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10월 1일 목요일

3장. 기계

Chapter 3. Machines


근대 이래 수공업 장인이 직면한 가장 큰 딜레마는 기계다. 기계는 과연 우호적인 도구인가, 아니면 인간의 수작업 일거리를 빼앗는 적인가? 경제사에서 숙련 육체노동이 지나온 길을 보면 기계는 처음에 친구였지만 번번이 적이 되고 말았다. 직물을 짜고, 빵을 굽고, 철물을 만들던 장인들은 모두 도구를 환영했지만, 결국 도구는 그들에게 등을 돌렸다. 오늘날 초소형 전자기술(마이크로일렉트로닉스)의 출현은 지능적인 기계가 의료진단이나 금융서비스처럼 인간의 판단이 들어가야만 하는 사무직 노동의 영역도 침범할 수 있음을 뜻한다.

컴퓨터지원설계(CAD)가 매혹적인 이유는 속도도 빠를뿐더러 사람처럼 지치는 일도 없고, 도면을 수작업으로 작성하는 사람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월등한 계산 능력을 발휘한다는 데 있다. 하지만 기계를 사용함에 따라 인간이 지불해야 할 대가도 있다. 앞서 보았듯이 CAD 프로그램의 오용으로 사용자들의 정신적 이해력이 위축되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이런 이야기는 우울한 것 같지만, 어쩌면 다른 시각에서 바라볼 수 있는 문제인지도 모른다. 우리 인간은 이런저런 잣대로 볼 때 불완전한 존재인 게 분명하다. 하지만 바로 그 불완전한 모습 속에서 우리가 인간이란 것(즉 인간성)에 대한 무언가 긍정적인 것을 배울 수도 있지 않을까?

18세기 산업시대가 열릴 때, 노동자들은 사상가들만큼이나 이런 철학적인 물음과 치열하게 대치했다. 이러한 노동자들의 인식이나 사상가들의 논증은 기계가 생산되기 훨씬 오래 전부터 경험해왔던 물질문화에서 비롯된 것이다.

일찍이 15세기 유럽에서는 유례없이 물질적 재화가 쏟아지듯 불어나는 일이 생겼는데, 이 현상을 두고 역사가 사이먼 샤마(Simon Schama)는 “재물의 폭주(embarrassment of riches)”라고 묘사했다.[주1] 르네상스기에 이르러 유럽 바깥 지역과 무역을 시작하고 도시권 수공업자들의 수가 계속 늘어남에 따라 사람들이 손에 쥘 수 있는 재화가 크게 불어났다. 제리 브로튼(Jerry Brotton)과 리사 자르딘(Lisa Jardine)에 따르면 사상 최초로 “새로운 물건들이 물밀듯이” 15세기 이탈리아의 가정에 밀려들었다.[주2] 1600년대 초에 이르러서는 네덜란드와 영국, 프랑스에 “책상, 탁자, 찬장, 벽에 걸어 쓰는 선반, 식기대 같은 물건들을 찾는 전대미문의 수요가 일었는데, 모두 주거공간에 맞추어 새로 장만한 물건들을 수납할 용도였다”고 존 헤일(John Hale)은 묘사하고 있다.[주3] 물질적 풍요가 사회계층 아래로도 스며들자 흔해 빠진 물건들까지 풍요를 노래했다. 식탁에 올려놓을 갖가지 접시에다 취사용 냄비도 여럿 됐고, 신발도 두 켤레 이상을 번갈아 신었으며, 철마다 바꿔 입을 옷도 생겼다. 요즈음 우리가 생필품으로 당연시하는 물건들이 일반서민들 손에 점점 늘어나기 시작했다는 이야기다.[주4]

샤마는 이처럼 물건들이 물밀듯이 늘어나는 현상을 연대기로 기록하다가 16~17세기 네덜란드인들을 두고 ‘재물의 폭주’라는 표현을 쓰게 됐다. 사실 오랫동안 근검절약으로 살아왔던 사람들이 네덜란드인이었으니 특징적인 현상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이런 표현은 사실을 잘못 전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근대가 막 열릴 그 시점의 근심거리는 오히려 풍요를 경계하는 반발일 때도 많았기 때문이다. 세상이 물건들로 풍요로워지자 종교계는 이를 우려하며 경계했다. 종교개혁을 부르짖는 측이나 그 반대 측이나 가릴 것 없이 물질적 유혹을 매서우리만큼 경계하는 신학 차원의 우려가 일었다. 신학의 지평 아래서는 이러한 우려가 아이들의 장난감처럼 해로울 게 없을 물건에까지 미쳤다.

.... (중략) ....

18세기 기계의 출현으로 풍요에 대한 우려는 커지기만 했다. 해묵은 문제인 가난과 물자 부족 현상이 사라졌던 것은 아니다. 유럽의 일반대중은 여전히 쪼들린 채 살았다. 이런 와중에도 기계 덕분에 부엌 용품, 의류, 벽돌, 유리제품 등의 생산이 늘어나자, 일반대중의 가난과는 동떨어진 차원에서 이 새로운 현상에 대한 걱정이 증폭됐다. 그 걱정거리란 어떻게 하면 이러한 재화를 잘 쓸 수 있으며, 무엇을 위한 풍요이고, 또 재물 때문에 사람이 망가지는 것을 어떻게 피할 수 있겠느냐는 우려였다.

전체적으로 보아 18세기는 기계로 생산되는 풍요의 혜택을 환영했고, 지금의 우리라도 그랬을 것이다. 그때도 소비자 입장에서 기계는 더 나은 삶을 약속했고, 21세기에 들어선 우리도 기계 덕분에 삶의 질이 더없이 향상되는 길을 걸어왔다. ..... (중략).... 이러한 소비생활의 측면보다 계몽주의 사상가들이 더 우려했던 문제는 기계의 생산적 측면(즉 물건을 만드는 일에 기계가 미치는 영향)이었는데, 여전히 걱정거리로 남아 있는 문제다.

몇몇 계몽주의 사상가가 보기에 기계의 우월성이 인간의 절망을 초래할 문제는 아니었다. 아이작 뉴턴은 결국 자연계 전체를 거대한 기계로 묘사했고, 이런 생각은 쥘리앵 오프레 드 라 메트리(Julien Offray de la Mettrie)를 비롯한 18세기 작가들에게서 극단적인 모습을 띠기도 했다. 또 합리성에 근거한 향상과 진보, ‘인간의 완벽성’를 주창하는 사상가들도 나타났는데, 제임스 와트(James Watt)의 증기기관처럼 새로 출현한 효율적인 기계가 그 가능성을 보여주는 구체적인 모델로 비쳤다. 그럼에도 이런 모델을 다른 시각에서 보는 사상가들도 나타났다. 이들은 새것을 배격하고 전통을 옹호했던 게 아니라 인간과 기계를 비교하는 과정에서 인간에 대한 생각을 더 많이 했다. 이들은 여러 모로 제약도 많고 단순한 게 인간이지만, 오히려 이런 특징이 인류가 문화를 일구는 데 기여하는 인간의 장점이라고 봤다. 이러한 생각에 기계적이라고 할 만한 것은 없다. 이들은 기계의 힘에 의존하는 풍요와 거창하지는 않아도 인간 냄새가 물씬한 어떤 가치를 이어줄 중간다리로, 장인의 일과 장인의식을 관심 있게 지켜봤다.

사회적인 면에서 장인은 새로운 전환기를 맞았다. 18세기에 와트가 증기기관을 처음으로 만들 때는 스트라디바리의 공방과 비슷한 작업장 조건에서 제작이 이루어졌다. 곧이어 표준화된 조립이 도입됐고, 이어서 여러 산업에 증기기관이 활용될 때는 사회적 배경이 아주 달라져 있었다. 1823년에 이르러 증기기관 제작 방법은 명문화된 매뉴얼로 완전히 체계화됐다. 와트 본인은 공학 세계의 스트라디바리처럼 작업했지만, 이 공학의 마스터는 더 이상 비밀을 유지하지 못했다. 이런 현상은 앞서 청사진의 역사에서 봤듯이 19세기 공학의 포괄적인 변화를 반영한다(즉, 그것은 지식의 주도권이 사람의 체득 지식에서 명시적 지식으로 넘어가는 변화였다). 물론, 작업장 방식의 일은 과학이나 예술, 일상적인 소매거래 등 여러 가지 형태로 이어지기는 했다. 하지만 작업장은 그저 다른 기관을 세우기 위한 수단으로 변해가는 양상을 띠게 됐다. 다시 말해 공장으로 가기 위해 잠시 들르는 간이역 같은 존재다.

기계문화가 성숙해감에 따라 19세기의 장인은 갈수록 기계와 조화를 이루는 중재자의 모습을 잃어가고, 점점 기계의 적으로 비치게 됐다. 오늘날 장인은 정밀하고 완벽한 기계의 반대편에서 사람의 개성을 상징하는 존재가 됐고, 수작업에서 생기는 여러 가지 변이와 결함, 불규칙성이 그 상징이 담고 있는 긍정적 가치다. 이러한 문화적 가치의 변화를 알리는 전조가 일찍이 18세기 유리 제조에서 나타났다. 이어서 낭만주의적인 견지에서 장인의 실기를 분석했던 존 러스킨(John Ruskin)은 산업화 이전의 작업장이 사라지는 것을 못내 아쉬워했다. 러스킨은 19세기 장인노동을 기계와 자본주의에 맞서는 저항의 깃발로 내세우며 한때 시대를 풍미했던 사람이다.

문화와 사회 전반에 걸친 이러한 변화는 우리 시대에도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문화생활 면에서 우리는 여전히 인간의 한계에서 기계적인 것과는 다른 긍정적인 의미를 찾고자 애쓰고 있다. 반면 사회생활 면에서는 반기술주의(anti-technologism)와 계속 맞서고 있다. 실기 수작업은 여전히 이 두 가지 흐름 각각의 한복판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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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자료에서 일부를 발췌. "Chapter 3. Machines," 리처드 세넷Richard Sennett, 《장인 The Craftsm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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