는 것일까요? 만약 그렇게 생각한다면, 장기 지속이란 것을 외생 변수로 간주하는 또 하나의 구조 결정론이자 역사 밖에서 역사를 설명하는 형이상학이 되고 말 것입니다. 따라서 장기 지속하는 심층의 역사는 두 가지 의미를 모두 지닌다고 볼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한편, 브로델은 “우리는 심층의 역사를 발견하지 못합니다. 단지 우리의 생각으로 비추어볼 뿐입니다”라고도 말합니다. 앞서 했던 논의를 괜히 했다고 느낄 만큼 김빠지게 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렇지만 이 이야기에서 장기 지속과 심층의 역사에 대한 세 번째 의미를 생각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즉 장기 지속이라는 개념은 역사를 기술하는 내용이나 결과라기보다는 역사를 기술하기 위한 방법이 아닐까 하는 점입니다. 또한 그러한 방법으로 찾을 수 있는 여러 가지 비체계적인 재료를 가리키는 것이지, ^그것 자체^가 무언가의 구조랄지 어떤 역사의 법칙을 의미하는 것은 아닌 듯합니다. 오히려 그렇게 찾아낸 여러 가지 재료에서 읽어내야 할 과제가 구조나 법칙이 될 것입니다.
가령 10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밥을 먹고 살았다는 것은 분명 장기 지속하는 현상이고 재료가 될 것입니다. 또 장례를 치를 때 서양에서는 아주 오랜 세월 검은 옷을 입었고 우리나라에서는 흰옷을 입었다는 것도 (근래에 서양 문화의 유입으로 검은 옷을 주로 입게 되었습니다만) 그러한 재료일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현상을 두고, 그것 자체가 무슨 구조이고 인간을 구속하는 감옥이라고 하기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밥에서 시작하여 쌀농사와 농업 일반의 생산 조건을 긴 시간에 걸쳐 알아보고, 토지의 소유 관계와 생산물의 분배나 유통, 다른 산업과의 관계나 도시와 농촌의 관계를 파악해보면, 대략 어느 시기부터 어느 시기까지 장기간 존속했던 어떤 구조가 파악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또 오랜 세월 동안 장례를 치를 때 검은 옷을 입었다거나 흰옷을 입었다는 것이 문화사적 맥락에서 죽음의 상징과 관련해 어떤 심성의 구조를 찾아내는 단서가 될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러한 심성의 구조가 수천 년의 세월을 지속하며 오늘에까지 이르고 있음을 발견한다면, 그때는 단순히 어떤 옷을 오래 입었다는 것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될 것입니다.
장기 지속하는 역사와 그 심층의 세계에 부여할 수 있는 세 가지 의미를 정리해보아야겠습니다. 첫째, 인간의 조건을 결정하는 구조는 오랜 세월을 통해 형성된다는 것입니다. 매우 단순한 말일지도 모르겠지만, 인간의 조건을 결정하는 구조는 어느 날 갑자기 생기는 것도 아니고, 선험적인 개념으로 파악할 수 있는 것도 아니며, 오로지 장기 지속하는 세월의 ‘무게’를 통해서 형성된다는 뜻으로 읽힙니다. 둘째는 그 세월의 ‘무게’와 그로부터 형성된 ‘구조’가 아무리 무겁고 단단하더라도 세대에 세대를 거듭하는 ‘긴 시간대의 인간’이 만들어내는 결과라는 것입니다. 이 역시 단순한 말일지도 모르지만, 역사를 창조하는 원동력은 어느 한두 세대의 행위나 그들이 처한 조건을 뛰어넘는 훨씬 장기적이고 심층에 있는 힘에서 비롯된다는 말로 읽힙니다. 셋째, 장기 지속은 역사를 서술하는 어떤 개념이라기보다는 그러한 개념에 도달하기 위한 방법이라는 점입니다. 빨리 지나가는 시간대에서 드러나는 표층의 움직임만으로는 역사의 의미를 결코 이해할 수 없다, 역사의 심층을 비추어줄 재료를 장기적 시야에서 찾아보자는 말로 읽힙니다. 두 번째와 세 번째 의미는 브로델에 대한 표준적 해석이라고 보기는 어렵지만, 제가 보기에 두루 알려진 첫 번째 의미와 함께 생각해볼 만한 것이 아닌가 여겨집니다. (... 중략 ...)
※ 다음 역서의 해제에서 일부를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