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명:《역사와 역사가들》
마크 길더러스 지음, 강유원과 이재만 옮김. 이론과실천사에서 2009년 펴낸 책.
※ 책을 접하여 기억해두고 싶은 부분이나 잘 이해되지 않아 다시 생각해보고 싶은 부분을 발췌해 기록하면서 읽어간다. 경우에 따라 이해할 수 없거나 이해하는 데 혼란이 따르는 문장이나 어구를 고쳐 읽음으로써 이해하려는 노력도 일부 병행한다.
* * *
■ 3장. “근대의 역사의식” 68-71쪽
(...) 계몽주의 시대는 소나기를 퍼붓듯 역사 저술을 생산했고, 동시에 역사적 사유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18세기에 유럽 철학자들은 인류를 위한 새로운 시대가 도래하고 있다고 선언했다. 미신이 아닌 이성이 인간의 행위를 안내할 [것이라는 취지였다]. 계몽주의 운동은, 일종의 필연적 결과로서, 전통적 종교의 권위에 대한 반란을 내포하고 있었다. 영국의 철학자이자 역사가인 로빈 콜링우드는 유명하고 중요한 저작 《역사의 이념The Idea of History》에서 계몽주의의 특성을 “인간의 삶과 사유의 모든 부분을 세속화하려는” 시도라고 기술했다. 그는 계몽주의를 “제도화된 종교의 권위만이 아니라 종교 그 자체에 대한 반란”으로 보았다. 콜링우드가 설명했듯이, 계몽주의를 선도했던 볼테르는 스스로를 기독교를 비롯하여 시대에 역행하는 야만스러운 세력에 맞선 십자군의 선발대로 여겼다. 그의 슬로건 “Ecrasez l'infâme”는 동시대인들에게 “사악한 것을 쳐부수자”고 요청했다.[주2: 콜링우드에서 재인용]
(...)
(17세기 중반 잉글랜드에서 청교도와 왕당파의 종교적·정치적 투쟁.....) 이러한 쟁점들은 계몽주의 시대에 심각한 균열을 낳았다. 일선의 역사가들ㅡ볼테르, 데이비드 흄, 그리고 에드워드 기번ㅡ은 종교를 인간의 진보를 방해하는 장애물로 묘사하여 종교의 역할을 비하했다. 볼테르는 성직자 계급이 시대와 장소를 막론하고 언제나 거대한 사기꾼이었다고 보았다. 실로 그들은 편협함, 불관용, 억압의 납품업자 역할을 했다. 인민을 종교적 미신에서 자유롭게 하는 것은, 계몽주의 역사가들에게 합리성과 해방을 향항 인간의 진보를 알리는 이정표였다.
관습적인 범주를 넘어서려는 시도 역시 계몽주의 시대 역사 저술의 전형적인 특징이었다. 세속적 저술은 대개 정치적 사건과 군사적 사건으로 구성되었고 서유럽인들의 활동에 초점을 맞추었다. 볼테르는 사회적·경제적·문화적 차원과 더불어 비유럽인들까지 아우르기 위해 가장 두드러지게 경계선을 넓혔다. 그는 최초로 사회사와 문화사를 구상했고, 중국어에 집착했다.
이렇게 칭송할 만한 자극을 주었음에도, 계몽주의 시대에 쓰여진 역사 가운데 상당수에는 근본적인 결함이 있었다. 계몽주의 시대 역사가들은 역사적 행위자들의 행위를 행위자의 관점에서 이해하지 못했다. 그들은 발전과 맥락에 대한 진정한 역사적 감각을 결여하고 있었다. 그들은 자신이 속한 시대의 인식에 갇혀 자신들의 가치와 열망을 보편적이고 절대적인 것으로, 인간이 얻으려 애쓸 수 있는 최선의 것으로 여겼다. 그 결과 그들은 다른 시대와 다른 장소로의 일탈을 탈선 혹은 어리석은 시도로 여기곤 하였다.
콜링우드가 날카롭게 지적했듯이, “계몽주의의 역사적 견해는 진정으로 역사적인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것은 "논쟁적이고 반역사적"이었다. {역설적으로 과거는, 벗어나려는 것을 구속하는 것이 과거라고 해석한 역사가들을 쫓아내버렸다. ㅡ다르게 고쳐 읽고 싶지만 방법을 찾지 못했다} 콜링우드의 말에 따르면, 역사가들은 과거를 "완전한 오류... 모든 긍저억 가치를 결여한 것"으로 여겼다. 그리하여 학자들은 참여자들이 과거를 경험했던 대로 과거를 이해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고, 현재의 잣대로 과거를 판단하면서 실패하고 말았다. 이와 연관된 문제가 기록 연구를 충분히 수행하는 것을 꺼리는 경향 {에서 비롯되었다: 으로 나타났다}. 역사가들은 기존 저작들에 의존하는 편을 선호했다. 콜링우드가 말했듯이, "그들은 멀리 떨어진 흐릿한 시대들의 과거를 재구축하는 과제를 끈기 있게 추진할 정도로 역사 그 자체에 관심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
■ 4장. 역사철학: 사변적 접근
95-96쪽:
^역사철학^이라는 술어는 지난 3세기 동안 몇 가지 함의를 가지게 되었다. 볼테르가 ^철학적^ 역사를 수행하자고 역설함으로써 이 술어를 고안했을 때, 그가 뜻한 바는 사려 깊은 반성을 통한 좀 더 의미 있는 서사의 구축이었다. {(1)훗날 이 술어에는 다른 정의들이 더해졌다. (2)역사의 행로와 목적에 관한 사변을 장려한 역사철학이 있다. ㅡ앞 문장 (1)에서 뒷 문장 (2)로 넘어가는 문장의 진행이 이상하게 읽힌다. (1)과 (2) 사이에 생략된 글이 있는 것처럼 읽힌다}
이번 장의 주제인 {이 접근법 : ‘역사의 행로와 목적에 관한 사변’을 가리킨다고 이해하고 읽자}은 과거의 패턴을 식별하고 그것들을 미래에 대한 예측과 연결지음으로써 심원한 수준의 진리를 얻고자 했다. 이 접근법은 역사의 목적과 의도를 예측하는 데 도움이 될 설명을 요구했고, 역사 연구자들이 그러한 것들을 알 수 있다고 가정했다.
다음 장에서 다룰 둘째 시도인 분석적 역사철학은 방법론의 문제들, 특히 논리학과 인식론 영역의 문제들에 초점을 맞춘다. 이 접근법은 엄격한 기준을 내놓았고, 역사가들과 그들의 실천이 부합하는 정도를 철저히 검토했다. (...)
인간은 고대 이래로 역사의 방향을 반추해왔다. 인간은 그중에서도 특히 과거에 되풀이되었던 경향들을 확인함으로써 알려지지 않을 것을 맞닥뜨렸을 때 느끼는 무력감을 누그러뜨리려 했다. {세월이 흐르면서 적어도 세 가지 기본적 도식ㅡ순환적, 섭리적, 진보적ㅡ이 그러한 노력을 특징지었다. ㅡ “세월이 흐르면서 나타난 그러한 노력의 특징은 적어도 세 가지였는데, 바로 순환적 도식과 섭리적 도식, 그리고 진보적 도식이 그것들이다.” 이렇게 고쳐 읽으며 이해해보자} 분명 각 도식은 변화했고, 세 견해는 서로 겹치고 뒤섞였다. 그러한 혼란이 있긴 했지만 각 견해는 일정한 특색을 간직했다.
- 첫째 견해에서 역사는 원을 따라 움직이면서 끝없이 몇 번이고 되풀이된다.
- 반면 둘째와 셋째 견해에서 역사는 시간을 따라 처음에서 시작해 중간을 거쳐 끝을 향해 움직이는 직선적 과정이다.
- 섭리적 견해와 진보적 견해 모두 시간의 흐름에 따라 일종의 전진 혹은 진보를 가정했으나 그 동력[을 보는 시각은 서로 달랐다]. 섭리적 견해에서는 신의 인도가 원인이었지만, 진보적 견해에서는 자연적 혹은 형이상학적 힘이 추진력을 제공했다.
같은 장 100쪽:
(...) {헤겔에 따르면 역사는, 신이 이 세상에서 자신의 의도를 달성하기 위해, 또한 인간이 자신을 둘러싼 환경과 자신의 역량 모두에 대한 새롭고 더 높은 의식 수준에 도달하기 위해 사용하는 수단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 {헤겔은, 성스러운 힘이 역사적 행위자들을 자신의 의도에 맞게 조종하는 능력을 가리키는, "이성의 간계" 때문에 개인이 의도하지 않은 결과가 생겨난다고 보았다.}밑줄 그은 ‘사용하다’란 동사의 의미상 주어는 ‘신’인가? 아니면 밑줄 그은 등위접속사 ‘또한’의 영향력이 ‘사용하다’에까지 미치는 것이어서 ‘신’ 또한 ‘인간’ 둘 다가 의미상 주어라고 보아야 하는 것인가? 만약 둘 중에서 후자로 봐야 한다면, 결국 다음과 같은 문장처럼 고쳐 읽어서 이해하면 좋을 것 같다(물론 이 독자의 추측일 뿐 아닐지도 모른다).
“헤겔이 보기에 역사는 신이 이 세상에서 자신의 의도를 달성하기 위해 사용하는 수단으로 이루어진 것이기도 했고, 또한 {헤겔이 보기에 역사는(생략해도 좋을 어구로 보인다)} 인간의 입장에서 자신을 둘러싼 환경과 자신의 역량 모두에 대한 새롭고 더 높은 의식 수준에 도달하기 위해 인간이 사용하는 수단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이기도 했다.”
아마도 다음과 같이 이해하면 될 것도 같다(물론 이 독자의 추측일 뿐이고, 아닐지도 모른다). “헤겔은 역사적 행위자들을 자신의 의도에 맞게 조종하는 성스러운 힘의 능력을 "이성의 간계"라고 보았는데, 바로 이 간계 때문에 개인이 의도하지 않은 결과가 생겨난다고 보았다.”
같은 장, 101쪽~
진보적·직선적 관점에 따라 과거를 세속적으로 특징짓는 방향으로의 이행은 18세기 계몽주의 시대에 두드러졌다. {이 접근법은 전형적으로 당시 사람들이 선호하고 지지하던, 인간에게 구원을 가져다줄 미래관을 내세웠고, 또한 역사를 그러한 방향으로 추동하는 필연적 기제를 보여주었다.} 프랑스에는 주목할 만한 전형적인 인물이 두 명 있었다. 볼테르는 역사를 무지와 미신에서 벗어나 합리성과 계몽을 향해 가는 운동으로 설명했다. 이와 어느 정도 유사하게, 마리 장 앙투안 콩도르세는 1790년대 초에 《인간 정신의 진보에 관한 역사적 개요》에서 발전하는 열 가지 역사적 단계들이 "국가들 간의 불평등의 폐기, 각 국가 내에서의 평등의 증대, 그리고 인류의 진정한 완성"으로 귀결되는 목가적 상태를 예견했다.
독일 사상가들 역시 진보를 기대했다. 임마누엘 칸트는 〈세계 시민의 관점에서 본 보편사의 이념〉에서 중요한 명제를 내놓았다. 콩도르세의 《개요》보다 10년 이른 1784년에 출간된 이 에세이는 역사의 최우선 목표가 자유의 확대라고 선언했다. 칸트의 논증에 따르면, "인류의 역사는 전체적으로 보면 자연의 숨겨진 계획의 현실화로 여길 수" 있으니, {이 계획은 "자연이 인류{인간??} 안에 심어 놓은 모든 역량을 완전히 발달"시키는 데 필수적인 정치적 조건을 국가들 내부에서 그리고 국가들 사이에서 성립시킬 것이었다.}
인용문 마지막 문장의 두 번째 절인 {...}의 주술 호응은 <이 계획은... 성립시킬 것이었다>와 같이 호응하는 서술이다. 이 책에는 <[주어]...할 것이었다>가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 5장. 역사철학: 분석적 접근
129-132쪽:
20세기에 전대된 분석적 혹은 비판적 역사철학은 일련의 상이한 관심사를 반영했다. 이 지적 탐구의 갈래는 방법론과 인식론의 쟁점들을 [제기했는데, 특히 다음과 같은 의문이 중대한 문제로 부상했다].
- 역사가들은 무엇을 근거로 자신들이 주장하는 것을 알고 있음을 합리적으로 논증할 수 있는가? 달리 말해 역사적 지식의 입증 가능성이 재검토된 것이다. 이러한 검토를 수행할 때에는, 자연과학에서 [대세를 이룬] 형식[에 맞추어] 한 종류의 기준[을 잣대로] 역사학의 논리, 엄격함, 기법을 측정한다.
- 다른 고려 사항으로는 설명의 형식적 필요조건, 인과관계의 의미, 그리고 객관성의 역할이 있다.
이러한 쟁점들은 끊임없이 문제[로 제기되어 왔으며], 해결은 요원한 채 여전히 [논쟁을 야기하고 있는 중이다]. [아직 끝나지 않은 문제이지만] 이 쟁점들은 역사학의 이론적 차원들을 이해하는 데 아주 중요하다.
주요한 구분선이 그어진 시기는 프랜시스 베이컨, 르네 데카르트를 비롯하여 그 밖에 다른 과학자들이 자연계를 연구하는 데 사용할 보다 신뢰할 만한 수단을 정립하려 했던 17세기와 18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들과 그 계승자들은 자신들이 발견한 것들을 검사하고 표현하는 방편으로 수학적 정식화를 채택했다. {그들은 또한 변하지 않는 관계 혹은 현상들 사이에서 되풀이되는 균일성과 규칙성에 대한 명제들을 확증하는 데 필요한 높은 수준의 일반성을 선호했다}. 기본적인 관점에서 보면 그러한 명제들은 다음과 같은 형태를 취했다: 특정한 경우에 어떤 선행하는 조건들의 조합이 존재하기만 한다면, 확실하고 예측 가능한 종류의 결과가 필연적으로 도출될 것이다. 자연에서 예를 들자면, 적절한 조건에서 열을 가해 물을 일정한 온도까지 데우기만 하면, 그 결과 분명히 수증기가 발생할 것이다.
변하지 않는 관계에 대한 실제 명제들은 관찰하는 문제들이 점차 복잡해짐에 따라 더욱 난해해졌지만, 그것들 아래에 놓인 형식적 논리 구조는 얼마간 일정하게 유지되었고, 많은 자연과학자들이 보기에 자신들이 그 명제들을 수학적 관점에서 표현할 수 있는 범위가 넓어질수록 상황은 점점 더 나아졌다. (...) 역사가들이 좋아할 범주로 거칠게 표현하자면, 일반법칙에 대한 호소는 동일한 원인이 주어진다면 매우 유사한 결과가 거의 확실히 발생하리라는 것을 의미했다.
18세기에 잠바티스타 비코는 역사 연구에 적합하지 않다고 여겨 그러한 방법을 거부했으나 과학적 모형의 우위는 그의 반대를 압도했다. 많은 역사가들은 모든 형태의 지식이 반드시 자연과학의 방법과 기법을 따라야 하며 그렇지 않다면 지식이라는 지위를 정당하게 요구할 수 없다고 교조적으로 단언했다. 논리적 형식이 덜 엄격하고 그 지향이 덜 수학적인, 이러한 열등한 종류의 탐구는 ‘자연과학’의 지시를 따라야 하며, 그렇지 않다면 사이비과학이라는 오명을 감수할 터였다. 그들은 자연과학을 모방하라는 요구에 응할 수 있었고, 자신들이 발견한 것들을 변하지 않는 관계에 대한 일반적 명제들로 제시하려 할 수 있었다. 그러한 노력은 훗날 사회과학의 발전으로 이어질 것이었다. 한편 역사가들은 그 대안으로서, 자신들의 연구 분야 내에서 전통적인 방법과 기법의 타당성과 통합성을 역설하고, 자연과학의 모형들을 고수해야 할 필요성을 거부할 수도 있었다. 후자 진영에 속한 이들은 역사를 ‘독자적인 것’으로, 곧 역사 그 자체에 대한 공부로 묘사하곤 했다.
현대에 벌어진 이 논쟁은 로보트 윌리엄 포겔(Robert William Fogel)과 엘튼(G. R. Elton)이 쓴 《어떤 길로 과거에 이를 것인가? 역사에 대한 두 가지 견해(Which Road to the Past? Two Views of History》(1983)에서 찾을 수 있다. 이 책은 ‘과학적’ 역사와 ‘전통적’ 역사를 임의로 구별하는데, 저명한 경제사가인 포겔은 전자를 지지하고, 튜더 왕조 시대의 잉글랜드에 관한 유명한 권위자인 엘튼은 후자를 지지한다. (...) 포겔은 과거에 관한 더욱 높은 수준의 일반적 진실을 얻기 위해 사회과학적 모델과 수학적 정식화의 유용성에 대한 찬성론을 편다. 반면 엘튼은 역사가들이 훌륭한 사람들이 언제나 해왔던 것ㅡ선입견 없이 기존의 증거를 검토한 후 그것이 의미하는 바에 관한 합리적 판단을 내리는 것ㅡ을 수행하기를 바란다.
역사적으로 그 논쟁은 19세기 중반 실증주의의 도래와 함께 특히 두드러졌다. 주로 프랑스인 오귀스트 콩트의 저술로부터 영향을 받았지만 뒤이어 두 영국인 헨리 토머스 버클과 존 스튜어트 밀이 받아들여 정교하게 가다듬은 이 사상체계는, 자연과학의 기법을 지지함으로써 인간사에 대한 연구를 보다 체계적인 종류의 탐구로 탈바꿈시키려고 했다.
136-140쪽:
콩트, 버클, 그리고 밀이 선언한 실증주의 철학은 격렬한 적대적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이 논쟁에서 비판가들은 대개 “관념론자”라고 불렸는데, 이 학파는 독일인 빌헬름 딜타이(Wilhelm Dilthey), 이탈리아인 베네데토 크로체(Benedetto Croce), 그리고 잉글랜드인 로빈 콜링우드로부터 나왔다. 그들 모두는 자연과학에서 이끌어낸 유추는 유효하지 않으며 복잡한 역사 저술에는 매우 다른 개념적 틀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19세기 말에 딜타이는 자연과학과 정신학을 근본적으로 구별[하면서, 이 둘을 실천하는 데 필요한 방법론은 서로 확연히 다르다고 말했다]. 일례로 딜타이에 따르면 자연과학자는 자연 내의 규칙성과 균일성을 다루는 반면, 역사가는 자연 밖의 독특하고 특정하고 되풀이될 수 없는 사건들을 [다룬다는 것이다]. 딜타이에게는 일반적인 것과 특수한 것의 차이가 무엇보다 중요했다.
훗날 20세기 이탈리아의 가장 중요한 지식인들 가운데 한 명인 크로체와 옥스퍼드대학교의 철학자, 역사가, 고고학자인 콜링우드는 관념론적 역사 개념을 정교하게 가다듬었다. 크로체는 역사가들이 현재를 살아간다는 사실이 극히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과거가 활력과 의미를 지니려면, 역사가들이 과거를 자신의 마음속에서 재사유함으로써 과거를 생생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이러한 이유로 크로체는 “모든 역사는 현대사”라는 결론을 이끌어냈다. (...) 콜링우드는 관념론적 입장에 대한 가장 완전하고 지속적인 명제를 내놓는 데 자신의 삶을 바쳤다. 그가 1943년에 52세로 죽은 뒤에 출간된 위대한 책 《역사의 이념》은 이제껏 영어로 출간된 역사철학에 관한 가장 중요한 책으로 여전히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콜링우드는 역사를 "인간 본성에 관한 학문"이라고 기술했으며, 그 목적은 ‘자기인식’을 촉진하는 것이라고 했다. 단순하다고 여기기 쉬운 이 명제는, 역사 연구의 적절한 대상이 인간 정신 혹은 더 적절하게 말하자면 인간 정신의 활동임을 의미하여, 더 나아가 적절한 탐구 수단은 ‘역사학의 방법론’을 수반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달리 말하면 역사가들은 정신이 해왔던 것을 이해함으로써 정신에 관해 배운다는 것이다. 이어서 콜링우드는 자연과학의 방법론가 인간과학의 방법론 사이의 불일치를 논했고, 전자와 후자 사이에 유사한 관계가 존재하지 않는 이유를 설명했다. “과거에 일어났던 어떤 사건을 탐구하는 역사가는 사건의 바깥쪽이라 불릴 만한 것과 안쪽이라 불릴 만한 것을 구별한다.”그는 이 표현으로 자신이 전하려는 메시지의 핵심을 정립했다.
콜링우드가 “사건의 바깥쪽”이라는 말로 의미했던 바는 “신체와 그 운동이라는 관점에서 기술될 수 있는, 사건에 속한 모든 것으로, 카이사르가 일군의 남자들과 함께 특정한 날에 루비콘이라 불리는 강을 건넌 것, 혹은 그가 다른 날에 원로원 회랑 바닥에 피를 흘린 것”이었다. 콜링우드가 “사건의 안쪽”이라는 말로 의미했던 바는 “사유라는 관점에서만 기술될 수 있는 것으로, 공화국의 법에 대한 카이사르의 저항, 혹은 카이사르와 그의 암살단 사이에 공화국의 앞날을 둘러싸고 일어난 충돌”이었다. 콜링우드는 그 차이를 강조하기 위해 “역사가는 결코 다른 하나를 배제하기 위해 이 두 가지 중 하나에만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는 것을 인정했다. 그가 설명했듯이, 역사가의 작업은 “사건의 바깥쪽을 발견하는 것으로 시작할지 모르나 결코 거기에서 멈출 수 없다. 역사가는 그 사건이 행위였다는 것과, 자신의 주된 과업은 그 행위자의 사유를 파악하기 위해 그 행위 속으로 들어가 사유하는 것임을 항상 기억해야만 한다.”
그런 다음 콜링우드는 또 다른 주요 명제를 내놓았다. “자연의 경우, 이러한 사건의 바깥쪽과 안쪽의 구별은 생기지 않는다.” 그는 “자연의 사건들은 단지 사건일 뿐이지 과학자가 그 사유를 추적하려고 애쓰는 행위자들의 행위가 아니다.” 달리 말해 자연에서 일어나는 사건은 내적 생활을 공공연히 드러내지 않는다. “과학자에게 자연은 언제나 ‘현상’... 그가 지적으로 관찰하는 광경에 불과하다.” 반면 역사가에게 “역사의 사건들은 결코 단순한 현상, 숙고하는 광경이 아니며, 역사가가 그 안에 내재하는 사유를 알아차리기 위해, 바라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꿰뚫어보는 대상이다.”
이어서 콜링우드는 또 다른 방식으로 자신의 논점을 요약했다. “역사가는 사건들의 안쪽을 꿰뚫어보고 그것들이 표현하는 사유를 감지하기 위해, 과학자는 할 필요도 없고 할 수도 없는 무언가를 하고 있다.” 그럼에도 이러한 목적을 성취하기 위한 방법론적 처방은 엄청난 문제들을 낳았다. 어떻게 역사가는 인간들이 행동으로 드러낸 사유를 확실히 알 수 있는가? 콜링우드에 따르면 “그렇게 할 수 있는 방법은 단 하나밖에 없다. 그 사유를 자기 자신의 정신 속에서 재사유하는 것이다.” 또는 그가 다른 곳에서 단언했듯이, “사유의 역사, 따라서 모든 역사는 역사가가 자기 자신의 정신 속에서 과거의 사유를 재현하는 것이다.” 이 창조적이면서도 비판적인 경험은 “역사가에게 그 자신의 정신이 지닌 힘을 드러내고”그리하여 모든 정신이 지닌 힘을 드러내는데, 이는 실제 경험을 연구하는 정신에 의해 인간 본성이 점차 드러남에 따라 인간 본성에 대한 보다 완전한 이해로 귀결된다.[주2: 콜링우드의 《역사의 이념》 204-215쪽]
실증주의 비평가들이 보기에 관념론적 입장은 환상, 신비주의, 그리고 자기기만을 포함하고 있었다. 관념론적 입장은 정신이라 불리는 관찰할 수 없는 실체의 작용에 기반한 설명을 필요로 했고, 아울러 역사적 행위자들에 공감하며 그들의 정신 속으로 뛰어들 것을 요구했는데, 이 모두는 과학이 아니라 신념에 의존하는 것이었다. 역사가가 관념론적 대안이라는 기준을 사용해 알 수 있는 것이라곤 언제 지식을 인지할 수 있게 되었는가 뿐이었고, 그 밖에 다른 검사로는 하나의 기준도 내놓지 못할 터였다. 콩트의 후계자들이 보기에, 이러한 전제는 방법론적 통합성을 결여한 것, 증거의 사용이나 관찰을 통해 입증할 수 없는 것, 인간 발전의 형이상학적 단계에 고유하게 속하는 것이었다.
콜링우드와 그의 관념론적 계승자들은 몇 가지 근거를 들어 실증주의의 비판을 내리눌렀다.
변하지 않는 관계에 대한 실제 명제들은 관찰하는 문제들이 점차 복잡해짐에 따라 더욱 난해해졌지만, 그것들 아래에 놓인 형식적 논리 구조는 얼마간 일정하게 유지되었고, 많은 자연과학자들이 보기에 자신들이 그 명제들을 수학적 관점에서 표현할 수 있는 범위가 넓어질수록 상황은 점점 더 나아졌다. (...) 역사가들이 좋아할 범주로 거칠게 표현하자면, 일반법칙에 대한 호소는 동일한 원인이 주어진다면 매우 유사한 결과가 거의 확실히 발생하리라는 것을 의미했다.
18세기에 잠바티스타 비코는 역사 연구에 적합하지 않다고 여겨 그러한 방법을 거부했으나 과학적 모형의 우위는 그의 반대를 압도했다. 많은 역사가들은 모든 형태의 지식이 반드시 자연과학의 방법과 기법을 따라야 하며 그렇지 않다면 지식이라는 지위를 정당하게 요구할 수 없다고 교조적으로 단언했다. 논리적 형식이 덜 엄격하고 그 지향이 덜 수학적인, 이러한 열등한 종류의 탐구는 ‘자연과학’의 지시를 따라야 하며, 그렇지 않다면 사이비과학이라는 오명을 감수할 터였다. 그들은 자연과학을 모방하라는 요구에 응할 수 있었고, 자신들이 발견한 것들을 변하지 않는 관계에 대한 일반적 명제들로 제시하려 할 수 있었다. 그러한 노력은 훗날 사회과학의 발전으로 이어질 것이었다. 한편 역사가들은 그 대안으로서, 자신들의 연구 분야 내에서 전통적인 방법과 기법의 타당성과 통합성을 역설하고, 자연과학의 모형들을 고수해야 할 필요성을 거부할 수도 있었다. 후자 진영에 속한 이들은 역사를 ‘독자적인 것’으로, 곧 역사 그 자체에 대한 공부로 묘사하곤 했다.
현대에 벌어진 이 논쟁은 로보트 윌리엄 포겔(Robert William Fogel)과 엘튼(G. R. Elton)이 쓴 《어떤 길로 과거에 이를 것인가? 역사에 대한 두 가지 견해(Which Road to the Past? Two Views of History》(1983)에서 찾을 수 있다. 이 책은 ‘과학적’ 역사와 ‘전통적’ 역사를 임의로 구별하는데, 저명한 경제사가인 포겔은 전자를 지지하고, 튜더 왕조 시대의 잉글랜드에 관한 유명한 권위자인 엘튼은 후자를 지지한다. (...) 포겔은 과거에 관한 더욱 높은 수준의 일반적 진실을 얻기 위해 사회과학적 모델과 수학적 정식화의 유용성에 대한 찬성론을 편다. 반면 엘튼은 역사가들이 훌륭한 사람들이 언제나 해왔던 것ㅡ선입견 없이 기존의 증거를 검토한 후 그것이 의미하는 바에 관한 합리적 판단을 내리는 것ㅡ을 수행하기를 바란다.
역사적으로 그 논쟁은 19세기 중반 실증주의의 도래와 함께 특히 두드러졌다. 주로 프랑스인 오귀스트 콩트의 저술로부터 영향을 받았지만 뒤이어 두 영국인 헨리 토머스 버클과 존 스튜어트 밀이 받아들여 정교하게 가다듬은 이 사상체계는, 자연과학의 기법을 지지함으로써 인간사에 대한 연구를 보다 체계적인 종류의 탐구로 탈바꿈시키려고 했다.
- 실증주의자들은 독특하거나 개별적인 사건보다는 인간사의 궤적에서 나타나는 균일성과 유사성에 주의를 집중했고, 곧이어 같은 종류의 경험들을 연결하고 있는 불변의 관계를 발견했다.
- 그들은 프랑스 혁명을 연구하기보다는 혁명의 현상들을 조사하려 했다.
- 실증주의자들은 자연 세계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인간 세계에서 일어나는 활동의 결과들을 지배해하는 일반법칙들을 가정했고, 그것들을 발견할 만한 역량이 자신들에게 있다고 믿었다.
136-140쪽:
콩트, 버클, 그리고 밀이 선언한 실증주의 철학은 격렬한 적대적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이 논쟁에서 비판가들은 대개 “관념론자”라고 불렸는데, 이 학파는 독일인 빌헬름 딜타이(Wilhelm Dilthey), 이탈리아인 베네데토 크로체(Benedetto Croce), 그리고 잉글랜드인 로빈 콜링우드로부터 나왔다. 그들 모두는 자연과학에서 이끌어낸 유추는 유효하지 않으며 복잡한 역사 저술에는 매우 다른 개념적 틀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19세기 말에 딜타이는 자연과학과 정신학을 근본적으로 구별[하면서, 이 둘을 실천하는 데 필요한 방법론은 서로 확연히 다르다고 말했다]. 일례로 딜타이에 따르면 자연과학자는 자연 내의 규칙성과 균일성을 다루는 반면, 역사가는 자연 밖의 독특하고 특정하고 되풀이될 수 없는 사건들을 [다룬다는 것이다]. 딜타이에게는 일반적인 것과 특수한 것의 차이가 무엇보다 중요했다.
훗날 20세기 이탈리아의 가장 중요한 지식인들 가운데 한 명인 크로체와 옥스퍼드대학교의 철학자, 역사가, 고고학자인 콜링우드는 관념론적 역사 개념을 정교하게 가다듬었다. 크로체는 역사가들이 현재를 살아간다는 사실이 극히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과거가 활력과 의미를 지니려면, 역사가들이 과거를 자신의 마음속에서 재사유함으로써 과거를 생생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이러한 이유로 크로체는 “모든 역사는 현대사”라는 결론을 이끌어냈다. (...) 콜링우드는 관념론적 입장에 대한 가장 완전하고 지속적인 명제를 내놓는 데 자신의 삶을 바쳤다. 그가 1943년에 52세로 죽은 뒤에 출간된 위대한 책 《역사의 이념》은 이제껏 영어로 출간된 역사철학에 관한 가장 중요한 책으로 여전히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콜링우드는 역사를 "인간 본성에 관한 학문"이라고 기술했으며, 그 목적은 ‘자기인식’을 촉진하는 것이라고 했다. 단순하다고 여기기 쉬운 이 명제는, 역사 연구의 적절한 대상이 인간 정신 혹은 더 적절하게 말하자면 인간 정신의 활동임을 의미하여, 더 나아가 적절한 탐구 수단은 ‘역사학의 방법론’을 수반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달리 말하면 역사가들은 정신이 해왔던 것을 이해함으로써 정신에 관해 배운다는 것이다. 이어서 콜링우드는 자연과학의 방법론가 인간과학의 방법론 사이의 불일치를 논했고, 전자와 후자 사이에 유사한 관계가 존재하지 않는 이유를 설명했다. “과거에 일어났던 어떤 사건을 탐구하는 역사가는 사건의 바깥쪽이라 불릴 만한 것과 안쪽이라 불릴 만한 것을 구별한다.”그는 이 표현으로 자신이 전하려는 메시지의 핵심을 정립했다.
콜링우드가 “사건의 바깥쪽”이라는 말로 의미했던 바는 “신체와 그 운동이라는 관점에서 기술될 수 있는, 사건에 속한 모든 것으로, 카이사르가 일군의 남자들과 함께 특정한 날에 루비콘이라 불리는 강을 건넌 것, 혹은 그가 다른 날에 원로원 회랑 바닥에 피를 흘린 것”이었다. 콜링우드가 “사건의 안쪽”이라는 말로 의미했던 바는 “사유라는 관점에서만 기술될 수 있는 것으로, 공화국의 법에 대한 카이사르의 저항, 혹은 카이사르와 그의 암살단 사이에 공화국의 앞날을 둘러싸고 일어난 충돌”이었다. 콜링우드는 그 차이를 강조하기 위해 “역사가는 결코 다른 하나를 배제하기 위해 이 두 가지 중 하나에만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는 것을 인정했다. 그가 설명했듯이, 역사가의 작업은 “사건의 바깥쪽을 발견하는 것으로 시작할지 모르나 결코 거기에서 멈출 수 없다. 역사가는 그 사건이 행위였다는 것과, 자신의 주된 과업은 그 행위자의 사유를 파악하기 위해 그 행위 속으로 들어가 사유하는 것임을 항상 기억해야만 한다.”
그런 다음 콜링우드는 또 다른 주요 명제를 내놓았다. “자연의 경우, 이러한 사건의 바깥쪽과 안쪽의 구별은 생기지 않는다.” 그는 “자연의 사건들은 단지 사건일 뿐이지 과학자가 그 사유를 추적하려고 애쓰는 행위자들의 행위가 아니다.” 달리 말해 자연에서 일어나는 사건은 내적 생활을 공공연히 드러내지 않는다. “과학자에게 자연은 언제나 ‘현상’... 그가 지적으로 관찰하는 광경에 불과하다.” 반면 역사가에게 “역사의 사건들은 결코 단순한 현상, 숙고하는 광경이 아니며, 역사가가 그 안에 내재하는 사유를 알아차리기 위해, 바라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꿰뚫어보는 대상이다.”
이어서 콜링우드는 또 다른 방식으로 자신의 논점을 요약했다. “역사가는 사건들의 안쪽을 꿰뚫어보고 그것들이 표현하는 사유를 감지하기 위해, 과학자는 할 필요도 없고 할 수도 없는 무언가를 하고 있다.” 그럼에도 이러한 목적을 성취하기 위한 방법론적 처방은 엄청난 문제들을 낳았다. 어떻게 역사가는 인간들이 행동으로 드러낸 사유를 확실히 알 수 있는가? 콜링우드에 따르면 “그렇게 할 수 있는 방법은 단 하나밖에 없다. 그 사유를 자기 자신의 정신 속에서 재사유하는 것이다.” 또는 그가 다른 곳에서 단언했듯이, “사유의 역사, 따라서 모든 역사는 역사가가 자기 자신의 정신 속에서 과거의 사유를 재현하는 것이다.” 이 창조적이면서도 비판적인 경험은 “역사가에게 그 자신의 정신이 지닌 힘을 드러내고”그리하여 모든 정신이 지닌 힘을 드러내는데, 이는 실제 경험을 연구하는 정신에 의해 인간 본성이 점차 드러남에 따라 인간 본성에 대한 보다 완전한 이해로 귀결된다.[주2: 콜링우드의 《역사의 이념》 204-215쪽]
실증주의 비평가들이 보기에 관념론적 입장은 환상, 신비주의, 그리고 자기기만을 포함하고 있었다. 관념론적 입장은 정신이라 불리는 관찰할 수 없는 실체의 작용에 기반한 설명을 필요로 했고, 아울러 역사적 행위자들에 공감하며 그들의 정신 속으로 뛰어들 것을 요구했는데, 이 모두는 과학이 아니라 신념에 의존하는 것이었다. 역사가가 관념론적 대안이라는 기준을 사용해 알 수 있는 것이라곤 언제 지식을 인지할 수 있게 되었는가 뿐이었고, 그 밖에 다른 검사로는 하나의 기준도 내놓지 못할 터였다. 콩트의 후계자들이 보기에, 이러한 전제는 방법론적 통합성을 결여한 것, 증거의 사용이나 관찰을 통해 입증할 수 없는 것, 인간 발전의 형이상학적 단계에 고유하게 속하는 것이었다.
콜링우드와 그의 관념론적 계승자들은 몇 가지 근거를 들어 실증주의의 비판을 내리눌렀다.
- 첫째, 관념론자들은 자신들이 방법론적 통합성을 가지고 있다고 역설했으며, 자신들의 접근법을 신중하고 엄격하게 수행한다면 정신의 작동원리에 관한 입증 가능한 통찰력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역사가는 문서 증거, 곧 편지와 일기 등을 올바르게 사용함으로써 정당하게 추론할 수 있었다.
- 둘째, 그들은 과거에 관한 적극적·비판적 사유의 역할을 중요하게 여겼다. 오로지 그러한 방법으로만 역사에 생명을 불어넣을 수 있었다. 콜링우드는 전거들을 논거로 삼아 단순한 사실들을 멍청하게 암송하는 것을 “오려 붙이는 역사”라고 비난했다.
- 마지막으로, 콜링우드는 일반화의 필요성에 대한 실증주의적 강조를 쓸모없는 것으로 여겼다. 그가 중요한 구절에서 말했듯이, “우리가 역사적 사유를 통해 {나폴레옹이 혁명기 프랑스에서 자신의 권세를 어떻게 그리고 왜 확립했는지}a를 이미 {이해하고 있다면}x, {유사한 사태가 다른 곳에서도 일어났다}b고 말하는 것은 ({그것}c이 아무리 진실하더라도) {그 과정}d에 대한 우리의 이해에 아무것도 보태지 못한다.” 그는 자신의 논점을 강화하기 위해 “{특정한 사실을 그 자체만으로 이해할 수 없는 경우}e에만 {그러한 진술}f이 가치를 지닌다”고 덧붙였다.[주3: 콜링우드, 같은 책, 223쪽]
- {그것}c → {유사한 사태가 다른 곳에서도 일어났다}b를 가리키는 듯하다.
- {그 과정}d → 바로 위 1과 같이 이해하면, {나폴레옹이 혁명기 프랑스에서 자신의 권세를 어떻게 그리고 왜 확립했는지}a를 가리키는 듯하다.
- {특정한 사실을 그 자체만으로 이해할 수 없는 경우}e → {나폴레옹이 혁명기 프랑스에서 자신의 권세를 어떻게 그리고 왜 확립했는지}a와 같은 사태를 그 자체만으로 이해할 수 없는 경우를 가리키는 듯하다.
- 바로 위 3과 같이 이해하면, {그러한 진술}f은 {유사한 사태가 다른 곳에서도 일어났다}b와 같은 진술을 가리키는 듯하다.
“우리가 역사적 사유를 통해 나폴레옹이 혁명기 프랑스에서 자신의 권세를 어떻게 그리고 왜 확립했는지를 이미 이해하고 있다면, 유사한 사태가 다른 곳에서도 일어났다고 말해본들ㅡ그 유사하다는 사태가 아무리 진실한 것이라고 하더라도ㅡ나폴레옹이 어떻게 그리했고 왜 그리했는지를 이해하는 데 아무런 보탬도 되지 못한다.” 그는 자신의 논점을 강화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말을 덧붙였다. “특정한 사실을 그 자체만으로 이해할 수 없는 경우에만, 그 사실과 다른 사실을 진술하는 행위가 가치를 지닌다.”(...)
141-144쪽:
한편 철학자 칼 헴펠(Karl G. Hempel)은 1942년에 펴낸 독창적 에세이 《역사에서 일반법칙들의 기능(The Function of General Laws in History)》에서 논의의 주요 범주들을 정립했다. (...) 이 글에서 헴펠은 자연과학의 설명 형식은 역사 분야에서도 실로 유효하다고 주장했다. 그는 일반법칙을 “적절한 경험적 발견을 통해 참인지 거짓인지 확증할 수 있는, 보편적인 조건 형식의 진술”이라고 정의했으며, 그 주요 기능은 “대개 설명과 예측이라 불리는, 패턴들 안의 사건들을 연결하는 것”이라고 기술했다. (...) 그 이후로 이 논쟁은 분석적 성향의 역사철학자들을 사로잡았다. 비평가 윌리엄 드레이(William Dray)가 “포섭적 법칙 모형”이라 부른 헴펠의 입장은, 역사가들이 보편명제 아래로 특정한 사건들을 포섭함으로써 그것들을 설명할 것을 요구한다. (...)
“확률적-통계적 형식”(...)
“생략적 혹은 부분적” 설명 스케치 (...)
“발생론적 설명” (...)
“연역적-법칙적 설명” (...)
144-147쪽:
역사에서 인관관계의 본질을 이해하는 문제 또한 논쟁에 끼어들었다. ‘원인’이라는 술어는 언제나 골치 아픈 문제였다. 역사가들은 대개 이 술어를 상식적인 방식으로 사용했고 그리하여 일반 독자들도 역사가들의 논의에 접근할 수 있었지만, 그럼에도 이 술어의 모호하고 부정확한 사용법은 논리학자들과 철학자들을 괴롭혔다. 적어도 한 명의 권위자, 곧 잉글랜드이ㅡ 오크쇼트(Michael Oakeshort)는 이 술어를 전혀 사용하지 말 것을 권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혼란을 일으키는 여러 차원의 이유들을 조명하기 위해 원인을 네 가지 유형으로, 곧 질료인, 작용인, 형상인, 목적인으로 구분했다. 로널드 내쉬에 따르면, 이 가운데 세 가지는 특히 역사 연구에 관련된다.
- ‘작용인’은 주요 사건이 발생하는 데 필요한 선행 사건들과 조건들을 가리키며, 흔히 필요한 에너지를 생산함으로써 사건을 발생시킨다. 예를 들어 내쉬에 따르면, 관찰자는 에이브러햄 링컨의 사망 원인이 암살자 존 윌크스 부스가 그의 머리를 향해 발사한 총알이라고 기술할 것이다.
- 역사에서 ‘형상인’은 한 사건을 일으키는 데 필요한 “성향적 속성”의 위치를 통해 그 사건을 설명한다. 내쉬가 지적했듯이, 창문은 유리가 깨지기 쉽기 때문에 부춰지며, 링컨은 그에 대한 부스의 증오와 남부인들의 동조 때문에 사망했다.
- 마지막으로 ‘목적인’은 행위자의 의지 혹은 의도 때문에 사건이 발생한다고 설명한다. [링컨이 암살당한 사건의 경우, 패배한 남부 연방에 대한 보다 관대한 처리를 이끌어내기를 원했던 부스가 링컨을 제거하려 했기 때문에 링컨이 사망했다고 설명하는 식이다.]
또 다른 난제가 원인 문제와 뒤섞였다. 분석철학자들은 인관관계를 논하면서 인간사의 행로를 설명하기 위한 필요조건과 충분조건을 구별하곤 했다. 필요조건은 가능성을 포함한다. 필요조건에 대한 진술은 어떤 사건을 발생시키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요건을 가리키며, 그 초점은 확실성보다 가능성에 집중된다. 반면 충분조건은 필연성을 포함한다. 충분조건에 대한 진술은 결국 특정한 결과가 일어날 것임을 보장하는 것으로 귀결된다. 역사가들은 대개 로마제국의 몰락이나 제1차대전의 개시와 같은 거대하고 복잡한 사건들의 원인을 두고 논쟁을 벌이기 때문에 모든 변수를 고려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지성에는 한계가 있으므로 역사가들은 대부분의 경우 필요조건만을 말한다. 그들의 서사는, 올바르게 이해한다면, 거의 언제나 가능성만을 숙고할 뿐 필연성을 숙고하는 경우는 좀처럼 없다.
150-153쪽:
(...) 미국의 역사가 칼 베커(Carl L. Becker)가 말했듯이, “실제 과거는 지나가버렸다. 우리의 마음속에서 재창조된 역사의 세계는 만질 수 없는 세계이다.” 자연과학의 많은 형식들과는 달리, 역사가들이 실제 대상을 관찰할 수는 없다. 그 대신 역사가들은 과거의 유물들을 이용해서 역사를 재구축하며, 언제나 관점의 제한을 받는 가능성(확실성이 아니라)에 대한 진술을 사용한다.
역사적 서사는 시각 혹은 관점을 거쳐야 이해할 수 있는 것이 된다. 시각이나 관점이 없다면 역사적 유물은 의미를 지니지 못할 것이고 역사적 서사는 일관되게 전개되지 못할 것이다. 역사가들이 항상 합의에 도달하는 것은 아니라는 지적은 옳지만, 동일한 사건에 대한 서로 다른 견해들이 반드시 지적으로 양립 불가능하거나 오류로 귀결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엇갈리는 견해들은 더욱 포괄적이고 보완적인 형태의 이해로 귀결될 것이고, 각 견해는 개별적인 관점에 의거하여 다른 견해를 풍요롭고 생기 있게 만들 것이다. 이론적으로 볼 때 역사가들이 과거에 관해 말할 수 있는 ‘진실한’ 이야기들의 수는 무한하다. 미국의 역사가 찰스 비어드(Charles Beard)는 미합중국 헌법을 경제적 관점에서 해석한 자신의 작업이 정치적·이데올로기적·제도적 해석을 무효로 만드는 건 아니라고 줄곧 주장했다. 자신의 작업은 새로운 차원을 더할 뿐이라는 것이다. (...)
■ 6장. 최근의 전문적 역사학
157-161쪽:
19세기 중반에 진행된 역사학의 전문화는 초점과 방향의 심대한 변화를 초래했고, 더불어 목적과 방법을 둘러싼 격렬한 투쟁을 촉발했다. (...) 한편으로 역사 연구는 점점 더 정확하고 철저해졌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전문화에 사로잡혀 고립되고 파편화되었으며 몇몇 경우에는 취약해지고 말았다. 전문화가 만연한 결과 {역사적 이해의 공통된 다양성}a이 무너졌다. 그 대신 {다원적 해석들}b이 인간 경험들 사이의 불일치를 증언했다.
※ 독해: 저자는 a와 b를 서로 대립되는 의미로 적었을 것이다. a는 ‘common variety(or plurality) of historical understanding’였을까. 혹시 ‘역사를 다양하게 이해하는 공통의 준거’를 의미하는 것이었을까.(...) 한편 산업혁명이 초래한 혼란으로 인해 문화적 통일성과 역사적 연속성에 대한 전통적 이해가 파괴되었다. {이와 유사한 방식으로, 대중 운동의 등장, 곧 의지할 곳 없는 인구의 도시지역으로의 집중과 그 결과로 나타난 많은 불평분자들의 정치를 뒤흔들겠다는 위협은 학문적 관심을 비엘리트층으로 돌렸다}[이와 같은 선상에서 의지할 곳 없는 인구가 도시 지역으로 집중하고 그 결과 정치를 위협하는 불평분자들의 행동이 나타났는데, 이러한 대중 운동의 등장과 더불어 학문적 관심이 비엘리트층의 활동으로 옮겨갔다]. 거의 같은 시기에[즉 19세기 말 이래] 전 세계의 나머지 지역에 대한 서구의 승리는 세계사에 대한 유럽중심적 관념에 신뢰를 보탰다. 나중에 제2차대전 이후 서구의 헤게모니가 무너지자 이러한 정식화는 개념적 수정을 거쳐야만 했다. 이러한 변화의 영향으로 균일한 과거상은 산산조각이 났고, 이는 엄청난 {다양성}으로 귀결되었다. (...)
산업시대의 가혹하고 무자비한 상황에 자극받은 다른 역사가들은 극적이고 급격한 경제적 변화의 영향을 강조함으로써 역사를 형성하는 진정함 힘에 대한 새로운 이해에 도달했다. 그들이 보기에, 초자연적 혹은 형이상학적 혹은 이성주의적 관점에서 정의된, 세계에 대한 추상적이고 관념론적인 개념들은 물질적 조건의 압박보다 현실성이 떨어졌다. 유물론적 견해에 따르면, 실제 세계는 생계를 획득하기 위한 경제적 투쟁에 의해 활기를 띠었고, 부의 추구는 인간 행위의 가장 중요한 결정요인으로 기능했다. 칼 마르크스는 19세기 중엽에 이러한 주제들에 관한 자신의 입장을 제시했고, 그 이후로 역사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적 변형태와 비마르크스주의적 변형태는 둘 다 생산체계의 조직과 사람들이 생계를 획득하기 위해 사용하는 수단들으로 관심을 돌렸더. 그러한 연구들이 모여 경제사로 나타났다.
(...) 마르크스주의적 방법은 역사에는 시종일관 계급투쟁이라는 현실이 존재해왔다고 강조했지만, ‘인민’에 관해 썼던 19세기의 대다수 역사가들은, {자신의 이야기가 자신이 속한 국가의 역사에 통합되었음을 발견한 인간들의 집합성ㅡ무슨 뜻일까?}a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이와 대조적으로}x 20세기에 역사가들은 탐구 대상을 {집단 정체성의 발전, 특히 노동자, 농민, 인종 집단, 여성, 그리고 가족 정체성의 발전}b으로 바꾸었다. 이러한 범주들 안에서만큼은 주된 역사적 행위자였던 그들은, 흔히 전통적 역사에서는 자신들의 이야기를 발견할 수 없었고, 그리하여 새로운 역사를 요구했다.
※ 독해 준비: 앞과 뒤를 대립시키는 {..}x를 고려하면, {..}a와 {..}b가 대립되는 의미일 것 같다. 양자가 대립된다는 것만 이해하고 더 읽어나가자.(...) {19세기에 아시아, 아프리카, 그리고 중동에서 거둔 제국들의 승리는 유럽인들에게 세계의 야만스러운 지역들에서 신이 정한 문명화 사명을 수행한다는 인상만을 준 것이 아니라, 다윈주의적 관점에서 열등한 인간들에 대한 유럽인들의 우위를 정당화하는 것으로 정의된, 유럽인들의 본질적 우월함에 대한 논박할 수 없는 표지라는 인상도 주었다. 미합중국에서는 이러한 생각의 이데올로기적 등가물이 그 겉모습을 다양하게 치장한 채 “명백한 운명”(미합중국이 북미 전체를 지배할 운명이라는 주장ㅡ옮긴이)이라는 교리로 선언되었다. 이러한 관념의 영향 아래에 놓인 보편사 혹은 세계사는 유럽(혹은 미합중국)의 경험의 투영, 전 세계의 거주민들을 끊임없이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진보적 추동력의 핵심이 되었을 뿐이다.} (.......) 그 결과 비서구의 역사에 진지한 관심을 가진 서구 학자들은 비유럽인들의 역사를 그들 자신의 관점에서 이해하는 데 필요한 새로운 범주와 수단을 찾기 위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만 했다. 새로운 세계사 개념들, 세계체제 분석, 그리고 포스트식민 연구가 그러한 목적을 달성하려 했다.
(...)
171-174쪽:
스탈린 당국으로부터 추방당한 마르크스주의 학자들은 세계의 다른 곳에서 지적 골칫거리, 곧 사실과 이론, 사상과 실천을 조화시키는 문제와 씨름했다. 1930년대 독일에서 이른바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구성원들 가운데 비판적 사상가들은, 경제적 요소를 지나치게 강조한, ‘속류’ 마르크스주의의 순진한 변종들을 거부했으며, 인간 행위를 형성하는 영향력들의 다양성에 대한 보다 완전한 이해를 역설했다. (...)
프랑스 학자들 역시 인간의 과거에 대한 보다 포괄적인 형태의 이해를 얻기 위해 노력했다. 1929년 마르크 블로흐와 뤼시앙 페브르가 창간한 영향력 있는 저널 〈경제사회사 연보(Annale d'histoire économique et sociale)〉를 중심으로 아날 학파를 구성한 역사가들은 당시 학계를 지배하던 역사 흐름에 반대했다. 아날 집단은 페브르가 “사건사(histoire événementielle)” 또는 “사건지향적 역사”라고 폄하한 정치, 전쟁, 외교에 국한된 강조를 거부했으며, 인간 실재의 많은 차원들을 보다 완전하게 파악하려 애썼다. 역사서술가 에른스트 브라이자흐가 설명했듯이, 이 프랑스 학자들은 인간 삶의 모든 측면을 포괄하는 새롭고 보다 완전한 역사를 구상했다.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그들은 더 많은 탐구 기법을 개발했는데, 그중 많은 것은 사회학에서 이끌어낸 것이었고, 모든 사회과학과 인간과학을 가로질러 “형제동지들”이 광범하게 협력할 것을 요구했다. 페브르는 이 목표를 “모든 장벽과 꼬리표를 타도하라! 경계에 걸터앉아 양편에 한 발씩 놓아라. 경계야말로 역사가가 자유롭고 유용하게 작업할 수 있는 곳이다”라고 표현했다. [주2: Ernst Breisach(1994), p. 285]
아날 집단의 신조는 제2차대전의 주요 패자인 구 프랑스의 실천과 가치가 환상이었음을 일정 부분 입증함으로써 1945년 이후 프랑스 역사가들 사이에서 성공을 거두었다. 이 집단의 저널은 표제를 〈아날: 경제, 사회, 문명〉으로 바꾸어 계속 발간되었고, 아날 학자들은 계속해서 총체적인 역사를 탐구했다. 그들의 작업이 역사이론과 방법론을 함축하기는 하지만, 놀랍게도 그들은 그러한 주제에 관해 거의 쓰지 않았다. (...) 대체로 아날 학자들은 자신들의 이론적·방법론적 가정을 [여러 가지] 저술들 안에 암시적으로 남겨 놓았다.
그들의 저작에서는 두 가지가 두드러진다.
- 첫째, 아날 학자들은 전형적으로 집단의식 개념을 중심으로 분석했다. “심성구조”라 이름 붙은 이 현상은 , 특정한 시간과 장소에 존재하는 인간 집단의 정신적·심리적 특성에 주의를 집중했으며 그럼으로써 개인들에 대한 제한적이고 근시안적인 관심 너머로 역사가들을 이끌었다. {이 접근법에 따르면, 집단성은 총체적 역사로 이어지는 설명을 정식화하는 데 거의 모든 것을 포함시켰다.ㅡ혹시 이런 뜻인가? “이 접근법은 총체적 역사를 설명하는 데 필요한 모든 도식적(formalizing??) 요소들을 집단성에 포함시켰다”??}
- 둘째, 앞의 경우와 비슷한 방식으로 아날 역사가들은 장기지속 개념을 사용했다. 실제로 시간 개념인 이 술어는 역사적 변화의 행로에 개입하는 구조적 연속성을 가리켰다. 장기지속은 무엇보다 토지, 바다, 기후, 그리고 식생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 조건들은} 인간사를 안정시키는 효과를 나타냈으며 정치, 전쟁, 외교와 관련된 일시적 사건들보다 더 느린 {속도와 리듬에 주목하게 했다.} 더 나아가 이것들은 삶의 방식을 결정했다.
192-195쪽:
역사가들의 지식이 파편화되고 고립이 가속화되고 있는 것에 맞서 개념적 통합과 세계사에 대한 새로운 접근법을 요청하고 있다. 그 최전선에 있다고 할 윌리엄 맥닐(William H. McNeill)은 1963년에 방대하고도 박식하며 신기원을 이룬 책 《서구의 등장: 인간 공동체의 역사(The Rise of the West: A History of the Human Community)》을 출간하였다. 이 책은 고대 메소포타미아에서 시작하여 20세기 중반에서 끝나는 인간의 경험을 고찰하였다. 또한 이 책을 현대 세계를 만들어낸 원동력을 그 모든 측면에서 드러냄으로써 우리가 그것을 역사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맥닐이 등장하기 전에는 대다수의 역사가들이 유럽과 유럽화된 아메리카 지역 등에 관심을 집중했으며, 고급문화, 정치, 외교 등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들은 선사시대, 고대, 비유럽 지역은 다루지 않았고, 그 영역은 고고학자, 인류학자, 고전주의자, 언어학자, 오리엔탈리스트, 지역 전문가 몫이었다. (...)
또다른 통합적 개념화는 이매뉴얼 월러스틴(Immanuel Wallerstein)이 시도한 “자본주의 세계체제 분석”에서 나타난다. 전문용어로 가득 찬 두툼한 그의 저작은 아날 학파의 페르낭 브로델에게 영감을 얻어 경제학과 사회학의 방법론을 끌어왔다. 월러스틴이 보기에 서구에서 자본주의라는 새로운 관계는 1500년 이후에 등장했도, 마침내 세계의 상당 부분이 자기폐쇄적이고 자기 충족적이며 끊임없이 변화하는 유기적 조직으로 구성되었다. (...) 암스테르담, 런던, 뉴욕과 같은 세계 거점도시는 계혹해서 의사결정 당국이 자리잡고 경제 엘리트들이 생산, 분배 등을 선택하는 재정중심지 역할을 했다. 그와는 대조적으로 라틴아메리카, 아시아, 아프리카의 주변부는 다양한 자원이 풍부하고 완제품을 만들기 위해 원자재를 공급하는 곳이었다. (...)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