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명: 미시사와 거시사: 역사를 바라보는 두 가지 관점.
지은이(들): 위르겐 슐롬봄 편 (궁리출판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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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장. 미시적, 거시적 아니면 편두통? (찰스 틸리Charles Tilly) 63-66쪽.
(...) 이제 20세기에 역사가와 사회과학자들이 사회적 삶을 연구하는 데 적용했던 네 가지 중요한 존재론을 검토해봅시다. 즉 현상학적 개인주의, 방법론적 개인주의, 전체주의, 그리고 관계적 사실주의 말입니다.
랑시에르와 그 동료들은 ^현상학적 개인주의^, 즉 개인의 의식이 사회적 삶의 가장 중요한 기초 또는 요소라고 보는 이론에 기울어져 있습니다. 현상학적 개인주의자들은 다음과 같이 주장합니다. 주위 사람들의 여러 가지 생각은 다른 사람의 생각에 닿을 수가 없다고 말입니다. 따라서, 어떤 관찰자[연구자]도 자기 자신의 의식(意識)이라는 감옥에서 탈출할 수가 없다고 합니다. 이렇게 주장할 경우, 현상학적 개인주의는 유아론(唯我論)과 거의 유사해지고 맙니다.[주2] 자기 파괴적인 분석 경향이 유아론보다는 덜하기는 하지만, 현상학적 개인주의자들 또한 충동, 반사, 욕망, 이상 또는 계획 등, 육체와 정신이 처하게 되는 여러 가지 상태야말로 인간이 사회적 행위를 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주요한 동력원이라고 이해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원칙적으로, 현상학적 개인주의자들이 대규모 사회 구조 및 사회적 진행 과정을 설명하는 방법은 두 가지입니다.
- 가) 사회 과정/구조를 비슷한 여러 상황에 대하여 개개인의 반응이 집합된 것으로 보거나, {아마도 다음과 같이 뜻으로 이해하면 될 것 같다ㅡ“사회 과정이나 구조는 개개인이 비슷한 여러 상황에 반응하는 행동이 모여서 형성되는 것이라고 이해하거나”,}
- 나) 개개인의 행위에 존재하는 연관성 또는 배분 관계라고 이해하는 것입니다. {다음의 두 가지로 분해해서 이해해보자ㅡ(1)개개인의 행위에 존재하는 연관성 또는 (2) 개개인의 행위에 존재하는 배분 관계. (2)는 바꾸어 말해, “모종의 배분 관계가 개개인의 행위 속에 존재한다”는 말인 것 같다.}
^방법론적 개인주의^는 현상학적 개인주의에 비해서 역사가들의 지지를 별로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많은 경제사가들이 방법론적 애인주의를 따르고 있습니다. 경제학과 정치학 쪽에서 역사적인 분석을 시도하는 연구자들도 상당수가 그런 형편입니다. 방법론적 개인주의는 개인을 사회적 실재의 기본적 또는 유일한 존재로 봅니다. 그런 점에서 방법론적 개인주의는 현상학적 개인주의와 비슷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방법론적 개인주의에 따르면, 개인은 의식이 희박하거나, 의식 자체가 아예 없는 것으로 규정됩니다. 이 점에서 양자의 차이가 있습니다. 방법론적 대인주의를 경제학적으로 설명해보겠습니다. 지금 여기서 문제가 되고 있는 개인이란, 효용 항목(utility schedule)과 일련의 자산 항목으로 구성됩니다. 그런데 효용과 자산은 적절히 규정된 제한된 범위 안에서 선택이 결정되도록 상호 작용을 하지요.
(...) 이러한 분석은 그 어느 것이나 시장과 흡사한 분배 구조를 그려냅니다. 그 분배 구조는 선택권을 가지고 있는 개인을 초월하여 존재하지요.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은, 그러한 분배 구조가 자신들의 연구에 실제로 작용한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방법론적 개인주의자들이 보통은 따져보려고도 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결과적으로 미시경제학과 거시경제학 사이에는 커다란 틈이 생깁니다. {즉} 개인의 다양한 선택 행위{라든가}, 개인적 선택{을 낳은} 원인의 총합{이라든가}, 개인적 선택이 불러일으키는 다양한 결과{라는 것과} 은행, 상사, 산업체, 정부 따위의 조직 기관들{을 대치시켜볼 경우, 이 두 가지} 사이에는 메우지 못할 간격이 생깁니다. 방법론적 개인주의자들은 심각한 미시-거시 문제에 봉착하게 됩니다.
역사학자들과 사회학자들 가운데서도 현상학적 개인주의와 방법론적 개인주의의 약점을 감지한 이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전체주의^ 쪽으로 다가가는 경우가 많았다고 봅니다. 전체주의의 입장에서 보면, 사회 구조는 그 스스로를 유지하는 자체 논리를 갖고 있습니다. 극단적으로 말하면ㅡ한때는 역사학계에서 대단히 영향력이 있었으나 요즘은 그 유행이 한물 지나갔습니다만ㅡ문명 전체, 사회, 또는 문화는 자체적으로 삶을 꾸려 나간다는 것입니다.
이보다는 조금은 덜 극단적인 견해도 있습니다. 그에 따르면, 주요한 제도는 자기 복제력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사회의 특정한 부분은 나머지를 자기 이익에 종속시킨다고도 보지요. 예컨대 지배적인 사고 방식, 전통, 가치관, 또는 문화적 형태가 사회 생활을 조정하는 것으로 간주되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산업주의, 자본주의, 봉건주의 및 그 밖의 여러 가지 사회 조직들은 본래부터 자기 복제 논리를 가지고 있다고 믿습니다.
전체주의자들의 손에서는 미시-거시 문제가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게 됩니다. 그들은 어느 정도까지, 어떻게, 그리고 왜, 개인의 체험을 내용으로 하는 소규모 사회 생활이 그 상부 개념적인 여러 유형과 맞아떨어지는지를 판단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가능성은 별로 없습니다만, 만일 전체주의자들이 미시-거시 문제를 어떤 식으로든지 해결하려고 한다면, 그들이 선택할 방법은 사회화와 제제 조치[사회화가 예정대로 진행되지 못할 경우에 부가될 조치]를 조합한 것이 될 가능성이 큽니다. 긍정과 부정의 두 가지 측면을 모두 포함해서 조합할 것입니다.
^관계적 사실주의^에서는 계약, 상호 작용, 사회적 결속 및 대화 등을 사회적 삶을 구성하는 중심적인 요소로 봅니다. 역사학에서는 그런 적이 없었다고 하겠습니다만, 한때는 그것이 사회과학계의 지배적인 풍조였습니다. 고전적인 경제학자들, 예컨데 카를 마르크스, 막스 베버 및 게오르그 짐멜 등은 개인과 복합적 사회 구조 두 가지를 사회 관계에서 생기는 규정의 산물(?)(products of regularities)로 간주합니다. 그러나 20세기에 들어와서는 관계적 사실주의가 개인주의와 전체주의에 밀려서 설 땅을 잃어버렸습니다. 겨우 미국의 실용주의자들 사이에서만 연망(network) 분석의 다양한 방법이라든가, 조직 경제 또는 노동 경제의 몇 가지 분야가 명맥을 유지한 정도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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