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1월 1일 토요일

[서평] 새로운 빈곤 (지그문트 바우만 지음/이수영 옮김/천지인)

자료: hermes.khan.kr,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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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비자 사회에서 ‘실업자=빈곤층’은 잉여인간, 쓰레기에 다름 아니며 배제와 격리의 대상일 뿐 설 자리가 전혀 마련돼있지 않다는 것이다.

물론 빈곤층은 예나 지금이나 존재했고 빈곤층이 대접받는 시대는 없었다. 그러나 산업화시대로 일컬어지는 근대사회에선 ‘예비 노동자’로서의 지위나마 주어졌다. 노동을 중심으로 사회를 구성했던 이 시대엔 '일을 하라'는 명령이 빈곤층에 주어졌다.(...) 보편적 고용 혹은 완전고용은 아직 달성되지 않았지만 근대사회의 노동윤리는 이것이 이뤄지리라는 비전을 제시했다. 이 기주넹 비춰볼 때 일하지 않는다는 것, 다시 말해 실업은 비정상, 규범의 위반이었다.

그러나 탈근대 사회에서 ‘정상적인 삶’은 더 이상 일하는 삶이 아니다. 노동이 있던 자리는 소비가 대체했다. 즉 ‘생산자 사회’가 ‘소비자 사회’가 됐다. 근대는 노동이 사회구성의 원리였지만 오늘낳의 사회가 구성원에게 내세우는 규범은 소비다. 현대 사회에선 일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소비자 노릇을 해내는 사람이 정상인 대접을 받는다.

지은이가 현대 사회의 빈곤층을 ‘신빈곤층’이라고 지칭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제 실직은 비정상적 상태가 아니라 ‘잉여’ 즉 남아도는 쓰레기 그 자체다. 현대 자본주의 체제에서는 더 이상 대규모 노동력을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에 빈곤층은 처음부터 예비 노동력으로서의 역할조차 주어지지 않고 소비하지도 못하기 때문에 아무짝에도 쓸모없다는 것이다. “오늘날의 빈곤층은 ‘실업자’가 아니라 ‘비소비자’이다.”(...)

지은이는 책 말미에 소득 자격과 소득 확보 능력의 분리를 언급한다. 노동 자체와 노동시장을 분리시키자는 논리인데 짤막하게 암시할 뿐 상술하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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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메모:
  • 원시 수렵채취 사회에서 수십 명씩 무리지어 이동하던 때에는 분배할 부가 절대적으로 제약되어 영아를 살해하는 일도 발생했다고 한다. 오늘날 잉여로 전락하는 사람들이 발생하는 이유는 해당 사회에 더 이상 분배할 부(富)가 없어서가 아니다.
  • 이 책의 지은이가 소득 자격과 소득 확보 능력을 분리하자고 했다면, 원시 수렵사회처럼 영아를 살해하듯 사회적 약자를 죽여버릴 게 아니라면 당연히 사회 구성원으로서 인정하고 소득을 보장해주자는 의미로 읽힌다.
  • 또 노동 자체와 노동시장을 분리하자고 했다면, 사적 시장에서 ‘자유롭게 거래되는 상품’으로서만 노동을 취급하지 말고, 시장 이외의 방법으로 노동 자체를 분배해주자는 생각으로 읽힌다. 왜 이런 생각을 했을까? 인간에게 노동은 생존을 위한 밥벌이로서의 의미만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생존 수단으로서의 의미는 부수적이다. 노동은 인간에게 ‘의미를 발견하고 자아를 생산하는’ 것이기 때문일 거라고 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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