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12월 31일 금요일

[서평] 제3의 길’: 서유럽 사민주의의 혁신인가 투항인가?

지은이: 신정완, 성공회대 교수
서평 대상: 제3의 길과 신자유주의 (김수행․안삼환․정병기․홍태영 공저, 2003, 서울대출판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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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 이래 우리 학계에서 가장 많이 거론되어온 용어는 아마 ‘세계화’와 ‘신자유주의’일 것이다. 세계화와 신자유주의는 이제 단순히 학술적 용어라기보다는 수많은 대중이 일상생활을 통해 수없이 자주 부딪치는 압도적 현실로 다가왔다. 특히 1997년 말 이후 우리 사회가 경험한 IMF 경제위기는 세계화와 신자유주의의 엄혹한 모습을 생생히 보여주었다. 신자유주의적 지향의 세계화를 추진해온 핵심 세력은 나라 수준에서는 물론 미국이고, 사회집단 수준에서는 초국적 기업들이라 할 수 있다. 주지하다시피 신자유주의적 지향의 세계화는 빈부격차의 증대, 금융 불안정성의 심화 등 수많은 부작용을 초래했고, 특히 최근에는 미국의 군사적 패권주의와 결합되어 더욱 무서운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렇다면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에 대항할 수 있는 유력한 이념과 세력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인가? 소련-동구 사회주의의 붕괴 이후 국가사회주의에 대한 미련을 버리게 된 중도좌파적 지식인과 사회운동세력은 유럽의 사민주의 이념과 세력에 상당한 기대를 걸어왔다. 사민주의 운동의 힘이 과거 케인즈주의의 전성기만 못하다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래도 100년 이상의 역사를 자랑하는 유럽 사민주의 운동의 역량이 그리 녹록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기대해온 것이다. 특히 급속히 진행되어가고 있는 유럽통합 운동은 지금까지는 주로 신자유주의적 기조 하에 진행되어왔지만, 일단 유럽통합이 완료되면 유럽이 미국에 대항할 수 있는 큰 힘을 갖게 될 것이고, 따라서 유럽 사회들에 깊이 뿌리내린 사민주의 운동의 힘이 머지않아 진가를 발휘할 수도 있으리라 기대한 것이다. IMF 경제위기 와중에 국내 학계 및 정치권에서 영국의 토니 블레어가 이끄는 ‘신노동당’의 지도이념인 ‘제3의 길’에 큰 관심을 보였던 것도, 혹시 ‘제3의 길’이라는 것이 불가역적 현상으로서의 세계화를 전제로 한 현실주의적이면서도 진보적인 대안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의 발로였다고 할 수 있다.

김수행, 안삼환, 정병기, 홍태영이 공동으로 집필한 책 ꡔ제3의 길과 신자유주의ꡕ는 이러한 기대감이 근거 없는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한다. 신자유주의의 새로운 버전(version), 그것도 상당히 기만적인 버전이라 할 수 있는 영국의 ‘제3의 길’뿐 아니라, 독일 사민당의 ‘신(新)중도’(Neue Mitte), 그리고 영국과 독일 사민주의 세력의 우경화를 비판하며 전통적인 사회주의적 가치를 어느 정도 표방한 프랑스 사회당의 프랑스식 ‘제3의 길’ 역시 크게 보면 신자유주의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이다.

(...)

이렇게 필자들은 기본 시각을 공유하고 있지만 각국의 사례를 분석하는 방식과 각국 사민주의 운동의 우경화를 해석하는 방식에서 상당한 차이를 보이고 있기도 하다. 영국 사례를 분석한 김수행 교수는 오래 전부터 보수당 대처(M. Thatcher) 정권 이후 영국 사회의 신자유주의적 개편이라는 주제에 천착해왔는데, 이 책을 통해 블레어의 ‘신노동당’ 정부의 경제정책과 사회정책에 관한 가장 자세하고 입체적인 설명을 제공해주고 있다. 특히 공황론 전공자답게 경기변동과 정책 변화간의 상관관계를 매우 세밀하게 다루어주고 있다. 특히 주목할 만한 부분은 김수행 교수가 케인즈주의 전성기의 서유럽 사민주의 세력의 이념 및 정책 노선을 국가사회주의 및 자유시장주의와 확연하게 구별되며 나름의 정합성을 갖는 독자적 이념이자 정책노선으로 간주하며 비교적 호의적 평가를 내리고 있다는 점이다.

독일 사례를 분석한 정병기 박사는 독일 현 사민당 슈뢰더 정권의 ‘신중도’ 노선이 영국 블레어 정권의 ‘제3의 길’과 별다른 차이가 없다는 점을 강조하며, 이러한 사민당 노선의 우경화의 역사적 뿌리를 추적하는 데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다. 특히 라쌀(Lassale)주의가 독일 사민당의 이념과 정책노선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쳐왔다는 점을 강조한다. 독일 사민당은 처음에는 맑스주의적 성향이 강한 혁명적 계급정당인 사민주의노동자당(SDAP)으로 출범하였으나 라쌀주의자들의 전독일노동자연맹(ADAV)과 통합하면서 의회주의적 계급정당으로 변모하였고, 2차대전 이후에는 계급정당적 성격을 더욱 약화시키며 ‘친근로자적 국민정당’으로 변모해갔고 마침내 슈뢰더 정권 하에선 주로 중간계층의 이익을 대변하며 경제성장을 최우선시하는 ‘부르주아적 국민정당’으로까지 나아가게 되었다는 것이다.

(...)

그러나 아쉬운 점도 적지 않다. 우선 전공 분야가 다른 필자들이 공동으로 집필한 관계로 사례 분석의 방식이 나라마다 표준화되어 있지 않다. 김수행 교수의 글은 주로 경기변동과 경제-사회정책의 변화간의 상관관계를 다룬 전형적인 정치경제학적 성격의 글인 데 반해, 정치학자인 정병기 박사의 글과 홍태영 박사의 글은 이념사 분석에 많이 치중하고 있다. 또 김수행 교수의 글은 1980년대 이후 보수당과 ‘신노동당’의 정책 노선 분석에 대부분의 지면을 할애하고 있는 데 반해, 정병기 박사와 홍태영 박사의 글은 1970년대 이전 시기에 대한 분석에 꽤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다.
특히 정병기 박사의 글의 경우 서술방식에 있어 상당한 불균형을 발견할 수 있는데, 1970년대 사민당-자민당 연립정부 시기의 정책에 대한 소개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고 있으며, 1980년대 이후 기민련/기사연-자민당 연정과 1998년 이후 사민당-녹색당 연정의 정책기조를 규정한 중요한 배경인 독일 통일, EMU 가입 등이 미친 효과에 대한 설명이 매우 부족하다. 또 서술방식에 있어 시기별 서술로 일관한 김수행 교수와는 달리 시기별 서술과 이슈별 서술을 혼합시킴으로써 시기별 흐름을 제대로 파악하는 것을 매우 어렵게 하고 있다.

홍태영 박사의 글은 프랑스 정치문화의 특성으로서 공화주의적 전통을 강조한 것은 좋으나 이것이 글 전체를 관통하여 반복적으로 강조될 정도로 중요한 요인인가 하는 의문이 들기도 하고, 경제조건의 변화에 대한 설명이 전반적으로 부족하다는 약점이 있다. 또 서술방식에 있어 프랑스 사민주의 세력의 이념과 정책의 변화를 중심으로 서술하면서 이에 대한 이해를 돕는 차원에서 시대상의 변화와 프랑스의 사회복지제도의 특성 등에 대한 설명을 배치하는 것이 아니라, 종합적인 시대상의 변화와 프랑스 사회복지제도의 특성에 대한 설명에 지면을 너무 많이 할애하고, 또 복지국가의 유형에 대한 에스핑-안델센(G. Esping-Andersen)의 설명을 장황하게 소개하는 등 글의 흐름을 너무 자주 끊어 놓고 있다.

전반적으로 필자들간에 서술방식의 표준화를 위한 사전 협의가 매우 미흡했던 것 같다. 좋은 학제적 연구를 이루기 위해선 서로 다른 전공분야를 가진 연구자들이 모여 집필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연구자들간의 긴밀한 협의를 통해 높은 수준의 입장 공유를 이루어내고 서술방식의 통일성도 달성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는 점을 새삼 느끼게 된다. 또 책의 구성에 있어 책 말미에서 각국 사례 분석의 결과를 통합 정리해준 것은 좋으나 이러한 정리가 별다른 이론적 틀에 기대지 않고 앞부분의 사례 분석들을 요약, 정리해주는 선에 머물러 있다. 책의 서두에서 유럽 사민주의 운동의 이념적, 정책적 특성을 개관해주고 자본주의 발전국면별로 유럽 사민주의 세력의 정책 노선이 변화해오게 된 이유를 자본주의라는 구조적 제약과 사민주의 운동의 정책자율성 사이의 관계 차원에서 일반론적으로 설명해 주었더라면 더 낫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그리고 이러한 일반론적 설명을 바탕에 깔고나서 각국 사례를 분석했더라면 사민주의 운동의 일반적 성격과 각국의 특수한 조건을 반영하는 각국 사민주의 운동의 특수성과 편차를 더 입체적으로 보여줄 수 있었을 것 같다.

또한 자본운동의 세계화라는 압력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하는 문제와 관련하여 각국 사민주의 세력 내에서 전개된 논쟁을 좀더 자세히 소개해주었으면 좋았을 것 같다. 그렇게 했더라면 향후 정치경제적 여건의 변화에 따라 서유럽 사민주의자들이 새로이 선택할 수 있는 정책노선의 폭이 어느 정도인지를 독자들이 예상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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