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11월 17일 수요일

[용어 용례] 사회공학(social engineering)

용어가 사용된 사례를 다 찾아볼 수는 없지만, 몇 개만 살펴본다.


한편 보수논객 전원책 변호사는 한국 사회의 보수를 "탐욕스럽다"라고 혹평한 홍 최고위원에게 반론을 제기하기도 했다. 전 변호사는 "홍 의원이 이야기하는 보수는 보수의 탈을 쓴 기회주의자, 기득권층에 불과하다"며 "한국의 보수는 그렇게 약아빠지지 않았다. 자식의 교육을 위해 자신의 점심은 굶는, 여러분의 아버지, 할아버지들이 바로 보수주의자들"이라고 말했다. 정부가 주도하고 있는 '공정 사회' 캠페인의 헛점도 지적했다. 전 변호사는 "이런 식으로 정부가 캐치플레이즈를 내 거는 것은 파시스트, 독재자들, 레닌과 스탈린 등 마르크스주의의 아류들, 모택동과 체 게바라 등의 사생아들, 그리고 평양뿐"이라며 "'공정'이라는 구호가 사회공학(social engineering)으로 작용하는 것은 위험하다"고 했다. 전 변호사는 "어느 날 느닷없이 대통령은 공정한 사회를 만들겠다고 했고, 모든 언론을 통해 화두로 떠올랐다"며 "과연 이것이 선진국 진입을 앞둔 대한민국에서 가능한 현상인가"라고 반문했다. 전 변호사는 "우리 사회의 편법주의, 정실주의, 지연·학연·혈연으로 얽힌 근본적인 부패구조 즉 이너서클이 문제"라며 "이 틀을 해체하는 것은 사회공학, 정치공학으로는 불가능하며 '도덕 재무장'이 유일한 해법"이라고 강조했다. (...)



포퍼는 완전한 사회란 존재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완전한 사회를 혁명과 같은 수단을 동원하여 단번에 이룩할 수 있다는 생각이 세계를 더욱 위험하게 만든다. 포퍼에게 있어 이상적 사회란 상호비판과 토론 속에서 서로의 오류를 교정해가는 그런 사회다. 포퍼는 그러한 자신의 방법을 '점진적 사회공학'(piecemeal social-engineering)이라 불렀다. "점진적 방법에 찬성하는 점진적 공학자는 어떤 이상을 확립하기 위한 투쟁보다는 고통과 부정 그리고 전쟁에 대항하는 체계적인 투쟁이 수많은 사람들의 찬성과 동의에 의해 지지를 받을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다.

사회생활이란 너무 복잡하므로 전체적 규모의 사회공학을 위한 청사진에 대해서는 거의 아무도,어쩌면 전혀 그 누구도 판단할 수 없다. 말하자면 그것이 실현 가능한지 아닌지,그것이 사실상의 향상을 가져오는 것인지 아닌지,그 청사진을 실현하는 방법으로는 어떤 것이 있을 수 있는지 판단할 수 없다. 이것과는 반대로 점진적 공학을 위한 청사진은 비교적 간단하다. (...)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자유주의가 이들 집단주의적 형태의 이데올로기에 대한 해독제역할을 할것으로 기대되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요청될수 있는 조건은 크다. 무엇보다 국가의 역할은 민주화이후 여러 다원적인 사회적 힘과 가치들을 압도하면서 팽창일로에 있는것으로 이해된다. 이를 견제할만한 어떠한 가치나 이념도, 시민사회의 발전도, 가치와 세력의 다원화도 발전하지 못하는 조건때문에 그러하다. 민주화이후 한국사회에서 국가권력이 견제되고 분산되어야 한다는 요구가 강하게 표출된 적은 별로 없다. 정부의 부서간 견제와 균형, 그리고 국가(기구)권력과 시민권력간의 견제와 균형을 원리로하는, 한국민주주의의 제도적 틀의 모델이되는 매디슨적 민주주의원리가 한국민주주의의 제도개혁의 관심사로 떠올랐던것은 기억되지않는다. 한국민주주의의 자유주의적 측면, 즉 개인의 기본권은 그 어떤 가치에 우선하여 존중되고 보호되어야하며, 이들에 의해 국가권력은 견제되고 제한되어야한다는 문제의식은 어디로부터도 제기된적이 없다. 견제되지않고 균형되지않는 국가는 구조적으로 권위주의적이 될수밖에 없고, 자유주의에 의해 대응되지않을때 전체주의적 경향성을 드러내기 쉽다. 과거의 권위주의산업화의 전통위에서, 국가는 경제발전과 효율성을 극대화하기위해 법의 지배를 존중하지않고, 다른 중요한 가치를 희생해서라도 오로지 성장목적을 달성하기에 적합하도록 시장을 조직하고 왜곡할수 있다는것이 자연스럽게 수용되고 있는것이다. 진보와 보수를 포함하는 전체사회가 이러한 가치관과 비젼을 자연스럽게 수용한다. 그리하여 국가주의, 민족주의, 경제발전을 지향하는 성장주의는 사회의 가장 지배적인 가치이자 이념일뿐 아니라 그에 대응할수 있는 어떤 경쟁적인 가치도 발전하지 못하고 있는것이 현실이다. 진보적지식인사회나, 시민운동은 이러한 이념과 가치를 더 추동하는 역할을 한것으로 보인다. 개혁은 국가프로젝트에 의한 사업의 형태로 모습을 띄게되고, 진보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정책은 물론, 시민사회에서의 시민운동역시 국가의 지원과 힘에 의존하는 “사회적 기획” (social engineering)의 내용을 갖게된다. 최근 황우석논문조작사건이 재판부의 판결에 의해 유죄로 확정된 사례에서도 볼수있듯, 생명공학의 발전은 국가정책의 중요 우선순위를 가지면서 전폭적으로 정부에의해 지원된 바 있었다. 이미 학문적 정직성을 훨씬 벗어난 상황에서도 많은 사람들은 이를 국가발전의 이름으로 그 잘못을 수용하지 않았다. 그만큼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하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는 없다. 노벨상수상도 국가프로젝트에 의해 추진될수 있는 가능성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고, 또 이를 긍정할수 있는 곳은 한국이외에는 없을것이다. (...)



저자는 평등주의의 건강성은 사회적인 인정(social recognition)에 달려 있다고 한다. 어느 정도이면 불만족이고 어느 정도이면 만족할 것인가는 그 사회의 구성원들의 인식에 달려 있다. 미국처럼 불평등에 대한 "관용의 수준"이 높은 사회가 있고 (...) 따라서 분노와 적개심의 에너지를 긍정적이고 발전적인 에너지로 변환을 시켜야 하는 것이 사회공학(social engineering)적인 과제라고 한다.



법(法)은 곧 보수(保守)」로 통한다. 현상유지(statusquo)의 도구로 법이 이용되는 속성 때문이다. 법률가 세상인 미국(美國)에서 법은 사회공학(social engineering)의 유력한 도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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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이란 국가의 강제력을 가지고 있는 단순한 수단이 아니다. 사회의 문화 현상의 하나이며, 또한 하나의 가치체계이며, 사회의 평화와 질서를 유지하면서 사회를 발전적으로 이끌어 가는 하나의 시스템이다. 또한 英美에서는 법이란 사회를 이끌어 가는 하나의 공학, 즉 사회공학(social engineering)이라고도 한다. 이러한 법의 사회 시스템이 원만하게 작동하게 되면, 그 사회는 안정적이고 평화스러우며, 그 사회의 구성원인 개인은 원만한 인격을 갖추어 인격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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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사회의 또 다른 지표는 公共計劃 혹은 計劃이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前근대사회에서는 오늘날과 같은 의미의 계획이 필요하지도, 가능하지도 않았다. 무엇보다 권력의 정당성이 세습적 전통이나 카리스마와 같은 ‘내재적 권위’에 기초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근대국가에서는 외형적 업적이나 외부적 평가가 권력의 향배를 가늠하며, 바로 그런 이유로 공공계획의 중요성이 증가한다. 산업사회의 출현 또한 계획의 시대를 함께 열었다. 산업혁명 이후 각종 사회적 혼란과 무질서에 대한 정치적 대응이 요구되었기 때문이다. 18세기 벤담이나 생시몽, 꽁트 등이 제시한 사회공학적(social engineering) 발상은 공공계획의 기원을 이루었고, 맑스의 사회주의혁명 이론은 급진적 사회계획을 의미했다. (... ...) 물론 근대국가의 합리적 종합계획이 모두 효과적이거나 항상 성공적인 것은 아니다. 특히 그것의 극단적인 형태에 해당하는 소위 ‘고도 근대주의’(high modernism) 사회공학이 20세기 인류문명에 수많은 폐해를 남긴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Scott, 1996). 우선 국가의 영향력은 원래 계획한 사회경제적 목표의 달성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성공적 실현과정에서 계급구조나 사회갈등 혹은 정치문화 전반에 걸쳐 ‘非意圖的 結果’를 초래할 수 있다.




저도 문명의 진보는 믿습니다만...하이에크가 이야기하는 자생적 질서를 통한 진보를 믿지 '사회공학(social engineering)'을 통한 진보를 믿지 않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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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빈 서판』, 14 쪽 : 그리고 인간이 대규모 사회 정화 운동에 의해 개조될 수 있다는 확신은 역사상 가장 규모가 큰 잔학 행위들을 낳았다.
  • 번역 수정 : 그리고 인간이 대규모 사회 공학 프로젝트에 의해 개조될 수 있다는 확신은 역사상 가장 규모가 큰 잔학 행위들을 낳았다.
  • massive social engineering projects’를 ‘대규모 사회 정화 운동’이라고 번역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운동’의 주체는 대중일 수 있지만 ‘프로젝트’의 주체는 엘리트이기 십상이다.



신우파에서 볼 때, 복지국가 지지자들은 시장질서의 중요성, 정교함, 잠재력과 같은 복잡성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단편적인 사회공학의 가능성만을 인정한다고 본다. 또한, 복지국가 지지자들은 복지국가정책이 공동의 사회적 목적과 욕구와 주장을 만족시킬 수 있고 또 그럴 필요성이 있다고 믿는데 반해. 신우파는 사회는 공동의 목적을 추구하는 것보다는 수단에 대한 동의에 의해서 보다 안전하게 결속될 수 있다고 비판한다. (...) 대량 생산, 대량소비를 바탕으로 형성된 포디즘체제는 근대가 만들어낸 '사회공학'(social engineering)의 최정점인 복지 국가의 물적 토대가 되었다. 그러나, 복지국가, 즉 선진산업국가의 대량생산, 대량소비를 실현하기 위해 인간은 끊임없이 자연을 개발(착취)해야했고, 이에 따른 수많은 부작용이 발행했으며, 더욱이 이 부작용들은 경제의 분배와 마찬가지로 평등하게 분배되지 못했다. 1970년대 나타난 서구 사회의 공급측면의 위기가 곧 복지국가 위기로 연결되는 가운데 다양한 비판이 터져 나왔지만, 그 가운데서 환경을 파괴해야만 생존이 가능한 기존의 소비 지향적 생활양식과 인간중심이 오만함을 비판하면서 생태주의가 출현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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