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료: 전체주의 시대의 종교와 여성: ‘유토피아적 부정’과 여성해방적 종교비판
지은이: 박경미, 이화여대 기독교학,
출처: 젠더와 문화 제1권 창간호(2008년)
※ 요약 중에서:
‘사유’라는 가장 인간적인 행위가 효율과 합리성의 미명 하에 조롱당하는 오늘의 현실 속에서 인간적인 세계를 향한 유토피아적 비전을 보존하는 보루로서 종교와 비판적 여성해방론은 어떻게 만날 수 있는가?
‘화폐적 보편성’에 의해 획일화 된 자본주의라는 이름의 전체주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비판적 관점에서 이루어지는 종교적 성찰은 오늘날 억압과 지배의 형태에 대한 어떠한 의미 있는 분석과 비판을 제공할 수 있는가? 그것은 비판적 여성해방론과 어떻게 근접할 수 있는가? 이러한 질문들에 대해 성찰하는 것이 이 글의 관심사이다. (...)
1. 들어가는 말: 전체주의 시대의 종교
종교는 세일 중이다. 미래에 대한 불안과 공포를 적당히 섞어 반죽한 목사의 축복은 적립식 연금보험 상품과 나란히 재고시장에 쌓여 팔린다. 본능적 욕망과 일체가 된 원초적인 종교적 감정들이 TV 오락 프로그램의 미끈한 육체들과 힘에 붙이는 경쟁을 한다. 오늘 우리사회에서 종교는 기왕의 수많은 자본주의적 자극들에 하나를 더 보태 아주 싸게 팔리고 있는 중이다. 극심한 경쟁사회의 구성원들은 바로 그 끝없는 경쟁 때문에 자신들이 고통당하고 있는데도, 종교를 통해 그 사실을 잊어버리고 다시 그 가망 없는 경쟁에 뛰어들도록 조종당한다. 사람들이 종교를 사고파는 사이 한물 간 개발지상주의자들은 밀실에서 국민의 생명과 미래를 놓고 저희끼리 거래를 한다. 종교는 장사가 되고, 민주주의는 역전의 용사들의 훈장이 되어 무게를 저울질 당한다. 삶의 근본과 정신적 가치에 대한 발언은 ‘진보, 아니면 보수’, 둘 중 어느 쪽인지 빨리 고르라는 명령으로 되돌아온다. 사회보전과 애국 애족이라는 보수주의의 전통적 미덕은 헌신짝처럼 내버리고 제 밥그릇 챙기기에만 혈안이 되어 있는 우리 사회의 ‘보수’. 갑자기 현실주의자로 변모해서 나라를 책임지기라도 할 듯 ‘희망’을 ‘제작’하며 미심쩍은 대안제시에 매달리는 ‘진보’. 무책임한 ‘보수’와 책임감 과잉의 ‘진보’. ‘보수’와 ‘진보’. ‘좌’와 ‘우’라는 말이 원래 내포했던 정서(情緖)와 장단점이 서로 뒤바뀌고 뒤죽박죽이 되어버린 상황에서 둘 중 어느 쪽을 선택해야 하나? 무대 위에서 벌어지는 쇼는 눈부시고 화려해도 그걸 보고 있는 사람들의 실제 살림살이는 가련하기 짝이 없는데, 삶의 고단함과 답답함을 설명하고 위로해줄 ‘이야기’는 보수에도, 진보에도 없는 것 같다.
자본주의의 ‘화폐적 보편성’은1) 진보와 보수를 가리지 않는다. 자본주의는 모든 것을 동질화시킨다. 근대 자본주의 경제는 ‘화폐에 의한 보편성’이라는 거짓된 보편적 사고에 기반해 있으며, 통계수치라는 추상적 개념을 강조한다. 그리고 이 추상적 수치에 의해 모든 것이 동질화 된다. 그래서 저마다 개성과 다양성을 외치지만 사실은 똑같이 기계와 화폐의 리듬을 찬양하고 있다. 문화산업이 예술을 대신하고, 경영이 정치를 대신하며, 섹스가 사랑을 대신한다. ‘진보’건 ‘보수’건 경제가 발전해야 문제가 해결되고 삶의 질이 보장된다는 확신을 공유한다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이런 ‘진보’는 사실상 아직 권력을 잡지 못한 ‘보수’일 뿐이다. 그러므로 ‘화폐적 보편성’, 획일성을 거부하지 않으면서 세상은 알록달록하다고, 남자와 여자, 백인과 흑인, 가난한 자와 부자, 누구나 각자의 권익을 추구하며 자신이 원하는 대로 먹고, 입고, 생각하고 행동하게 내버려 두면 된다고 주장하는 자유주의자들 의 다원주의 찬미는 순진하거나 아니면 위선적이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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