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료 1: http://en.wikipedia.org/wiki/Jacob_Fugger
Jacob Fugger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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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cob Fugger by Albrecht Dürer | |
Born | March 6, 1459 Augsburg |
Died | December 30, 1525 (aged 66) |
Parents | Jakob Fugger the Elder |
Relatives | Anton Fugger, nephew |
Fugger was born on 6 March 1459 in the Swabian town of Augsburg in the Holy Roman Empire. He was the son of Jakob Fugger the Elder, a weaver and councilman in Augsburg. A trader like his brothers, he learned double-entry bookkeeping in Venice. Inheriting his father's business of trading, Fugger expanded the family enterprise to the Adriatic Sea via the port of Venice. He married Sibylla Artzt in 1498, but they had no children.[edit]
Biography
He was elevated to the nobility of the Holy Roman Empire in May 1511, and in 1519, led a consortium of German and Italian businessmen that loaned Charles V 850,000 florins (about 95,625 oz(t) of gold) to procure his election as Holy Roman Emperorover Francis I of France[1]. The Fugger's contribution was 543,000 florins.
At his death on 30 December 1525 Jacob Fugger bequeathed to his nephew Anton Fugger company assets totaling 2,032,652 guilders.[2] He is considered to be one of the richest persons of all time,[3] and today he is well known as Jakob Fugger 'the rich'.
He was well-known throughout Europe, and used his eventual fortune to lend money to its rulers. Fugger often provided mercenary armies with monetary resources so they could wage war against one another.
■ 자료 2: http://fr.wikipedia.org/wiki/Jacob_Fugger
■ 자료 3: 김동욱 기자의 역사책 읽기
제목: 정경유착의 원조, 야콥 푸거
때는 16세기 초. 교황이 유럽지역에서 가장 자금이 풍부한 지역인 프랑스와 영국의 추기경을 불러 얘기한다. “그대들은 한 시간 안에 3톤의 황금을 모을 수 있는가.” 추기경들이 ‘불가능하다’고 대답하자 “시골동네인 아우구스부르크의 일개 시민도 하는 일을 부국의 추기경들이 못 하는가”라는 면박이 돌아온다. 16세기 유럽에서 회자되던 ‘카더라’ 통신의 한 대목이다.
여기서 ‘아우구스부르크의 한 시민’으로 불린 이가 바로 16세기 유럽 경제를 쥐락펴락했던 대상인 야콥 푸거다. 당시 유럽대륙을 지배하던 합스부르크 가문의 정치 시스템에서 제국을 엮는 ‘황금실(golden thread)’로 불렸던 인물. 독일지역에서 거두어진 소위 ‘면죄부(현대 카톨릭에선 라틴어 ‘인둘겐치아’를 정치적으로 편향적으로 해석한 용어라며 ‘대사(大赦)’라고 번역한다.)’의 판매대금을 로마로 송금하는 유통 업무를 담당했던 이 초기 자본주의의 대표적 기업가는 ‘정경유착의 원조’라고 불릴 만한 인물이었다.
15세기말 16세기초 막대한 부를 쌓은 야콥 푸거의 위세는 대단했다. 이 독일 남부 아우구스부르크의 대상인은 북으로는 스칸디나비아, 남으로는 나폴리, 서로는 잉글랜드와 에스파냐, 동으로는 헝가리와 폴란드에 이르는 전 유럽지역에 푸거가(家) 지점망을 갖추고 은과 동, 화폐와 직물 등의 거래를 사실상 독점했다. 야콥 푸거에 필적할 만한 상인은 유럽 내에 존재하지 않았고 15세기말 16세기초 50년간 합스부르크가가 그들의 영향력 확장을 위해 유럽내에서 행한 수다한 협상과 전쟁의 배후에는 푸거가문의 자금이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있었다.
합스부르크가 외에도 유럽의 각종 수준의 상인들과 일반 여행자는 물론 공공기관, 도시국가 관계자, 영주들, 교황청 모두 유럽 전역에 거미줄처럼 퍼져있는 야콥 푸거의 지점들을 활용해 금전거래와 물자거래를 했다. 예를 들어 돈을 벌기 위해 에스파냐로 간 독일의 광산업자들은 멀리 있는 친척들에게 돈을 부치기 위해 에스파냐 소재 푸거가의 지점을 통해 송금했다. 16세기 초 여행자들은 다른 지역의 푸거가 지점에서 돈을 인출하기 위해 푸거가의 신용장을 미리 사놓곤 했다는 것.
퍼스티안 천 거래로 일어선 아우구스부르크의 대상인 가문인 푸거가문의 지도권을 1490년대에 잡게 된 야콥 푸거는 그의 전임자들이 주력했던 천과 향신료 교역에서 사실상 손을 떼고 광산업과 금융업의 신수종 사업에 집중한다. 물론 기존 사업을 완전히 포기한 것은 아니어서 퍼스티언천과 기타 직조물, 모직의류, 최고급 이탈리아 실크와 벨벳 그리고 향신료 거래는 다양한 푸거가의 사업 중 하나로 남아있긴 했지만 말이다. 대기업을 물려받은 신임회장이 잘나가던 주력산업에 안주하지 않고 과감하게 하이리스크의 신수종 산업에 올인한 것과 같은 격이다.
야콥 푸거의 지도하에 광산업에서의 이윤과 그에 따른 금융 신용사업이 점차 푸거가의 주력업종으로 자리메김하게 됐다. 신성로마제국 황제인 칼5세가 1525년 말했듯 “야콥 푸거는 다른 모든 상업적 행위를 포기하고 광산업에만 몰두”한 셈이다.
특히 헝가리와 티롤 지방의 광산이 야콥 푸거의 관심을 끌었다. 16세기 이 두 광산은 에스파냐가 아메리카 신대륙에서 귀금속을 대량으로 수입하기 전까지 유럽 뿐 아니라 세계에서 가장 큰 은과 동의 생산지였다. 이곳을 독점한 야콥 푸거는 초기 유럽 산업의 지존 자리에 올랐다. 광산권의 독점 과정에선 야콥 푸거만의 정경유착이 역할을 했다.
야콥 푸거는 그의 형 울리히 푸거가 문을 연 합스부르크가와의 금융컨넥션을 활성화시키면서 광산업 진출을 시도했다. 푸거가는 1487년에 ‘부유하지만 언제나 돈은 모자랐던’ 티롤 공작 지그문트에게 선금을 주고 은과 동을 확보하는 계약을 맺으며 광산업에 발을 들인다. 이후 푸거가는 티롤지방 공작들에게 일정 금액을 선금으로 지불하고 빌려준 돈과 이자가 완납될 때까지 공작 소유 광산에서 나오는 이득을 얻어왔다. 광산업은 오늘날 인식과는 달리 당시에는 고수익 신사업이었다. 역사학자 막스 얀센의 연구에 따르면 푸거가는 푸거가의 성장 초기인 1487-1494년 사이에만도 40만 라인골드굴덴의 수익을 본 것으로 추산된다는 것.
야콥 푸거가 1490년대 지도력을 발휘한 이후에는 이미 확립돼있던 티롤의 지그문트 공작과의 사업관계 외에 지그문트 사후 그 지역의 지배권을 갖게 된 독일왕이자 후의 신성로마제국 황제가 되는 합스부르크가 막시밀리안1세와 사업관계를 이어갔다.
막시밀리안1세와의 유착관계는 당시까지 티롤지방 합스부르크가 영지로부터 생산되는 은의 구입과 이와 관련한 금융업의 선두주자였던 한스 바움가르트너를 제치는 계기가 된다. 야콥 푸거는 막시밀리안1세가 바이에른 출신인 바움가르트너에게 적대적인 태도를 취하는 정치상황을 십분 활용해 푸거가의 성장을 유도했다. 왕은 이 새로운 아우구스부르크의 비즈니스 리더에 대한 신뢰를 꾸준히 쌓아갔다. 결국 야콥 푸거는 1491년에는 티롤지방 은교역의 우선권을 획득하게 됐다.
푸거가는 1522년 이전에는 티롤지방 광산을 사실상 직접 소유하지 않았다. 하지만 정치적 ‘빽’을 활용해 경쟁자인 마틴 바움가르트너의 파산을 유도, 슈바츠와 라텐베르크, 리엔츠의 중요한 광산권을 획득한 뒤에는 광산업에 직접 관여하게 됐다. 여기에 오스트리아와 잘츠부르크의 은 교역으로 인한 수익도 야콥 푸거의 부를 불려나갔다.
푸거가는 은 외에도 지그문트와 막시밀리안1세와 맺은 티롤지방 동에 관한 계약과 동 교역을 통해서도 부를 축적해 갔다. 특히 푸거가는 이탈리아 기술자이자 상인가문인 투르조(투르조 가문과는 이후 이중삼중 결혼정책으로 결합이 강화된다.)와의 협력을 통해 동의 원광석에서 동을 효율적으로 뽑아내는 기술을 개발, 수익성을 더욱 높이게 됐다. 여기에 푸거가의 금융업은 광산업과 결합돼 확장을 계속했다.
정경유착의 활용은 헝가리 광산진출시 더욱 빛났다.헝가리 카르파티아 산맥 지역은 오스만투르크와의 접경지대였고 신성로마제국과 적대적 관계를 가진 마자르족 지도자 마티아스 코르비누스의 지배하에 있어서 독일 자본가들이 자본을 투자하기에는 어려운 점이 많았다. 하지만 범독일과 헝가리 간의 적대간계는 1491년 프레스부르크 화약으로 해소됐고 야콥 푸거는 프레스부르크 화약 직후 헝가리 광산에 대규모 투자를 하는 결단을 보였다.
그는 마자르족 헝가리의 독일 상인에 대한 적대감을 합스부르크를 ‘빽’으로 삼아 극복하며 광산업을 확대해 나갔다. 특히 합스부르크가가 헝가리 왕실과 이중의 결혼동맹을 맺어 헝가리내에 합스부르크가가 영향력을 확대하는데 푸거가가 적극적인 역할을 담당하기도 했다. 그로 인해 푸거가의 입지도 물론 다져나갔다.
이 아우구스부르크의 상인은 꾸준한 수익이 창출될 때까지 엄청난 양의 금액을 헝가리 광산과 용해소, 제철소는 물론 광석을 옮길 도로건설 등에 쏟아 부었다. 당시 헝가리의 광산들은 독일 자본이 없었다면 개발될 수 없었을 것이라는게 야콥 푸거에 대한 매력적인 전기를 쓴 야콥 스트리더의 설명이다.
야콥 푸거의 사업성장에 있어 결정적 역할을 한 것도 정치권력과의 독점계약 이었다. 야콥 푸거는 두건의 중요한 동 독점계약을 정치권력과 맺었는데 하나는 1514년에 막시밀리안1세와 푸거가 독점으로 맺은 것으로 1515년 크리스마스부터 1520년 크리스마스까지 신성로마제국내 동 독점권을 푸거가가 갔는다는 것이었다. 다른 하나는 1520년 크리스마스부터 1523년 크리스마스까지 회히스테터 가문과 공동으로 동 독점권을 소유한다는 것이었다.
야콥 푸거의 정경유착은 정치권력의 대를 이어 계속됐다. 막시밀리안 사후에 야콥 푸거는 그의 후계자인 칼5세와 독점계약을 맺었다. 1525년 에스파냐 톨레도에서 칼5세가 직접 발표한 칙령은 “야콥 푸거와 그의 가문만이 원광석 거래를 합법적으로 행할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이런 금속 독점권을 바탕으로 푸거가는 유럽 경제권을 장악해갔다. 동유럽 지역에서 생산된 푸거가 소유 동은 우선 한자동맹 상인과 네덜란드 상인들을 통해 뤼벡이나 함부르크를 거쳐 네덜란드로 갔다. 이어 안트워프의 푸거가 지점으로 집결됐다. 다시 안트워프에서 푸거가의 동은 에스파냐와 포르투갈, 스페인, 이탈리아로 갔다. 물론 혈연동맹을 맺었던 이탈리아 투르조가를 통해 육로로 이탈리아 반도와 남유럽으로도 동이 퍼졌다.
(중략)
특히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는 야콥 푸거의 가장 강력한 지지자였으며 헝가리 국왕이 “푸거가가 헝가리에 대해 공식적으로 불만을 표한다면 전 유럽을 헝가리에 대해 적대적으로 만들 수 잇을 것”이라고 푸념할 정도였다. 역사가들은 후대의 로스차일드 가문을 제외한다면 정치세력과 그토록 꾸준하고 효과적인 커넥션을 지속적으로 유지한 가문은 푸거가문이 유일하다고 지적한다. 독일과 에스파냐에서의 황제의 ‘통큰 정치(grosse Politik)’는 모두 푸거가의 재정적 지원을 필요로 했다.
(중략)
그는 또 교황청과도 밀착해 교황청 주조 동전의 거의 모든 원료를 공급했으며 면죄부 판매와 수익금 전달에도 깊이 관여했다.(이에 따라 당대와 후대 작가들에 의해 과장된 면도 있지만 마틴 루터 공격의 일차 타깃이 되기도 했다.)하지만 교황청과의 커넥션은 중요하긴 했지만 효용성과 실적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와 가졌던 수준에는 미치지 못했다.
하지만 이같은 정경유착으로 성장한 푸거가문은 정치권의 몰락으로 발목이 잡혔다. 그의 후계자인 안톤 푸거를 비롯한 후손들은 16-17세기 네덜란드와 에스파냐 정부가 파산하면서 빌려준 돈들을 날려 푸거가문 재정에 결정타를 맞게 된다. 그가 뿌린 유착의 씨앗은 고속성장의 씨앗이기도 했지만 후계자들의 파멸을 잉태한 파괴의 씨앗이기도 했던 것이다.
<참고한 책>
Jacob Strieder, Jacob Fugger the Rich-Merchant and Banker of Augusburg, BeardBooks 2001
Gordon A. Craig, The Germans, Meridian 19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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